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 시작은 스쳐 지나가듯이 (2)
알파는 기본적으로 자기 영역이 확고한 개체다. 다른 알파의 향을 맡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고 부담스러워했다. 일반 알파끼리도 그러는데 우성 알파는 흡사 공격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들어서 아는 척할 뿐 실제로는 무슨 감각인지 알 수 없다. 정작 안겼던 자신은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 페로몬이 실존하는 투명한 막도 아니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 곁에 강현이 있는 듯 구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미묘해졌다. 그에게서 도망치듯 떠난 유학인데 외려 한시도 복기하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윤이해.”
강현의 목소리는 깊고 낮게 울린다. 목소리를 내는 기관이 가슴쯤에 있는 것 같다. 저 깊다란 곳에서 어렵사리 나왔기에 제게도 이토록 깊숙이 꽂히는 것이리라고, 이해는 생각했다.
“선배.”
그가 재차 불렀다. 대답 대신 그의 가슴을 짚는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강현은 이해가 고개를 숙이면 숙이는 대로, 들면 드는 대로 따라왔다. 그가 속삭였다.
“도망가서도 내 생각했어요?”
“……응.”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야한 생각도 했고?”
“…….”
“어디까지 했어요. 키스? 애무? 끝까지? 상상 속의 나는 잘하던가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소리가 되지 못한 진심이 턱 끝에 걸렸다. 강현은 그냥 넘어가지 않다 못해 괴롭히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리 짓궂은 녀석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평소처럼 능청스레 넘기지 못하는 자신도 문제였다.
이해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숨을 곳을 찾아 시선이 방황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앞은 채강현, 뒤는 달리는 자동차의 문. 설상가상, 한쪽 팔은 강현과 얽힌 상태다.
“더 하면 울 것 같으니 그만두죠. 그새 다른 놈을 들인 것 같지도 않고.”
어, 어라?
대답을 추궁하던 압박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강현이 상체를 떨어뜨렸다. 반대쪽 창가에 팔꿈치를 대고서 턱을 기댄다. 방금 전까지 성격 나쁜 질문으로 곤란하게 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이해는 얼떨떨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려 했다. 강현이 한발 빨랐다.
“그런데요, 선배.”
“으, 응?”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했어요. 야한 생각.”
“…….”
“끝까지.”
*
차는 수십 분을 달려 어느 주택가에 멈춰 섰다. 담장이 높아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동네였다. 이해에게는 익숙했다. 본가가 있는 곳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사생활이 드러나는 걸 극히 꺼리는 아버지 탓에 담장을 넘고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저택에서 살았다. 좋게 말하면 정원이 넓었고, 나쁘게 말하면 돌아다니기 피곤한 집이었다.
잠시 대기하자 거대한 문이 열렸다. 일직선으로 쭉 달리자 낯선 저택 앞에 당도했다. 층이 높은 건물이었다. 창은 3층까지 나 있었지만 지붕이 높아 그 사이에 층이 하나 더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해의 기억엔 없는 곳이었다. 자주 들렸던 강현의 자취방은 대학 근처 고급 오피스텔이었고, 본가는 고전 양식의 대저택이었다.
강현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내려요.”
동시에 잡고 있던 팔도 놓아준다. 그가 반대편 문으로 먼저 내렸다. 이해는 문고리를 잡은 채 머뭇거렸다. 이곳엔 왜 데리고 온 걸까. 뭔가 많은 말을 한 듯싶어도 속 시원히 해결된 게 없었다. 당장 1분 앞이 막막한 기분은 여전했다.
망설이는 사이 빠르게 돌아온 남자가 이해를 끄집어냈다. 이해와 달리 그의 행동에서는 주저함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이해에겐 강현이 마치 처음부터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앗!”
그가 팔을 잡아당기는 통에 중심을 놓친 몸이 휘청댔다.
“조심해요.”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다. 강현이 혀를 차며 피부를 살폈다.
“괜찮아요. 멍은 안 남겠어요.”
알리는 말투가 다소 부드러워져서 이해는 애써 긴장을 풀었다.
“여긴 어디야?”
“내 집이에요.”
“이사했어?”
