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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문형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미술학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진품이나 가품을 구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수님들이 한입으로 칭찬한 건 그녀가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었다.

강민석 화백이라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무명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다 막 작품이 주목 받은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갑작스레 사고로 죽어 값이 천정부지로 훅 뛴, 비운의 천재였다.

“값이 지금은 수십 배 올랐죠.”

“알고는 있군.”

“좋아하는 화백입니다. 남자의 뒷모습만 전문적으로 그리죠. 개인적으로 ‘바다의 남자’를 좋아합니다.”

“꽤 쓸모 있겠는데.”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기가 막히다는 듯 태진이 웃었다. 지금 조건을 걸어야 할 사람은 문형이 아니라 그여야 옳다. 문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태진이 그대로 의견을 묵살하면 그만이었다.

“빚 갚으러 온 주제에 조건?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네. 말해 봐.”

“제대로 된 계약서를 써 주세요.”

“계약서?”

“10년 뒤, 전 그쪽과의 안전 이별을 원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사무실은 정적이었다. 태진은 검지로 소파 손잡이를 툭툭 내리쳤다. 그 소리는 어찌나 간격이 일정한지 꼭 메트로놈 같았다.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규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는 작았지만 문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태진이 웃었다.

“겁 없는 줄 알았더니.”

“많아요.”

“많으면 이렇게 당당히 내 사무실엔 못 와. 그래서, 준비해 온 게 따로 있나?”

고개를 까딱이며 묘하게 웃는 태진을 보며 문형은 볼 안쪽 살을 살짝 씹었다.

남자는 모든 것에 여유롭다. 비단 가진 게 많아서 오는 자신감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지금 남자를 신경을 쓸 여유까진 그녀에게 없었다.

가방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태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봉투를 내려 본 태진이 느긋하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에서 편지지를 펼치고는 문형을 보았다.

“백지잖아.”

“혹시 몰라서 준비해 온 겁니다.”

“종이 쪼가리라면 내 사무실에도 많은데.”

“사장님께서 손을 대지 않으실지도 모르죠.”

“아, 내 지문이라도 묻어야 안심을 하겠다? 이래 봬도 이쪽 세상에서 약속은 신뢰야. 돈 놀음하는 깡패가 아니라고. 믿고 써 보지? 공증이라도 받아 줄 테니까.”

태진은 직접 품에서 펜까지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왠지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입학을 할 때 아버지가 사 준 몽블랑 펜이 기억났다. 꿈을 꾸는 미술학도가 되길 바란다며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거 하나만은 되도록 남겨 두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빚이 그녀를 압박했다.

결국 친구인 민우에게 그 펜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언제든 다시 사가도 된다며 오히려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눈을 질끈 감은 문형이 천천히 백지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태진은 그런 문형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거래를 무려 10년이나 해 왔던 부부였다. 이런 식으로 사라질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부부가 증발하고 이렇게 문형이 집안의 모든 것들을 팔아왔다.

그 부부의 수완이라면 10억쯤은 어떻게든 유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콩에서 맡아 온 물건들을 모두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태진은 그 부부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걸려 있어 서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다들 뒷거래하기 좋아하는 정재계 사람들이다 보니 차마 달라고 하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 순진한 서문형은 그나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나마 여자에게 취미가 없는 태진에게 온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다 적었습니다.”

다행히 더 엄한 상상을 거기서 마칠 수 있었다. 태진이 팔을 뻗어 종이를 받아 들었다.



[안전 이별 청구권]

서문형은 이태진의 할머니를 10년간 모신다.

1년에 1억을 보수로 10년간 일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경우, 계약 이행 기간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계약은 자동 종료된다.

이태진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서문형에게 그 어떤 물리적 행사를 할 수 없다.

서문형은 1년에 한 번 일주일의 휴가를 갖는다.



이런 걸 써 본 적도 없으니 간단하기도 하다. 정말 악덕에게 걸렸으면 인생을 말아먹었을 것이다.

태진이 저도 모르게 쯧,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소리에 문형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태진은 문형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펜.”

“아, 여기요.”

사인도 아니고 손으로 무엇인가를 적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태진은 옆에서 종이를 꺼내어 차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전 이별 청구권]

1. 서문형은 1년에 1억을 보수로 10년간 일한다.

2. 서문형은 이태진의 할머니인 정을복 여사를 모신다.

