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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몸은 빛바래 보였다. 색을 빼낸 것처럼 푸른 입술이나 투명하다 못해 창백한 살결이 유난히도 시린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지난 4일 경기도 외곽의 국도변에서 발견됐습니다. 발견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실종 신고도 없었고, 발견된 장소도 외진 곳에 사람이 드물게 다니는 곳이라서요. 사망 원인은 동맥 파열, 그러니까 출혈 과다로 추정되고 사고 원인은 교통사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사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로넌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형사는 잠시 침묵했다.
로넌은 죽은 이의 몸에 남은 흔적들을 이미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생전에 폭행당했던 흔적입니다.”
시신의 얼굴과 목에 남은 멍을 보며 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설명을 들어야 할 사람이 한참 만에 연락이 닿은 유가족일 경우에는 더 그랬다.
“앨리는…… 그러니까 동생은 아이를…….”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아 통역과 함께 왔다던 피해자의 오빠가 직접 입을 열었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은 듯 느렸지만 뭘 묻고 싶은지 형사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사는 죽은 여자를 향했다. 시선에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태아는 산모가 사망할 때 함께 사망했습니다.”
로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통역하던 사람 역시 무언가 울컥한 듯 멈칫했다가 말을 마무리했다.
사망자의 신원 확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안실 직원이 가슴까지 내려 둔 천을 올려 다시 얼굴 위로 덮었다. 작고 깊고 어두운 곳으로 망자를 돌려보내고 난 뒤 스테인리스의 작은 문이 철컥 잠겼다.
영안실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발의 남자가 로넌에게 달려들 듯 가까이 다가왔다.
「앨리가 맞아? 정말?」
로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가 죽었다. 두 달만 있으면 아기가 태어날 거라며 시간을 어떻게든 내서 한국으로 휴가를 오라고 조르던 동생이었다. 한국에서는 태어나면 바로 한 살이니까 아이에게 줄 생일 선물도 두 개를 챙겨 와야 한다며 통화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로넌은 얼굴을 문질렀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앨리와 연락이 닿지 않은 건 보름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걸어온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앨리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 없어 주변을 탐색하고서야 겨우 가방을 찾아냈다고 했다. 휴대폰에 찍혀 있는 최근 통화한 가족의 연락처가 그의 것이라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는 연락을 받자마자 워싱턴에서 서울로 날아온 참이었다.
그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형사가 전화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더 남은 것 같아.」
로넌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앨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 설명이 부족했다. 어째서 남편이 아니라 그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는지부터 말이다.
*
오랜만에 먹는 아이스크림은 지나치게 달았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시리얼 초콜릿이 통째로 들어가 아삭아삭한 식감의 아이스크림은, 입에 넣고 혓바닥 위에 굴리는 것만으로 몸서리쳐졌다.
서겸은 스푼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테이블 건너편을 바라봤다. 밥공기보다 조금 더 높은 통에 들은 아이스크림을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푹푹 떠먹던 여자가 그를 보며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역시 활짝 웃었다.
“맛있어?”
“응.”
비음 섞인 콧소리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좋다는데 어쩔 거야.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서겸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먹은 뒤 창밖을 봤다. 1층 창가에 있는 테이블이라 그런지 밖이 훤히 보였다. 뿌연 안개 같은 먼지가 낀 날이 아니라 모처럼 파란 하늘이었다.
“어디 놀러 가고 싶다.”
그가 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여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어디?”
“그냥 아무데나?”
턱을 괴고 멍하니 하는 말에 서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 오기 시작하는 건지 햇살은 무척이나 따사로웠고, 두꺼운 외투가 아니라 한결 얇아진 옷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무작정 가 보고 싶었다. 그게 어디든 상관없이 말이다.
“멀리는 못 가지만, 아이스크림 다 먹으면 학교나 걸을까?”
서겸의 제안에 여자는 시각을 확인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느긋하게. 교정을 걸으며 서겸은 즐겁게 떠들어 댔다. 대화 소재는 뭐든 좋았다. 최근에 개봉한 어떤 영화의 후속작이 나올 것 같으냐는 것도 좋았고, 편의점에 새로 나온 온갖 괴상한 제품들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준비해 둔 이야깃거리들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두 사람은 학교 외진 곳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사람이라곤 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벌써 소화 다 된 것 같아요.”