제대한 지 몇 달 안 되었을 텐데 역시나 행동력이 남다르다. 강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전 자취방은 살림 가구가 썩 시원치 않아서요.”
그렇구나, 하고 마냥 동의하기엔 그곳도 충분히 괜찮은 집이었다. 그렇지만 이해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수긍했다. 상대가 상대다. 평수를 따지기 무용한 대저택이 그의 본가였다. 저 역시 모자란 삶은 아니었으나 수천 평이나 되는 부지를 오롯이 집으로만 사용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평소 어떤 대상에 대해 가타부타 평가하는 성격이 아니라 간과했는데, 사실 강현은 남들보다 불편함을 느낄 요소가 많은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 평생 탁 트인 광경만 마주하다 사방이 막힌 건물에 들어가면 답답증을 호소하는 사람처럼.
그 점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그만두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은 모난 돌처럼 툭 튀어나온 존재일수도 있겠지. 거슬린다거나 짜증 난다며 치워 버릴 만도 한데 강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끈질기게 찾아서 손을 잡고 네 생각을 했다며 털어놓았다.
얼마간 말없이 걸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뻥 뚫린 정경이 두 사람을 반겼다.
“세상에.”
이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려 거실 한쪽 벽 전체가 통유리였다. 잘 관리된 녹빛 정원이 시야를 꽉 채우며 펼쳐졌다.
제집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아버지는 창문조차 열어 놓기를 꺼리는 분이었다. 그 정도로 예민하진 않더라도 벽을 투명하게 한 구조는 상품 매장에서나 경험할 줄 알았다.
“이러면 밖에서 다 보이지 않아?”
이해가 손등으로 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강현은 입꼬리를 씩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인다는 건지 안 보인다는 건지. 궁금했으나 다시 물을 정신은 없었다. 잘생긴 얼굴이 미소를 머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늘 처음 보는 미소였다. 다정다감함 따윈 모를 듯한 차가운 인상이 미소 하나로 해사하게 변한다. 이해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강현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휘었다.
“고백 듣고 보니까 내 얼굴 정말 좋아하네, 선배.”
“아, 아니야.”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지만 늦었다. 두 발짝가량 떨어져 있던 강현이 다가왔다. 그가 이해의 귀를 콕 짚었다.
“뭐가 아니에요. 귀 안 뜨거워요? 빨간데.”
지적하지 않아도 안다. 이해는 차마 앞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왜 반박했을까. 자문해 봤자 답은 명백하다.
타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널…… 좋아하는 거야.”
채강현의 얼굴이 아니라 채강현이 좋은 거라고.
비슷한 모양새의 문장이나 이해에겐 대단히 다른 어감이다. 본능적으로 짚어서 정정해야 할 만큼.
“앗, 아, 아니 물론 네 얼굴도 좋아해. 근데 네가 잘생겨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널 좋아해서 얼굴도 좋다는…….”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진정해요.”
손을 휘저으며 횡설수설하는 이해의 곁으로 강현이 바짝 붙었다. 이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또한 본능이 시킨 움직임이었다. 강현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선 자리에 머물렀다. 손을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였다. 가깝지만 완전히 틈을 메우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리.
강현은 망설임 없이 허락을 구했다.
“가까이 가도 돼요?”
“……응.”
보나마나 새빨개져서 볼품없는 꼴일 텐데 그는 아랑곳 않고 조그만 빈틈마저 지운다. 이해는 일부러 그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오늘밤 꿈자리에 나올 것 같았다. 지금만큼은 고개를 젖혀야 얼굴이 보이는 키 차이가 다행스러웠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산만하게 배회하는 것보단 우리 강현이 목울대도 잘생겼네, 찬양이나 하는 편이 나았다.
그가 이해의 옆자리에 어깨를 붙이며 말했다.
“집 둘러보고 필요한 가구가 있다면 들여도 돼요.”
“응? 내 가구를?”
둘 다 나란히 유리창에 붙은지라 시야 정면을 차지한 건 반대편 거실 구조였다. 이해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의 말이 좀 뜬금없게 느껴진 탓이다. 그야 한두 번쯤 방을 빌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로 전용 가구까지 마련해 두기엔 과했다.
