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1화







쾅.

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가 아픈데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올 때까지 다들 뭐한 건가 싶어 모니터를 읽던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몇 분 전 규원이 뭐라 말을 건네고 나간 것 같다.

“우리 부모님 찾아내요.”

앙칼진 목소리다. 하지만 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프진 않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울림이 있었다. 어쩌면 그 울림엔 무언에 대한 원망이 섞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새하얀 얼굴에 쌍꺼풀이 없이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화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태진.”

“네?”

“이름부터 밝혀야 정상 아닌가?”

자리에서 일어난 태진이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그리고 여자에게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지만 그다지 앉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두 번째 권유는 관두었다.

그때 열린 문으로 안 비서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사, 사장님. 죄송합니다. 바로 끌고 나가겠습니다.”

“차 두 잔.”

“하지만 이분 약속을…….”

“안 비서.”

“알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안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갔다.

지금 태진 역시 심기가 좋지 않은 상황이다. 누구나 손을 뻗고 갖고 싶어 하는 그 ‘용의 눈동자’가 사라졌다.

마지막 경매 시장에 나온 게 54년 전. 거의 반세기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태진이 홍콩까지 가서 가까스로 낙찰을 받은 그 물건이었다.

물론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뭐 하나 놓치지 않는 그는 저렇게 눈에서 불을 뿜을 듯 쳐들어온 여자를 알고 있었다.

서문형.

그가 세팅과 보관을 맡겼던 부부의 첫째 딸이자 스물다섯 살의 대학원생.

“서문형입니다.”

“앉아.”

“괜찮습니다.”

“올려 보고 이야기하는 취미 없어.”

사실 다시 한번 쓸데없이 되묻는다면 이 건질 알맹이 없는 대화를 당장 끝내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정말 마지못한 표정으로 소파 건너편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것도 엉덩이를 바싹 당겨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지금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태진의 미간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지만 상대는 생각도 하지 않는 얼굴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커다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것저것 다 정리해 봤지만 10억이 모자라요, 취직해서 갚겠습니다.”

오랜만이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참, 당돌하기까지 하다.

명문대에 다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술 전공자였다. 다행히 임용은 통과해서 선생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 쉽지, 10억? 태진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이 기분 나쁜 모양인지 문형의 이마가 살짝 좁혀졌다.

“어느 세월에. 난 돈 놀이 하는 사람이라 한시가 급한데. 20년? 30년? 그걸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생각 하나 보지?”

문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10억이면 한 달 이자가 얼만지 알고나 있어? 참고로 난 1금융 장사하는 사람 아니야.”

눈앞이 캄캄하다. 문형 역시 그 이자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1금융권에서 빌렸더라도 한 달 이자는 그녀가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아도 모자랄 것이다. 결국 빚에 계속 빚을 얹어 가는 형국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문형이 고개를 들었다. 태진이 봉투 안의 서류들을 재빨리 훑어 내려가고 있었다.

저 봉투 안에 든 통장에도 그녀의 입장에선 어마어마하게 큰돈이 들어 있다. 그녀가 평생을 벌어도 만질 수도 없을 만큼의 돈이.

부모님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던 것일까. 그리고 저 많은 돈을 긁어모았는데도 빚이 남았다.

갑자기 생긴 어마어마한 빚 앞에서 이렇게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도 일 처리가 꽤 빠르네. 갑자기 재산 처리하는 거 힘들었을 텐데. 헐값으로 넘기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서류를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태진이 문형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마치 품평을 당하는 것 같아 불쾌해졌다.

“나가 봐.”

“술집은 안 나가요.”

기가 막힌지 태진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무슨 여자 팔아 장사하는 양아치로 보여? 그리고 내가 하는 술집은 아무나 나갈 수 있는 줄 아나 보지?”

순식간에 문형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소득 없이 쫓겨날 수는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안 비서가 들어왔다.

테이블에 잔을 놓아두고 고개를 꾸벅 숙인 채 나가는 그를 보며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했다.

“돈은 내가 알아서 그쪽에게 받을 테니 그거 마시고 나가 봐.”

“저희 부모님 좀 놓아주세요.”

찻잔으로 손을 뻗던 태진이 멈칫했다. 그리고 낮게 숨을 뱉었다.

“누구보다 그쪽 부모 찾아내고 싶은 사람은 나야. 내가 사람 납치나 하는 싸구려로 보여?”

아무리 봐도 태진의 얼굴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마지막 희망을 잃은 듯 문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쪽이 아니란 말이에요?”

