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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퀸델 백작이 죽었다. 오랜 노환에 시달리다 자듯이 숨을 거뒀다. 그의 부고 소식이 왕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생전 인망이 두터웠던 인사답게 각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백작의 죽음을 애도했다.
해가 늦게 떴다가 아주 잠깐 머무는 시기였다. 장례식은 날 밝는 시간에 맞추어 느지막한 오전에 시작되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듯 하늘이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친지들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 쏟아졌다. 시린 겨울비였다.
검은 우산이 일제히 일어나 색다른 장관을 이루었다. 후다닥 몸을 빼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대개 얼굴 도장만 찍고 가려 했던 이들이었다.
작고한 부친의 뒤를 이어 새 가주가 된 펠린 퀸델은 그들을 위해 연회장을 개방했다. 백작가에서 그만한 인원을 수용 가능한 곳은 연회장이 유일한 탓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한겨울에 내리는 비를 잘못 맞으면 폐렴에 걸려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다 말고 연회장으로 뛰어가는 기현상이 펼쳐졌다. 그러면서도 하나 같이 한 지점을 힐끗거렸는데, 연회장으로 가는 방향에 서 있던 인물이 시선의 대상이었다.
그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고인의 직계가족들도 부리나케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마당에 미동 없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하지만 죄다 같은 사람을 힐끔댄 이유는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름답군.”
조각상 같던 인물을 지켜보던 군중 속 한 남자, 로어드 일라이저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읊조렸다. 근처에 있던 이들이 헛숨을 들이키며 시선을 돌렸다.
로어드는 수군거리는 군중을 헤치고 청년의 근처로 향했다. 지금은 혼자 동떨어져 있지만, 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백작의 가족들과 함께 서 있었다. 어두운 금발 머리통 가운데 홀로 다른 은발이 눈에 띄었다. 그를 발견한 자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백작이 늘그막에 아들을 낳았나?’
비밀스런 정체만큼이나 의문이 드는 생김새였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은사 같은 머리칼은 둘째 치고 신이 공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는 퀸델 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깨질 듯한 은회색 눈동자, 그림자처럼 옅은 음영이 들어간 눈동자는 퀸델 백작에게서 왔음이 분명했다. 흔히 알려진 퀸델가 자녀들 중에선 후계자인 펠린 퀸델만이 그와 비슷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어두운 회색이라 같이 놓고 보면 퍽 달랐지만 나머지는 그마저 없었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가 모호한 남자는 우수 어린 눈빛으로 장례식 내내 슬픔을 삼켰다. 적어도 그를 본 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고인은 가볍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만큼 시선을 끄는 미모였다. 도홧빛이 도는 뺨과 울기라도 했는지 붉은 기가 도는 눈 밑, 마찬가지로 빨간 입술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자극했다. 그것이 그저 얕은 감탄이든 깊은 갈증이든 어두운 음심이든.
그랬던 모습은 비에 흠뻑 젖어 또 다른 분위기를 입었다. 가느다란 은사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이목구비에 착 달라붙었다. 머리칼과 똑같은 은빛 속눈썹 위로 물방울이 고였다가 눈물처럼 떨어졌다.
요요하다 못해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이 빗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얼굴은 차라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면 믿을 법했다.
사내의 커다란 우산이 두 사람을 덮었다. 가까이서 보니 상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창백했다. 가련하고 애처로웠다.
로어드는 속으로만 헛웃음을 흘렸다. 살다 살다 누군가를 애처롭게 여기는 날이 오다니. 아무래도 저 지독한 외모에 홀린 모양이었다.
“백작가에 하인이 모자란 건 아닐 테고.”
“…….”
“이 난리를 목격했다면 부친이 한탄했을 걸세. 알다시피 그는 마음 약한 인사였으니 말이야. 자네처럼 우두커니 비를 맞는 자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지. 좋은 이였어.”
“…….”
일부러 관계를 특정 짓는 호칭을 갖고 왔건만 그는 미동이 없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로어드는 그것이 대답임을 알았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식은 몸 주변으로 냉기가 흘렀다. 질린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는 가슴팍에 겨우 닿는 상대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았다. 마력이 뭉치며 순식간에 물기를 가져갔다. 밀랍 인형처럼 굳었던 얼굴에 그제야 표정이 피어올랐다.
“어…….”
“간단한 마법이지. 처음 보나?”
“……감사합니다.”
“로어드, 로어드 일라이저. 백작의 친우였네. 그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려 주었지.”
“감사합니다, 일라이저 씨. 클라우드 퀸델입니다.”