“이 집에서 지내는 일이 늘어날 테니까요.”
“으음……? 내가?”
아니 이건 단순히 자고 가는 어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는 동거에 가까운 말투다. 기분 탓이 아니라고 확인시켜 주듯 강현이 답했다.
“네. 선배가요.”
“어째서?”
제 행보를 강현에게 묻고 있다. 기묘한 일이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만큼 강현은 이해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현이 딱 잘라 단정 지을 때는 반드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거기에 도움받은 경험이 다수였기에 이해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머리 위로 우뚝 솟은 후배가 이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그럼 발정기를 보내는데 선배 집에 절 초대할 수―.”
“으아앗!”
누군가 들을세라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정말이지 거리낌이라곤 없는 녀석이었다. 이해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발정기. 덮침 운운하던 화제보다야 낫지만 이것도 부끄럽긴 매한가지다.
과연, 그가 구태여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납득했다. 발정기가 핵심이었다. 살림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집을 옮긴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을 터였다. 강현에게 그곳은 잠깐 머무는 용도이지 누군가를 데려와서 살 만한 곳은 아니었던 거다.
여타 가구와 마주치지 않는 개인의 영역. 파트너가 있는 알파에겐 특히 독립적인 공간이 중요했다. 그곳은 단지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는 곳이 아니라 둥지였다. 페로몬을 퍼트려도 방해받지 않고 배우자와 아이들을 마음 놓고 보호할 수 있는 보금자리.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정 거리가 필요한 것처럼 알파에게 알파의 영역은 필수 요소였다.
그리고 이곳은 강현이 알파로서 설정한 자신의 영역이다. 설령 가족이라 하더라도 다른 알파가 마음대로 침범한다면 강현은 상대를 진심으로 경계하고 공격할 권리가 있었다.
강현은 눈썹만 꿈틀했을 뿐 얌전히 이해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해는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뗄지 말지 망설였다.
“손 떼 줄 테니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줘.”
쪽.
손바닥 안쪽에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알파는 기본적으로 자기 영역이 확고한 개체다. 다른 알파의 향을 맡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고 부담스러워했다. 일반 알파끼리도 그러는데 우성 알파는 흡사 공격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들어서 아는 척할 뿐 실제로는 무슨 감각인지 알 수 없다. 정작 안겼던 자신은 평소와 같은 상태였다. 페로몬이 실존하는 투명한 막도 아니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 곁에 강현이 있는 듯 구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미묘해졌다. 그에게서 도망치듯 떠난 유학인데 외려 한시도 복기하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윤이해.”
강현의 목소리는 깊고 낮게 울린다. 목소리를 내는 기관이 가슴쯤에 있는 것 같다. 저 깊다란 곳에서 어렵사리 나왔기에 제게도 이토록 깊숙이 꽂히는 것이리라고, 이해는 생각했다.
“선배.”
그가 재차 불렀다. 대답 대신 그의 가슴을 짚는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강현은 이해가 고개를 숙이면 숙이는 대로, 들면 드는 대로 따라왔다. 그가 속삭였다.
“도망가서도 내 생각했어요?”
“……응.”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개를 끄덕였다.
“야한 생각도 했고?”
“…….”
“어디까지 했어요. 키스? 애무? 끝까지? 상상 속의 나는 잘하던가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소리가 되지 못한 진심이 턱 끝에 걸렸다. 강현은 그냥 넘어가지 않다 못해 괴롭히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리 짓궂은 녀석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평소처럼 능청스레 넘기지 못하는 자신도 문제였다.
이해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숨을 곳을 찾아 시선이 방황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앞은 채강현, 뒤는 달리는 자동차의 문. 설상가상, 한쪽 팔은 강현과 얽힌 상태다.
“더 하면 울 것 같으니 그만두죠. 그새 다른 놈을 들인 것 같지도 않고.”
어, 어라?
대답을 추궁하던 압박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강현이 상체를 떨어뜨렸다. 반대쪽 창가에 팔꿈치를 대고서 턱을 기댄다. 방금 전까지 성격 나쁜 질문으로 곤란하게 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이해는 얼떨떨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려 했다. 강현이 한발 빨랐다.
