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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은 스쳐 지나가듯이 (1)
학교에 올 때는 맑더니 돌아가는 길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날씨에 기분을 빗대고 싶지는 않은데 딱 제 기분 같다.
이해는 창에 비치는 얼굴을 힐끗거렸다. 뺨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다. 차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갑작스런 만남이 아직 당혹스러운 탓이다. 강현이 모교에 나타난 것도, 대뜸 책임을 지라고 한 것도.
책임이라…….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라는 걸까.
강현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그 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힐끔거리지 말고 그냥 봐요. 선배 내 얼굴 좋아하잖아.”
“…….”
“배까지 맞춘 사이에 뭘 새삼.”
“미안해. 잘못했어.”
자동 반사처럼 사과가 튀어 나간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고 송곳 같은 화법이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을 아프게 찌른다. 강현을 바라보자 잘생긴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다. 이해는 그새 뺨을 달군 열이 그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사정했다.
“그, 그러니까 그 얘긴 안 하면 안 될까?”
“왜요. 이제 와서 후회돼요?”
“그…….”
‘그래’라고 대답하려 했다. 강현이 말을 잘랐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나랑 잔 거 정말 후회해요?”
음성이 한층 낮게 깔렸다. 팔목을 틀어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복도에서 붙잡힌 이후로 떨어질 줄 모르는 손이다. 아팠으나 아프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날 일이 잘 기억이 안 나. 히트 사이클이었잖아.”
“그래서요.”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같은 밤을 보낸 이가 추궁한다.
원하는 대답이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이해는 망설이다 끄덕이려던 머리를 가로로 저었다.
“그래도…… 후회했을 것 같진 않아.”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숨길까.
발정기 때의 기억이 깔끔하게 날아갔다면 좋을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완전히 페로몬에 잡아먹히기 전 기억은 어렴풋 남아 있었다. 취중 진담인 척, 그에게 고백했다.
“좋아해, 강현아. 쭉 좋아했어.”
그러면서 울었던가? 고백 직후 히트 사이클이 터져 쾌감 때문에 울먹였던 것 같기도 하다. 생생한 것은 과정이나 맥락보다 그날의 열기와 아픔, 몸을 짓누르던 무게감 따위였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는 강현이 출발하기 직전까지 그와 얽혀 있었던 것 같다. 들어가는 거 보겠다고 부득불 먼 산간 지방까지 따라갔는데 정작 입소하는 장면은 못 보고 낯선 호텔에서 끙끙거리다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길에 올랐으니 그날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셈이었다.
2년 만에 마주한 강현이었으나 도드라지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당장 어제도 만난 사람처럼 완벽한 채강현이었다. 굵직한 선으로 그린 이목구비와 다부진 몸,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으면서도 막상 쳐다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위압감마저 그대로였다.
스스로 그런 점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현은 먼저 말을 걸어 분위기를 풀어 놓는 편이었다. 평생 사람에게 둘러싸여 지냈음을 증명하듯 그는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했다. 바꿔 말하면 강현과 지내면서 지금처럼 숨 막히는 공기는 처음이었다.
어색해. 벗어나고 싶다. 불안감에 자꾸만 눈이 딴 곳으로 향했다.
강현에게 끌려오며 주차장에 놓아둔 차가 떠올랐다. 교직원 주차장이니 누가 견인해 가지는 않을 테지만 예정에 없던 일이라 걱정되기도 하고, 과연 근시일 내에 찾으러 갈 수 있을지 막연한 불안감이 일었다.
정정해야겠다. 군대에 다녀온 강현은 고압적인 모습을 배워 왔다. 좋은 사람임에는 변함없겠지만,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친근함이 덜했다.
우리 강현이…… 귀여웠는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웃어요.”
“으, 응? 내가 웃고 있었어?”
이해가 화들짝 놀라며 입가를 더듬었다. 강현이 이해의 입술 끝을 건드렸다.
“여기, 올라가 있는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뺨이며 귀밑까지 덧그린다. 모양 좋은 손가락이 목덜미를 건드리자 이해는 어깨를 옹송그렸다. 강현이 뒷목 부근을 손끝으로 긋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 위에서 실소가 흘렀다.
“내가 선배랑 자긴 했나 봐요.”
“…….”
“그땐 어쩐지 실감이 안 났거든. 그런데 선배 목 보니까 뒷덜미 예민했던 게 문득 떠오르고 그러네.”
