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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워낙에 넓은 홀이다 보니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오지 않아 몇 발자국 걸어 통로를 지나 홀의 구석 쪽을 살피는 순간, 여준의 입에서는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축 처진 어깨에 넋이 빠진 듯 놓여 있는 컵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 있는 낯익은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살며시 시선을 돌리자 귀퉁이에 놓여 있는 짐 가방도 보였다.
여준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아 넣는 순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중에 몸을 돌려 창문에 비친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어 여자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네.”
여준이 망설이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 재인의 앞자리에 앉으며 넌지시 말했다.
“네.”
재인이 굳은 표정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잠깐만.”
여준은 홀 직원을 불러 따뜻한 차 한 잔을 부탁하고 꽤 오래 앉아 있었는지 식어 버린 재인의 차를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홀 직원이 차를 가져다주는 시간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다만, 무엇이 불안한지 재인이 손톱을 만지면서 나는 톡톡 소리만 날 뿐이었다.
금세 홀 직원이 차를 새롭게 타 와 놓아 주었다. 한 모금 마신 여준이 가만두질 못하는 재인의 손톱에서 천천히 시선을 올려 그녀의 팔과 목선을 지나 버석하게 말랐지만 분홍빛이 감도는 입술, 자그마한 코, 콧날을 훑고 마침내 눈을 바라보았다.
불안감이 역력하고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헤어진 이후로 보지 못했던, 3개월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살가워 보이지 않는 그녀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무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떼어 냈다.
“전화 안 받기에,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만두신 후에 저도 바로 그만뒀어요. 이번 학기에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알고 있었어.”
재인은 알고 있었다는 여준의 말에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찾아갔었거든.”
여준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재인의 시선을 살짝 피해 찻잔을 어루만졌다.
“한 번쯤은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재인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화를 받지 않고 피하는 자신을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고, 왜 봐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재인은 궁금해하면서도 그의 대답이 어떤 것일지 몰라 쉽게 질문을 내뱉지 못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재인을 보며 여준이 식기 전에 마시라는 뜻으로 재인의 앞에 놓여 있는 차를 슬쩍 밀어 주었다. 재인은 그런 여준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태아 사진을 보여 주면 그의 반응은 어떨까? 매몰차게 당장 나가라고 고함칠까, 아니면 당황하고 횡설수설할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회피할까? 아니면 자기의 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을까?
재인은 요 며칠 동안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줄 행동을 예상할 수가 없어 불안감이 치솟아 오르며 손톱을 더욱 세게 만지작거렸다.
미칠 것만 같았다.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또다시 일렁이는 어지러움을 버티고 있기가 힘들었다.
엄마에게 임신을 했다고 말했고 지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지울 수 없다고 말했고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왔다. 무작정, 아무런 계획 없이. 그렇게 뛰쳐나와서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전에 일하던 레스토랑 매니저님을 찾아가 가까스로 그가 일하는 이곳을 알아냈다.
이곳에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대면하고 나니 그 확신이 희미해져 버렸다. 그녀가 짧은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알고 지냈던 그가, 그가 아닐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정말 그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네.”
오랜 침묵 끝에 겨우 대답한 재인을 여준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 할 말이 있을 텐데 입을 굳게 다물고 손톱만 만지작거리는 재인의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친한 사람하고는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 지켜본 재인은 낯가림을 타는 듯 보였고 말수가 적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지난 3개월을 그랬듯이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여준의 기다림이 헛된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그녀는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잘못 찾아온 거 같아요.”
재인이 옆에 놓아 둔 짐 가방을 들어 올리고 나가려는 순간, 여준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 세웠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밥 한 끼라도 함께 먹자고, 그게 싫으면 연락이라도 아주 가끔만 주고받자고 말하고 부탁하고 싶어 얼른 그녀를 불렀다.
“재인아.”
그 반동 때문이었는지 만지작거리느라 주머니에 깊숙하게 들어가 있지 않았던 사진이 툭 하고 여준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커지는 재인의 눈동자 속에서 그 사진을 줍는 여준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마침내, 태아 사진이 여준의 시야에 완전히 담겨졌을 때, 재인은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여준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주위가 까맣고 가운데만 하얀 초음파 사진. 그것을 보자마자 여준은 알아차렸다. 이것이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
여준이 초음파 사진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재인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어진 눈망울을 한 재인이 서둘러 여준의 손에서 사진을 홱 뺏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다급하게 돌아서려는 재인을 여준이 다시 잡아 세웠다. 손에 잡힌 가녀린 손목이 부서질 것처럼 앙상했다.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가슴이 아릴 정도로 힘겨웠을 그녀를 위해 여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방법 따위는 없다. 오로지 하나.