3. 정을복 여사가 돌아가실 경우, 계약 이행 기간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계약은 자동 종료된다.

4. 정을복 여사의 상태가 호전되는 기미가 보일 경우, 보너스 차감이 있을 수 있다.

5. 업무 시간은 법정 근로 기준에 따르며, 추가 근무시 추가 근무 수당조로 차감한다.(월차, 연차, 휴가 역시 마찬가지다)

6. 서문형은 입주를 기본으로 하며 의식주를 모두 성북동 본가에서 해결한다.

7. 정을복 여사의 요구는 불가항력(별을 따다 준다든지)한 일이 아니면 뭐든 들어주어야 한다.

8. 이태진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서문형에게 그 어떤 물리적 행사를 할 수 없다.



순식간에 적어 내려간 태진이 문형의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마음 같아선 규원에게 알아서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태진은 최대한 문형의 요구 사항을 들어준 것이다.

“저기…….”

문형의 눈엔 약간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왜? 법정 근로 기준을 따른다니까 웃겨?”

“아뇨.”

“좀 힘들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타 사항은 그때 보고 서로 합의하지.”

“이건…….”

“왜? 조건에 비해서 보수가 너무 센 거 같아서?”

차마 그렇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문형은 살짝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만만치 않은 노인네야.”

보통 자신의 할머니에게 저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의아하게도 태진의 목소리에서는 인정이 느껴졌다. 그만큼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좋아하고 아끼는 것일까?

물론 가족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 역시 실종되어 버린 부모님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지 않았나.

“사인해.”

고개를 숙여 계약서를 멍하니 보았다. 태진은 별다른 사인이 없는 모양이었다. 정직하게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형은 서둘러 태진의 옆에 자신의 사인을 적었다.

“동생은?”

“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태진은 문호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 엄청난 가치를 가진 물건을 부모님이 잃어버렸으니 태진도 이것저것 알아봤을 터였다.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짜고짜 그가 이름부터 물어본 것은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는데.

“서문후였나, 호였나.”

“홉니다.”

“캐나다 거주 중. 심장 수술을 3번이나 받았고.”

다 알고 있었으면서 떠봤단 말인가? 그녀가 모든 재산을 정리하며 문호의 남은 수술비와 생활비를 몰래 두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네.”

“남은 수술만 받으면 건강해지나?”

“아직 수술이 한 번 더 남았지만 의사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수술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여기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래도 사람이 먼저지. 가불해 줄 수도 있어. 가령 휴가비 같은 게 따로 나올 거니까. 물론 그쪽이 버티기만 한다면.”

“완불했습니다.”

입이 제멋대로 터졌다. 하지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인지 태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차라리 지금 솔직히 말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저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하라는 듯 태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동생이 수술을 하고 나면 당장 생활비를 벌 여건이 안 되어서…….”

“생활비 정도는 빼놨다고?”

정곡을 찔렸다. 왠지 문형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볼을 꾹 눌렀다. 차가운 손등에 뜨거운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잘했어.”

“네?”

“덕분에 계산이 쉬워졌잖아. 난 10년간 그쪽 노동력을 딱 맞게 받으면 되는 거니까.”

더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태진이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곧 노크 소리와 함께 규원이 들어섰다.

“이거 공증 받아.”

“알겠습니다.”

“2층 어느 방이 비워졌지?”

“사장님 서재 옆방입니다.”

“시트 새로 다 갈라고 전해. 오늘부터 서문형 씨가 들어가서 일하게 됐다고.”

“오늘부터 말입니까?”

“왜? 문제 있나?”

“여사님 건강 검진으로 입원하셨습니다.”

태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오늘이었나? 어쨌거나 오늘부터 지내야 하지 않겠어? 갈 곳도 없을 텐데.”

태진의 말에 규원이 고개를 돌려 문형을 보았다. 문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규원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피게 되었다.

규원은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긴 눈에 강인해 보이는 턱 선을 가진 남자였다. 잘생겼으나 위압감이 절로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태진과 키는 비슷해 보이지만 몸은 꼭 보디빌더인 것처럼 컸다. 그에 비해 태진은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모델처럼.

“차 부장 따라 나가 봐.”

“네?”

“집안일에 대한 건 차 부장이 잘 설명해 줄 거야.”

태진의 미소가 악마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