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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1화
프롤로그
“임신이시네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하는 의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재인은 쿵 하고 심장이 가라앉는 괴기한 감각을 느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핑 하고 도는 것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곤욕스러웠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12주째이십니다. 남편분이랑 오세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앳돼 보이는 외모의 재인에게 그렇게 말한 의사는 꿈쩍하지 않는 재인을 보며 뒤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환자를 밖으로 안내해 주라는 무언의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원래 남의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인간들이잖아. 결혼을 했다고 하기엔 어린 나이인 22살의 주민등록번호가 버젓이 떴을 텐데도 방임하는 걸 보면. 저 의사는 지금 재인이 진료를 받으면서 내게 될 비용만 받는 장사꾼에 불구한 거겠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난무하기만 했다. 재인이 속으로 그렇게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잠시 비틀거리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책상 끝머리를 잡았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뒤에 서 있던 간호사가 얼른 와서 재인을 받쳐 주었지만 정작 입에서는 예의로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질 못하니까.
재인은 간호사의 손길을 정중하게 뿌리치고 진료실을 나와 안내에 따라서 진료비를 지불했다.
“저 환자분, 이거요.”
간호사가 건넨 건 태아 사진이었다. 재인이 사진을 건네받고 자꾸만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고 산부인과를 빠져나왔다. 숨통을 조일 것 같은 병원 내부의 답답함과는 달리 상쾌한 공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꽉 막힌 숨통이 뚫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역질이 올라올 거 같았고 목구멍 어딘가가 꿈틀거렸다.
재인이 주먹을 꽉 쥐고서는 가슴 언저리를 두들겼다. 아무리 두들겨도 꽉 막힌 무언가가 도통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부터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었다. 2개월에 한 번씩 할 때도 있고 3개월에 한 번씩 할 때도 있었기에 별 의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이 너무 매슥거리고 버틸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잠 때문에 영양제라도 맞을 생각에 온 병원에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임신이라니. 임신……이라니. 믿을 수 없는 가혹한 현실 속에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재인이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져 버린 것이다.
“어떡하지. 앞으로…… 나…… 이제 어떡해야 하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임신이라면 그나마 축복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재인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지난 학기 중간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레스토랑의 셰프. 고작 5개월가량 같이 일하면서 인사 정도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사람이 더 좋은 조건으로 다른 레스토랑으로 간다고 해서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서였다.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신 탓에 필름이 끊겨 버렸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뜨고 정신이 든 재인은 낯선 천장에 당황스러워하며 일어나며 인기척이 느껴져 흠칫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고, 자신의 옆자리에 왜 그가 있을까 하는 혼란스러움이 몰려왔다. 지난밤의 일들을 떠올리려 해 보았다. 중간중간 끊겨지는 기억 속의 필름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올라타고, 옆에 있던 남자친구와 키스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아…….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남자친구하고는 헤어진 지 며칠이 지난 터라, 그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같은 방향이라 함께 택시에 올라탔을 여준을 남자친구라 착각하고 키스를 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려고 해 얼른 생각을 멈추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의 하룻밤을 보낸 실수는 후회와 질책만을 남겼다.
원했던 일이 아니었기에 그에게 미안했고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후에 당당하게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은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씻을 정신도 없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옷을 입고 나왔다.
단순히 동네 모텔이 아닌 화려함이 겸비되어 있는 큰 로비를 가진 호텔이었다. 나오는 동안 친절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는 직원들의 상냥함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몰려오는 후회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고 그 뒤로도 몇 번 걸려 온 그의 전화를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 잊고 싶었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
그때의 모든 것들이 생생히 기억이 나자,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후회가 됐다. 돌이킬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이 내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꺼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와중에도 재인은 무의식중에 제 배를 끌어안았다. 죽고 싶은 두려움이 온몸을 장악하고 있는 순간에도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재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비웃으면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위로도, 호기심 가득한 눈길도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나 정말 어떡해.”
그렇게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두려움에 재인은 무너지고 있었다. 집까지 무슨 정신으로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 버거운 현실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몸에 휴식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들어가 추위를 녹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재인은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촉촉한 손에 닿는 살결의 보드라움이 좋았다. 이 안에선 지금 어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체가 자라나고 있다.
