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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어지는 헛소리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칼뤼프소는 원래도 정신이 나간 존재지만, 오늘따라 더 넋이 나가 있었다. 광인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칼뤼프소가 듣지 못하도록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쉴 따름이었다.
칼뤼프소는 탄식하는 남자에게 물담배를 건네주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시선으로 종용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예의상 받아야만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집요한 시선을 견디던 남자는 곧 담뱃대를 입에서 떼었다. 더는 무례한 언행을 참아 주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뤼프소, 당신 말마따나 우리는 오래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내가 이런 존재가 된 후로부터 쭈욱. 우리는 굳이 비유를 들자면 막역한 친우였지요. 당신은 늘 나에게 점을 쳐 주었고, 나는 당신의 점괘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 냈습니다. 우리는 서로 꼭 필요했던 공생 관계였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칼뤼프소가 눈을 크게 뜨자 뱀처럼 긴 동공이 여실히 드러났다. 남자는 짐짓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상의 그 어떤 이보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내 친우 점쟁이 칼뤼프소, 다만 아르마하덴의 애송이 황제가 오늘내일 하는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제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는 점을 굳이 설명드리는 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내 점은 늘 틀린 적이 없지.”
뱀의 눈을 가늘게 뜨며 칼뤼프소가 웃자 남자도 어색하게 따라 미소 지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남자는 한껏 정색했다.
“예. 당신의 점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은 틀린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신 나갔어요! 미쳤다고요!”
“내가? 이 칼뤼프소가 미쳤다고?”
“예, 당신이요. 오늘 제가 상등품의 무화과를 열 바구니나 수레에 실어 와 당신에게 내주면서 점을 쳐 달라 한 것은 일말의 관심도 없는 황제 놈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 따위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언제쯤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였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칼뤼프소, 이로써 우리의 깊고 오래된 신뢰는 깨진 것으로 하지요. 당연히 오늘 거래도 사라진 셈이니 이 무화과 열 바구니는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앞으로 더 조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지혜롭고 아름다웠던 칼뤼프소. 내 오래된, 그러나 이젠 옛 친우여.”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남자는 점괘의 대가로 가져왔던 무화과 열 바구니를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칼뤼프소가 하나를 먹어 버려 원래의 수량과 달라진 것은 아쉽지만 이미 사라진 무화과를 다시 채울 방도가 없었다. 없어진 존재를 다시 만들어 낼 정도로 전능하지는 못한 탓이다.
뭐, 그래도 괜찮다. 설령 무화과 한 알이 없다고 해도 적당히 팔아 치우면 그만이었다. 상등품의 무화과를 꼭 후식으로 먹어야 하는 귀족 가문이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아르마하덴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다 게을러서 온종일 입에 음식을 넣는 것밖에 못 하는 돼지 같은 족속들이었으니 말이다.
무화과 아홉 바구니를 차곡차곡 수레에 옮겨 담고 마지막 한 바구니도 실으려는 남자에게 칼뤼프소가 다시 세로로 긴 동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아르마하덴의 황제가 갑자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한낱 하룻밤의 꿈으로 치부했지만, 그 끔찍한 악몽과 밤은 하루, 이틀, 사흘 계속 이어지더니 석 달을 넘긴 지금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면서 따라다니지. 황제는 매일 밤마다 의사를 불러 병을 고쳐 보려 했지만 누구도 고칠 수 없었어. 이건 인간의 병이 아니니까!”
남자는 손에 든 무화과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온 사방에 무화과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남자는 급히 칼뤼프소의 앞으로 달려와서 따졌다.
“칼뤼프소, 정말 이러긴가요? 아까는 말해 주지 않았으면서!”
굴러가던 무화과 하나가 칼뤼프소의 발치에서 멈췄다. 무화과를 집어 든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천박한 웃음과 달리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칼뤼프소는 점괘를 말하던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남자가 멍청하게 무례를 저질렀을 뿐.