주위를 살핀 여자가 아까와 달리 존댓말로 중얼거렸다. 서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괜찮습니까?”
그의 말투도 바뀌었다.
“네. 이렇게 실컷 걸어 본 것도 되게 오랜만인 것 같아요.”
여자가 쑥스럽게 웃었다.
서겸은 희미한 미소를 건네며 뭐든 괜찮다는 듯 여자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늘 도움 주셔서 진짜 고마웠어요. 덕분에 유학 가기 전에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아요.”
후련하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서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뭐가 정리된 건지 그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그의 시간을 빌린 의뢰인이 만족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다음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지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연락 주세요.”
영업용 인사인데도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들으니 이상하다며 여자가 웃었다.
서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잘 있어요. 건강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하듯 친근하게 손을 흔들며 서겸이 인사를 남겼다. 여자도 열심히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멀리서 보면 헤어짐이 아쉬운 연인처럼 보일 모양새였다.
서겸은 처음 들어선 낯선 대학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애써서 표정을 유지했다. 교문까지 다 나와서야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끝이었다.
조금 전까지 세상 행복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겸은 손바닥으로 볼을 감싸고 문질렀다. 안 쓰던 얼굴 근육을 쓴 탓인지 턱 위쪽이 얼얼했다.
역할 대행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한참이나 연습을 했지만 자신이 봐도 어색한 얼굴이었는데 오늘 의뢰인은 괜찮다고 해 줬다. 다행인 일이었다.
애인 대행도 끝났으니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집으로 가는 버스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했다.
퇴근길의 버스가 다 그렇지 싶어도, 앉아 있는데도 머리 위쪽으로 사람의 몸이 기울어져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몸을 웅크려야 했다.
오늘 다녀온 약속 장소가 버스 종점에 가까운 곳이라 일찍 자리에 앉은 서겸은 머리를 창문에 바짝 붙였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리창이 머리를 두들겼지만, 사람의 온도로 데워진 안쪽 공기와 달리 차가워서 좋았다.
그는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어느 사이에 해가 넘어가 버렸는지 밤이었다. 캄캄한 도로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도로의 건물들 역시 환하게 조명을 밝혔다. 반짝이는 간판들의 어지러운 빛 아래로 사람들은 저마다 갈 곳을 향해 들어갔다.
도심의 저녁은 금방 캄캄해졌다가 화려하게 밝아지곤 했다.
서겸은 축 늘어졌다.
의뢰인이 설정해 준 정보를 받아 프로필을 외우고 외워 그대로 행동했더니 체력이 고갈된 것 같았다. 타인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손에 턱을 괴고는 눈을 깜박였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의뢰인에게도 신경이 곤두선 날이었겠지만 그도 마찬가지였다.
피곤했다.
서겸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멈칫했다.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시원하면서도 단 셔벗의 향을 맡는 것 같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버스 안에서 뭘 먹고 있을 리는 없으니 누가 이런 계열의 향수를 짙게 뿌린 모양이다.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닌데도 이상하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겸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두통에 창문에서 머리를 들었다. 자잘한 흔들림에도 순식간에 멀미가 났다. 그는 결국 손을 뻗어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틈새로 밀려드는 차가운 밤공기에 단내가 옅어지긴 했어도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겸은 주위를 조심스레 살폈다.
냄새에 민감한 것은 그뿐인지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란 피울 일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도 버스에서 내릴 거였다.
끈질긴 울렁거림에 그는 손바닥으로 코를 가렸다.
이상하네.
코로 느끼는 냄새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5초면 충분하다고 어디선가 그랬다. 그런데도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버스가 멈추고 서겸은 튕기듯 서둘러 내렸다. 사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질척하게 달라붙었던 향수 냄새가 코끝에서 지워졌다.
“살 것 같다.”