재인이 생각하는 이 소중한 생명체를 그도 소중하다고 생각해 줄까? 그날의 일을 후회하면서 절대로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지우라고 한다면 어떡하지? 재인은 온몸을 휘어 감는 불안감에 또다시 습관처럼 손톱을 톡톡 쳤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는 재인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짐인 만큼 그에게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의 아이가 결코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더 쉬울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이…….”
그렇다. 그것 또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룻밤의 실수로 생긴 아이 때문에 결혼하면……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만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성큼 재인에게 다가왔다.
그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행복을 장담할 수 없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아이를 지워 버린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자신은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술을 먹고 밤새 놀면서 즐거워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원하는 직장을 들어가면 행복할까? 사고 싶은 옷과 가방과 구두를 사서 자신을 가꾸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고 살 수 있을까?
재인은 아랫입술을 억척스럽게 꽉 깨물었다.
“아니.”
그리고 그 답은 1초도 되지 않아 나왔다. 평생 누군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야.
책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책임이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쓰든 달든 스스로가 삼켜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쓰게 느껴지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재인은 그것을 삼키기로 결심했다.
배를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버리지 않을게.”
그 사람의 선택이 어떻게 되든, 재인의 선택은 아이에 대한 책임이었다. 메는 목과 뚫리지 않을 것처럼 막혀 버린 가슴으로 굳세게 각오했다.
씻고 나온 재인은 화장대 앞에 앉아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를 수건으로 꽉꽉 짜서 말렸다.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말해야겠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아니지. 엄마보다는 그에게 가서 먼저 말하는 것이 나을까? 그래.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에게는 가장 먼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이와 나를 책임진다고 할까? 아니면, 자기하고는 무관한 일이라며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릴까?
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마음을 떨어트려 버리고자 잠자리에 누웠다. 눈을 깜빡였다. 갑갑한 마음에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괜찮을 리는 없었다. 재인은 한 번도 불편하다고 느껴 본 적 없던 잠자리가 불편해서 몇 번이고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어서 일어나! 최재인! 너 일어나라고!”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다사로운 햇살이 눈을 괴롭히는 것보다 억척스러운 엄마의 손길과 찢어질 것 같은 고함 소리에 재인은 눈을 떴다.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떠 보니, 거짓말처럼 숙자의 손에 태아 사진이 들려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재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엄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침착하려야 침착할 수가 없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이 사진! 어디서 난 거야!”
숨길 수 없었고 회피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들통 났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말하기로 결심한 상태였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누구 애야, 누구 애냐고!”
“미안해. 미안해. 엄마…….”
숙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화를 내며 부릅뜨고 있는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애 아빠는 알고 있어? 너 임신한 거?”
재인이 고개를 힘없이 내저었다.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아……!”
숙자가 울분을 토해 내며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슴을 퍽퍽 내려쳤다.
“너 어떡하려고 그래, 너!”
“낳아서 키울 거야.”
재인은 울먹이는 목소리지만 완강하게 말했다. 재인의 반응에 숙자는 또 한 번 깊은 울분을 토해 냈다.
“미쳤어? 애 낳아서 키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러지 말고 이 애 지우자. 아직 너는 창창한 나인데 이 애 때문에 괜히 발목 잡힐 필요 없어. 엄마랑 오늘 같이 병원 가자! 병원!”
재인을 억척스럽게 침대에서 끌어 내렸지만 그녀는 눈물을 쏟아 내며 완고하게 버텼다.
“엄마. 나 이 애 낳을 거야. 낳아서 내가 잘 기를 거야. 나, 이 애 절대 안 지울 거라고!”
“이 애 낳아서 키울 거면 엄마랑 인연 끊는다고 생각해. 엄마 말 안 듣고 애 낳을 거면, 엄마 집에서 당장 나가! 엄마 말 안 듣는 너 같은 딸 필요 없으니까!”
숙자가 악을 지르며 장롱에 있는 캐리어를 꺼내 거칠게 집어 던지고 서랍을 열어 재인의 속옷과 옷을 죄다 끄집어냈다. 재인은 있는 힘을 다해 귀를 틀어막고선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아가야.’
“너 같은 딸! 필요 없어. 그러니까. 당장 나가!”
