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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현비가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옵니까?”
“압니다.”
“그저 이 어미는 대견할 뿐입니다. 앞으로 더욱더 정진하여 황자를 믿어 준 폐하의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꼭 그리 하겠나이다.”
음색마저 듣기 그만이니 순간, 현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최고의 행복을 누릴 것만 같은 시간이 다가오건만 저와는 반대로 지옥 같은 순간에 접어들 황후가 궁금했다.
“하면 잠시 바람이나 쏘이도록 할까요. 뛰어난 놀이패의 공연도 있거니와…….”
“황후께 가시려는 겁니까?”
제 속을 들여다보는 은환에 현비는 움찔했다. 어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간담이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 현비는 태연스레 웃음을 매달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꼬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과연 황후께서 어찌 나오시는지, 이 어미는 알아야겠단 말입니다.”
현비의 째지는 말투에 은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권력이 좋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인간사에서는 권력! 그것도 천자의 권력이 최고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동화되었군요.”
뜻밖에도 그는 현비를 비웃었다.
“그, 그런 말씀은 삼가셔야 합니다.”
현비는 속삭이듯 비명 질렀다. 바들바들 떨어 대며 손질된 손톱 끝을 잘근잘근 물기까지 했다. 더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가히 불안했다.
숨넘어갈 듯한 현비와는 반대로 은환은 매우 차분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현재에 연연하지 마시고 이대로 즐기시지요.”
낮으나 엄정했으며 부드러우나 몹시도 엄했다. 현비는 그의 시선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엄연하게 그와 자신과는 다른 존재.
승천하기 위해 수백 년 기다린 하급 미물인 자신과 살아온 세월을 가늠치 못하는 존재와는 같은 급일 수는 없었다.
“즈, 즐길 겁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부디 앞서 나가지 마시길 당부 드립니다, 어마마마.”
부러 어마마마라는 호칭에 힘을 실은 은환. 현비를 보는 비릿한 눈빛은 냉기 그득한 시선 아래 얼어붙을 것 같았다.
오늘날, 황제의 정신과 건강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특히나 은환은 기실 황태자의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탐욕이 그득한 인간사는 하등 상관없었다. 다만 명분 없이 최고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면 그를 의심할 인간들이 귀찮을 뿐.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불멸의 존재를 바란다면 부디 자중하시길.”
협박이었다. 당장이라도 현비의 명줄을 잘라 내겠단 의미였다. 현비는 터지는 비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만일 그의 말대로 실행된다면…….
인간의 거죽은 벗겨지고 그들이 기겁할 본신이 나타나겠지.
궁인들은 비명을 지를 것이고 수많은 군위들은 절 산산조각 낼 것이다. 그간 기다린 세월이 얼마인데 절대 그리 될 수 없었다.
은환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매서움으로 확인을 요했다.
“어마마마. 알아 들으셨는지요.”
현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눈에 발려진 화장이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하면 웃으시지요.”
가차 없는 주문까지. 그의 요구에 현비는 당장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아이의 그것처럼 천진난만 해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누렇게 들뜬 눈자위가 떠올랐다 사라지니 인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렇게 황자가 물러난 뒤,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웃고 있는 현비.
차를 준비해 들어서던 궁인은 그런 현비의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손에 든 소반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현비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 하는 게야! 냉큼 치우지 못할까!”
“소, 송구합니다.”
당황한 궁인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치우는 사이, 현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새장이 걸린 난간을 잡았다. 그간 함께 지내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명줄을 잡고 협박한다. 그러나 현비는 은환은 넘어설 능력이 없었다. 아니, 세상 누구도 그에 대적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이왕지사 이리 된 거, 반드시 승천하고 말 테다. 그러자면 기운을 북돋아야 하는 법!”
그래, 그것만이 살길인 것을. 현비의 눈빛에 기이한 윤기가 흘렀다.
❋ ❋ ❋
오후에 접어들자 철린과 은동이 파는 옹기들의 개수는 늘어났다.
“봐라. 내 그랬잖으냐. 팔린다고.”
으스대는 아비에 받은 옹기 값을 꼼꼼하게 세어 본 은동은 허리에 찬 복대에 그 값을 잘 쟁였다.
“아직 아홉 개여요. 두 개 더 팔아 열 한 개가 되면 그때.”
“고기 넣은 국밥!”
“예, 아버지.”
벌써 두 끼니를 넘긴 부녀는 냉수 사발로 배를 채우며 옹기 장사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끈 힘을 합친 부녀는 오고가는 이들에게 한껏 소리쳤다.
“옹기 사세요! 튼튼하고 온기 그득한 옹기!”