“도움을 감사히 여긴다면 부디 로어드라 불러 주게. 그쪽을 좋아하거든.”
“예…….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로어드 씨.”
로어드가 놓아주자 클라우드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끼지 않는 손 역시 인간 같지 않게 새하얗고 가늘었다. 로어드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맞닿자 색감 차가 유달리 선명했다.
클라우드의 손은 단순히 차가운 것 이상으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겨울이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뱀 냄새가 풍겼다. 서펜트인가? 거기에 인간의 냄새가 섞인 것을 보면 수인의 피를 진하게 타고난 혼혈임이 분명했다. 아니면 혼혈에게서 수인의 냄새가 더 짙게 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토록 오묘했나. 로어드는 내심 납득했다. 사실 혼혈은 처음 봤기도 하고.
인간 사이로 스며든 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그는 여태 제대로 된 혼혈을 볼 기회가 마땅찮았다. 이종족 세계에서 워낙 이종교배를 죄악시하는 분위기라 혼혈은 개체수 자체가 적었고, 그럼에도 낳으면 누구도 못 찾게 숨겼다. 당연했다. 혼혈과 혼혈을 잉태한 자는 전 종족으로부터 멸시당했으니까.
물론 지나가면서 혼혈과 스쳤을 수도 있다. 허나, 그랬다면 인간 냄새가 강하거나 수인의 피가 너무 흐려 못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흐릿한 냄새를 일부러 쫓을 만큼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성미도 아니고 말이다.
만약 클라우드가 스쳐 지나갔다면…… 그냥 보냈을 리가 없지.
로어드는 하릴없이 인정했다. 심미안이 어지간히 높은 저조차 말문을 잃게 하는 외모였다. 성화에 등장하는 천사가 현신하면 얼추 비슷할 듯했다.
온통 새하얀 인간. 죄다 까만 자신과 대비된다. 수심 깊은 모습이 처연했다. 마법으로 물기를 거둬 주었건만 아직 젖어 있는 듯했다. 곧 울음을 터트릴 듯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괜스레 조마조마했다. 살짝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주며 울지 말라 토닥이고 싶었다. 핏기가 돌아온 입술은 유난히 붉어 음심을 자극했다.
로어드는 오랜만에 재밌는 것을, 흥미를 끄는 것을 찾은 기분이었다.
흔히 혼혈을 ‘마녀’라고 한다. 이종족 사이에선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종족을 모조리 멸망시킬 존재로 통한다. 그것은 이종족들이 예언서로 삼는 마더구즈에 실린 구절이었다.
월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을 지키고
화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을 현혹하며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의 등불이 되고
목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의 다리를 자르고
금요일에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도륙하여
토요일이 되자 온갖 혼란이 도래해
일요일에 인간이 모두를 버렸다.
월요일의 라이칸, 화요일의 웨어폭스, 수요일의 세이렌, 목요일의 서펜트, 그리고 금요일의 마녀.
태초의 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었다는 최초의 친구가 이종족이었다. 정확히는 마더구즈 속에 등장하는 종족들이다. 예언서에는 왜 마녀가 인간을 등에 업고 모두를 멸살시키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럼에도 순혈인 이종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마더구즈를 듣고 자라, 마녀는 멀리하며 비난해야 마땅할 존재라 배운다.
로어드도 마찬가지였다. 금요일에 태어난 마녀가 모두를 멸망시키리라. 그 구절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운 대로라면 그는 눈앞의 존재를 혐오해야 했다. 정체를 알자마자 목을 조르고 꺾어 버렸어야 했다. 주변에 깔린 이들이 순혈 이종족들이었다면 종족을 불문하고 로어드의 행동을 환호했을 터였다. 로어드는 깜박이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마녀는 보는 순간 역겨운 냄새가 날 거라고? 혐오스러워 닿기도 싫을 거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예언서에 나온 마녀와 눈앞의 마녀는 아예 다른 종족임에 틀림없었다.
마더구즈 따위, 먼지 냄새 나는 퀴퀴한 이야기일 뿐이다. 한편으로 마녀가 어떻게 인간을 구슬렸는지 납득했다.
“혹 마녀들이 죄다 이렇게 생겼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괜히 마음을 어지럽게 들쑤시는 존재가 마녀라면 저것들이 마음먹고 달려들었을 때 안 넘어갈 자신이 있을까. 1분도 못 버틸 것이다.
“저…… 로어드 씨?”
“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목소리에도 질감이 있다면 작고 보들보들한 감촉일 테다. 로어드는 클라우드의 얼굴에 어린 감정을 읽었다. 곤란하고, 난처한. 내가 뭘 했다고?
