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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안 (1)





장례식이 끝난 보름 후, 클라우드는 퀸델 본가에서 연락을 받았다. 펠린 퀸델로부터 온 호출이었다. 그에게서 받은 연락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 때, 두 번째는 장례식 때, 그리고 지금.

피가 일부 섞였지만 클라우드는 여전히 이복형제가 서먹했다. 실제로 남과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조차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그 점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클라우드는 일찌감치 쌍둥이 형제 외엔 부모도 형제도 없는 셈 쳤다.

무슨 일일까.

하필 기묘한 꿈을 꾼 날이었다. 꿈 자체는 아버지의 장례식 직전부터 꾸었다. 커다란 개가 멀리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꿈이었다. 아니 사실 개인지도 잘 모르겠다. 개의 형상이었으나 마냥 개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커서 늑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온통 까만 털과 짐승의 새파란 눈이었다. 자신이 어디로 도망쳐도 따라붙는 눈. 짐승이 딱히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닌데 집요한 시선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서재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지체 없는 허락이 떨어졌다. 클라우드는 가로로 긴 문고리를 꺾었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그는 쓸데없이 친근한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펠린이 소파를 턱짓했다.

“거기 앉아.”

펠린은 창백한 안색이었다. 피로가 가시지 않는지 주름진 미간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클라우드는 새삼 큰 형님과의 나이 차를 실감했다. 첫째 형님은 저와 몇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자녀를 둔 중년이었다.

“잠깐 기다리렴. 이것만 보고 얘기하자.”

“예.”

“그래. 아, 차라도 마시겠니?”

백작 근처에 시립하고 있던 하인이 조용히 다가왔다.

“평소 어떤 차를 즐겨 드시는지요?”

“……향이 옅은 차로 부탁합니다.”

차는커녕 물도 가려 마셔야 하는 처지였으나 클라우드는 선뜻 대답했다. 누가 그리 물어 준 게 처음이라 기뻤다. 하인이 눈을 맞추며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백작이 어린 동생을 흘끗거렸다. 클라우드는 그 시선을 못 느낀 척 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저택으로 오는 사이 차갑게 굳어 딱딱했다. 동지가 가까워질수록 체온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솔직히 밝히면, 당장 훈김이 도는 서재도 클라우드에겐 다소 추웠다. 벽난로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 마법석으로 대체한 지 오래인 듯했다. 온도 조절이 용이한 마법석은 벽난로보다 효율적이었다. 대신 무척 고가였는데, 퀸델 가문은 초대 시절부터 영지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어 마법석을 수억 개쯤 사도 몇 대가 놀고먹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 가문의 혈족으로 인정받아 장례식까지 참석했다. 누군가는 으쓱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클라우드는 그러나 어떤 것도 요구할 마음이 없었다. 다들 제집이라고 하는데 남의 집처럼 낯설기만 했다.

백작이 물었다.

“취향이 독특하구나.”

아무렴 차에 술을 타 먹는 취향보다 독특하려고. 그저 말을 붙이기 위함임을 모르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낯선 형님의 호의에 보답하려 노력했다.

“실은…… 차를 즐기는 편이 아닙니다. 향이 잘 옮아 붙어서요.”

“저런.”

평범한 인간이라면 차 한 잔 마셨다고 향이 옮거나 하진 않을 터다. 그러나 클라우드는 어릴 때부터 평범하지 않다는 걸 나타내기라도 하듯 향이 잘 묻었다. 거의 빨아들이는 수준이었다. 동생인 클리프는 그 향을 맡고 클라우드가 어딜 다녀왔는지 쉬이 추측하곤 했다. 같은 맥락으로 어릴 적에 가장 힘들었던 놀이 역시 숨바꼭질이었다.

서류를 다 봤는지 백작이 몸을 일으켜 맞은편에 앉았다. 때마침 하인이 차를 가져왔다. 달콤한 향이 흘렀다. 종류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진했다. 백작은 저도 모르게 클라우드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쟤가 뭘 잘못 주워 먹었나. 오늘따라 심술궂은 하인의 행태에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클라우드는 그것을 발견하고서야 하인의 미소 뒤편에 놓인 악의를 읽었다.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뭘 했다고 싫어하는 걸까? 방금 처음 본 사이인지라 실수할 만한 겨를조차 없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펠린 앞에는 붉은 차가 놓였다. 남자가 백작을 향해 고개 숙인 뒤 물러갔다. 클라우드는 차에 입술만 적신 뒤 다시는 손대지 않았다.

“동생의 차 취향 하나 모르는 형이라니. 무심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군.”

“아닙니다, 백작님.”

이복형제의 취향에 무지한 건 클라우드도 같았다. 펠린은 거두절미하고 화제를 뒤집었다.

“혹시 로어드 일라이저라는 자를 아니?”