입에서 저절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몸은 빛바래 보였다. 색을 빼낸 것처럼 푸른 입술이나 투명하다 못해 창백한 살결이 유난히도 시린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지난 4일 경기도 외곽의 국도변에서 발견됐습니다. 발견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실종 신고도 없었고, 발견된 장소도 외진 곳에 사람이 드물게 다니는 곳이라서요. 사망 원인은 동맥 파열, 그러니까 출혈 과다로 추정되고 사고 원인은 교통사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사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로넌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형사는 잠시 침묵했다.
로넌은 죽은 이의 몸에 남은 흔적들을 이미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생전에 폭행당했던 흔적입니다.”
시신의 얼굴과 목에 남은 멍을 보며 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설명을 들어야 할 사람이 한참 만에 연락이 닿은 유가족일 경우에는 더 그랬다.
“앨리는…… 그러니까 동생은 아이를…….”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아 통역과 함께 왔다던 피해자의 오빠가 직접 입을 열었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은 듯 느렸지만 뭘 묻고 싶은지 형사는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사는 죽은 여자를 향했다. 시선에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태아는 산모가 사망할 때 함께 사망했습니다.”
로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통역하던 사람 역시 무언가 울컥한 듯 멈칫했다가 말을 마무리했다.
사망자의 신원 확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안실 직원이 가슴까지 내려 둔 천을 올려 다시 얼굴 위로 덮었다. 작고 깊고 어두운 곳으로 망자를 돌려보내고 난 뒤 스테인리스의 작은 문이 철컥 잠겼다.
영안실에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발의 남자가 로넌에게 달려들 듯 가까이 다가왔다.
「앨리가 맞아? 정말?」
로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가 죽었다. 두 달만 있으면 아기가 태어날 거라며 시간을 어떻게든 내서 한국으로 휴가를 오라고 조르던 동생이었다. 한국에서는 태어나면 바로 한 살이니까 아이에게 줄 생일 선물도 두 개를 챙겨 와야 한다며 통화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로넌은 얼굴을 문질렀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앨리와 연락이 닿지 않은 건 보름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걸어온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앨리의 시신을 발견하고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 없어 주변을 탐색하고서야 겨우 가방을 찾아냈다고 했다. 휴대폰에 찍혀 있는 최근 통화한 가족의 연락처가 그의 것이라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는 연락을 받자마자 워싱턴에서 서울로 날아온 참이었다.
그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형사가 전화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더 남은 것 같아.」
로넌은 이를 꽉 깨물었다.
앨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 설명이 부족했다. 어째서 남편이 아니라 그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는지부터 말이다.
*
오랜만에 먹는 아이스크림은 지나치게 달았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시리얼 초콜릿이 통째로 들어가 아삭아삭한 식감의 아이스크림은, 입에 넣고 혓바닥 위에 굴리는 것만으로 몸서리쳐졌다.
서겸은 스푼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테이블 건너편을 바라봤다. 밥공기보다 조금 더 높은 통에 들은 아이스크림을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푹푹 떠먹던 여자가 그를 보며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역시 활짝 웃었다.
“맛있어?”
“응.”
비음 섞인 콧소리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좋다는데 어쩔 거야.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서겸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더 먹은 뒤 창밖을 봤다. 1층 창가에 있는 테이블이라 그런지 밖이 훤히 보였다. 뿌연 안개 같은 먼지가 낀 날이 아니라 모처럼 파란 하늘이었다.
“어디 놀러 가고 싶다.”
그가 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여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어디?”
“그냥 아무데나?”
턱을 괴고 멍하니 하는 말에 서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 오기 시작하는 건지 햇살은 무척이나 따사로웠고, 두꺼운 외투가 아니라 한결 얇아진 옷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무작정 가 보고 싶었다. 그게 어디든 상관없이 말이다.
“멀리는 못 가지만, 아이스크림 다 먹으면 학교나 걸을까?”