재인이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캐리어 쪽으로 다가갔다. 주섬주섬 흩어진 옷을 들어 캐리어에 구겨 넣고 저를 원망스럽게 쏘아보는 숙자를 지나쳐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숙자를 외면하고 나온 집 밖은 지독히도 쌀쌀했다.
1.
자칫하면 살을 데기에도 적당해 보일 정도의 위험한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매끈한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들이붓고 여러 종류의 해산물까지 듬뿍 넣었다. 프라이팬을 좌우로 흔드는 핏줄이 선명하고 상처투성이인 남자의 손은 능하고 익숙하게 움직였다.
반듯하게 접혀 있는 여준의 스카프와 구김 하나 없는 조리복은 그가 얼마나 깔끔하고도 청결한 성격인지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 맡은 파트에 최선을 다하는 조리사들은 하나같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까다로운 손님들의 입맛에 만족을 선사할 요리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강 셰프님.”
아까부터 여준의 파스타가 완성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홀 캡틴은 여준이 그릇에 파스타를 옮겨 놓고 행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평소에 목소리가 워낙에 크고 하이톤이었던 홀 캡틴이 어울리지 않게 조바심 어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지 않은 말을 할 거라는 걸 느끼게 했다.
“무슨 일이죠?”
“어떤 여자분께서 찾아오셨는데…….”
그런데요? 라는 질문으로 홀 캡틴에게 횡설수설한 대답을 듣는 것보다 자신을 찾아왔다는 여자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낫다고 여준은 판단했다. 부주방장에게 자신의 파스타를 대신 내보내라고 눈짓을 하고선 주방을 빠져나왔다.
각종 오븐과 조리기들의 불길로 인해 찜통이나 다름없던 주방에서, 히터를 틀었지만 확 트인 공간인 홀로 나오니 온몸에서 흐르던 땀이 식혀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원함도 잠시, 자신을 찾아올 만한 여자라고는 미국에 계신 어머니가 전부였던 여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홀을 살폈다.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자신이 나왔음에도 식사를 하느라 바빠 보이는 손님들이 전부였다.
“대체 누구지?”
1화
프롤로그
“임신이시네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하는 의사를 바라보고 있자니, 재인은 쿵 하고 심장이 가라앉는 괴기한 감각을 느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핑 하고 도는 것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곤욕스러웠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12주째이십니다. 남편분이랑 오세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앳돼 보이는 외모의 재인에게 그렇게 말한 의사는 꿈쩍하지 않는 재인을 보며 뒤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환자를 밖으로 안내해 주라는 무언의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원래 남의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인간들이잖아. 결혼을 했다고 하기엔 어린 나이인 22살의 주민등록번호가 버젓이 떴을 텐데도 방임하는 걸 보면. 저 의사는 지금 재인이 진료를 받으면서 내게 될 비용만 받는 장사꾼에 불구한 거겠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난무하기만 했다. 재인이 속으로 그렇게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잠시 비틀거리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책상 끝머리를 잡았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뒤에 서 있던 간호사가 얼른 와서 재인을 받쳐 주었지만 정작 입에서는 예의로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절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 있질 못하니까.
재인은 간호사의 손길을 정중하게 뿌리치고 진료실을 나와 안내에 따라서 진료비를 지불했다.
“저 환자분, 이거요.”
간호사가 건넨 건 태아 사진이었다. 재인이 사진을 건네받고 자꾸만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악착같이 힘을 주고 산부인과를 빠져나왔다. 숨통을 조일 것 같은 병원 내부의 답답함과는 달리 상쾌한 공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꽉 막힌 숨통이 뚫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역질이 올라올 거 같았고 목구멍 어딘가가 꿈틀거렸다.
재인이 주먹을 꽉 쥐고서는 가슴 언저리를 두들겼다. 아무리 두들겨도 꽉 막힌 무언가가 도통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래부터 생리 주기가 불규칙한 편이었다. 2개월에 한 번씩 할 때도 있고 3개월에 한 번씩 할 때도 있었기에 별 의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이 너무 매슥거리고 버틸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잠 때문에 영양제라도 맞을 생각에 온 병원에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임신이라니. 임신……이라니. 믿을 수 없는 가혹한 현실 속에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재인이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져 버린 것이다.