“왜?”
클라우드는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속눈썹이 길었다. 비가 아니라 눈이 왔다면 속눈썹 위에도 쌓였겠지. 그러다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고서야 로어드는 자신이 아직도 클라우드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손이었다. 한 팔로 안아도 품이 남아도는 체구만큼이나.
“몇 살이지?”
로어드는 문득 클라우드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너무 화려한 인상이라 그런가, 덜 여문 소년 같기도 하고 다 자란 청년 같기도 한 얼굴은 은근히 나이를 어림잡기 힘들었다.
“얼마 전에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그렇군. 늦었지만 축하하네.”
무례한 질문에도 클라우드는 안색을 흐리지 않았다. 그 점이 흡족해 로어드는 신사적으로 손을 한번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뺨을 슬쩍 훔치곤 씩 웃었다.
“묻어 가지고, 빗방울이.”
“아…….”
물론 물방울 따윈 없는 수작질이다. 클라우드가 조그맣게 ‘감사합니다’ 하고 속삭였다. 되도 않는 수작질을 정말 믿는 거다. 로어드는 충동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로, 로어드 씨.”
“백작과 절친하게 지냈는데도 수인 아들이 있는 줄 몰랐군. 의지할 곳이 필요하면 연락하게. 내 그쯤은 해 줄 수 있지.”
낮게 속삭인 말에 가느다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목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숨만 쉬는 새처럼 숨소리도 가냘팠다.
“몸이 차군. 어서 들어가도록 해.”
로어드는 너무 지체하지 않고 클라우드를 놓아주었다. 관자놀이에 입술을 붙인 건 장난 반, 충동 반이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이 야기한 표정을 새겨 주고 싶은 충동.
“그럼 또 보지.”
멍하니 서 있는 클라우드를 뒤로한 채 로어드는 가까이 다가갔을 때처럼 갑작스레 멀어졌다. 우산을 쥐어 주어서 빗속에 고스란히 드러났으나 빗줄기는 자연스레 그를 피해 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뒤돌아선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로어드는 백작의 관이 있을 위치를 가늠하며 말했다.
“초상화 값은 저걸로 받겠네, 친구. 잘 가시게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의 눈이었다.
퀸델 백작이 죽었다. 오랜 노환에 시달리다 자듯이 숨을 거뒀다. 그의 부고 소식이 왕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생전 인망이 두터웠던 인사답게 각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백작의 죽음을 애도했다.
해가 늦게 떴다가 아주 잠깐 머무는 시기였다. 장례식은 날 밝는 시간에 맞추어 느지막한 오전에 시작되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듯 하늘이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친지들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 쏟아졌다. 시린 겨울비였다.
검은 우산이 일제히 일어나 색다른 장관을 이루었다. 후다닥 몸을 빼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대개 얼굴 도장만 찍고 가려 했던 이들이었다.
작고한 부친의 뒤를 이어 새 가주가 된 펠린 퀸델은 그들을 위해 연회장을 개방했다. 백작가에서 그만한 인원을 수용 가능한 곳은 연회장이 유일한 탓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한겨울에 내리는 비를 잘못 맞으면 폐렴에 걸려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다 말고 연회장으로 뛰어가는 기현상이 펼쳐졌다. 그러면서도 하나 같이 한 지점을 힐끗거렸는데, 연회장으로 가는 방향에 서 있던 인물이 시선의 대상이었다.
그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고인의 직계가족들도 부리나케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마당에 미동 없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하지만 죄다 같은 사람을 힐끔댄 이유는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름답군.”
조각상 같던 인물을 지켜보던 군중 속 한 남자, 로어드 일라이저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읊조렸다. 근처에 있던 이들이 헛숨을 들이키며 시선을 돌렸다.
로어드는 수군거리는 군중을 헤치고 청년의 근처로 향했다. 지금은 혼자 동떨어져 있지만, 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백작의 가족들과 함께 서 있었다. 어두운 금발 머리통 가운데 홀로 다른 은발이 눈에 띄었다. 그를 발견한 자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백작이 늘그막에 아들을 낳았나?’