서겸의 제안에 여자는 시각을 확인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느긋하게. 교정을 걸으며 서겸은 즐겁게 떠들어 댔다. 대화 소재는 뭐든 좋았다. 최근에 개봉한 어떤 영화의 후속작이 나올 것 같으냐는 것도 좋았고, 편의점에 새로 나온 온갖 괴상한 제품들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준비해 둔 이야깃거리들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두 사람은 학교 외진 곳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사람이라곤 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벌써 소화 다 된 것 같아요.”
주위를 살핀 여자가 아까와 달리 존댓말로 중얼거렸다. 서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괜찮습니까?”
그의 말투도 바뀌었다.
“네. 이렇게 실컷 걸어 본 것도 되게 오랜만인 것 같아요.”
여자가 쑥스럽게 웃었다.
서겸은 희미한 미소를 건네며 뭐든 괜찮다는 듯 여자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늘 도움 주셔서 진짜 고마웠어요. 덕분에 유학 가기 전에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아요.”
후련하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서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뭐가 정리된 건지 그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그의 시간을 빌린 의뢰인이 만족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다음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지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연락 주세요.”
영업용 인사인데도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들으니 이상하다며 여자가 웃었다.
서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잘 있어요. 건강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하듯 친근하게 손을 흔들며 서겸이 인사를 남겼다. 여자도 열심히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멀리서 보면 헤어짐이 아쉬운 연인처럼 보일 모양새였다.
서겸은 처음 들어선 낯선 대학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애써서 표정을 유지했다. 교문까지 다 나와서야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끝이었다.
조금 전까지 세상 행복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겸은 손바닥으로 볼을 감싸고 문질렀다. 안 쓰던 얼굴 근육을 쓴 탓인지 턱 위쪽이 얼얼했다.
역할 대행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한참이나 연습을 했지만 자신이 봐도 어색한 얼굴이었는데 오늘 의뢰인은 괜찮다고 해 줬다. 다행인 일이었다.
애인 대행도 끝났으니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집으로 가는 버스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했다.
퇴근길의 버스가 다 그렇지 싶어도, 앉아 있는데도 머리 위쪽으로 사람의 몸이 기울어져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몸을 웅크려야 했다.
오늘 다녀온 약속 장소가 버스 종점에 가까운 곳이라 일찍 자리에 앉은 서겸은 머리를 창문에 바짝 붙였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유리창이 머리를 두들겼지만, 사람의 온도로 데워진 안쪽 공기와 달리 차가워서 좋았다.
그는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어느 사이에 해가 넘어가 버렸는지 밤이었다. 캄캄한 도로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도로의 건물들 역시 환하게 조명을 밝혔다. 반짝이는 간판들의 어지러운 빛 아래로 사람들은 저마다 갈 곳을 향해 들어갔다.
도심의 저녁은 금방 캄캄해졌다가 화려하게 밝아지곤 했다.
서겸은 축 늘어졌다.
의뢰인이 설정해 준 정보를 받아 프로필을 외우고 외워 그대로 행동했더니 체력이 고갈된 것 같았다. 타인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손에 턱을 괴고는 눈을 깜박였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의뢰인에게도 신경이 곤두선 날이었겠지만 그도 마찬가지였다.
피곤했다.
서겸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멈칫했다. 어디선가 단내가 났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시원하면서도 단 셔벗의 향을 맡는 것 같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버스 안에서 뭘 먹고 있을 리는 없으니 누가 이런 계열의 향수를 짙게 뿌린 모양이다.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닌데도 이상하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겸은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두통에 창문에서 머리를 들었다. 자잘한 흔들림에도 순식간에 멀미가 났다. 그는 결국 손을 뻗어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틈새로 밀려드는 차가운 밤공기에 단내가 옅어지긴 했어도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겸은 주위를 조심스레 살폈다.
냄새에 민감한 것은 그뿐인지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란 피울 일도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도 버스에서 내릴 거였다.
끈질긴 울렁거림에 그는 손바닥으로 코를 가렸다.
이상하네.
코로 느끼는 냄새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5초면 충분하다고 어디선가 그랬다. 그런데도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버스가 멈추고 서겸은 튕기듯 서둘러 내렸다. 사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질척하게 달라붙었던 향수 냄새가 코끝에서 지워졌다.
“살 것 같다.”
입에서 저절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