“한 번 사면 몇 년은 거뜬! 질 좋은 그릇 사세요!”
목청을 돋은 결과가 있는지 옹기를 사려는 이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곳곳에 걸린 등롱에 불이 붙여지고 낮과는 다른 분위기가 한껏 조성되었다. 거나하게 배를 채운 옹기장이 철린은 모처럼 두둑한 장사에 절로 어깨춤이 나왔다. 그러나 여직 돌아오지 않는 은동을 나무랐다.
“어여 오지 않고 뭐 하는 게야.”
약조한 대로 국밥을 먹은 것은 좋았다. 옹기를 판 값이 모이자 은동은 선심 쓰듯 한 소리 했다. 앞으로 옹기를 더 많이 구우려면 꼭 필요한 것을 구비해야 한다고. 그건 낭비가 아니라나.
그게 뭐냐 물으니 싱긋 웃기만 할뿐 대답을 아니 했었다. 대신 저 혼자 사 가지고 오겠단다.
“암튼 고집은.”
철린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손님들을 상대했다.
그즈음 은동은 현란한 등불의 향연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원하던 국밥도 잘 먹었겠다, 한 손엔 아버지에게 드릴 특별한 선물도 들었겠다, 날아갈 듯했다.
그런데 실개천 사이 드리운 반월교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은동의 발목을 잡은 묘한 기운이 있었다. 은동은 다리 난간을 짚고 실개천을 응시했다. 폭이 매우 좁고 작으나 물의 깊이만은 강 못지않은, 한림을 가로지르는 천이었다.
사방을 환히 밝히고 있는 등불들이 파닥파닥 힘없이 약해지는가 싶더니만 은동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부근에만 사위가 서슬 퍼렇게 바뀌었다. 은동은 몇 번이고 제 눈을 비볐다.
“염사(蚦蛇, 큰 뱀 또는 이무기)?”
그런데 그뿐 아니었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은동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네 눈에 보인다 말이지.”
갑작스레 들려오는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은동은 더없이 커진 눈으로 다가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두건을 내려썼으나 눈에 보이는 각진 턱선은 완벽한 조각이었다. 거기다 붉은 입술은 여인처럼 선명하니 잠시 상대의 성별이 사내가 분명한지 다시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분명히 보았느냐.”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제야 상대의 입술만 바라보았단 것에 괜스레 부끄러워 은동은 급히 손짓했다.
“보세요. 저기 물가 낮은 나룻배. 저기 앉아 있는 여인…….”
사내는 손짓을 따라갔다. 크기는 작으나 규모는 호화로웠다. 거기에 황제의 후궁, 현비가 타고 있었다.
사내의 눈빛에 가는 섬광이 뿜어진다 싶었다. 그는 나룻배 대신 난간에 기댄 은동을 주시했다.
“그렇군. 한데 방금 여인 외에 무엇이 보인다고?”
“푸른 안개지요. 그리고 그 아래 옅은 그림자를 봐요!”
은동은 저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낯선 사내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제가 본 것에 대한 증인이 있는 것에 기뻤다. 제 눈으로 본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은동은 거듭 강조했다.
“안 보이나요. 저 여인의 발끝에서 퍼지는 시퍼런 거?”
“호오. 시퍼런 안개.”
“자잘한 연기가 모여……. 자, 봐요!”
은동은 난간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사내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매단 채 여전히 은동을 노골적일 정도로 찬찬히 훑었다. 그러나 은동은 사내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여인을 태운 나룻배는 건장한 사내들이 노를 젓자마자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은동은 발을 동동 굴렀다.
“봤어요? 똬리를 틀고 있는 형체. 인간의 거죽을 쓴 듯…….”
순간, 제가 말하고 은동은 흠칫했다.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닌데, 은동은 동조를 바라듯 사내를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단정하게 늘어지니 요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은동은 사내의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다 아차 싶었는지 나룻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았나요? 저기!”
여인은 소맷자락 나풀거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면사로 얼굴은 가렸으나 더 없이 아름다울 것임은 자명했다. 그러나 점점 멀어지는 여인의 형상. 은동은 다급하게 반월교 난간에 바짝 기댔다.
“사라지네…….”
눈으로만 여인을 쫓던 은동은 시무룩해지며 손의 힘이 빠져 버렸다. 그 덕분에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물건이 툭, 하고 떨어졌다. 사내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동안 은동은 나룻배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몸이 틀어져 있었다. 여차하면 아래로 떨어질 모양새였다.
“이봐.”
“봤어요? 봤지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냐. 분명 큰 뱀이었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현비가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옵니까?”