아무래도 강현은 그냥 넘어갈 마음이 없나 보다. 어색하리만치 말이 없어서 넘긴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는 이해더러 ‘덮치고 튀었다’고 했다. 이해에겐 ‘뜻하지 않게 일어난 사고’였지만 당한 사람이 그리 생각했다면 이해는 명백한 가해자였다.
문제는 이해 또한 강현의 진심을 오늘에서야 알았다는 점이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당혹감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 맹세컨대 이해는 그날 강현과 몸을 겹치게 될 줄 몰랐다. 애당초 이 마음을 알리고 싶었을 뿐, 사귀자거나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이래서 그토록 끈질기게 연락했던 걸까.
한 번이라도 연락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을까?
선택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길이다.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가 버렸고 강현은 줄곧 저를 강간범으로 여겼을 터였다. 연락도 끊고 튀어 버린 괘씸한 강간범.
죄질이 나쁘다. 이해가 할 말은 하나였다.
“잘못……했어.”
강현이 손을 거둬들였다.
“잘못한 줄은 알아요?”
“응…….”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코끝이 매웠다. 염치없이 울 것 같아 이해는 숨을 참았다. 경험상 이러면 눈물이 좀 잦아들었다. 이 나이 먹고 어릴 때처럼 울면 이상한 시선이나 받기 십상이었다.
강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담담히 말했다.
“계속 궁금했어요. 몸도 약한 사람이 서울까진 어떻게 돌아갔을지, 불러 둔 사람들은 왜 따돌렸는지, 유학은 그렇다 치고 연락은 왜 안 받았는지.”
“…….”
“혹시나 임신해서 겁먹고 도망간 건 아닌지.”
“…….”
“아주…… 미친놈처럼 궁금했죠.”
얼굴에선 손을 떼었으나 팔목은 여전히 붙들고 있다. 그의 불신이 생생히 그려졌다.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릴 만큼 무모하진 않은데 말이다.
이해는 강현이 듣고 싶어 할 법한 대답을 골랐다.
“도망 아니야. 네 연락만 안 받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머리를 좀 식히고 싶었어.”
“선배 말대로 제 연락만 안 받았던 건 아니죠. 졸업한 지 한참 된 학교 선생님과도 되는 연락이 왜 저랑은 안 됐을까 의문이 들었을 뿐이에요.”
음…… 이게 아닌가.
강현은 이해가 자신을 피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이었으므로 이해는 입을 여는 대신 강현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예전에도 그가 화낼 낌새를 비치면 등이나 어깨에 얼굴을 붙이곤 했다. 왜인지 그러고 나면 평소보다 빨리 누그러들었다. 이번에도 먹힐지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급 정장의 부드러운 질감이 이마에 닿았다. 강현에게선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이해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잡힌 팔의 방향을 조심스레 돌렸다. 안쪽 손목에 강현의 손바닥이 붙었다. 다행히 뭐하는 짓이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슬금슬금 손을 빼내듯이 아래로 내렸다. 단단한 손날에 손가락이 턱 걸리며 손을 잡은 형태가 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해는 선수 쳐 말했다.
“피해서 미안해. 겁나서 그랬어.”
말하고 나서야 노린 것처럼 비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게 아닌데. 강현과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계산적으로 군 적 없다. 그러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 죽겠는데 계산은 무슨…….
손바닥이 뜨거웠다. 가까이 붙은 몸에서 한결 힘이 빠졌다. 깊은 한숨이 이해의 가슴을 두드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한숨. 보통 그것을 들으면 죄책감이 일거나 걱정하거나 같이 한숨을 쉬어 줄 테지. 반면 이해는 슬그머니 미소를 띠운다. 강현이 져 주는 소리인 까닭이다. 한숨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마음이 풀렸다는 신호였다. 진심으로 짜증 났다면 처음부터 숨소리조차 섞지 않았을 녀석이었다.
“솔직히 좀 의외였어요.”
“응? 뭐가?”
“날 덮칠 정도로 좋아했다면 옆에 붙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덮…….”
덮친 게 아니라고 말해도 될까. 말하면 믿어 줄까?
“결심이 섰나 했죠. 착각이었지만.”
