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프롤로그





줄곧 짝사랑했던 상대와 재회한다면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까.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장소는 학교다. 과방이나 강의실, 혹은 우연히 들른 과사무실이라든가 정문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지.

같은 과에, 고작 한 학번 터울인 그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아예 학교를 떠나 얼굴을 보지 않는 상황이면 모를까 아니라면 그러기가 더 어려울 거다.

더군다나 같은 시기에 복학을 앞두고 있는 처지였다. 상상의 범주는 자연히 대학 어드메로 치우쳤다. 물론 사람 앞날은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므로 가능한 많은 곳을 상상했지만, 단 한 곳만은 떠올리지 않았다. 미처 생각을 못 한 게 아니라 거긴 아니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미 졸업한 모교.

당장 어제 졸업한 곳도 아니고 몇 년이나 지났다. 저야 매년 스승의 날과 은사의 생신, 졸업식을 챙긴다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게 보통일 것이다. 이해도 매년 졸업식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자신이 유난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은사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믿기지 않았다.

이해는 답지 않게 멍하니 되묻고 말았다.

“네?”

은사가 귀찮은 내색 없이 반복했다.

“강현이 말이야, 채강현.”

“강현……이요?”

오랜만에 불러 보는 이름이다. 단지 이름자를 입에 담았을 뿐인데 가슴이 선뜩해졌다. 기대인지 불안인지 헷갈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아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술렁이는 가슴을 애써 다독였다.

“그래. 걔가 졸업식엘 다 왔더라니까. 졸업하고 코빼기도 안 보이던 녀석이.”

“……왜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선택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학교에 와 보고 싶어서? 은사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 녀석에겐 전부 해당하지 않는 경우다. 반대 상황은 있을 수 있겠지만.

“뭐야. 둘이 연락 안 해? 아, 하긴. 그래서…….”

은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해는 어물어물 변명했다.

“연락 못 한 지 좀 됐어요. 강현이 군대 갔었잖아요. 저도 외부에 있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해 볼 걸 그랬나 봐요.”

다행히 납득 가는 변명이었는지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그랬지 참. 난 또 뭐라고. 그래도 그렇지, 2년 동안 답신도 안 해 준 건 너무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지? 설마 채강현이 말한 걸까.

모교에 찾아온 채강현도 놀라운 일인데 그의 일로 타박을 받는 상황은 너무 이상해 현실감이 떨어졌다.

그의 연락을 피했던 건 사실이었다. 받자니 무슨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서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채강현을 좋아했지만 그때만큼은 무서움이 컸다. 너무 좋아해도 상대가 두려워질 수 있음은 처음 알았다.

당황스러운 발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채강현, 암만 봐도 네 소식 물으러 온 거 같단 말이지. 너 들렸냐고 묻더라고.”

“강현이가 제 소식을…….”

“응. 그래서 말인데…… 저기, 미안하다, 이해야. 강현이랑 너 연락 제대로 안 되는 줄도 모르고 나는 꼬박꼬박 된다고 했지 뭐냐.”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어가 문장이 되지 못하고 입안을 맴돌았다. 채강현이 저를 찾았다고? 제 소식을 묻고 다녀?

못 물을 건 아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찾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해는 떨리는 속을 달래 보려 했으나 턱 끝까지 차오른 긴장으로 인해 토기마저 느꼈다. 여느 때와 같이 졸업식 시간에 맞춰 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앞이 깜깜했다.

“윤이해, 괜찮아? 표정 안 좋은데.”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다가 결국 말을 더듬었다. 은사의 눈가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으음. 너네…… 혹시 싸웠냐?”

잠깐 뜸을 들인 끝에 나온 물음은 교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종류였다. 그러나 이해에겐 재학 중일 때도 해 본 적 없는 가정이었다.

“네? 강현이랑 제가요? 설마요.”

지나치게 터무니없어도 웃음이 난다. 손을 내저으며 웃었더니 긴장이 좀 가라앉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라면 다행이고. 그래, 채강현 그놈이면 몰라도 이해 네가 누구랑 싸울 리 없지. 나중에 나가는 길에 4층 들러 봐. 나 내려오기 전까지 그 녀석 거기에 있었거든. 아님 지금이라도 가 볼래?”

말은 그리 해도 안 그러던 녀석이 희한한 반응을 보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해는 시계를 확인했다. 담임과 대면한 지 30분은 족히 넘었다. 이쯤이면 충분히 돌아갔을 법했지만 내심 궁금했다.

아직 있을까.

너를…… 만나도 될까.

걱정과 기대가 공존한다. 했던 짓을 생각하면 걱정만이 닥쳐야 했으나 그러기엔 이름만 떠올려도 속절없이 떨리는 상대다.

“선생님, 저…… 괜찮으시면 4층에 올라갔다 올게요.”