“압니다.”
“그저 이 어미는 대견할 뿐입니다. 앞으로 더욱더 정진하여 황자를 믿어 준 폐하의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꼭 그리 하겠나이다.”
음색마저 듣기 그만이니 순간, 현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최고의 행복을 누릴 것만 같은 시간이 다가오건만 저와는 반대로 지옥 같은 순간에 접어들 황후가 궁금했다.
“하면 잠시 바람이나 쏘이도록 할까요. 뛰어난 놀이패의 공연도 있거니와…….”
“황후께 가시려는 겁니까?”
제 속을 들여다보는 은환에 현비는 움찔했다. 어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간담이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 현비는 태연스레 웃음을 매달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꼬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과연 황후께서 어찌 나오시는지, 이 어미는 알아야겠단 말입니다.”
현비의 째지는 말투에 은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권력이 좋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인간사에서는 권력! 그것도 천자의 권력이 최고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동화되었군요.”
뜻밖에도 그는 현비를 비웃었다.
“그, 그런 말씀은 삼가셔야 합니다.”
현비는 속삭이듯 비명 질렀다. 바들바들 떨어 대며 손질된 손톱 끝을 잘근잘근 물기까지 했다. 더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가히 불안했다.
숨넘어갈 듯한 현비와는 반대로 은환은 매우 차분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현재에 연연하지 마시고 이대로 즐기시지요.”
낮으나 엄정했으며 부드러우나 몹시도 엄했다. 현비는 그의 시선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엄연하게 그와 자신과는 다른 존재.
승천하기 위해 수백 년 기다린 하급 미물인 자신과 살아온 세월을 가늠치 못하는 존재와는 같은 급일 수는 없었다.
“즈, 즐길 겁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부디 앞서 나가지 마시길 당부 드립니다, 어마마마.”
부러 어마마마라는 호칭에 힘을 실은 은환. 현비를 보는 비릿한 눈빛은 냉기 그득한 시선 아래 얼어붙을 것 같았다.
오늘날, 황제의 정신과 건강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특히나 은환은 기실 황태자의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탐욕이 그득한 인간사는 하등 상관없었다. 다만 명분 없이 최고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면 그를 의심할 인간들이 귀찮을 뿐.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불멸의 존재를 바란다면 부디 자중하시길.”
협박이었다. 당장이라도 현비의 명줄을 잘라 내겠단 의미였다. 현비는 터지는 비명을 두 손으로 막았다. 만일 그의 말대로 실행된다면…….
인간의 거죽은 벗겨지고 그들이 기겁할 본신이 나타나겠지.
궁인들은 비명을 지를 것이고 수많은 군위들은 절 산산조각 낼 것이다. 그간 기다린 세월이 얼마인데 절대 그리 될 수 없었다.
은환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매서움으로 확인을 요했다.
“어마마마. 알아 들으셨는지요.”
현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눈에 발려진 화장이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하면 웃으시지요.”
가차 없는 주문까지. 그의 요구에 현비는 당장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아이의 그것처럼 천진난만 해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누렇게 들뜬 눈자위가 떠올랐다 사라지니 인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렇게 황자가 물러난 뒤,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웃고 있는 현비.
차를 준비해 들어서던 궁인은 그런 현비의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손에 든 소반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현비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 하는 게야! 냉큼 치우지 못할까!”
“소, 송구합니다.”
당황한 궁인이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치우는 사이, 현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새장이 걸린 난간을 잡았다. 그간 함께 지내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명줄을 잡고 협박한다. 그러나 현비는 은환은 넘어설 능력이 없었다. 아니, 세상 누구도 그에 대적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이왕지사 이리 된 거, 반드시 승천하고 말 테다. 그러자면 기운을 북돋아야 하는 법!”
그래, 그것만이 살길인 것을. 현비의 눈빛에 기이한 윤기가 흘렀다.
❋ ❋ ❋
오후에 접어들자 철린과 은동이 파는 옹기들의 개수는 늘어났다.
“봐라. 내 그랬잖으냐. 팔린다고.”
으스대는 아비에 받은 옹기 값을 꼼꼼하게 세어 본 은동은 허리에 찬 복대에 그 값을 잘 쟁였다.
“아직 아홉 개여요. 두 개 더 팔아 열 한 개가 되면 그때.”
“고기 넣은 국밥!”
“예, 아버지.”
벌써 두 끼니를 넘긴 부녀는 냉수 사발로 배를 채우며 옹기 장사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끈 힘을 합친 부녀는 오고가는 이들에게 한껏 소리쳤다.
“옹기 사세요! 튼튼하고 온기 그득한 옹기!”