어감이 이래서 중요하다. 엄밀히 말해 덮쳐진 쪽은 자신이었다. 흐릿한 기억 어디를 돌려 봐도 그의 옷을 벗기며 달려든 장면은 없었다. 듣다 보니 점점 억울해졌다.
강현이 겹친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확연히 상체를 기울여 이해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니면 나 가지고 야한 생각만 했다는 뜻인데.”
“…….”
“의외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닿기도 힘들어하던 선배가 섹스하는 상상을 할 줄 알았나.”
덜컥, 숨이 걸렸다.
강현이 갑자기 귓불을 깨물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서 완성된 맥락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어서였다.
남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녀석은 약간 남은 빈틈마저 모두 메우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말랑한 입술이 살갗을 눌렀다.
“가, 강현아.”
“냄새는 그대론데.”
강현이 무심히 읊조렸다. 단 한번이라도 타인과 몸을 섞었다면 알아낼 수 있다는 투였다.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상상해 보지는 않았지만 강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이해는 숨을 들이켰다. 인사로 뺨을 맞대는 나라에서 지내며 혹여 누군가의 페로몬이 묻었을까 조마조마했다. 그의 우성 알파 페로몬 때문에 섹스는커녕 사람 사귀는 일 자체가 힘들었음은 까맣게 잊고서.
“읏…….”
“예민한 것도 여전하고.”
청량한 향이 피부를 덮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인데 잡힐 듯한 촉감이 느껴진다. 페로몬에 완전히 잠식되었던 경험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 상태를 페로몬 샤워라고 부른다는 건 유학 가서 알았다. 퍽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성 알파가 드문 한국에선 없다시피 한 일이었다. 오래된 부부에게서 서로의 향이 섞이는 경우가 가끔 나타난다지만 정확히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방긋 웃어 주면 흔히 몰리곤 하던 사람들이 좀처럼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았다. 특이형질이 아닌 이들조차 이해에게서 영문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들었다.
“잠, 잠깐만.”
유학 생활은 다르게 말하면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깨닫는 나날이었다. 덕분에 이해는 유학 초, 이미 파트너 알파가 있는 오메가로 알려졌다. 알파들은 아예 근처에도 오지 않으려 했다. 거북하다는 이유였다.
학교에 올 때는 맑더니 돌아가는 길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날씨에 기분을 빗대고 싶지는 않은데 딱 제 기분 같다.
이해는 창에 비치는 얼굴을 힐끗거렸다. 뺨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다. 차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갑작스런 만남이 아직 당혹스러운 탓이다. 강현이 모교에 나타난 것도, 대뜸 책임을 지라고 한 것도.
책임이라…….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라는 걸까.
강현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그 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힐끔거리지 말고 그냥 봐요. 선배 내 얼굴 좋아하잖아.”
“…….”
“배까지 맞춘 사이에 뭘 새삼.”
“미안해. 잘못했어.”
자동 반사처럼 사과가 튀어 나간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고 송곳 같은 화법이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을 아프게 찌른다. 강현을 바라보자 잘생긴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다. 이해는 그새 뺨을 달군 열이 그의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사정했다.
“그, 그러니까 그 얘긴 안 하면 안 될까?”
“왜요. 이제 와서 후회돼요?”
“그…….”
‘그래’라고 대답하려 했다. 강현이 말을 잘랐다.
“잘 생각하고 대답해요. 나랑 잔 거 정말 후회해요?”
음성이 한층 낮게 깔렸다. 팔목을 틀어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복도에서 붙잡힌 이후로 떨어질 줄 모르는 손이다. 아팠으나 아프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날 일이 잘 기억이 안 나. 히트 사이클이었잖아.”
“그래서요.”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같은 밤을 보낸 이가 추궁한다.
원하는 대답이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이해는 망설이다 끄덕이려던 머리를 가로로 저었다.
“그래도…… 후회했을 것 같진 않아.”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숨길까.
발정기 때의 기억이 깔끔하게 날아갔다면 좋을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완전히 페로몬에 잡아먹히기 전 기억은 어렴풋 남아 있었다. 취중 진담인 척, 그에게 고백했다.
“좋아해, 강현아. 쭉 좋아했어.”
