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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음 날, 편지를 읽은 정보상이 발 빠르게 여관으로 찾아왔다. 정보상은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대신 더러운 앞치마를 입은 종업원을 통하여 칼리드를 식당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했다. 아직 잠결이라 멍한 칼리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둘러쓰고 있던 천을 걷으며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내 금고가 빈 걸 용케도 알았네.”
칼리드는 눈을 비비며 오늘따라 더 해맑아 보이는 정보상에게 투덜댔다.
“당신과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가 없습니다.”
도대체가 아르마하덴의 사람들은 절 놀려 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녀는 칼리드가 권한 자리에 앉더니,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여러 개와 산뜻한 차 두 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먼저 내온 재스민 차를 마시며 정보상은 칼리드의 정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킬킬댔다.
“언니에게 된통 당했다면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꼭 제 언니를 닮은 듯한 웃음이었다. 칼리드는 노골적으로 드러날 뻔한 불쾌함을 감추며 경고하는 어투로 정보상의 이름을 불렀다.
“페이토.”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이지 고리타분하다니까! 언니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네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줘. 그런 언니를 둔 내 심정은 얼마나 비통하겠어? 물론 우리 자매는 서로를 몹시 아끼지만 말이야.”
다시 한번 칼리드는 경고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페이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페이토가 픽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았어. 얻고 싶은 정보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
페이토의 불량한 언행에도 그녀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뛰어난 점쟁이 칼뤼프소에겐 총 다섯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들은 각각 직업이 달랐는데 첫째 여동생인 페이토는 정보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페이토만큼 정보를 보유한 정보상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종업원은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내왔고, 페이토는 몹시 시장했는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페이토가 후추로 간을 해서 구운 뒤 싱싱한 레몬즙을 뿌린 닭고기를 입 안에 가득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는 동안 칼리드는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페이토, 당신도 알듯이 나는 이 대륙을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최근 소식 같은 건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알고 싶은 정보는 아르마하덴의 현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 살아 있는 신이라고까지 칭해지는 황제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등 여하튼 황제에 대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알고 싶습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요. 페이토, 당신의 위상에 걸맞는 정보를 주세요.”
“다 알고 싶다고? 그럼 꽤 보수가 높겠는걸. 여긴 듣는 귀가 대략 백 개쯤 되니 네가 묵는 방으로 올라가서 차근차근 이야길 나눠 보자.”
순식간에 음식을 다 먹어 치워 짐승이 핥은 듯 접시를 윤이 나도록 비워 낸 페이토를 본 칼리드는 제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가 입가를 닦는 것을 보며 음식값을 계산한 뒤 앞서 걷는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페이토는 언급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묵는 방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것은 곧 페이토가 아직도 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상이라는 증명이었기에 칼리드는 몰래 속으로 안도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페이토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후식용 주전부리를 꺼내 먹었다. 그 주전부리는 다름 아닌 말린 무화과였는데, 역시나 칼뤼프소의 여동생다운 기호였다. 질색하는 칼리드를 보며 말린 무화과를 연신 우물거리던 페이토가 짧은 질문을 던졌다.
“대제 이브라힘은 알고 있어?”
정보를 제공하기 전에 어디서부터 설명해 줘야 할지 범위를 정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푸른 두 눈동자를 굴리던 칼리드는 곧 케케묵은 기억 속에서 ‘대제 이브라힘’을 떠올렸다. 신께서 찬란한 승리의 빛을 내리셨다는 그 대제 이브라힘.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대제 이브라힘이 음모에 휘말려 태어나지 못했더라면 이 아르마하덴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이런 격언도 있으니까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페이토가 손뼉을 부딪치며 웃었다.
“그럼 이야기가 한결 쉬워지겠네.”
“찬란한 제국 아르마하덴의 신민들은 현황제를 전쟁과 승리의 신이라 칭송하지. 부와 재물을 관장하기도 하고. 그가 제위에 오른 몇 년 전부터 아르마하덴의 신전엔 신앙심 깊은 신도들이 사라졌어. 남은 건 그들의 신이 오래전에 쇠락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늙고 케케묵은 신관들뿐이지.”
살아 있는 신과 같다던, 병에 걸려 석 달이 넘도록 악몽을 꾸는 황제 이브라힘의 혈통을 따져 보자면 오래전 건국이란 업적을 이루어 낸 대제 이브라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대제 이브라힘에겐 정부인인 황후와 율법에 따라 들인 네 명의 비가 있었다. 대제 이브라힘의 사후, 열 명이 넘는 아들은 제위에 오르려고 이복, 동복형제 가릴 것 없이 서로를 죽고 죽이며 내전을 계속해 왔고, 그사이 이교도의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교도의 침범은 점점 넓어졌으며 자연히 넓디넓은 영토도 이교도에 의해 많이 축소되었다.
