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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는 펜을 쥔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며 탄식했다. 그러자 메리가 옆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잘 안 되시나요?”
“응……. 오늘은 될 줄 알았는데…….”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리자 메리 또한 안타깝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독립을 결정한 것에는 앞서 말한 이유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이 망할 놈의 슬럼프 때문이었다.
나는 현재 내 작품의 중후반부, 새 장을 여는 부분을 써야 했다. 중요한 부분인 만큼 쓰는 속도가 더뎌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아예 안 써질 줄은 몰랐다.
슬럼프를 극복하고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독립까지 했건만.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니 괜스레 민망해졌다.
가만히 종이만 노려보던 나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뭐.”
“네. 내일은 꼭 쓰실 수 있을 거예요.”
나와 메리는 확신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다음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억지로 써 보려고 몇 줄 끄적였지만 전혀 성에 차지가 않았다.
그런 날이 한 달 동안 반복되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나는 새하얀 백지 앞에 앉아 절망에 빠졌다. 아무리 슬럼프라지만 한 글자도 적지 못하다니. 이건 너무했다.
펜도 잡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데, 때마침 메리가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찻잔 안의 차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설마 이대로 글을 못 쓰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예요. 잠시간의 슬럼프일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좀 있으면 글이 술술 써질 거예요.”
메리가 위로를 건넸지만 마음속의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글을 못 쓰게 되는 삶이라니. 오직 글만 보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나는 서둘러 책장으로 가 얼마 전에 구입한 <슬럼프를 극복하는 법>이라는 책을 꺼냈다. 진지하게 몇 장 읽어 내려가다가 해결 방법처럼 보이는 문장을 입으로 중얼거렸다.
“가끔은 슬럼프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떨어져 살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라고?”
내가 구입한 책이긴 했지만 의심스러운 문장이었다. 문제되는 것에 당당하게 맞부딪쳐야 해결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곧 생각을 조금 바꿔 보았다. 상상이 잘 되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그렇게 해서 슬럼프를 이겨 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좋아. 결심했어.”
떨떠름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곧 책을 텁 덮었다. 그러고 비장하게 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분간은 글하고 떨어져서 살아 볼래.”
“괜찮으시겠어요?”
메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겠지. 설마 글 몇 줄 안 적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지루했다.
“일단 출판사에 서한을 보내야지…….”
곧 있으면 원고를 넘겨주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 대신 출판사에 보낼 서한을 적기 시작했다.
서한을 써 내려갈수록 암담함이 마음속을 뒤덮었다. 담당자는 분명 괜찮다며 기한을 늘려 주겠지만 내 자신이 괜찮지가 않았다. 과연 이런 날이 얼마나 길어질까.
그날 나는 어두운 얼굴로 출판사에 서한을 보냈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슬럼프는 깊어져만 갔고, 원래 책이 나왔어야 할 날이 다가왔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설마 글을 적지 않았다고 무슨 일이 생길 줄은.
* * *
나는 오늘도 식탁 앞에 앉아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리 보이는 것뿐, 속은 글에 대한 생각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원래 책이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지난날, 출판사는 각 책방에 서한을 보냈다. 다음 이야기의 더 나은 완성도를 위해 작가님께서 휴식기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독자들은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왔다. 작가님은 괜찮냐, 다음 권을 기다리고 있겠다 등 좋은 내용의 편지들도 많이 들어왔지만 간혹 무책임하다는 내용의 편지도 섞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 초조함이 밀려들어 왔다. 그저 독자들에게 미안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에 대한 생각을 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손에 든 빵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조금이라도 더 드세요.”
“미안. 입맛이 없네.”
기껏 식사를 차려 줬건만 나는 메리를 향해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책상을 흘끗 보았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흰 종이가 턱 놓여 있었다.
오늘은 또 새하얀 종이 앞에 앉아 몇 시간을 고민할까. 그 생각에 도저히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메리가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제안했다.
“아가씨, 오늘 산책이라도 가실래요?”
“산책?”
“네. 바깥 공기라도 쐬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지 않을까요?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지도 모르고요.”
사실 마음은 거절하고 싶었다. 도저히 산책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메리의 눈을 보니 거절의 말이 쏙 들어갔다. 메리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네! 그럼 준비할게요.”