비밀스런 정체만큼이나 의문이 드는 생김새였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은사 같은 머리칼은 둘째 치고 신이 공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는 퀸델 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깨질 듯한 은회색 눈동자, 그림자처럼 옅은 음영이 들어간 눈동자는 퀸델 백작에게서 왔음이 분명했다. 흔히 알려진 퀸델가 자녀들 중에선 후계자인 펠린 퀸델만이 그와 비슷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어두운 회색이라 같이 놓고 보면 퍽 달랐지만 나머지는 그마저 없었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가 모호한 남자는 우수 어린 눈빛으로 장례식 내내 슬픔을 삼켰다. 적어도 그를 본 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고인은 가볍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만큼 시선을 끄는 미모였다. 도홧빛이 도는 뺨과 울기라도 했는지 붉은 기가 도는 눈 밑, 마찬가지로 빨간 입술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자극했다. 그것이 그저 얕은 감탄이든 깊은 갈증이든 어두운 음심이든.
그랬던 모습은 비에 흠뻑 젖어 또 다른 분위기를 입었다. 가느다란 은사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이목구비에 착 달라붙었다. 머리칼과 똑같은 은빛 속눈썹 위로 물방울이 고였다가 눈물처럼 떨어졌다.
요요하다 못해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이 빗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얼굴은 차라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면 믿을 법했다.
사내의 커다란 우산이 두 사람을 덮었다. 가까이서 보니 상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창백했다. 가련하고 애처로웠다.
로어드는 속으로만 헛웃음을 흘렸다. 살다 살다 누군가를 애처롭게 여기는 날이 오다니. 아무래도 저 지독한 외모에 홀린 모양이었다.
“백작가에 하인이 모자란 건 아닐 테고.”
“…….”
“이 난리를 목격했다면 부친이 한탄했을 걸세. 알다시피 그는 마음 약한 인사였으니 말이야. 자네처럼 우두커니 비를 맞는 자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지. 좋은 이였어.”
“…….”
일부러 관계를 특정 짓는 호칭을 갖고 왔건만 그는 미동이 없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로어드는 그것이 대답임을 알았다.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식은 몸 주변으로 냉기가 흘렀다. 질린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는 가슴팍에 겨우 닿는 상대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았다. 마력이 뭉치며 순식간에 물기를 가져갔다. 밀랍 인형처럼 굳었던 얼굴에 그제야 표정이 피어올랐다.
“어…….”
“간단한 마법이지. 처음 보나?”
“……감사합니다.”
“로어드, 로어드 일라이저. 백작의 친우였네. 그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려 주었지.”
“감사합니다, 일라이저 씨. 클라우드 퀸델입니다.”
“도움을 감사히 여긴다면 부디 로어드라 불러 주게. 그쪽을 좋아하거든.”
“예…….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로어드 씨.”
로어드가 놓아주자 클라우드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끼지 않는 손 역시 인간 같지 않게 새하얗고 가늘었다. 로어드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맞닿자 색감 차가 유달리 선명했다.
클라우드의 손은 단순히 차가운 것 이상으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겨울이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뱀 냄새가 풍겼다. 서펜트인가? 거기에 인간의 냄새가 섞인 것을 보면 수인의 피를 진하게 타고난 혼혈임이 분명했다. 아니면 혼혈에게서 수인의 냄새가 더 짙게 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토록 오묘했나. 로어드는 내심 납득했다. 사실 혼혈은 처음 봤기도 하고.
인간 사이로 스며든 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그는 여태 제대로 된 혼혈을 볼 기회가 마땅찮았다. 이종족 세계에서 워낙 이종교배를 죄악시하는 분위기라 혼혈은 개체수 자체가 적었고, 그럼에도 낳으면 누구도 못 찾게 숨겼다. 당연했다. 혼혈과 혼혈을 잉태한 자는 전 종족으로부터 멸시당했으니까.
물론 지나가면서 혼혈과 스쳤을 수도 있다. 허나, 그랬다면 인간 냄새가 강하거나 수인의 피가 너무 흐려 못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흐릿한 냄새를 일부러 쫓을 만큼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성미도 아니고 말이다.
만약 클라우드가 스쳐 지나갔다면…… 그냥 보냈을 리가 없지.
로어드는 하릴없이 인정했다. 심미안이 어지간히 높은 저조차 말문을 잃게 하는 외모였다. 성화에 등장하는 천사가 현신하면 얼추 비슷할 듯했다.
온통 새하얀 인간. 죄다 까만 자신과 대비된다. 수심 깊은 모습이 처연했다. 마법으로 물기를 거둬 주었건만 아직 젖어 있는 듯했다. 곧 울음을 터트릴 듯 눈동자가 반질반질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괜스레 조마조마했다. 살짝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주며 울지 말라 토닥이고 싶었다. 핏기가 돌아온 입술은 유난히 붉어 음심을 자극했다.
로어드는 오랜만에 재밌는 것을, 흥미를 끄는 것을 찾은 기분이었다.