“네가 죄송하다고 할 이유 없고 잘못 찾아온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서 도망치지도 말고 사라지지도 마.”
여준이 잡고 있던 재인의 손목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 힘을 주어 제 품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던 그날 이후로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재인이었기에 여준은 더욱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진작 그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내 옆에 있어. 내가 지켜 줄게, 재인아.”
타개되지 않을 것만 같이 막막하고 암흑 같았던 현실이 으깨어지고 조금씩 스며든 햇살이 찬바람에 휘청거리던 재인의 식어 버린 몸을 따스하게 끌어안아 녹여 주었다.

***

“조금만 기다려. 우리 집으로 가자. 나랑 같이.”
짐 가방을 보았을 때, 그녀는 분명 집을 나왔다. 그녀가 그 어디에서도 편하게 쉬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 여준은 그녀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여준이 품에 안고 있던 재인을 조심스럽게 다시 의자에 앉힌 후, 다급하게 3층으로 올라갔다. 조퇴를 하기 위해서 사무실로 들어갔지만 사장인 성호는 보이지 않았다.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어렵게 찾아온 그녀를 근무가 끝날 때까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던 여준이 조퇴를 하겠다는 쪽지를 남겨 놓고 탈의실로 향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주방에 들러 부주방장과 직원들에게 양해와 사과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미리 가게 앞으로 빼 온 후, 다시 재인에게로 향했다.
“가자.”
재인의 짐을 들어 앞장서 나갔다. 자신을 천천히 따라오는 재인을 확인하며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타.”
재인은 조수석을 내버려 두고 굳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여준은 여전히 재인이 이 상황에 두렵고 얼떨떨해하고 있으며, 자신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미주알고주알 따질 생각도 없고 앞으로 너는 나를 편하게 여겨야 돼, 라고 강요할 생각도 없다.
그녀를 끌어안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속으로 수도 없이 되새겼던 진심 어린 다짐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해 주는 것만이 꽁꽁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고 떨고 있는 불안감을 떨어뜨려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향한 진실은 지금도 물론이고 후에도 어긋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재인이 타느라 열린 뒷좌석 차 문을 잡고 여준은 그녀를 살펴보았다.
긴장을 하고 있는지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앉아 있는 재인에게 혹시 모를 일이니 안전벨트를 매 주려 여준이 몸을 기울였다. 순간, 재인이 큰 반응을 보이며 두 눈을 꽉 감고 몸을 움칠했다. 자신의 동작에 놀라 하며 몸을 굳히고 있는 재인을 여준은 빤히 바라보았다.
앙증맞게 다문 입과 무릎 위에 꽉 주먹을 쥐고 미미하게 떨고 있는 손이 꽤 귀엽다고 느낀 여준이 입가에 미세한 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다.”
웃음기가 살짝 스며든 여준의 어투에 재인이 당황해하며 살포시 눈을 떴다. 앞에 서서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준이 보였다. 재인은 자신이 취했던 행동에 대한 후회감이 몰려오면서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라 버렸다.
“그런 생각 한 거 아니에요…….”
왜 저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대해 속으로 저를 질책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은 여준의 귀에 박힌 후였다.
“그런 생각이 뭔데?”
농담하는 그를 재인이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한 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는 눈빛으로 쏘아붙이는 재인을 보자, 여준이 머쓱해져서 웃었다.
“미안. 안전벨트 매 줄게.”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때 함께 일을 할 적에도 그랬다.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낑낑거리기에 도와준다고 했더니 제가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서는 끝까지 도움을 받지 않았던 그녀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던 제 몸뚱이만 한 짐 가방을 옆에 두고 허둥지둥 안전벨트를 맸다. 재인이 안전하게 벨트를 맨 것을 확실히 확인한 여준이 그제야 뒷좌석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재인은 창밖으로 힐끔 여준의 동선을 살폈다. 아무것도 덧바르지 않은 수수한 그의 머릿결이 차가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바람을 통해 살랑대는 그의 머릿결에선 좋은 향이 날 것이다. 예전과 다르지 않게 말이다.
“아, 맞다.”