“내 점은 늘 옳단다. 그리고 신뢰를 저버린 존재는 칼리드, 너지. 네 뜻대로 다신 만나는 일 없을 테니 잘 가도록 해. 네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래, 내 오래된 옛 친우여. 정말 그리울 거란다. 오, 벌써 눈물이 나려 하네.”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칼뤼프소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쳤다. 순식간에 남자, 칼리드를 집 밖으로 내쫓은 그녀는 먹음직스러운 무화과를 베어 물었다. 칼뤼프소의 입 안에서 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칼뤼프소를 향해 다급해진 칼리드가 애걸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얻을 수 있다는 건가요? 그것만 대답해 줘요, 칼뤼프소! 제발, 우리의 지난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애걸복걸하는 칼리드를 보고 칼뤼프소가 코웃음 쳤다.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난 점괘였다. 그러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화과들이 제 소유가 될 것을 생각해 칼뤼프소는 딱 한마디만큼의 자비를 베풀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무화과 천 바구니를 가져와도 알려 줄 수 없단다, 칼리드. 기회는 스스로 잡아야지. 꿈 속에서 직접!”
칼리드가 다시 질문하려는 순간 희뿌연 연기와 함께 낡은 집과 칼뤼프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무화과 바구니가 담긴 수레 앞에 허망하게 서서 바라만 보았다. 공터만 남은 곳을 바라보며 칼리드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칼리드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원하던 점괘 대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화과만 잔뜩 남았다. 바구니에 가득 든 수백 개의 무화과라니!
심지어 한 바구니는 통째로 떨어트리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가서 칼뤼프소의 소유가 되었다. 열 바구니나 샀는데 점괘도 얻지 못하고, 점쟁이 칼뤼프소에게 절연이나 당하고, 무화과 한 바구니마저 통째로 잃고 말았으니 어마어마한 손해였다. 너무 큰 손해라서 금액으로 환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아르마하덴에 다시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
다소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최소한 하나는 알아냈다. 지금껏 간절히 원해 온 것이 아르마하덴에 있다는 사실.
‘심지어 가지고 있던 재물도 다 처분했고.’
칼뤼프소도 떠났고, 심지어 이곳에 오기 전 제 아늑한 둥지도 헐값에 처분해 버렸다. 기반이 전무하니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엔 무리였다. 어차피 이리 되었으니 아르마하덴에 새 둥지를 틀고 오래도록 찾아다닌 그것을 얻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 먼저였다. 바닥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운 칼리드는 천천히 수레를 끌며 빈민가에서 벗어났다.
칼리드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임시로 묵는 여관에 무화과 바구니가 든 수레를 질질 끌며 도착했다. 피로에 지친 그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종업원에게 수레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더러운 앞치마에 손을 닦아 낸 종업원은 수레 위에 가득 든 무화과와 칼리드를 번갈아 보더니 묵묵히 수레를 끌고 가 손님들의 짐을 보관하는 창고에 두었다. 농담 따위를 던질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칼리드는 수레가 창고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실히 보고 나서야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을 지나 계단을 한 칸씩 천천히 올라가자 그가 묵을 방이 보였다. 갑작스레 맡은 수레 때문에 종업원이 열쇠를 주는 것을 깜빡한 듯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굳이 다시 부를 필요도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열쇠는 이미 칼리드의 손 안에 존재했다.
열쇠로 문을 딴 칼리드는 딱딱한 침대 위에 피로에 지친 몸을 던졌다. 예전이었더라면 이런 형편없는 하급 여관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텐데. 마음에 차지 않아도 당장은 이런 저급한 여관이라도 만족해야만 했다.
침대 위에 뻗어 있던 그는 간신히 기운을 내 벌떡 일어났다. 그런 뒤, 짐 꾸러미 속에서 깃펜과 양피지를 꺼내 급히 편지를 썼다.
역시 정보 습득이 먼저였다. 칼리드는 오랫동안 이 대륙을 떠나 있었기에 아는 정보가 없었다. 병에 걸렸다는 황제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해 알아보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칼리드가 유일하게 아는 정보상이 마침 아르마하덴 제도에 살고 있으니 금방 양질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보수는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내주어야겠지만 얼마가 들든 간에 정보가 우선이었다. 칼리드가 창밖으로 몸을 살짝 내밀고 휘파람을 불자 지나가던 십자매가 세차게 날갯짓하며 날아왔다. 그는 십자매의 다리에 편지를 단단히 묶어서 다시 날려 보냈다.
‘하루빨리 정보상이 찾아와야 할 텐데.’
수레를 끄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지친 칼리드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곤히 잠들었다.
