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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한 면은 바다로, 또 한 면은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서국의 중심지 한림(翰林).
동장군이 오래 머무는가 싶더니만 기다림 끝에 찾아온 봄은 더없이 따사로웠다.
더욱이 삼년 만에 나타난 금월을 더해 천추절을 맞이했으니 도성 곳곳은 장장 보름 동안 장대한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은동아.”
도성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옹기장이 철린은 여식을 불렀다. 곧 자그마한 한숨이 들렸다.
“이제 그만 좀 부르소, 예? 은동이 어디 가지 않는다니까요!”
참 매정하게도 대답한다. 그럼에도 아비는 허허거렸다.
“오냐, 오냐. 우리 은동이 배고프지 않으냐?”
“것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아니 고픕니다. 하니 어서 가요. 아버지.”
나귀가 끄는 수레 위, 내다 팔 옹기들 사이에서 진흙덩이를 조몰락거리는 은동은 연신 절 부르는 아비를 못 말리겠단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간다, 가. 이 아비가 얼른 가고 있잖으냐. 하나 정녕 배고프…….”
“아버지!”
더는 참지 못한 은동은 고개를 쳐들었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자그마한 머리통 꼭대기에 쫑긋 묶인 모양새에다 조막막한 얼굴에 꽉 들이찬 이목구비는 허름한 몰골임에도 눈에 뜨였다. 거기에 찬란한 눈빛만은 깊고 또 깊었다.
“어린애 아니라니까요. 이젠 배고픔 따위 충분히 참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고 도성 노점상에선 반드시 옹기가 팔릴 테니 그다음 고기가 잔뜩 들어간 국밥을 같이 배 터지게 먹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어서 가자고요!”
타박이 섞인 종용이었다. 세상천지 둘 밖에 없는 부녀지간. 서로를 의지하며 산 세월이 수십 년, 굶주림이 일상임에도 은동은 아비의 부정(父情)에는 다소 속상했다.
늘 저를 위한다. 제 속이 아우성이라면 아비의 속은 더할 텐데도……. 제 입만 입이 아닌 것이다. 은동은 야윈 아비의 뒷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허. 우리 은동이. 이제 어린애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인심 좋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옹기장이 철린. 그러나 그도 속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 은동이에게 이 아비가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 주어야 할 터인데…….
철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도성에서 다소 떨어진 산 아래, 강가 초막집이 그들의 작업장이자 보금자리였다. 은동은 태어나자마자 모친 잃어 젖동냥으로 키웠다. 자라면서는 장난감처럼 쥐어 준 흙덩이를 만지작거리다 아비의 솜씨를 넘어선 실력으로 희망을 준 아이였다.
그러나 또래보다 잘 먹이지 못하고 거두지 못한 점은 늘 그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은동은 밝고 씩씩하게, 또 영리하게 자랐다.
도성의 첫 관문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구로 들어서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줄에 합류한 철린은 주름진 눈가에 웃음을 담으며 또 은동을 불렀다.
“은동아. 첫 번째 팔린 옹기 값으로 무얼 할까.”
벌써부터 신명난 듯 웅얼거렸다. 그러나 은동은 고개조차 들지 않으며 샐쭉하니 화답했다.
“하긴 뭘 해요. 차곡차곡 모아야지.”
“하면 두 번째 옹기 값은?”
“것도 모아야지.”
“하면 세 번째 네 번째…….”
“아버지! 열 개가 팔리기 전까진 절대 함부로 쓰지 마셔야 합니다. 네?”
마냥 걱정스런 눈빛으로, 또 한편으로는 다부지게 아비를 상기시켰다.
“허투루 쓰지 말자 하였습니다. 겨울은 금방 오니까요. 아끼고 또 아껴야죠.”
“그래도 우리 은동에게 비단 끈 하나…….”
“아버지!”