“그런데요, 선배.”
“으, 응?”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도 했어요. 야한 생각.”
“…….”
“끝까지.”
*
차는 수십 분을 달려 어느 주택가에 멈춰 섰다. 담장이 높아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동네였다. 이해에게는 익숙했다. 본가가 있는 곳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사생활이 드러나는 걸 극히 꺼리는 아버지 탓에 담장을 넘고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저택에서 살았다. 좋게 말하면 정원이 넓었고, 나쁘게 말하면 돌아다니기 피곤한 집이었다.
잠시 대기하자 거대한 문이 열렸다. 일직선으로 쭉 달리자 낯선 저택 앞에 당도했다. 층이 높은 건물이었다. 창은 3층까지 나 있었지만 지붕이 높아 그 사이에 층이 하나 더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해의 기억엔 없는 곳이었다. 자주 들렸던 강현의 자취방은 대학 근처 고급 오피스텔이었고, 본가는 고전 양식의 대저택이었다.
강현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내려요.”
동시에 잡고 있던 팔도 놓아준다. 그가 반대편 문으로 먼저 내렸다. 이해는 문고리를 잡은 채 머뭇거렸다. 이곳엔 왜 데리고 온 걸까. 뭔가 많은 말을 한 듯싶어도 속 시원히 해결된 게 없었다. 당장 1분 앞이 막막한 기분은 여전했다.
망설이는 사이 빠르게 돌아온 남자가 이해를 끄집어냈다. 이해와 달리 그의 행동에서는 주저함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이해에겐 강현이 마치 처음부터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앗!”
그가 팔을 잡아당기는 통에 중심을 놓친 몸이 휘청댔다.
“조심해요.”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다. 강현이 혀를 차며 피부를 살폈다.
“괜찮아요. 멍은 안 남겠어요.”
알리는 말투가 다소 부드러워져서 이해는 애써 긴장을 풀었다.
“여긴 어디야?”
“내 집이에요.”
“이사했어?”
제대한 지 몇 달 안 되었을 텐데 역시나 행동력이 남다르다. 강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전 자취방은 살림 가구가 썩 시원치 않아서요.”
그렇구나, 하고 마냥 동의하기엔 그곳도 충분히 괜찮은 집이었다. 그렇지만 이해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수긍했다. 상대가 상대다. 평수를 따지기 무용한 대저택이 그의 본가였다. 저 역시 모자란 삶은 아니었으나 수천 평이나 되는 부지를 오롯이 집으로만 사용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평소 어떤 대상에 대해 가타부타 평가하는 성격이 아니라 간과했는데, 사실 강현은 남들보다 불편함을 느낄 요소가 많은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 평생 탁 트인 광경만 마주하다 사방이 막힌 건물에 들어가면 답답증을 호소하는 사람처럼.
그 점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그만두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은 모난 돌처럼 툭 튀어나온 존재일수도 있겠지. 거슬린다거나 짜증 난다며 치워 버릴 만도 한데 강현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끈질기게 찾아서 손을 잡고 네 생각을 했다며 털어놓았다.
얼마간 말없이 걸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뻥 뚫린 정경이 두 사람을 반겼다.
“세상에.”
이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려 거실 한쪽 벽 전체가 통유리였다. 잘 관리된 녹빛 정원이 시야를 꽉 채우며 펼쳐졌다.
제집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아버지는 창문조차 열어 놓기를 꺼리는 분이었다. 그 정도로 예민하진 않더라도 벽을 투명하게 한 구조는 상품 매장에서나 경험할 줄 알았다.
“이러면 밖에서 다 보이지 않아?”
이해가 손등으로 유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강현은 입꼬리를 씩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인다는 건지 안 보인다는 건지. 궁금했으나 다시 물을 정신은 없었다. 잘생긴 얼굴이 미소를 머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늘 처음 보는 미소였다. 다정다감함 따윈 모를 듯한 차가운 인상이 미소 하나로 해사하게 변한다. 이해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강현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휘었다.
“고백 듣고 보니까 내 얼굴 정말 좋아하네, 선배.”