피했던 나날이 무색하게 의지는 기대 쪽으로 기울었다. 자신의 소식을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에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갔다면 달리 연락할 용기 따위 없지만 남아 있다고 하면 뒷모습이나마 보고 싶었다.

은사가 흔쾌히 답했다.

“그럴래? 강현이 없어도 그냥 가. 슬슬 퇴근해야겠다.”

“엇, 저 쫓아내시는 거예요?”

“인마, 이런 날 나도 퇴근 좀 빨리 해 보자.”

강현이 갔겠다, 하며 숫제 대놓고 내쫓는 은사를 뒤로한 채 상담실을 나왔다. 이해는 왔던 길을 되짚어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4층이면 특별반 교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때 이해와 강현이 나란히 거쳤던 곳이다.

본관 오른쪽 끝, 짧은 구름다리를 사이에 두고 일반반과 동떨어져 있던 구역은 특별반만의 공간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달라 차별이니 뭐니 잡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 학교에 입학하는 대다수가 ‘특별반’이 문자 그대로 얼마나 특별한지 알고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겉보기로는 성적순으로 잘라 넣은 듯 보인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 성적을 어떻게 만들어 냈고, 유지하는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드러난다.

특이형질. 그리고 그 안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는 집안.

여남은 명 남짓한 한 반에 알파 혹은 오메가가 아닌 이들이 드물었다. 특이형질이 평범한 사람보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로 입증되었다. 하물며 그 형질은 몹시 드물게, 오직 유전으로만 이어진다는 점이 희소가치를 높였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몇십만 명은 될까 말까 한 특이종이다. 따지자면 변종이었으나 누구도 그리 여기지 않았다. 인류의 진화형이라 드높이는 발표만 쏟아져 나왔다.

한국에는 알파와 오메가를 긁어모아 봐야 세 자리 수가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절반은 이곳에 있다. 핏줄로 싸우던 시절이었다면 제 피가 더 고귀하다며 왕위를 놓고 다투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전부 왕의 자손들일지도.

물론 그렇다 해도 한 사람 앞에서는 한낱 알파이고 오메가일 것이다. 전체 인류의 상위 1%에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면, 그들마저 지배하는 우성 알파가 존재했다. 이해가 알기로 한국에서 우성 판정을 받은 이는 딱 세 명이었다. 채강현의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웬만하면 계속 기다리려고 했는데.”

채강현.

“놔두면 또 도망갈 것 같아서요.”

언제 다가왔을까.

시선 위, 계단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낯익은 한편 낯선 얼굴.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인데 모르는 분위기를 한 겹 둘러 입은 청년이 이해를 불렀다.

“윤이해.”

“……강현아.”

“선배.”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호칭으로 부른 이는 소리 없이 발을 내딛는 맹수처럼 거리를 좁혔다. 이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와중에 시선은 피하지 못했다. 그것만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강현이 이해를 붙들었다. 딱히 고압적인 것도 아니고 눈 돌리지 마라 명령한 것도 아닌데 이해는 박제된 곤충처럼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이래서…… 널 만나기가 무서웠던 건데.

속절없이 끌려가니까. 헛된 기대로 가득했던 날들이 바로 어제처럼 떠올라서.

“선…….”

“강현아.”

단 한 걸음 앞. 이해는 대뜸 양팔을 벌렸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긴장으로 경직됐던 몸이 조금 풀렸다.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던 녀석이 눈썹을 꿈틀했다.

심기 불편한 얼굴도 참 잘생겼다, 우리 강현이.

“뭔데요.”

“안아 줄래?”

무뚝뚝하게 굳은 미간이 일순 찌그러졌다. 그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낌새다. 이해는 은사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히죽 웃었다. 어서 안아 줘. 조르듯이 팔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잖아. 한번 안아 보자.”

“내참……. 닿을 수는 있고요?”

“그러엄. 이제 그 정도는 가능하다고.”

“뭐?”

더럭 표정을 구긴 강현을 향해 이해가 손을 뻗었다. 한 걸음의 거리를 좁혀 빈틈을 메웠다. 머리를 기대자 관자놀이에 딱딱한 쇄골이 닿았다. 조심히 짚었던 허리를 조금 더 분명하게 끌어당겼다. 손바닥을 펴 상대의 등을 감싸고 상대로 팔 안을 넉넉하게 채웠다.

팔이 가늘게 떨렸다. 가슴은 그보다 불안하게 펄떡였지만 이만하면 예상보다 결과가 좋다.

“이것 봐. 진짜지?”

단단한 빗장뼈에 뺨을 기댄 채 묻자 품에 안긴 몸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사뭇 어설프게 닿은 몸을 한층 깊숙이 당겨 안았다. 거대한 체구로 모두 덮어 버릴 듯했다. 조그마한 틈새라곤 없이 깊게 붙어 이해를 가둬 버린 그는 붉게 달아오른 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윤이해, 바보야?”