로어드……? 어디서 들어 봤더라.

묘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클라우드는 머지않아 특정 얼굴을 상기해 냈다. 부친의 장례식 때 봤던 남자.

사실대로 말했다.

“전 백작님의 친우라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우…… 그래, 그 말도 틀리진 않지.”

벌써 만난 건가. 작게 중얼거린 백작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머물렀다. 급기야 그가 눈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클라우드는 내심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주치면 곤란한 사람이었던가?

“비 맞고 있던 제게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인사했는데…… 실수였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다. 그런 뜻은 아니니 사과 안 해도 된단다.”

“그럼 왜…….”

펠린은 따뜻한 차로 가슴을 다독였다. 사실 이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그로서도 고민이 많았다. 클라우드가 전면에 드러났으니 다가오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건 예상한 일이었다. 로어드 일라이저, 그 자가 대놓고 요구해 올 줄 몰랐을 뿐이지. 이럴 줄 알았다면 억지라도 돈을 안겼어야 했다.

하여튼 그놈의 초상화가 문제다. 펠린은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꾹 눌렀다. 클라우드의 여린 눈동자에 근심이 끼어들었다.

“백작님?”

걱정으로 물든 눈이 펠린의 조바심을 자극했다. 그는 쫓기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횡설수설해도 이해해 주렴. 솔직히 나도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거든.”

“물론입니다.”

응수하는 얼굴이 비장하게 굳었다. 순진하고도 순수한 반응이었다. 단언컨대 제 열세 살 난 아들이 이보다 영악할 것이다. 그리 여기니 부담감은 한결 사라졌지만 걱정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로어드 일라이저를 안다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고맙다, 클라우드. 일라이저를 만났다니 말인데…… 그가 아버님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건 알고 있니?”

“네.”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네?”

쌍꺼풀이 짙게 진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펠린은 그 눈이 두려움으로 질릴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아는지 모르겠다만 아버님께는 인간이 아닌 지인들이 여럿 있었단다. 일라이저만이 아니라 네 어머니도 그랬지.”

갑작스레 튀어나온 어머니 얘기에 클라우드는 긴장했다. 백작이 눈매를 설핏 휘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로어드 일라이저는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자였어. 7, 8년쯤 되었겠구나. 계기는 초상화였을 거다. 당시 아버님은 화가를 찾고 계셨거든. 가문 회랑에 걸 초상화는 특별해야 한다면서 말이야.”

퀸델 일족이 살아 있고, 저택이 남아 있는 한 쭉 이어질 가문의 역사.

왕국 최고의 부호이자 개국공신이기도 한 퀸델 가의 가주들은 대대로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초상화는 그 자부심의 집약체였다. 가주만이 가지는 경쟁심이기도 했다. 요컨대 자신이 이끈 세대가 퀸델 가문 역사상 가장 온전하고 부유하며 막강했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었다. 전대 퀸델 백작은 생전 큰 욕심 없이 지냈는데 그런 인물마저도 초상화만큼은 공을 들였다.

“특별한 초상화…….”

“그래. 나도 죽을 때가 되면 초상화에 집착할는지 걱정이 되는구나. 그땐 좀 말려 주렴. 아무래도 퀸델이란 피가 문제인 거 같거든.”

“제게도…….”

그 피가 흐른다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백작이 어색하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일라이저의 그림은 확실히 특별했어. 그자를 처음 본 건 사교계였는데, 나타나자마자 단숨에 유명해졌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성화를 그리는 자야. 나도 본 적이 있어. 굉장했지. 과감한 선과 사실처럼 세밀한 색채감은 독보적이더군. 아버님께서 그자를 지목했을 때 모두가 만장일치였을 정도로.”

클라우드는 백작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단지 그자의 이야기를 왜 이리 장황하게 늘어놓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펠린이 피식 웃었다.

“됐으니 본론이나 꺼내라는 표정이군.”

“시, 실례했습니다.”

“아니다. 솔직한 표정을 보니 좋구나.”

주변엔 겉 다르고 속 다른 능구렁이들뿐이라 말이지. 속으로 읊조린 그는 좀 더 분명히 미소 지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초상화 값으로 그자가 널 요구했단다.”

“네?”

“뮤즈라던가. 널 꼭 그려 보고 싶다고 했어. 그러면 초상화 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 오해 말거라. 초상화 값은 전혀 문제없어. 그자가 간곡히 부탁하는 게 신기해서 말이다. 나는 그저 부탁받은 걸 전해 줄 뿐이니 결정해서 알려 주렴.”

“예…….”

클라우드는 얼떨떨하게 수긍했다. 이상했다.

딱히 가깝지도 않았던 아버지의 장례식. 그날 한 번 본 사람이 저를 뮤즈로 삼았다고? 뮤즈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 아닌가. 그 중요한 게 그리 갑작스레 생기기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