“아, 아니야.”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서둘러 입술을 깨물었지만 늦었다. 두 발짝가량 떨어져 있던 강현이 다가왔다. 그가 이해의 귀를 콕 짚었다.
“뭐가 아니에요. 귀 안 뜨거워요? 빨간데.”
지적하지 않아도 안다. 이해는 차마 앞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왜 반박했을까. 자문해 봤자 답은 명백하다.
타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널…… 좋아하는 거야.”
채강현의 얼굴이 아니라 채강현이 좋은 거라고.
비슷한 모양새의 문장이나 이해에겐 대단히 다른 어감이다. 본능적으로 짚어서 정정해야 할 만큼.
“앗, 아, 아니 물론 네 얼굴도 좋아해. 근데 네가 잘생겨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널 좋아해서 얼굴도 좋다는…….”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진정해요.”
손을 휘저으며 횡설수설하는 이해의 곁으로 강현이 바짝 붙었다. 이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또한 본능이 시킨 움직임이었다. 강현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선 자리에 머물렀다. 손을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였다. 가깝지만 완전히 틈을 메우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리.
강현은 망설임 없이 허락을 구했다.
“가까이 가도 돼요?”
“……응.”
보나마나 새빨개져서 볼품없는 꼴일 텐데 그는 아랑곳 않고 조그만 빈틈마저 지운다. 이해는 일부러 그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오늘밤 꿈자리에 나올 것 같았다. 지금만큼은 고개를 젖혀야 얼굴이 보이는 키 차이가 다행스러웠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산만하게 배회하는 것보단 우리 강현이 목울대도 잘생겼네, 찬양이나 하는 편이 나았다.
그가 이해의 옆자리에 어깨를 붙이며 말했다.
“집 둘러보고 필요한 가구가 있다면 들여도 돼요.”
“응? 내 가구를?”
둘 다 나란히 유리창에 붙은지라 시야 정면을 차지한 건 반대편 거실 구조였다. 이해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의 말이 좀 뜬금없게 느껴진 탓이다. 그야 한두 번쯤 방을 빌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로 전용 가구까지 마련해 두기엔 과했다.
“이 집에서 지내는 일이 늘어날 테니까요.”
“으음……? 내가?”
아니 이건 단순히 자고 가는 어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는 동거에 가까운 말투다. 기분 탓이 아니라고 확인시켜 주듯 강현이 답했다.
“네. 선배가요.”
“어째서?”
제 행보를 강현에게 묻고 있다. 기묘한 일이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만큼 강현은 이해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현이 딱 잘라 단정 지을 때는 반드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거기에 도움받은 경험이 다수였기에 이해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머리 위로 우뚝 솟은 후배가 이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그럼 발정기를 보내는데 선배 집에 절 초대할 수―.”
“으아앗!”
누군가 들을세라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정말이지 거리낌이라곤 없는 녀석이었다. 이해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발정기. 덮침 운운하던 화제보다야 낫지만 이것도 부끄럽긴 매한가지다.
과연, 그가 구태여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납득했다. 발정기가 핵심이었다. 살림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집을 옮긴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을 터였다. 강현에게 그곳은 잠깐 머무는 용도이지 누군가를 데려와서 살 만한 곳은 아니었던 거다.
여타 가구와 마주치지 않는 개인의 영역. 파트너가 있는 알파에겐 특히 독립적인 공간이 중요했다. 그곳은 단지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는 곳이 아니라 둥지였다. 페로몬을 퍼트려도 방해받지 않고 배우자와 아이들을 마음 놓고 보호할 수 있는 보금자리.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정 거리가 필요한 것처럼 알파에게 알파의 영역은 필수 요소였다.
그리고 이곳은 강현이 알파로서 설정한 자신의 영역이다. 설령 가족이라 하더라도 다른 알파가 마음대로 침범한다면 강현은 상대를 진심으로 경계하고 공격할 권리가 있었다.
강현은 눈썹만 꿈틀했을 뿐 얌전히 이해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해는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뗄지 말지 망설였다.
“손 떼 줄 테니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줘.”
쪽.
손바닥 안쪽에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