메리는 신이 난 얼굴로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총총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미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원래 이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혼자는 절대 안 된다는 부모님의 단호한 한마디에 결국 내 전속 하녀인 메리가 나를 따르기로 했다.
저택에 남았다면 더 편하게 지냈을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에 메리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메리가 내 치장을 도울 때 슬쩍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 메리.”
“아직 치장이 안 끝났는데요?”
“그냥 모든 게 다 고마워.”
내 인사에 파우더를 내 얼굴에 두드리던 메리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곧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나와 메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다가 다시 준비에 들어갔다.
치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비췄다.
“오늘 날씨 좋은걸?”
“그러게요. 바람도 선선하고 정말 좋네요.”
나는 숨을 흐읍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에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오늘은 느낌이 좋은 것 같아.”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걸었다.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치마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올지 모를 영감을 대비해서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부디 이걸 쓸 일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오늘은 글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즐기자.
“아가씨, 그럼 가실까요?”
“응. 가자.”
나는 메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메리와 재잘재잘 떠들며 걷는데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
“아가씨? 왜 그러세요?”
메리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거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느낀 시선은 착각이었는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왠지 모를 찝찝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다시 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 * *
메리는 평소 장을 보면서 마을의 지리를 익혔는지 나를 이곳저곳으로 이끌었다. 메리가 평소 눈여겨보던 장신구 가게부터 디저트가 맛있다는 카페까지. 모두 메리가 가 보고 싶어 했던 곳들이었지만 나도 오랜만의 외출에 즐거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저녁거리를 포장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메리, 잠깐만.”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나는 메리를 불러 세웠다. 내 부름에 메리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나는 알 수 없는 이질감에 미간을 좁혔다.
이상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유독 우리 집이 있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외진 골목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없을 시간도 아닌데도.
게다가 아까 느꼈던 그 시선.
잠시 고민하던 나는 메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메리, 빨리 집으로 가자.”
“혹시 아이디어가 떠오르셨나요?”
“그건 아니고…….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빨리.”
메리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뛰어가자 메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내 다급함이 옮겨 갔는지, 집 앞에 당도하자마자 메리는 빠르게 집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아 잠금쇠를 걸었다.
“아가씨,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메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불안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잠시 뜸들이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네에?”
메리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유독 우리 집이 있는 거리에만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해. 게다가 아까 집을 나설 때 시선도 느껴졌고. 물론 내 착각이면 좋겠지만…….”
“서, 설마 아가씨가 귀족이란 걸 눈치채고 돈이라도 노리는 걸까요?”
이미 진짜라고 믿는 듯 메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을 거야.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해가 뜨면 경비대로…….”
똑, 똑.
그때 누군가가 문에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메리는 동시에 몸을 굳히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쉿. 내가 가 볼게.”
괜찮을 거라는 듯 메리의 어깨를 다시 한번 토닥이고 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긴장한 눈초리로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 눈을 비장하게 빛내며 태연한 척 물었다.
“누구세요?”
“우체부입니다. 이데아 출판사에서 리아 작가님께 보내는 서한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데아 출판사요?”
나는 옆을 힐끔 보았다. 창문을 통해 문밖의 상대를 확인한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잠금쇠를 풀고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러자 우체부 차림새의 한 건장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리아 작가님이신가요?”
“네. 이데아 출판사에서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그가 건네는 서한을 받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우체부에게 부탁해 경비대에 서한을 보내면 되지 않을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보며 말했다.
“자, 잠시만요! 부탁할 일이…….”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말을 하다 마는 나를 보며 우체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방금…… 이데아 출판사에서 왔다고 했죠? 이 서한…….”
“네. 그렇습니다만.”
“이데아 출판사에서 제 필명으로 서한을 보냈을 리가 없는데…….”
출판사는 혹시나 내 정체가 발각될 것을 염려해 늘 필명이 아닌 본명으로 서한을 보냈다. 게다가 출판사 이름이 아닌, 담당 편집자의 이름으로 보냈고.
내 말에도 우체부는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우체부가 문을 턱 잡기 전까진.
“정말 죄송합니다, 리아 작가님.”
미안함이 가득 담긴 우체부의 한마디와 함께 내 시야는 어둠으로 들어찼다.
나는 펜을 쥔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며 탄식했다. 그러자 메리가 옆으로 다가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잘 안 되시나요?”