그러면서 울었던가? 고백 직후 히트 사이클이 터져 쾌감 때문에 울먹였던 것 같기도 하다. 생생한 것은 과정이나 맥락보다 그날의 열기와 아픔, 몸을 짓누르던 무게감 따위였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는 강현이 출발하기 직전까지 그와 얽혀 있었던 것 같다. 들어가는 거 보겠다고 부득불 먼 산간 지방까지 따라갔는데 정작 입소하는 장면은 못 보고 낯선 호텔에서 끙끙거리다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길에 올랐으니 그날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셈이었다.
2년 만에 마주한 강현이었으나 도드라지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당장 어제도 만난 사람처럼 완벽한 채강현이었다. 굵직한 선으로 그린 이목구비와 다부진 몸,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으면서도 막상 쳐다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위압감마저 그대로였다.
스스로 그런 점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현은 먼저 말을 걸어 분위기를 풀어 놓는 편이었다. 평생 사람에게 둘러싸여 지냈음을 증명하듯 그는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했다. 바꿔 말하면 강현과 지내면서 지금처럼 숨 막히는 공기는 처음이었다.
어색해. 벗어나고 싶다. 불안감에 자꾸만 눈이 딴 곳으로 향했다.
강현에게 끌려오며 주차장에 놓아둔 차가 떠올랐다. 교직원 주차장이니 누가 견인해 가지는 않을 테지만 예정에 없던 일이라 걱정되기도 하고, 과연 근시일 내에 찾으러 갈 수 있을지 막연한 불안감이 일었다.
정정해야겠다. 군대에 다녀온 강현은 고압적인 모습을 배워 왔다. 좋은 사람임에는 변함없겠지만,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친근함이 덜했다.
우리 강현이…… 귀여웠는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웃어요.”
“으, 응? 내가 웃고 있었어?”
이해가 화들짝 놀라며 입가를 더듬었다. 강현이 이해의 입술 끝을 건드렸다.
“여기, 올라가 있는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뺨이며 귀밑까지 덧그린다. 모양 좋은 손가락이 목덜미를 건드리자 이해는 어깨를 옹송그렸다. 강현이 뒷목 부근을 손끝으로 긋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 위에서 실소가 흘렀다.
“내가 선배랑 자긴 했나 봐요.”
“…….”
“그땐 어쩐지 실감이 안 났거든. 그런데 선배 목 보니까 뒷덜미 예민했던 게 문득 떠오르고 그러네.”
아무래도 강현은 그냥 넘어갈 마음이 없나 보다. 어색하리만치 말이 없어서 넘긴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는 이해더러 ‘덮치고 튀었다’고 했다. 이해에겐 ‘뜻하지 않게 일어난 사고’였지만 당한 사람이 그리 생각했다면 이해는 명백한 가해자였다.
문제는 이해 또한 강현의 진심을 오늘에서야 알았다는 점이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당혹감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 맹세컨대 이해는 그날 강현과 몸을 겹치게 될 줄 몰랐다. 애당초 이 마음을 알리고 싶었을 뿐, 사귀자거나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이래서 그토록 끈질기게 연락했던 걸까.
한 번이라도 연락을 받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을까?
선택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길이다. 어쨌거나 시간은 흘러가 버렸고 강현은 줄곧 저를 강간범으로 여겼을 터였다. 연락도 끊고 튀어 버린 괘씸한 강간범.
죄질이 나쁘다. 이해가 할 말은 하나였다.
“잘못……했어.”
강현이 손을 거둬들였다.
“잘못한 줄은 알아요?”
“응…….”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코끝이 매웠다. 염치없이 울 것 같아 이해는 숨을 참았다. 경험상 이러면 눈물이 좀 잦아들었다. 이 나이 먹고 어릴 때처럼 울면 이상한 시선이나 받기 십상이었다.
강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담담히 말했다.
“계속 궁금했어요. 몸도 약한 사람이 서울까진 어떻게 돌아갔을지, 불러 둔 사람들은 왜 따돌렸는지, 유학은 그렇다 치고 연락은 왜 안 받았는지.”
“…….”
“혹시나 임신해서 겁먹고 도망간 건 아닌지.”
“…….”
“아주…… 미친놈처럼 궁금했죠.”
얼굴에선 손을 떼었으나 팔목은 여전히 붙들고 있다. 그의 불신이 생생히 그려졌다.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릴 만큼 무모하진 않은데 말이다.
이해는 강현이 듣고 싶어 할 법한 대답을 골랐다.
“도망 아니야. 네 연락만 안 받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머리를 좀 식히고 싶었어.”
