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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몸이 덜컹거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뒷목이 욱신거려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오……. 골아…….”

그 망할 우체부, 아니, 우체부도 아닌가? 아무튼 두고 보자.

나는 뒷목을 부여잡으며 잠시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맞은편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메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메리의 양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메리, 네가 왜 여기 있어? 너도 끌려온 거야?”

“네, 네. 어쩌다 보니…….”

“그 망할 자식들……. 내가 가만 안 두겠…….”

눈을 부라리며 우리가 있는 곳을 둘러보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멍한 목소리로 메리에게 물었다.

“……메리, 우리 납치되고 있는 것 맞지?”

“그런 것…… 같죠?”

나와 메리는 멍한 눈으로 우리가 있는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마차에 감금된 채 납치되고 있었다.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마차 안이 생각보다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차 안은 몇 명이 타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넓었고, 의자 위에는 푹신푹신한 쿠션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벽을 수놓은 화려한 장식까지. 자작가에서 태어나 나름 귀족다운 생활을 해 본 나에게도 낯설고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납치라기보다는…… 모셔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메리 또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실은요……. 그 우체부가 아가씨를 기절시킨 뒤에 저에게 묻더라고요.”

“묻다니……. 뭐를?”

“같이 가실 거냐고요.”

메리의 말에 우체부에게 맞은 뒤통수가 또 한번 얼얼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그렇게 정중하게 물었다고? 아니, 그보다 너 도망칠 수 있었는데 그냥 따라온 거야?”

“당연하죠! 어떻게 아가씨를 두고 저 혼자 도망쳐요.”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저 혼란스럽게 들릴 뿐이었다.

분명 우리는 납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중하게 납치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우리가 납치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창밖을 보려던 찰나, 때마침 마차가 멈추었다. 동시에 나와 메리는 몸을 굳혔다.

조용한 마차 바깥으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도착했습니다, 작가님.”

나는 눈앞의 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새 차림새가 바뀌었지만 저 회색 눈동자를 보니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나를 기절시켜 이곳까지 납치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우체부가 아닌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리에 찬 검이 그가 기사라는 것을 증명했다.

황당한 마음에 가시 돋친 목소리로 그에게 따졌다.

“한 제국의 기사가 사람을, 그것도 레이디를 이렇게 함부로 납치해도 되는 건가요?”

내 말에 할 말이 없는 듯 그는 그저 난감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정중하게 모신 것으로 봐주시죠. 그리고 저도 주군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라서요. 변명으로 들리리라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군의 명령이라니…….”

대체 어떤 미친 귀족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그의 검에 시선이 꽂혔다. 정확히는 그의 검집에 박혀 있는 문양에.

우리가 편히 나올 수 있도록 그가 잠시 물러나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낯설지 않은 문양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에 왠지 더 찝찝했다.

“와아…….”

마차에서 내린 메리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응시했다. 의아해하던 나는 곧 메리가 무슨 이유로 놀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같은 표정을 지었으니까.

“세상에…….”

눈앞의 새하얀 저택은 마치 빛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반짝반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컸다. 우리 로젠트 자작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사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는 우리를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저택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저의 주군께서 작가님을 꼭 뵙고자 하십니다.”

“저, 저를요?”

옆에서 메리가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이미 우리가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듯했다.

반면 그 사실을 잊지 않은 나는 계속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사람을 이딴 식으로 부르는 거야?

그래도 일단 기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 내부는 바깥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특히 천장을 수놓은 커다란 샹들리에는 없던 기도 죽어 버리게 만들 정도였다.

메리는 이미 넋을 놓았으니 나라도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그에게 물었다.

“대체 누가 저를 부른……. 아니, 납치한 거죠?”

“직접 뵈면 바로 아실 겁니다.”

모호한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를 따라 납치범이 있는 방문 앞에 선 순간,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이 방 안에 엄청난 사람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힐끗 본 기사는 곧 목을 가다듬고, 방 안에 있을 자신의 주군을 향해 말했다.