승자가 된 이가 패주를 남김없이 죽인 탓에 도리어 그의 피가 많이 흐려졌다. 실제로 몇 안 되게 그의 피가 짙은 자가 그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현 황제 이브라힘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아미타 황후는 그를 낳은 후 산욕열로 죽었고, 피가 귀해진 황제는 고심 끝에 아끼던 여인을 차비로 들여 둘째 아들을 낳았다.
십수 년간 황궁에서는 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차비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황태자 사이에서 수면 아래 조용한 암투가 이어졌다.
이교도가 영토를 침범해 오자 차비는 간교한 술수를 부렸다. 대제 이브라힘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을 빌미로 황태자를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주장했다. 판단력이 흐려진 황제는 차비의 속살거림에 넘어가 그의 출정을 명했으며 성전의 승리를 위해 황태자는 오랜 시간 전장을 전전했다.
“차비는 전장에 보급되어야 하는 물품과 지원 병력을 빼돌리면서 은밀하게 그를 죽이고자 했지.”
그녀를 비웃듯 이브라힘은 매번 죽음을 피해 갔다. 아르마하덴의 신민들이 이브라힘을 전쟁과 승리의 신이라 부르게 된 것은 그가 매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간 제국이 이교도에게 뺏겼던 영토와 신민을 모조리 되찾았다. 또한 그들을 속국으로 삼았다.
영토 수복 끝에 승리의 깃발과 지휘봉을 휘두르며 제도에 입성한 황태자를 길거리에 늘어선 제국의 신민들이 환호성과 박수로 환대했다. 목적지인 황궁으로 가는 황태자의 머리 위로 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날, 차비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며칠 후, 차비의 아들이자 이브라힘의 배다른 아우인 황자 카림이 죽었다. 사인은 병사였다. 차비는 치욕을 무릅쓰고 이브라힘에게 굴복했다. 모든 패를 잃은 그녀였지만 적어도 태후라는 지위 정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브라힘은 기꺼이 차비를 용서했다. 황제의 측근들은 주군께서 너무 너그럽다고 불평하며 즉위식을 준비했다. 즉위식 전, 황자 카림의 장례식은 초라할 정도로 조촐하게 끝났다. 차비는 단 하루만 검은 상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다음 날은 이브라힘의 즉위식이었다.
이브라힘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로 아르마하덴에서는 신의 전능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반복되었다. 아름다운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오랜 가뭄으로 초목이 말라 가던 남부에 세찬 비가 내려 비옥함을 되찾았다. 그 해는 유독 풍년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브라힘을 신의 계시자라 여기며 경배했다. 마침내는 그를 살아 있는 신이라 여기어 신전을 찾는 대신 황제의 초상화를 벽마다 걸어 두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초상화를 벽에 걸지 못하는 가난한 신민의 집에서는 매일 이브라힘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매만지며 소원을 읊조렸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사람들, 그리고 부자가 된 사람들, 황제에게 빌어 소원을 이뤘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자 반신반의하던 이들까지 황제의 초상화를 벽에 걸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신관들은 고요한 신전과 텅 비어 버린 창고를 떠올리며 절망했다.
여기까지 설명한 페이토가 갈증이 났는지 급하게 목을 축였다.
“내 금고가 다시 꽉 차겠어.”
페이토가 씩 웃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페이토.”
칼리드는 한껏 정색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벌써 주머니가 텅 빈 기분이었다.
“재미없기는.”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남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 이브라힘에게 흠이 하나 있다면, 그다지 결혼하고 싶은 의지가 없었단 거지.”
제위에 오른다는 생의 유일한 목표를 이룬 이브라힘은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는 정무를 보며 무료한 일과를 보냈다. 게다가 차비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간 아버지에게서 얻은 교훈으로 인하여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다. 소꿉친구이자 전우인 재상 무함마드가 여러 아름다운 공주들의 초상화, 심지어 바다 건너 사는 공주의 초상화까지 구해 와서 보여 주었으나 이브라힘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브라힘은 딱 한마디만 했다.
“그리 아름다운 여인들이라면 자네가 결혼하지 그러나.”
무함마드로서는 기가 차서 펄쩍 뛸 일이었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왕국에서 온 사신들도 소득 없이 빈 몸으로 돌아갔다. 결혼이라는 관습에 얽매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던 이브라힘은 어느 날 변복하고 나간 시장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낡은 고서를 팔던 이교도로 추정되는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다음 날, 편지를 읽은 정보상이 발 빠르게 여관으로 찾아왔다. 정보상은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대신 더러운 앞치마를 입은 종업원을 통하여 칼리드를 식당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했다. 아직 잠결이라 멍한 칼리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둘러쓰고 있던 천을 걷으며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내 금고가 빈 걸 용케도 알았네.”