“선배한테 바보가 뭐냐, 강현아.”

“전두엽 제대로 붙어 있어요?”

“존댓말한다고 욕 아닌 건 아니다…….”

얘도 참. 재회한 지 얼마나 됐다고 구박인지.

뇌 없냐고 욕먹은 건 좀 억울하지만 동시에 익숙한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평소 알던 후배였다. 황당한 짓을 하면 가차 없이 혀를 차고 한심한 중생 보듯 했던 채강현이다. 애써 밝은 척, 그가 황당해할 만한 선택지를 고른 보람이 있었다.

이해는 향수와 섞인 체향을 맡았다. 전혀 달지 않은데 달게 느껴지는 향이었다. 시원하고 묵직한 향이 콧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머물렀다.

강현이 강아지처럼 킁킁대는 이해의 뒤통수를 감싸 눌렀다.

“으웁! 수, 숨 막혀.”

“선배 눈엔 내가 등신으로 보이는 게 확실해.”

“웁!”

“아니면 그리 튀어 놓고 이따위로 나올 수가 없지.”

“뭐, 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나올 화제이긴 했다. 하지만 녀석이라면 그 일을 없는 셈치고 얼굴을 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지저분한 일은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성미니까. 설령 꺼낸다 해도 재회하자마자 직구로 던질 줄은 몰랐다.

강현이 이해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맞췄다. 까만 동공이 이해의 모든 것을 꿰뚫을 듯 진하게 부딪쳐 왔다. 얇은 입매가 삐뚜름하게 기울었다.

“나 따먹고 튀었잖아, 윤이해.”

“……!”

“그것도 입대 전날.”

“읏…….”

“당신은 내가 그날 입대할 걸 알고 있었어. 알고 노린 거야.”

강현의 확신은 끼어들 틈 없이 견고했다. 이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군대에 가기 전, 마음을 밝히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당일 일어난 사건까지 계획한 건 아니었다. 강현이 이를 박박 갈았다.

“그리고 사람 놀리듯이 해외로 튀어 버렸지.”

“강현아. 아, 아파.”

“임신했어요?”

어쨌거나 강현과 관계했다. 강현으로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녔던 사람이 사고 같은 관계 후 소식도 없이 외국으로 날랐다면 저 같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혹독한 비난을 당한 기분이었다. 염치도 없지. 부담을 안긴 것으로 모자라 내내 답답했을 그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대답이 없자 강현이 턱을 쥔 손에 악력을 가했다. 이해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턱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아니면 그새 딴 놈이랑 눈 맞은 건 아니겠지.”

“아니야!”

결코 있을 수 없는 선택지다. 이것만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나 강현의 사나운 기색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그럼 누구랑 포옹 연습했어요. 손도 제대로 못 잡던 사람이.”

“강현아.”

“누구냐고 묻잖아요.”

이해는 머뭇머뭇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강현이 움찔했다. 같은 남자의 손인데 강현의 것은 왜 이토록 크고 따뜻한 걸까.

“그냥…… 노력했어.”

특정한 누구라고 하긴 어려워서 사실대로 대답했다. 대부분 실패했단 이야기는 숨긴다. 해서 널 다시 만나도 닿을 수 있단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도 마음속에만 둔다.

강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날 선 분위기가 이해를 짓눌렀다.

“참 간도 커, 선배.”

“…….”

“겁도 없고.”

할 말이 없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일은 일어났고 그로 말미암은 감정이 결국 강현에게 심어진 결과였다. 당시에는 그게 어떤 감정이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강현에게 준 감정이므로. 그게 꼭 저처럼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흔적이나마 그에게 남기고 싶었다.

“참 의외죠. 겁 많고 뒤통수라곤 못 치게 생겼는데.”

아무래도 맺힌 게 많은가 보다. 말이 없던 녀석이 오늘따라 귀한 입술을 자주 열었다. 자신을 비난하는 투인데 이해는 바보같이 좋았다. 목소리 좋다, 강현아. 그리 말하면 정말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욕을 해도 좋았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강현이 쐐기를 박았다.

“이 일을 정말로 피하고 싶었다면 선배는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 해요. 알죠? 피해 다닐 게 아니라 아예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으응, 네 말이 맞아.”

이해는 시무룩하게 동의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전부 변명일 뿐이다. 강현이 이해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럴 용기는 없겠지. 그렇다면 마땅한 대가를 치르면 돼요. 우린 그걸 책임이라고 불러요.”

“강현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해는 제 의지로 턱을 한껏 젖혔다. 강현이 예쁜 눈매를 휘었다. 성질 나쁘게 보였던 입매와 달리 눈동자엔 익숙한 온기가 돌았다. 다정한 온기.

“책임져, 윤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