은동은 대뜸 소리를 높였다. 관문을 지나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모두 부녀를 쳐다보았다. 민망해진 은동은 당장 고개 숙였다. 아비가 허허 웃자 은동은 낮게 소곤거렸다.
“다음에요. 네?”
“오냐. 다음에.”
철린의 소망은 여식인 은동이 번듯하게 정장한 차림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삶이란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 비단으로 치장해 주지 못한 은동에겐 흙냄새만 그득했다.
“다음엔 말이다, 첫 번째로 비단 끈을 살 요량이야.”
“아버지!”
“어허. 사람들이 보는구나.”
괜스레 남을 의식한 은동은 삐죽거리며 고개 돌렸다. 그러나 아비의 깊은 애정은 뼈에 사무치니 가진 건 없는 부녀의 정은 넘쳤다. 금세 대기하는 줄은 짧아졌다.
“다음!”
수비병이 손짓하자 철린은 수레를 멈췄다. 수레를 꼼꼼히 살핀 수비병은 들어가라 손짓했다. 덜그럭덜그럭. 마른 소리와 함께 다시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수레 끝에 걸터앉은 은동은 점점 작아지는 수비병이 보거나말거나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하여 옹기장이 철린과 그의 여식 은동은 화려하고 번잡한 한림으로 접어들었다.
황성 주변. 정리된 구획마다 황실 문양이 또렷한 깃발은 춤추듯 나풀거렸다. 역시나 천추절을 맞아 개방된 한림 도성은 벌써부터 축제였다.
옹기장이 철린은 인가된 노점상 한편에 실어온 옹기들을 내려놓았다. 뒤이어 관리가 들어섰다. 물건을 사고판다는 것이 신고가 된 만큼 그에 따른 세를 거두는 자였다.
“어서 옵쇼! 아, 금오 나으리.”
“옹기들이 탄탄해 보이네 그려.”
안면 있는 관리였다. 철린은 은동에게 인사드리라 눈짓했다. 역시나 말 잘 듣는 어린애 처럼 은동은 머리를 조아렸다.
“등에 매달린 아이가 벌써 저리 컸다니. 세월이 유수로구먼.”
“허허. 삶의 낙입니다. 한데 나으리. 천추절이라 하기엔 역대 규모가 아닐는지요?”
철린의 눈썰미로 보아 도성 곳곳이 유난해 보였던 것이다. 관리는 그에 동조했다.
“더없는 소식이 들릴 걸세.”
“소식이라니요?”
철린이 의아해하자 관리는 넌지시 속삭였다.
“이번에 결정 난다지, 황태자.”
“아!”
철린은 크게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쉽게 결정 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나 말일세. 뭐니 뭐니 해도 현비마마를 거스를 순 없었던 모양이야. 그 결정으로 황후께선 몸져누우셨단 소문도 있고.”
“이런.”
“그러니 우리 같은 범인이야 그저 모른 척 축제를 즐기면 되네. 많이 파시게나.”
“예, 나으리. 마지막 날 뵙겠습니다.”
철린은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관리는 뒷손을 흔들며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은동은 아비와 관리의 대화에 의구심이 들었으나 대놓고 묻지는 못했다.
황태자 결정으로 몸져누운 황후. 하면 차기 황제가 될 누군가는 황후 소생이 아니라는 뜻인데…….
옹기들을 정리하는 은동의 손길이 빨라졌다. 뭐가 되었건 저와는 하등 상관없는 소식이니 차분히 제 할 일에 매진할 뿐이었다.
❋ ❋ ❋
현비의 처소. 대현전.
공들여 가꾼 후원엔 꽃들이 만발했다. 그러나 꽃들의 화려함에 비할 바가 아닌 곳이 현비의 전각이었으니 온갖 사치품들이 그득했다. 심지어 전각 기둥에는 금으로 세공한 새장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엔 든 한 쌍의 새들, 앞다투어 지저귀었다.