“응……. 오늘은 될 줄 알았는데…….”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리자 메리 또한 안타깝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독립을 결정한 것에는 앞서 말한 이유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이 망할 놈의 슬럼프 때문이었다.
나는 현재 내 작품의 중후반부, 새 장을 여는 부분을 써야 했다. 중요한 부분인 만큼 쓰는 속도가 더뎌질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아예 안 써질 줄은 몰랐다.
슬럼프를 극복하고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독립까지 했건만.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니 괜스레 민망해졌다.
가만히 종이만 노려보던 나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뭐.”
“네. 내일은 꼭 쓰실 수 있을 거예요.”
나와 메리는 확신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또 그다음 날이 되어도 다음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억지로 써 보려고 몇 줄 끄적였지만 전혀 성에 차지가 않았다.
그런 날이 한 달 동안 반복되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나는 새하얀 백지 앞에 앉아 절망에 빠졌다. 아무리 슬럼프라지만 한 글자도 적지 못하다니. 이건 너무했다.
펜도 잡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데, 때마침 메리가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찻잔 안의 차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설마 이대로 글을 못 쓰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예요. 잠시간의 슬럼프일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좀 있으면 글이 술술 써질 거예요.”
메리가 위로를 건넸지만 마음속의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글을 못 쓰게 되는 삶이라니. 오직 글만 보고 살아왔던 나로서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나는 서둘러 책장으로 가 얼마 전에 구입한 <슬럼프를 극복하는 법>이라는 책을 꺼냈다. 진지하게 몇 장 읽어 내려가다가 해결 방법처럼 보이는 문장을 입으로 중얼거렸다.
“가끔은 슬럼프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떨어져 살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라고?”
내가 구입한 책이긴 했지만 의심스러운 문장이었다. 문제되는 것에 당당하게 맞부딪쳐야 해결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곧 생각을 조금 바꿔 보았다. 상상이 잘 되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그렇게 해서 슬럼프를 이겨 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좋아. 결심했어.”
떨떠름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곧 책을 텁 덮었다. 그러고 비장하게 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분간은 글하고 떨어져서 살아 볼래.”
“괜찮으시겠어요?”
메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겠지. 설마 글 몇 줄 안 적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지루했다.
“일단 출판사에 서한을 보내야지…….”
곧 있으면 원고를 넘겨주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 대신 출판사에 보낼 서한을 적기 시작했다.
서한을 써 내려갈수록 암담함이 마음속을 뒤덮었다. 담당자는 분명 괜찮다며 기한을 늘려 주겠지만 내 자신이 괜찮지가 않았다. 과연 이런 날이 얼마나 길어질까.
그날 나는 어두운 얼굴로 출판사에 서한을 보냈다. 그 후, 시간이 지날수록 슬럼프는 깊어져만 갔고, 원래 책이 나왔어야 할 날이 다가왔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설마 글을 적지 않았다고 무슨 일이 생길 줄은.
* * *
나는 오늘도 식탁 앞에 앉아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리 보이는 것뿐, 속은 글에 대한 생각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원래 책이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지난날, 출판사는 각 책방에 서한을 보냈다. 다음 이야기의 더 나은 완성도를 위해 작가님께서 휴식기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독자들은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왔다. 작가님은 괜찮냐, 다음 권을 기다리고 있겠다 등 좋은 내용의 편지들도 많이 들어왔지만 간혹 무책임하다는 내용의 편지도 섞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 초조함이 밀려들어 왔다. 그저 독자들에게 미안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에 대한 생각을 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손에 든 빵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조금이라도 더 드세요.”
“미안. 입맛이 없네.”
기껏 식사를 차려 줬건만 나는 메리를 향해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책상을 흘끗 보았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흰 종이가 턱 놓여 있었다.
오늘은 또 새하얀 종이 앞에 앉아 몇 시간을 고민할까. 그 생각에 도저히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메리가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제안했다.
“아가씨, 오늘 산책이라도 가실래요?”
“산책?”
“네. 바깥 공기라도 쐬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지 않을까요? 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지도 모르고요.”
사실 마음은 거절하고 싶었다. 도저히 산책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메리의 눈을 보니 거절의 말이 쏙 들어갔다. 메리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네! 그럼 준비할게요.”