“어떡하지. 앞으로…… 나…… 이제 어떡해야 하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임신이라면 그나마 축복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재인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는 지난 학기 중간부터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레스토랑의 셰프. 고작 5개월가량 같이 일하면서 인사 정도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사람이 더 좋은 조건으로 다른 레스토랑으로 간다고 해서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서였다.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신 탓에 필름이 끊겨 버렸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뜨고 정신이 든 재인은 낯선 천장에 당황스러워하며 일어나며 인기척이 느껴져 흠칫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고, 자신의 옆자리에 왜 그가 있을까 하는 혼란스러움이 몰려왔다. 지난밤의 일들을 떠올리려 해 보았다. 중간중간 끊겨지는 기억 속의 필름은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올라타고, 옆에 있던 남자친구와 키스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아…….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남자친구하고는 헤어진 지 며칠이 지난 터라, 그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같은 방향이라 함께 택시에 올라탔을 여준을 남자친구라 착각하고 키스를 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려고 해 얼른 생각을 멈추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의 하룻밤을 보낸 실수는 후회와 질책만을 남겼다.
원했던 일이 아니었기에 그에게 미안했고 마주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후에 당당하게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은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씻을 정신도 없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옷을 입고 나왔다.
단순히 동네 모텔이 아닌 화려함이 겸비되어 있는 큰 로비를 가진 호텔이었다. 나오는 동안 친절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는 직원들의 상냥함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몰려오는 후회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고 그 뒤로도 몇 번 걸려 온 그의 전화를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 잊고 싶었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
그때의 모든 것들이 생생히 기억이 나자,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후회가 됐다. 돌이킬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이 내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꺼지는 것 같은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와중에도 재인은 무의식중에 제 배를 끌어안았다. 죽고 싶은 두려움이 온몸을 장악하고 있는 순간에도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재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비웃으면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위로도, 호기심 가득한 눈길도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나 정말 어떡해.”
그렇게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두려움에 재인은 무너지고 있었다. 집까지 무슨 정신으로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이 버거운 현실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몸에 휴식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들어가 추위를 녹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재인은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촉촉한 손에 닿는 살결의 보드라움이 좋았다. 이 안에선 지금 어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명체가 자라나고 있다.
재인이 생각하는 이 소중한 생명체를 그도 소중하다고 생각해 줄까? 그날의 일을 후회하면서 절대로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지우라고 한다면 어떡하지? 재인은 온몸을 휘어 감는 불안감에 또다시 습관처럼 손톱을 톡톡 쳤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는 재인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짐인 만큼 그에게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의 아이가 결코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더 쉬울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이…….”
그렇다. 그것 또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하룻밤의 실수로 생긴 아이 때문에 결혼하면……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만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성큼 재인에게 다가왔다.
그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행복을 장담할 수 없는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아이를 지워 버린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자신은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술을 먹고 밤새 놀면서 즐거워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원하는 직장을 들어가면 행복할까? 사고 싶은 옷과 가방과 구두를 사서 자신을 가꾸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고 살 수 있을까?
재인은 아랫입술을 억척스럽게 꽉 깨물었다.
“아니.”
그리고 그 답은 1초도 되지 않아 나왔다. 평생 누군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야.
책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책임이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쓰든 달든 스스로가 삼켜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쓰게 느껴지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재인은 그것을 삼키기로 결심했다.
배를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버리지 않을게.”
그 사람의 선택이 어떻게 되든, 재인의 선택은 아이에 대한 책임이었다. 메는 목과 뚫리지 않을 것처럼 막혀 버린 가슴으로 굳세게 각오했다.
씻고 나온 재인은 화장대 앞에 앉아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를 수건으로 꽉꽉 짜서 말렸다.
무엇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말해야겠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 아니지. 엄마보다는 그에게 가서 먼저 말하는 것이 나을까? 그래.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에게는 가장 먼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이와 나를 책임진다고 할까? 아니면, 자기하고는 무관한 일이라며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릴까?
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마음을 떨어트려 버리고자 잠자리에 누웠다. 눈을 깜빡였다. 갑갑한 마음에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괜찮을 리는 없었다. 재인은 한 번도 불편하다고 느껴 본 적 없던 잠자리가 불편해서 몇 번이고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어서 일어나! 최재인! 너 일어나라고!”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다사로운 햇살이 눈을 괴롭히는 것보다 억척스러운 엄마의 손길과 찢어질 것 같은 고함 소리에 재인은 눈을 떴다.