칼리드는 눈을 비비며 오늘따라 더 해맑아 보이는 정보상에게 투덜댔다.
“당신과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가 없습니다.”
도대체가 아르마하덴의 사람들은 절 놀려 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녀는 칼리드가 권한 자리에 앉더니,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여러 개와 산뜻한 차 두 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먼저 내온 재스민 차를 마시며 정보상은 칼리드의 정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킬킬댔다.
“언니에게 된통 당했다면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꼭 제 언니를 닮은 듯한 웃음이었다. 칼리드는 노골적으로 드러날 뻔한 불쾌함을 감추며 경고하는 어투로 정보상의 이름을 불렀다.
“페이토.”
“알았어, 알았다고. 정말이지 고리타분하다니까! 언니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 네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줘. 그런 언니를 둔 내 심정은 얼마나 비통하겠어? 물론 우리 자매는 서로를 몹시 아끼지만 말이야.”
다시 한번 칼리드는 경고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페이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페이토가 픽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았어. 얻고 싶은 정보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
페이토의 불량한 언행에도 그녀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뛰어난 점쟁이 칼뤼프소에겐 총 다섯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들은 각각 직업이 달랐는데 첫째 여동생인 페이토는 정보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페이토만큼 정보를 보유한 정보상을 찾긴 어려울 것이다.
종업원은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내왔고, 페이토는 몹시 시장했는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페이토가 후추로 간을 해서 구운 뒤 싱싱한 레몬즙을 뿌린 닭고기를 입 안에 가득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는 동안 칼리드는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도록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페이토, 당신도 알듯이 나는 이 대륙을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최근 소식 같은 건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알고 싶은 정보는 아르마하덴의 현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 살아 있는 신이라고까지 칭해지는 황제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등 여하튼 황제에 대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알고 싶습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요. 페이토, 당신의 위상에 걸맞는 정보를 주세요.”
“다 알고 싶다고? 그럼 꽤 보수가 높겠는걸. 여긴 듣는 귀가 대략 백 개쯤 되니 네가 묵는 방으로 올라가서 차근차근 이야길 나눠 보자.”
순식간에 음식을 다 먹어 치워 짐승이 핥은 듯 접시를 윤이 나도록 비워 낸 페이토를 본 칼리드는 제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가 입가를 닦는 것을 보며 음식값을 계산한 뒤 앞서 걷는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페이토는 언급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묵는 방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것은 곧 페이토가 아직도 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상이라는 증명이었기에 칼리드는 몰래 속으로 안도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페이토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후식용 주전부리를 꺼내 먹었다. 그 주전부리는 다름 아닌 말린 무화과였는데, 역시나 칼뤼프소의 여동생다운 기호였다. 질색하는 칼리드를 보며 말린 무화과를 연신 우물거리던 페이토가 짧은 질문을 던졌다.
“대제 이브라힘은 알고 있어?”
정보를 제공하기 전에 어디서부터 설명해 줘야 할지 범위를 정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푸른 두 눈동자를 굴리던 칼리드는 곧 케케묵은 기억 속에서 ‘대제 이브라힘’을 떠올렸다. 신께서 찬란한 승리의 빛을 내리셨다는 그 대제 이브라힘.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대제 이브라힘이 음모에 휘말려 태어나지 못했더라면 이 아르마하덴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이런 격언도 있으니까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페이토가 손뼉을 부딪치며 웃었다.
“그럼 이야기가 한결 쉬워지겠네.”
“찬란한 제국 아르마하덴의 신민들은 현황제를 전쟁과 승리의 신이라 칭송하지. 부와 재물을 관장하기도 하고. 그가 제위에 오른 몇 년 전부터 아르마하덴의 신전엔 신앙심 깊은 신도들이 사라졌어. 남은 건 그들의 신이 오래전에 쇠락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늙고 케케묵은 신관들뿐이지.”
살아 있는 신과 같다던, 병에 걸려 석 달이 넘도록 악몽을 꾸는 황제 이브라힘의 혈통을 따져 보자면 오래전 건국이란 업적을 이루어 낸 대제 이브라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대제 이브라힘에겐 정부인인 황후와 율법에 따라 들인 네 명의 비가 있었다. 대제 이브라힘의 사후, 열 명이 넘는 아들은 제위에 오르려고 이복, 동복형제 가릴 것 없이 서로를 죽고 죽이며 내전을 계속해 왔고, 그사이 이교도의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교도의 침범은 점점 넓어졌으며 자연히 넓디넓은 영토도 이교도에 의해 많이 축소되었다.