메리는 신이 난 얼굴로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총총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미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원래 이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혼자는 절대 안 된다는 부모님의 단호한 한마디에 결국 내 전속 하녀인 메리가 나를 따르기로 했다.
저택에 남았다면 더 편하게 지냈을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에 메리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메리가 내 치장을 도울 때 슬쩍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 메리.”
“아직 치장이 안 끝났는데요?”
“그냥 모든 게 다 고마워.”
내 인사에 파우더를 내 얼굴에 두드리던 메리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곧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나와 메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다가 다시 준비에 들어갔다.
치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비췄다.
“오늘 날씨 좋은걸?”
“그러게요. 바람도 선선하고 정말 좋네요.”
나는 숨을 흐읍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에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오늘은 느낌이 좋은 것 같아.”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걸었다.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치마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올지 모를 영감을 대비해서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부디 이걸 쓸 일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오늘은 글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즐기자.
“아가씨, 그럼 가실까요?”
“응. 가자.”
나는 메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메리와 재잘재잘 떠들며 걷는데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응?”
“아가씨? 왜 그러세요?”
메리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거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느낀 시선은 착각이었는지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왠지 모를 찝찝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다시 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 * *
메리는 평소 장을 보면서 마을의 지리를 익혔는지 나를 이곳저곳으로 이끌었다. 메리가 평소 눈여겨보던 장신구 가게부터 디저트가 맛있다는 카페까지. 모두 메리가 가 보고 싶어 했던 곳들이었지만 나도 오랜만의 외출에 즐거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저녁거리를 포장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메리, 잠깐만.”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나는 메리를 불러 세웠다. 내 부름에 메리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그녀와 달리 나는 알 수 없는 이질감에 미간을 좁혔다.
이상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유독 우리 집이 있는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외진 골목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없을 시간도 아닌데도.
게다가 아까 느꼈던 그 시선.
잠시 고민하던 나는 메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메리, 빨리 집으로 가자.”
“혹시 아이디어가 떠오르셨나요?”
“그건 아니고…….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빨리.”
메리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뛰어가자 메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내 다급함이 옮겨 갔는지, 집 앞에 당도하자마자 메리는 빠르게 집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아 잠금쇠를 걸었다.
“아가씨,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메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불안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잠시 뜸들이던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네에?”
메리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유독 우리 집이 있는 거리에만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해. 게다가 아까 집을 나설 때 시선도 느껴졌고. 물론 내 착각이면 좋겠지만…….”
“서, 설마 아가씨가 귀족이란 걸 눈치채고 돈이라도 노리는 걸까요?”
이미 진짜라고 믿는 듯 메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을 거야.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해가 뜨면 경비대로…….”
똑, 똑.
그때 누군가가 문에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메리는 동시에 몸을 굳히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쉿. 내가 가 볼게.”
괜찮을 거라는 듯 메리의 어깨를 다시 한번 토닥이고 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긴장한 눈초리로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 눈을 비장하게 빛내며 태연한 척 물었다.
“누구세요?”
“우체부입니다. 이데아 출판사에서 리아 작가님께 보내는 서한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데아 출판사요?”
나는 옆을 힐끔 보았다. 창문을 통해 문밖의 상대를 확인한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잠금쇠를 풀고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러자 우체부 차림새의 한 건장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리아 작가님이신가요?”
“네. 이데아 출판사에서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그가 건네는 서한을 받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우체부에게 부탁해 경비대에 서한을 보내면 되지 않을까?
나는 다급하게 그를 보며 말했다.
“자, 잠시만요! 부탁할 일이…….”
그 순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말을 하다 마는 나를 보며 우체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방금…… 이데아 출판사에서 왔다고 했죠? 이 서한…….”
“네. 그렇습니다만.”
“이데아 출판사에서 제 필명으로 서한을 보냈을 리가 없는데…….”
출판사는 혹시나 내 정체가 발각될 것을 염려해 늘 필명이 아닌 본명으로 서한을 보냈다. 게다가 출판사 이름이 아닌, 담당 편집자의 이름으로 보냈고.
내 말에도 우체부는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아니, 닫으려고 했다.
우체부가 문을 턱 잡기 전까진.
“정말 죄송합니다, 리아 작가님.”
미안함이 가득 담긴 우체부의 한마디와 함께 내 시야는 어둠으로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