이어지는 헛소리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칼뤼프소는 원래도 정신이 나간 존재지만, 오늘따라 더 넋이 나가 있었다. 광인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칼뤼프소가 듣지 못하도록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쉴 따름이었다.
칼뤼프소는 탄식하는 남자에게 물담배를 건네주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시선으로 종용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예의상 받아야만 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집요한 시선을 견디던 남자는 곧 담뱃대를 입에서 떼었다. 더는 무례한 언행을 참아 주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뤼프소, 당신 말마따나 우리는 오래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내가 이런 존재가 된 후로부터 쭈욱. 우리는 굳이 비유를 들자면 막역한 친우였지요. 당신은 늘 나에게 점을 쳐 주었고, 나는 당신의 점괘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 냈습니다. 우리는 서로 꼭 필요했던 공생 관계였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칼뤼프소가 눈을 크게 뜨자 뱀처럼 긴 동공이 여실히 드러났다. 남자는 짐짓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상의 그 어떤 이보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내 친우 점쟁이 칼뤼프소, 다만 아르마하덴의 애송이 황제가 오늘내일 하는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제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는 점을 굳이 설명드리는 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내 점은 늘 틀린 적이 없지.”
뱀의 눈을 가늘게 뜨며 칼뤼프소가 웃자 남자도 어색하게 따라 미소 지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남자는 한껏 정색했다.
“예. 당신의 점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은 틀린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신 나갔어요! 미쳤다고요!”
“내가? 이 칼뤼프소가 미쳤다고?”
“예, 당신이요. 오늘 제가 상등품의 무화과를 열 바구니나 수레에 실어 와 당신에게 내주면서 점을 쳐 달라 한 것은 일말의 관심도 없는 황제 놈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 따위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언제쯤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였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칼뤼프소, 이로써 우리의 깊고 오래된 신뢰는 깨진 것으로 하지요. 당연히 오늘 거래도 사라진 셈이니 이 무화과 열 바구니는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앞으로 더 조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지혜롭고 아름다웠던 칼뤼프소. 내 오래된, 그러나 이젠 옛 친우여.”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남자는 점괘의 대가로 가져왔던 무화과 열 바구니를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칼뤼프소가 하나를 먹어 버려 원래의 수량과 달라진 것은 아쉽지만 이미 사라진 무화과를 다시 채울 방도가 없었다. 없어진 존재를 다시 만들어 낼 정도로 전능하지는 못한 탓이다.
뭐, 그래도 괜찮다. 설령 무화과 한 알이 없다고 해도 적당히 팔아 치우면 그만이었다. 상등품의 무화과를 꼭 후식으로 먹어야 하는 귀족 가문이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아르마하덴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다 게을러서 온종일 입에 음식을 넣는 것밖에 못 하는 돼지 같은 족속들이었으니 말이다.
무화과 아홉 바구니를 차곡차곡 수레에 옮겨 담고 마지막 한 바구니도 실으려는 남자에게 칼뤼프소가 다시 세로로 긴 동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아르마하덴의 황제가 갑자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한낱 하룻밤의 꿈으로 치부했지만, 그 끔찍한 악몽과 밤은 하루, 이틀, 사흘 계속 이어지더니 석 달을 넘긴 지금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면서 따라다니지. 황제는 매일 밤마다 의사를 불러 병을 고쳐 보려 했지만 누구도 고칠 수 없었어. 이건 인간의 병이 아니니까!”
남자는 손에 든 무화과 바구니를 떨어트렸다. 온 사방에 무화과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남자는 급히 칼뤼프소의 앞으로 달려와서 따졌다.
“칼뤼프소, 정말 이러긴가요? 아까는 말해 주지 않았으면서!”
굴러가던 무화과 하나가 칼뤼프소의 발치에서 멈췄다. 무화과를 집어 든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천박한 웃음과 달리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칼뤼프소는 점괘를 말하던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남자가 멍청하게 무례를 저질렀을 뿐.
“내 점은 늘 옳단다. 그리고 신뢰를 저버린 존재는 칼리드, 너지. 네 뜻대로 다신 만나는 일 없을 테니 잘 가도록 해. 네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래, 내 오래된 옛 친우여. 정말 그리울 거란다. 오, 벌써 눈물이 나려 하네.”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칼뤼프소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쳤다. 순식간에 남자, 칼리드를 집 밖으로 내쫓은 그녀는 먹음직스러운 무화과를 베어 물었다. 칼뤼프소의 입 안에서 뱀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칼뤼프소를 향해 다급해진 칼리드가 애걸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얻을 수 있다는 건가요? 그것만 대답해 줘요, 칼뤼프소! 제발, 우리의 지난 우정을 생각해서라도.”