승자가 된 이가 패주를 남김없이 죽인 탓에 도리어 그의 피가 많이 흐려졌다. 실제로 몇 안 되게 그의 피가 짙은 자가 그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현 황제 이브라힘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아미타 황후는 그를 낳은 후 산욕열로 죽었고, 피가 귀해진 황제는 고심 끝에 아끼던 여인을 차비로 들여 둘째 아들을 낳았다.
십수 년간 황궁에서는 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차비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황태자 사이에서 수면 아래 조용한 암투가 이어졌다.
이교도가 영토를 침범해 오자 차비는 간교한 술수를 부렸다. 대제 이브라힘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을 빌미로 황태자를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주장했다. 판단력이 흐려진 황제는 차비의 속살거림에 넘어가 그의 출정을 명했으며 성전의 승리를 위해 황태자는 오랜 시간 전장을 전전했다.
“차비는 전장에 보급되어야 하는 물품과 지원 병력을 빼돌리면서 은밀하게 그를 죽이고자 했지.”
그녀를 비웃듯 이브라힘은 매번 죽음을 피해 갔다. 아르마하덴의 신민들이 이브라힘을 전쟁과 승리의 신이라 부르게 된 것은 그가 매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간 제국이 이교도에게 뺏겼던 영토와 신민을 모조리 되찾았다. 또한 그들을 속국으로 삼았다.
영토 수복 끝에 승리의 깃발과 지휘봉을 휘두르며 제도에 입성한 황태자를 길거리에 늘어선 제국의 신민들이 환호성과 박수로 환대했다. 목적지인 황궁으로 가는 황태자의 머리 위로 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날, 차비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며칠 후, 차비의 아들이자 이브라힘의 배다른 아우인 황자 카림이 죽었다. 사인은 병사였다. 차비는 치욕을 무릅쓰고 이브라힘에게 굴복했다. 모든 패를 잃은 그녀였지만 적어도 태후라는 지위 정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브라힘은 기꺼이 차비를 용서했다. 황제의 측근들은 주군께서 너무 너그럽다고 불평하며 즉위식을 준비했다. 즉위식 전, 황자 카림의 장례식은 초라할 정도로 조촐하게 끝났다. 차비는 단 하루만 검은 상복을 입을 수 있었다. 그다음 날은 이브라힘의 즉위식이었다.
이브라힘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로 아르마하덴에서는 신의 전능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반복되었다. 아름다운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오랜 가뭄으로 초목이 말라 가던 남부에 세찬 비가 내려 비옥함을 되찾았다. 그 해는 유독 풍년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브라힘을 신의 계시자라 여기며 경배했다. 마침내는 그를 살아 있는 신이라 여기어 신전을 찾는 대신 황제의 초상화를 벽마다 걸어 두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초상화를 벽에 걸지 못하는 가난한 신민의 집에서는 매일 이브라힘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매만지며 소원을 읊조렸다.
병이 씻은 듯이 나은 사람들, 그리고 부자가 된 사람들, 황제에게 빌어 소원을 이뤘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자 반신반의하던 이들까지 황제의 초상화를 벽에 걸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신관들은 고요한 신전과 텅 비어 버린 창고를 떠올리며 절망했다.
여기까지 설명한 페이토가 갈증이 났는지 급하게 목을 축였다.
“내 금고가 다시 꽉 차겠어.”
페이토가 씩 웃어 보였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페이토.”
칼리드는 한껏 정색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벌써 주머니가 텅 빈 기분이었다.
“재미없기는.”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남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 이브라힘에게 흠이 하나 있다면, 그다지 결혼하고 싶은 의지가 없었단 거지.”
제위에 오른다는 생의 유일한 목표를 이룬 이브라힘은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 그는 정무를 보며 무료한 일과를 보냈다. 게다가 차비의 간교한 술수에 넘어간 아버지에게서 얻은 교훈으로 인하여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다. 소꿉친구이자 전우인 재상 무함마드가 여러 아름다운 공주들의 초상화, 심지어 바다 건너 사는 공주의 초상화까지 구해 와서 보여 주었으나 이브라힘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브라힘은 딱 한마디만 했다.
“그리 아름다운 여인들이라면 자네가 결혼하지 그러나.”
무함마드로서는 기가 차서 펄쩍 뛸 일이었다.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왕국에서 온 사신들도 소득 없이 빈 몸으로 돌아갔다. 결혼이라는 관습에 얽매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던 이브라힘은 어느 날 변복하고 나간 시장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낡은 고서를 팔던 이교도로 추정되는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