떠지지 않는 눈을 힘들게 떠 보니, 거짓말처럼 숙자의 손에 태아 사진이 들려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재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엄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침착하려야 침착할 수가 없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이 사진! 어디서 난 거야!”
숨길 수 없었고 회피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들통 났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말하기로 결심한 상태였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누구 애야, 누구 애냐고!”
“미안해. 미안해. 엄마…….”
숙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화를 내며 부릅뜨고 있는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애 아빠는 알고 있어? 너 임신한 거?”
재인이 고개를 힘없이 내저었다.
“네가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아……!”
숙자가 울분을 토해 내며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슴을 퍽퍽 내려쳤다.
“너 어떡하려고 그래, 너!”
“낳아서 키울 거야.”
재인은 울먹이는 목소리지만 완강하게 말했다. 재인의 반응에 숙자는 또 한 번 깊은 울분을 토해 냈다.
“미쳤어? 애 낳아서 키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러지 말고 이 애 지우자. 아직 너는 창창한 나인데 이 애 때문에 괜히 발목 잡힐 필요 없어. 엄마랑 오늘 같이 병원 가자! 병원!”
재인을 억척스럽게 침대에서 끌어 내렸지만 그녀는 눈물을 쏟아 내며 완고하게 버텼다.
“엄마. 나 이 애 낳을 거야. 낳아서 내가 잘 기를 거야. 나, 이 애 절대 안 지울 거라고!”
“이 애 낳아서 키울 거면 엄마랑 인연 끊는다고 생각해. 엄마 말 안 듣고 애 낳을 거면, 엄마 집에서 당장 나가! 엄마 말 안 듣는 너 같은 딸 필요 없으니까!”
숙자가 악을 지르며 장롱에 있는 캐리어를 꺼내 거칠게 집어 던지고 서랍을 열어 재인의 속옷과 옷을 죄다 끄집어냈다. 재인은 있는 힘을 다해 귀를 틀어막고선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아가야.’
“너 같은 딸! 필요 없어. 그러니까. 당장 나가!”
재인이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캐리어 쪽으로 다가갔다. 주섬주섬 흩어진 옷을 들어 캐리어에 구겨 넣고 저를 원망스럽게 쏘아보는 숙자를 지나쳐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숙자를 외면하고 나온 집 밖은 지독히도 쌀쌀했다.
1.
자칫하면 살을 데기에도 적당해 보일 정도의 위험한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매끈한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들이붓고 여러 종류의 해산물까지 듬뿍 넣었다. 프라이팬을 좌우로 흔드는 핏줄이 선명하고 상처투성이인 남자의 손은 능하고 익숙하게 움직였다.
반듯하게 접혀 있는 여준의 스카프와 구김 하나 없는 조리복은 그가 얼마나 깔끔하고도 청결한 성격인지를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 맡은 파트에 최선을 다하는 조리사들은 하나같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까다로운 손님들의 입맛에 만족을 선사할 요리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강 셰프님.”
아까부터 여준의 파스타가 완성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홀 캡틴은 여준이 그릇에 파스타를 옮겨 놓고 행주로 마무리를 짓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평소에 목소리가 워낙에 크고 하이톤이었던 홀 캡틴이 어울리지 않게 조바심 어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지 않은 말을 할 거라는 걸 느끼게 했다.
“무슨 일이죠?”
“어떤 여자분께서 찾아오셨는데…….”
그런데요? 라는 질문으로 홀 캡틴에게 횡설수설한 대답을 듣는 것보다 자신을 찾아왔다는 여자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낫다고 여준은 판단했다. 부주방장에게 자신의 파스타를 대신 내보내라고 눈짓을 하고선 주방을 빠져나왔다.
각종 오븐과 조리기들의 불길로 인해 찜통이나 다름없던 주방에서, 히터를 틀었지만 확 트인 공간인 홀로 나오니 온몸에서 흐르던 땀이 식혀지는 시원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원함도 잠시, 자신을 찾아올 만한 여자라고는 미국에 계신 어머니가 전부였던 여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홀을 살폈다.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자신이 나왔음에도 식사를 하느라 바빠 보이는 손님들이 전부였다.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