역시나 특별히 제작한 나전 의자에 앉은 현비는 새들의 지저귐이 음률인 양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상자 두어 개가 열릴 준비를 했다.
대현전의 궁인은 잠시 상자를 들고 온 황제궁 내조의 눈치를 살폈다. 꽤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의 표정은 질린 듯했다. 더는 아니 되겠다 싶은 눈치 빠른 궁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이젠 열어보시옵소서.”
“그래야겠지. 황제께서 친히 보내신 패물이니 열어 보아야지.”
다소 심드렁했다. 궁인은 현비의 눈짓에 따라 첫 번째 패물 상자를 열었다.
“아이참, 이런 것을 무엇 하러?”
현비는 어떤 감흥도 없이 읊조렸다. 다시 궁인은 내조의 눈치를 살폈다. 내조의 눈썹이 꿈틀했다.
“폐하께서 손수 전하신 것이니 우리 마마께서는 보란 듯이 걸고 나가시면 되옵니다.”
눈치 빠른 궁인이 현비의 비위를 살살 맞췄다. 그제야 현비는 현란하게 손질된 손끝을 내밀었다. 궁인은 알이 굵은 보석이 서너 줄 세공된 목걸이를 내밀었다. 현비는 탐욕스런 눈빛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보석 마다할 여인은 없음이니. 다른 상자도 열어 보자꾸나.”
다시 상자가 열렸다. 이번엔 목걸이와 짝으로 보이는 팔찌와 귀걸이. 또 다른 상자에는 머리꽂이들이었다. 그럼에도 현비는 여전히 불퉁한 낯빛이었다. 내조는 부러 헛기침 몇 번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자 현비는 야린 눈빛으로 내조를 바라보았다.
“폐하의 무한한 마음을 아주 만족스럽게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현비의 눈초리가 심히 달갑지 않으나 뭐라 입 열지 못한 채 황제궁의 내조는 즉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현비는 문이 닫히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흥, 이미 차고도 넘치는 보석 따위. 이제 겨우 아드님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시는데, 야속하도다.”
현비는 과장된 몸짓으로 소매를 들어 눈가에 눌렀다. 궁인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마마. 본디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리는 무슨!”
현비는 눈매를 치켜떴다.
“어차피 황후가 되지 못할 바에야 품계를 초월한 황귀비라도 주시어야 될 말인데, 그런 말씀은 일언반구 없으시고 이 몸의 직책은 그대로 두실 요량이라?”
“그, 그것이.”
“봐라. 내 말에 틀린 것이 없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어디 두고 보라지. 지금은 참을 요량이나 내 아드님이 황제가 되면 날 천하다 여긴 이들을 모조리 사멸시킬 것이다.”
“마마…….”
이렇듯 억하심정으로 귀결된 현비는 증오가 들끓는 듯했다. 황실에서 현비의 존재를 대놓고 천하다 한 이는 오직 황후뿐이었다.
“내 반드시 황후를 냉궁으로 보낼 것이야. 그다음 이 몸은 최고의 황태후가 될 것이다.”
곧 닥칠 찬란한 미래를 그리는 현비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때를 같이해 읍이 들려왔다.
“현비마마. 황자마마 듭시옵니다.”
찰나 현비의 안색은 단번에 바뀌었다.
“오, 뫼셔라.”
역시나 눈치 빠른 궁인은 현비의 옷매무새를 재빨리 정돈했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중문을 넘어 들어선 황자에 현비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황태자로 책봉될 현(玄). 자는 은환(圁煥).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각 같은 턱선이며 뚜렷한 콧날에 붉은 입술까지. 거기다 윤기 나는 머리칼과 월등한 신체 조건은 남달랐다. 들어서는 황태자를 품평하듯 현비의 입술은 길게 올라갔다.
이 세상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지, 암.
흡족한 현비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모자의 조우에 궁인은 조용히 물러났다.
“어서 오소서.”
맞은편에 앉는 모양새까지 은환에겐 우아한 귀품이 흘렀다.