흔히 혼혈을 ‘마녀’라고 한다. 이종족 사이에선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종족을 모조리 멸망시킬 존재로 통한다. 그것은 이종족들이 예언서로 삼는 마더구즈에 실린 구절이었다.
월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을 지키고
화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을 현혹하며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의 등불이 되고
목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의 다리를 자르고
금요일에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도륙하여
토요일이 되자 온갖 혼란이 도래해
일요일에 인간이 모두를 버렸다.
월요일의 라이칸, 화요일의 웨어폭스, 수요일의 세이렌, 목요일의 서펜트, 그리고 금요일의 마녀.
태초의 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었다는 최초의 친구가 이종족이었다. 정확히는 마더구즈 속에 등장하는 종족들이다. 예언서에는 왜 마녀가 인간을 등에 업고 모두를 멸살시키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럼에도 순혈인 이종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마더구즈를 듣고 자라, 마녀는 멀리하며 비난해야 마땅할 존재라 배운다.
로어드도 마찬가지였다. 금요일에 태어난 마녀가 모두를 멸망시키리라. 그 구절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운 대로라면 그는 눈앞의 존재를 혐오해야 했다. 정체를 알자마자 목을 조르고 꺾어 버렸어야 했다. 주변에 깔린 이들이 순혈 이종족들이었다면 종족을 불문하고 로어드의 행동을 환호했을 터였다. 로어드는 깜박이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마녀는 보는 순간 역겨운 냄새가 날 거라고? 혐오스러워 닿기도 싫을 거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예언서에 나온 마녀와 눈앞의 마녀는 아예 다른 종족임에 틀림없었다.
마더구즈 따위, 먼지 냄새 나는 퀴퀴한 이야기일 뿐이다. 한편으로 마녀가 어떻게 인간을 구슬렸는지 납득했다.
“혹 마녀들이 죄다 이렇게 생겼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괜히 마음을 어지럽게 들쑤시는 존재가 마녀라면 저것들이 마음먹고 달려들었을 때 안 넘어갈 자신이 있을까. 1분도 못 버틸 것이다.
“저…… 로어드 씨?”
“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목소리에도 질감이 있다면 작고 보들보들한 감촉일 테다. 로어드는 클라우드의 얼굴에 어린 감정을 읽었다. 곤란하고, 난처한. 내가 뭘 했다고?
“왜?”
클라우드는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속눈썹이 길었다. 비가 아니라 눈이 왔다면 속눈썹 위에도 쌓였겠지. 그러다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고서야 로어드는 자신이 아직도 클라우드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손이었다. 한 팔로 안아도 품이 남아도는 체구만큼이나.
“몇 살이지?”
로어드는 문득 클라우드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너무 화려한 인상이라 그런가, 덜 여문 소년 같기도 하고 다 자란 청년 같기도 한 얼굴은 은근히 나이를 어림잡기 힘들었다.
“얼마 전에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그렇군. 늦었지만 축하하네.”
무례한 질문에도 클라우드는 안색을 흐리지 않았다. 그 점이 흡족해 로어드는 신사적으로 손을 한번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뺨을 슬쩍 훔치곤 씩 웃었다.
“묻어 가지고, 빗방울이.”
“아…….”
물론 물방울 따윈 없는 수작질이다. 클라우드가 조그맣게 ‘감사합니다’ 하고 속삭였다. 되도 않는 수작질을 정말 믿는 거다. 로어드는 충동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로, 로어드 씨.”
“백작과 절친하게 지냈는데도 수인 아들이 있는 줄 몰랐군. 의지할 곳이 필요하면 연락하게. 내 그쯤은 해 줄 수 있지.”
낮게 속삭인 말에 가느다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목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숨만 쉬는 새처럼 숨소리도 가냘팠다.
“몸이 차군. 어서 들어가도록 해.”
로어드는 너무 지체하지 않고 클라우드를 놓아주었다. 관자놀이에 입술을 붙인 건 장난 반, 충동 반이었다. 저 아름다운 얼굴에 자신이 야기한 표정을 새겨 주고 싶은 충동.
“그럼 또 보지.”
멍하니 서 있는 클라우드를 뒤로한 채 로어드는 가까이 다가갔을 때처럼 갑작스레 멀어졌다. 우산을 쥐어 주어서 빗속에 고스란히 드러났으나 빗줄기는 자연스레 그를 피해 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뒤돌아선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로어드는 백작의 관이 있을 위치를 가늠하며 말했다.
“초상화 값은 저걸로 받겠네, 친구. 잘 가시게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의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