“선배 말대로 제 연락만 안 받았던 건 아니죠. 졸업한 지 한참 된 학교 선생님과도 되는 연락이 왜 저랑은 안 됐을까 의문이 들었을 뿐이에요.”
음…… 이게 아닌가.
강현은 이해가 자신을 피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이었으므로 이해는 입을 여는 대신 강현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예전에도 그가 화낼 낌새를 비치면 등이나 어깨에 얼굴을 붙이곤 했다. 왜인지 그러고 나면 평소보다 빨리 누그러들었다. 이번에도 먹힐지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급 정장의 부드러운 질감이 이마에 닿았다. 강현에게선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이해는 그의 눈치를 살피다 잡힌 팔의 방향을 조심스레 돌렸다. 안쪽 손목에 강현의 손바닥이 붙었다. 다행히 뭐하는 짓이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슬금슬금 손을 빼내듯이 아래로 내렸다. 단단한 손날에 손가락이 턱 걸리며 손을 잡은 형태가 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해는 선수 쳐 말했다.
“피해서 미안해. 겁나서 그랬어.”
말하고 나서야 노린 것처럼 비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게 아닌데. 강현과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계산적으로 군 적 없다. 그러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 죽겠는데 계산은 무슨…….
손바닥이 뜨거웠다. 가까이 붙은 몸에서 한결 힘이 빠졌다. 깊은 한숨이 이해의 가슴을 두드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한숨. 보통 그것을 들으면 죄책감이 일거나 걱정하거나 같이 한숨을 쉬어 줄 테지. 반면 이해는 슬그머니 미소를 띠운다. 강현이 져 주는 소리인 까닭이다. 한숨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마음이 풀렸다는 신호였다. 진심으로 짜증 났다면 처음부터 숨소리조차 섞지 않았을 녀석이었다.
“솔직히 좀 의외였어요.”
“응? 뭐가?”
“날 덮칠 정도로 좋아했다면 옆에 붙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덮…….”
덮친 게 아니라고 말해도 될까. 말하면 믿어 줄까?
“결심이 섰나 했죠. 착각이었지만.”
어감이 이래서 중요하다. 엄밀히 말해 덮쳐진 쪽은 자신이었다. 흐릿한 기억 어디를 돌려 봐도 그의 옷을 벗기며 달려든 장면은 없었다. 듣다 보니 점점 억울해졌다.
강현이 겹친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확연히 상체를 기울여 이해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니면 나 가지고 야한 생각만 했다는 뜻인데.”
“…….”
“의외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닿기도 힘들어하던 선배가 섹스하는 상상을 할 줄 알았나.”
덜컥, 숨이 걸렸다.
강현이 갑자기 귓불을 깨물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내부에서 완성된 맥락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어서였다.
남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녀석은 약간 남은 빈틈마저 모두 메우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말랑한 입술이 살갗을 눌렀다.
“가, 강현아.”
“냄새는 그대론데.”
강현이 무심히 읊조렸다. 단 한번이라도 타인과 몸을 섞었다면 알아낼 수 있다는 투였다.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상상해 보지는 않았지만 강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이해는 숨을 들이켰다. 인사로 뺨을 맞대는 나라에서 지내며 혹여 누군가의 페로몬이 묻었을까 조마조마했다. 그의 우성 알파 페로몬 때문에 섹스는커녕 사람 사귀는 일 자체가 힘들었음은 까맣게 잊고서.
“읏…….”
“예민한 것도 여전하고.”
청량한 향이 피부를 덮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인데 잡힐 듯한 촉감이 느껴진다. 페로몬에 완전히 잠식되었던 경험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 상태를 페로몬 샤워라고 부른다는 건 유학 가서 알았다. 퍽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성 알파가 드문 한국에선 없다시피 한 일이었다. 오래된 부부에게서 서로의 향이 섞이는 경우가 가끔 나타난다지만 정확히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방긋 웃어 주면 흔히 몰리곤 하던 사람들이 좀처럼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았다. 특이형질이 아닌 이들조차 이해에게서 영문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들었다.
“잠, 잠깐만.”
유학 생활은 다르게 말하면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깨닫는 나날이었다. 덕분에 이해는 유학 초, 이미 파트너 알파가 있는 오메가로 알려졌다. 알파들은 아예 근처에도 오지 않으려 했다. 거북하다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