한 면은 바다로, 또 한 면은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서국의 중심지 한림(翰林).
동장군이 오래 머무는가 싶더니만 기다림 끝에 찾아온 봄은 더없이 따사로웠다.
더욱이 삼년 만에 나타난 금월을 더해 천추절을 맞이했으니 도성 곳곳은 장장 보름 동안 장대한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은동아.”
도성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옹기장이 철린은 여식을 불렀다. 곧 자그마한 한숨이 들렸다.
“이제 그만 좀 부르소, 예? 은동이 어디 가지 않는다니까요!”
참 매정하게도 대답한다. 그럼에도 아비는 허허거렸다.
“오냐, 오냐. 우리 은동이 배고프지 않으냐?”
“것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아니 고픕니다. 하니 어서 가요. 아버지.”
나귀가 끄는 수레 위, 내다 팔 옹기들 사이에서 진흙덩이를 조몰락거리는 은동은 연신 절 부르는 아비를 못 말리겠단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간다, 가. 이 아비가 얼른 가고 있잖으냐. 하나 정녕 배고프…….”
“아버지!”
더는 참지 못한 은동은 고개를 쳐들었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자그마한 머리통 꼭대기에 쫑긋 묶인 모양새에다 조막막한 얼굴에 꽉 들이찬 이목구비는 허름한 몰골임에도 눈에 뜨였다. 거기에 찬란한 눈빛만은 깊고 또 깊었다.
“어린애 아니라니까요. 이젠 배고픔 따위 충분히 참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고 도성 노점상에선 반드시 옹기가 팔릴 테니 그다음 고기가 잔뜩 들어간 국밥을 같이 배 터지게 먹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어서 가자고요!”
타박이 섞인 종용이었다. 세상천지 둘 밖에 없는 부녀지간. 서로를 의지하며 산 세월이 수십 년, 굶주림이 일상임에도 은동은 아비의 부정(父情)에는 다소 속상했다.
늘 저를 위한다. 제 속이 아우성이라면 아비의 속은 더할 텐데도……. 제 입만 입이 아닌 것이다. 은동은 야윈 아비의 뒷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허. 우리 은동이. 이제 어린애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인심 좋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옹기장이 철린. 그러나 그도 속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 은동이에게 이 아비가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 주어야 할 터인데…….
철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도성에서 다소 떨어진 산 아래, 강가 초막집이 그들의 작업장이자 보금자리였다. 은동은 태어나자마자 모친 잃어 젖동냥으로 키웠다. 자라면서는 장난감처럼 쥐어 준 흙덩이를 만지작거리다 아비의 솜씨를 넘어선 실력으로 희망을 준 아이였다.
그러나 또래보다 잘 먹이지 못하고 거두지 못한 점은 늘 그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은동은 밝고 씩씩하게, 또 영리하게 자랐다.
도성의 첫 관문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구로 들어서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줄에 합류한 철린은 주름진 눈가에 웃음을 담으며 또 은동을 불렀다.
“은동아. 첫 번째 팔린 옹기 값으로 무얼 할까.”
벌써부터 신명난 듯 웅얼거렸다. 그러나 은동은 고개조차 들지 않으며 샐쭉하니 화답했다.
“하긴 뭘 해요. 차곡차곡 모아야지.”
“하면 두 번째 옹기 값은?”
“것도 모아야지.”
“하면 세 번째 네 번째…….”
“아버지! 열 개가 팔리기 전까진 절대 함부로 쓰지 마셔야 합니다. 네?”
마냥 걱정스런 눈빛으로, 또 한편으로는 다부지게 아비를 상기시켰다.
“허투루 쓰지 말자 하였습니다. 겨울은 금방 오니까요. 아끼고 또 아껴야죠.”
“그래도 우리 은동에게 비단 끈 하나…….”
“아버지!”