“잘못 짚었어. 나…… 잠깐, 체격이 좀 아쉽긴 하지만. 진짜 아무 일이나 할 수 있겠어?”

“술집은 안 나간다고 했어요.”

“미안하지만 난 술집 취급 안 해.”

문형은 다시 한번 태진을 잘못 짚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상대가 돈 놀이를 하는 사채업자 아니, 속으론 그저 사람을 돈으로 보고 인격체로도 대하지 않는 깡패라고 무시했다. 아직까지 스스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똑똑.

“들어와.”

태진은 문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문형을 보며 말했다.

곧 문이 열리고 키가 190cm는 넘을 듯한 남자가 들어왔다.

체격이 동양인에선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흉통이 발달된 근육질의 남자였다.

“손님이…….”

“아냐, 말해.”

남자가 문형을 한 번 훑었다. 하지만 그건 흔히 말하는 그 기분 나쁜 희롱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저 남자는 지금 문형을 말 그대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강민석 화백 바다의 남자, 진품으로 판명 났습니다.”

“서 의원에게 연결하면 되겠네.”

“그렇습니다. 약속 잡겠습니다.”

“정 여사는?”

“오늘은 큰일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이겠지. 아직 사람 안 구해졌지?”

“네.”

태진의 시선이 다시 문형에게로 넘어왔다.

“이쪽은 차규원 부장. 앞으로 차 부장이라고 부르면 돼. 난 대강 사장이나 이름. 편한 대로 부르고.”

술집을 빼고 자신이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상속 포기하고 파산 신청하면 될 걸 뭣하러 이런 험한 곳은 찾아와서.”

“동생이 있습니다.”

“아, 수술을 앞뒀다는 동생?”

“그걸 어떻게…….”

쥐고 있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럼 그렇게 내 보석이 증발했는데. 맡고 있던 사람들 뒷조사도 안 했을까 봐?”

“저희 부모님 그런 분들 아니세요.”

“서문형 씨. 지금 내게 그런 말 해 봤자 안 들려.”

흥분했다. 이 남자에게 자신의 부모님은 그저 귀한 보석을 훔치고 사라져 버린 좀도둑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

“왜? 그 동생 앞날 걱정돼서?”

“그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밑에서 일하고 싶으면 그 자존심 쓰레기통에 처박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자신이 내세울 게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남자는 지금 그녀의 모든 생각을 꿰뚫고 부려먹기 편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문형은 이제야 남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보통 이쪽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다. 왠지 생김새도 우락부락할 것 같고, 나이가 좀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계란형의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피부도 희고 햇빛 같은 건 받아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나이도 아무리 많이 봤자 서른을 넘겨 보이지 않는다. 완벽한 슈트 차림에 단정한 모습이었다.

겉모습만 보아선 그냥 사무직을 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 배우 쪽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태진이라는 남자는 꽤나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치매 노인이 있어. 연봉은 1년에 1억. 10년 채우면 이자 붙지 않고 계약 종료. 물론 그 10년 안에 치매 노인이 저세상 가도 나머지 빚 탕감에 계약 종료.”

나쁜 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더는 갈 곳이 없다.

“하겠습니다.”

“치매가 어떤 건지 알고나 있어?”

“알고 있습니다.”

“TV에서 보는 건 다 사기야.”

그녀도 치매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할머니가 치매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 주위에서 모두 하는 말이 착한 치매라고 했었다.

할머니가 사고를 치는 건 그냥 화장만 계속하는 정도였으니까.

“한때 이 일대 주름잡던 대장부였지. 덩치도 아마 서문형 씨 2배쯤 될 거고. 치매 노인들이 힘도 세다고 하는데 덩치까지 그러니 더 하겠지. 대부분 일주일도 못 버티고 나갔어. 제일 오래 버틴 사람이 2개월.”

저런 말에 겁을 먹을 줄 알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다만 저런 정보력을 가진 사람이 동생의 수술비와 약간의 생활비를 남겨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못 버티고 나가면 그 10억, 내 식대로 받지. 대학원은?”

“등록금 빼면…….”

“아니. 수업이 언제냐는 소리야.”

“화, 수, 목입니다.”

“배움에 인색한 타입은 아니라. 강의 시간표 나오면 들고 와. 그 시간은 빼 주지.”

“네? 아닙니다, 제가 여유가 없어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간 내가 그쪽에게 부탁하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까 들었지? 강민석 화백. 나도 그림 볼 줄 아는 눈이 좀 필요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