애걸복걸하는 칼리드를 보고 칼뤼프소가 코웃음 쳤다.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난 점괘였다. 그러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화과들이 제 소유가 될 것을 생각해 칼뤼프소는 딱 한마디만큼의 자비를 베풀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무화과 천 바구니를 가져와도 알려 줄 수 없단다, 칼리드. 기회는 스스로 잡아야지. 꿈 속에서 직접!”
칼리드가 다시 질문하려는 순간 희뿌연 연기와 함께 낡은 집과 칼뤼프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무화과 바구니가 담긴 수레 앞에 허망하게 서서 바라만 보았다. 공터만 남은 곳을 바라보며 칼리드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칼리드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원하던 점괘 대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화과만 잔뜩 남았다. 바구니에 가득 든 수백 개의 무화과라니!
심지어 한 바구니는 통째로 떨어트리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가서 칼뤼프소의 소유가 되었다. 열 바구니나 샀는데 점괘도 얻지 못하고, 점쟁이 칼뤼프소에게 절연이나 당하고, 무화과 한 바구니마저 통째로 잃고 말았으니 어마어마한 손해였다. 너무 큰 손해라서 금액으로 환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아르마하덴에 다시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
다소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최소한 하나는 알아냈다. 지금껏 간절히 원해 온 것이 아르마하덴에 있다는 사실.
‘심지어 가지고 있던 재물도 다 처분했고.’
칼뤼프소도 떠났고, 심지어 이곳에 오기 전 제 아늑한 둥지도 헐값에 처분해 버렸다. 기반이 전무하니 사업을 다시 시작하기엔 무리였다. 어차피 이리 되었으니 아르마하덴에 새 둥지를 틀고 오래도록 찾아다닌 그것을 얻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 먼저였다. 바닥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운 칼리드는 천천히 수레를 끌며 빈민가에서 벗어났다.
칼리드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임시로 묵는 여관에 무화과 바구니가 든 수레를 질질 끌며 도착했다. 피로에 지친 그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종업원에게 수레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더러운 앞치마에 손을 닦아 낸 종업원은 수레 위에 가득 든 무화과와 칼리드를 번갈아 보더니 묵묵히 수레를 끌고 가 손님들의 짐을 보관하는 창고에 두었다. 농담 따위를 던질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칼리드는 수레가 창고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실히 보고 나서야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을 지나 계단을 한 칸씩 천천히 올라가자 그가 묵을 방이 보였다. 갑작스레 맡은 수레 때문에 종업원이 열쇠를 주는 것을 깜빡한 듯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굳이 다시 부를 필요도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열쇠는 이미 칼리드의 손 안에 존재했다.
열쇠로 문을 딴 칼리드는 딱딱한 침대 위에 피로에 지친 몸을 던졌다. 예전이었더라면 이런 형편없는 하급 여관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텐데. 마음에 차지 않아도 당장은 이런 저급한 여관이라도 만족해야만 했다.
침대 위에 뻗어 있던 그는 간신히 기운을 내 벌떡 일어났다. 그런 뒤, 짐 꾸러미 속에서 깃펜과 양피지를 꺼내 급히 편지를 썼다.
역시 정보 습득이 먼저였다. 칼리드는 오랫동안 이 대륙을 떠나 있었기에 아는 정보가 없었다. 병에 걸렸다는 황제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해 알아보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칼리드가 유일하게 아는 정보상이 마침 아르마하덴 제도에 살고 있으니 금방 양질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보수는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내주어야겠지만 얼마가 들든 간에 정보가 우선이었다. 칼리드가 창밖으로 몸을 살짝 내밀고 휘파람을 불자 지나가던 십자매가 세차게 날갯짓하며 날아왔다. 그는 십자매의 다리에 편지를 단단히 묶어서 다시 날려 보냈다.
‘하루빨리 정보상이 찾아와야 할 텐데.’
수레를 끄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지친 칼리드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곤히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