은동은 대뜸 소리를 높였다. 관문을 지나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모두 부녀를 쳐다보았다. 민망해진 은동은 당장 고개 숙였다. 아비가 허허 웃자 은동은 낮게 소곤거렸다.
“다음에요. 네?”
“오냐. 다음에.”
철린의 소망은 여식인 은동이 번듯하게 정장한 차림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삶이란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 비단으로 치장해 주지 못한 은동에겐 흙냄새만 그득했다.
“다음엔 말이다, 첫 번째로 비단 끈을 살 요량이야.”
“아버지!”
“어허. 사람들이 보는구나.”
괜스레 남을 의식한 은동은 삐죽거리며 고개 돌렸다. 그러나 아비의 깊은 애정은 뼈에 사무치니 가진 건 없는 부녀의 정은 넘쳤다. 금세 대기하는 줄은 짧아졌다.
“다음!”
수비병이 손짓하자 철린은 수레를 멈췄다. 수레를 꼼꼼히 살핀 수비병은 들어가라 손짓했다. 덜그럭덜그럭. 마른 소리와 함께 다시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수레 끝에 걸터앉은 은동은 점점 작아지는 수비병이 보거나말거나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하여 옹기장이 철린과 그의 여식 은동은 화려하고 번잡한 한림으로 접어들었다.
황성 주변. 정리된 구획마다 황실 문양이 또렷한 깃발은 춤추듯 나풀거렸다. 역시나 천추절을 맞아 개방된 한림 도성은 벌써부터 축제였다.
옹기장이 철린은 인가된 노점상 한편에 실어온 옹기들을 내려놓았다. 뒤이어 관리가 들어섰다. 물건을 사고판다는 것이 신고가 된 만큼 그에 따른 세를 거두는 자였다.
“어서 옵쇼! 아, 금오 나으리.”
“옹기들이 탄탄해 보이네 그려.”
안면 있는 관리였다. 철린은 은동에게 인사드리라 눈짓했다. 역시나 말 잘 듣는 어린애 처럼 은동은 머리를 조아렸다.
“등에 매달린 아이가 벌써 저리 컸다니. 세월이 유수로구먼.”
“허허. 삶의 낙입니다. 한데 나으리. 천추절이라 하기엔 역대 규모가 아닐는지요?”
철린의 눈썰미로 보아 도성 곳곳이 유난해 보였던 것이다. 관리는 그에 동조했다.
“더없는 소식이 들릴 걸세.”
“소식이라니요?”
철린이 의아해하자 관리는 넌지시 속삭였다.
“이번에 결정 난다지, 황태자.”
“아!”
철린은 크게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쉽게 결정 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나 말일세. 뭐니 뭐니 해도 현비마마를 거스를 순 없었던 모양이야. 그 결정으로 황후께선 몸져누우셨단 소문도 있고.”
“이런.”
“그러니 우리 같은 범인이야 그저 모른 척 축제를 즐기면 되네. 많이 파시게나.”
“예, 나으리. 마지막 날 뵙겠습니다.”
철린은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관리는 뒷손을 흔들며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은동은 아비와 관리의 대화에 의구심이 들었으나 대놓고 묻지는 못했다.
황태자 결정으로 몸져누운 황후. 하면 차기 황제가 될 누군가는 황후 소생이 아니라는 뜻인데…….
옹기들을 정리하는 은동의 손길이 빨라졌다. 뭐가 되었건 저와는 하등 상관없는 소식이니 차분히 제 할 일에 매진할 뿐이었다.
❋ ❋ ❋
현비의 처소. 대현전.
공들여 가꾼 후원엔 꽃들이 만발했다. 그러나 꽃들의 화려함에 비할 바가 아닌 곳이 현비의 전각이었으니 온갖 사치품들이 그득했다. 심지어 전각 기둥에는 금으로 세공한 새장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엔 든 한 쌍의 새들, 앞다투어 지저귀었다.