“한 번 사면 몇 년은 거뜬! 질 좋은 그릇 사세요!”
목청을 돋은 결과가 있는지 옹기를 사려는 이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곳곳에 걸린 등롱에 불이 붙여지고 낮과는 다른 분위기가 한껏 조성되었다. 거나하게 배를 채운 옹기장이 철린은 모처럼 두둑한 장사에 절로 어깨춤이 나왔다. 그러나 여직 돌아오지 않는 은동을 나무랐다.
“어여 오지 않고 뭐 하는 게야.”
약조한 대로 국밥을 먹은 것은 좋았다. 옹기를 판 값이 모이자 은동은 선심 쓰듯 한 소리 했다. 앞으로 옹기를 더 많이 구우려면 꼭 필요한 것을 구비해야 한다고. 그건 낭비가 아니라나.
그게 뭐냐 물으니 싱긋 웃기만 할뿐 대답을 아니 했었다. 대신 저 혼자 사 가지고 오겠단다.
“암튼 고집은.”
철린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손님들을 상대했다.
그즈음 은동은 현란한 등불의 향연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원하던 국밥도 잘 먹었겠다, 한 손엔 아버지에게 드릴 특별한 선물도 들었겠다, 날아갈 듯했다.
그런데 실개천 사이 드리운 반월교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은동의 발목을 잡은 묘한 기운이 있었다. 은동은 다리 난간을 짚고 실개천을 응시했다. 폭이 매우 좁고 작으나 물의 깊이만은 강 못지않은, 한림을 가로지르는 천이었다.
사방을 환히 밝히고 있는 등불들이 파닥파닥 힘없이 약해지는가 싶더니만 은동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부근에만 사위가 서슬 퍼렇게 바뀌었다. 은동은 몇 번이고 제 눈을 비볐다.
“염사(蚦蛇, 큰 뱀 또는 이무기)?”
그런데 그뿐 아니었다.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은동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네 눈에 보인다 말이지.”
갑작스레 들려오는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은동은 더없이 커진 눈으로 다가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두건을 내려썼으나 눈에 보이는 각진 턱선은 완벽한 조각이었다. 거기다 붉은 입술은 여인처럼 선명하니 잠시 상대의 성별이 사내가 분명한지 다시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분명히 보았느냐.”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제야 상대의 입술만 바라보았단 것에 괜스레 부끄러워 은동은 급히 손짓했다.
“보세요. 저기 물가 낮은 나룻배. 저기 앉아 있는 여인…….”
사내는 손짓을 따라갔다. 크기는 작으나 규모는 호화로웠다. 거기에 황제의 후궁, 현비가 타고 있었다.
사내의 눈빛에 가는 섬광이 뿜어진다 싶었다. 그는 나룻배 대신 난간에 기댄 은동을 주시했다.
“그렇군. 한데 방금 여인 외에 무엇이 보인다고?”
“푸른 안개지요. 그리고 그 아래 옅은 그림자를 봐요!”
은동은 저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낯선 사내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제가 본 것에 대한 증인이 있는 것에 기뻤다. 제 눈으로 본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은동은 거듭 강조했다.
“안 보이나요. 저 여인의 발끝에서 퍼지는 시퍼런 거?”
“호오. 시퍼런 안개.”
“자잘한 연기가 모여……. 자, 봐요!”
은동은 난간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사내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매단 채 여전히 은동을 노골적일 정도로 찬찬히 훑었다. 그러나 은동은 사내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여인을 태운 나룻배는 건장한 사내들이 노를 젓자마자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은동은 발을 동동 굴렀다.
“봤어요? 똬리를 틀고 있는 형체. 인간의 거죽을 쓴 듯…….”
순간, 제가 말하고 은동은 흠칫했다.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닌데, 은동은 동조를 바라듯 사내를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단정하게 늘어지니 요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은동은 사내의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다 아차 싶었는지 나룻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았나요? 저기!”
여인은 소맷자락 나풀거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면사로 얼굴은 가렸으나 더 없이 아름다울 것임은 자명했다. 그러나 점점 멀어지는 여인의 형상. 은동은 다급하게 반월교 난간에 바짝 기댔다.
“사라지네…….”
눈으로만 여인을 쫓던 은동은 시무룩해지며 손의 힘이 빠져 버렸다. 그 덕분에 한 손에 꼭 쥐고 있던 물건이 툭, 하고 떨어졌다. 사내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동안 은동은 나룻배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몸이 틀어져 있었다. 여차하면 아래로 떨어질 모양새였다.
“이봐.”
“봤어요? 봤지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냐. 분명 큰 뱀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