“작가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듣기 좋은 미성이 방 안에서 들려왔다. 사람을 납치할 정도의 미친놈이니 분명 걸걸한 목소리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아무리 멀쩡하게 생겼어도 속은 어떨지 모르는 법이니까.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메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몇 걸음 가지도 못해 뚝 멈추었다. 소파 위에서 책의 페이지를 팔락 넘기고 있는 금발의 남자 때문이었다.

나와 메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그에게 호기롭게 한 소리 하려고 했는데 그의 적안과 마주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눈을 부릅뜨며 생각했다.

‘미, 미친……. 뭐가 저렇게 잘생겼어?’

정말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짧은 금발은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고, 매력적으로 찢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적안은 어느 여자라도 홀릴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게다가 코는 어찌나 오똑한지, 모든 여자가 가지고 싶어 할 것 같은 코였다.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나 같은 웬만한 여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였다.

옆을 힐끔 보니 메리는 이미 행동 불능 상태였다. 얼굴이 빨개진 것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다행일 정도였다.

역시 믿을 건 나뿐인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심호흡하고 있는데 적안의 남자가 책을 턱 덮었다.

“그쪽이 리아 작가님?”

매혹적인 적안이 나를 직시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네. 제가 리아 작가인데요. 그러면 그쪽이 나를 납치하라고 시킨 주범?

……라고 비소를 띠며 되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나 이루어졌다. 현실의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내 옆의 메리에게 향했다.

“아니면 그쪽이 리아 작가님인가?”

“네? 저, 저요? 저는…….”

메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힐끔 보았다. 메리의 난처함을 눈치챈 나는 서둘러 그에게 말했다.

“제가 리아 작가예요.”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처음과는 달리 나를 보는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그쪽이?”

“그, 그래요.”

“생각보다 평범하네.”

이마에 핏줄이 돋아나는 듯했다. 물론 그에 비하면 평범한 외모이긴 하지만……. 나도 어디 가서 예쁘다는 소리 정도는 듣는다고!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 입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주먹만 그러쥐었다.

그사이 나를 훑어 내리던 남자는 곧 흐음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책을 써 내는 사람은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그제야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표지다 했더니 그 책은 내가 쓴 환상 소설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가 했던 말을 되뇌자니 좋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말은 내가 대단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고맙다는 말도, 그것 참 미안하다고 빈정거리는 말도 내뱉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남자가 예상치 못한 직구를 던졌다.

“하긴, 그러니까 멋대로 집필을 중단했겠지.”

남자의 말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다. 그것도 독자에게서 직접 들으니.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저 말은 틀렸으니까.

“집필을 그만둔 게 아니에요. 잠깐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외치자 남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더 큰 공격을 가했다.

“왜 멋대로 휴식기를 가져?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냥 들어서는 어린아이의 생떼 같았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왜 독자와의 약속을 어겨?’

맞은 곳을 또 맞은 듯한 느낌에 내 입은 달싹거리다가 결국 닫혀 버렸다.

딱히 나를 비웃으려고 한 말은 아닌 듯 남자의 눈빛에서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분에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남자의 적안을 똑바로 보며 반격을 가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저를 멋대로 납치한 거예요? 저는 허락하지 않았는데요!”

내 반격에 뒤에 얌전히 서 있던 기사가 숨을 흡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찔려서 그런 건지, 자신의 주군에게 대드는 모습에 놀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당돌한 모습을 남자는 그저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때? 할 말 없지? 내가 이겼지?

그렇게 묻는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 미소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의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작가님의 허락은 필요 없어. 작가님은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되거든.”

“그게…… 무슨…….”

너무 황당한 대답에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남자는 그런 나를 재밌다는 듯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작가님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봐?”

그의 말에 잠시 멈춰 있던 사고 회로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마차와 넓디넓은 저택, 그것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그리고 금발과 적안…….

순간적으로 하나의 이름이 번뜩 떠올랐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아벨하임 공작……?”

“정답이야.”

공작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제대로 맞춰서 몹시 기쁜 듯한 표정이었다.

반면 정답을 맞춘 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제대로 똥 밟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