역시나 특별히 제작한 나전 의자에 앉은 현비는 새들의 지저귐이 음률인 양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상자 두어 개가 열릴 준비를 했다.
대현전의 궁인은 잠시 상자를 들고 온 황제궁 내조의 눈치를 살폈다. 꽤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의 표정은 질린 듯했다. 더는 아니 되겠다 싶은 눈치 빠른 궁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이젠 열어보시옵소서.”
“그래야겠지. 황제께서 친히 보내신 패물이니 열어 보아야지.”
다소 심드렁했다. 궁인은 현비의 눈짓에 따라 첫 번째 패물 상자를 열었다.
“아이참, 이런 것을 무엇 하러?”
현비는 어떤 감흥도 없이 읊조렸다. 다시 궁인은 내조의 눈치를 살폈다. 내조의 눈썹이 꿈틀했다.
“폐하께서 손수 전하신 것이니 우리 마마께서는 보란 듯이 걸고 나가시면 되옵니다.”
눈치 빠른 궁인이 현비의 비위를 살살 맞췄다. 그제야 현비는 현란하게 손질된 손끝을 내밀었다. 궁인은 알이 굵은 보석이 서너 줄 세공된 목걸이를 내밀었다. 현비는 탐욕스런 눈빛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보석 마다할 여인은 없음이니. 다른 상자도 열어 보자꾸나.”
다시 상자가 열렸다. 이번엔 목걸이와 짝으로 보이는 팔찌와 귀걸이. 또 다른 상자에는 머리꽂이들이었다. 그럼에도 현비는 여전히 불퉁한 낯빛이었다. 내조는 부러 헛기침 몇 번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자 현비는 야린 눈빛으로 내조를 바라보았다.
“폐하의 무한한 마음을 아주 만족스럽게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현비의 눈초리가 심히 달갑지 않으나 뭐라 입 열지 못한 채 황제궁의 내조는 즉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현비는 문이 닫히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흥, 이미 차고도 넘치는 보석 따위. 이제 겨우 아드님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시는데, 야속하도다.”
현비는 과장된 몸짓으로 소매를 들어 눈가에 눌렀다. 궁인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마마. 본디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리는 무슨!”
현비는 눈매를 치켜떴다.
“어차피 황후가 되지 못할 바에야 품계를 초월한 황귀비라도 주시어야 될 말인데, 그런 말씀은 일언반구 없으시고 이 몸의 직책은 그대로 두실 요량이라?”
“그, 그것이.”
“봐라. 내 말에 틀린 것이 없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어디 두고 보라지. 지금은 참을 요량이나 내 아드님이 황제가 되면 날 천하다 여긴 이들을 모조리 사멸시킬 것이다.”
“마마…….”
이렇듯 억하심정으로 귀결된 현비는 증오가 들끓는 듯했다. 황실에서 현비의 존재를 대놓고 천하다 한 이는 오직 황후뿐이었다.
“내 반드시 황후를 냉궁으로 보낼 것이야. 그다음 이 몸은 최고의 황태후가 될 것이다.”
곧 닥칠 찬란한 미래를 그리는 현비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때를 같이해 읍이 들려왔다.
“현비마마. 황자마마 듭시옵니다.”
찰나 현비의 안색은 단번에 바뀌었다.
“오, 뫼셔라.”
역시나 눈치 빠른 궁인은 현비의 옷매무새를 재빨리 정돈했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중문을 넘어 들어선 황자에 현비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황태자로 책봉될 현(玄). 자는 은환(圁煥).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각 같은 턱선이며 뚜렷한 콧날에 붉은 입술까지. 거기다 윤기 나는 머리칼과 월등한 신체 조건은 남달랐다. 들어서는 황태자를 품평하듯 현비의 입술은 길게 올라갔다.
이 세상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지, 암.
흡족한 현비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모자의 조우에 궁인은 조용히 물러났다.
“어서 오소서.”
맞은편에 앉는 모양새까지 은환에겐 우아한 귀품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