운전석에 막 올라탄 그가 다시 껑충 내려서는 다급하게 뒤로 향했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어 무언가를 열심히 부스럭대며 꺼내더니 뒷좌석 문을 다시 열었다. 추운 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이거 덮어. 히터를 지금 막 틀어서 조금 추울 거야.”
비닐에 싸여 있는 담요를 꺼내서는 펼쳐 들어 재인의 무릎 위에 덮어 주는 그의 손길은 꽤 바빠 보였다.
뒷문이 다시 닫히고 그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평소 같았으면 거칠게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갔을 텐데. 혼자도 아니고 그녀가 있으니 여준은 모든 행동이 다 조심스러워졌다. 심지어는 미동조차 만들지 못하는 차 키를 꽂는 행동조차도 말이다.
그의 차는 을씨년스러운 주차장을 벗어나 시내로 진입했다. 침묵이 둘 사이를 괴로울 정도로 비집고 들어왔다.
원래 이렇게 여자 앞에서 긴장을 잘 하던 타입이었나? 그러지 않았다. 여자하고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모든 신경을 바짝 세울 만큼 긴장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만은 달랐다. 자꾸만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뒤에 앉아 있는 그녀를 살펴보게 되고 행여나 그녀가 불편해할까 싶어서 초조하기만 한 여준이다.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는 고요함 속에 큼, 하고 여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던 재인이 여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네. 없어요.”
먹고 싶은 게 없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다. 속이 매슥거리고 먹는 것마다 다 토악질로 뱉어 버리니 차라리 아무것도 안 먹는 것이 나았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네.”
다만, 집에서 나와 찜질방을 전전하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하기는 했다. 재인은 속에서 올라오는 하품을 입을 꾹 다물고 삼켰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도 돼. 알지? 나 못 하는 요리 없는 거.”
“네…….”
최대한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 싶고 긴장하는 그녀를 달래 주고 싶은 마음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재인의 축 처진 음성을 듣자니, 혼자서 너무 성급하게 서두른 것 같은 마음에 여준은 미안해지기만 했다.
“집은 그냥 무작정 나온 거야?”
“네.”
부모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는지, 아니면 모르고 계시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백미러에 비치는 그녀의 입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발견한 여준은 더 이상 그녀에게 피로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과 있을 때만큼은 편안하고 온전하게 쉬길 바랄 뿐이었다.
결국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온 신경을 운전하는 데만 기울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30분가량 달린 차가 집 근처에 도달했을 때, 조심스럽게 차를 멈췄다.
“재인아. 다 왔…….”
시동을 끄고 막 돌아본 여준이 내뱉으려던 말을 잘랐다. 긴 속눈썹을 늘어트린 재인이 연분홍빛이 감도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고단했던 모양이다.
여준이 재인을 깨우기 위해 손을 뻗어 어깨 언저리 쪽으로 향하다가 거두어 갔다. 굳이 그녀를 깨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곤히 잠든 얼굴을 보자 깨우기가 싫어진 것이다.
여준은 차에서 나와 뒷좌석 문을 열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신중하게 벨트를 풀어 주고 안아 올렸다. 잠에 취해서인지,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녀를 여준은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숨을 쉬고 있는 입가 근처로 귀를 가져다 댔다.
“잘 자네.”
새근새근 일정하게 소리를 내며 자는 그녀로 인해, 여준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귀엽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는 맘 편하게 웃어 본 적 없던 여준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싫지 않았다. 아니, 매우 뿌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 3개월, 후회라는 감정을 씻어 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송별회를 한 날, 마음에 두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회식이 끝나 버렸다.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렵사리 돌려 택시를 잡아타려던 그때, 한참 취기가 오른 그녀와 집 방향이 같다는 것을 알고 함께 몸을 실었다.
고즈넉한 새벽.
한적한 도로를 쉴 틈 없이 내달리는 택시 안에서 느닷없이 쿵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재인을 보니, 졸면서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여준이 조심히 재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 쪽으로 끌어당길 때였다.
술이라는 나락에 빠져 버린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느닷없이 키스를 해 왔다. 여준 역시 취기가 있었던 터라 밀어내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아 버렸다.
다음 날 호텔 안에서 눈을 떴을 때, 재인이 아무런 예고 없이 사라진 걸 알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바로 연락을 취했지만 재인은 연락을 받지 않았고 그녀를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가게를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일을 관둔 후였다.
그렇게 3개월을 허망하게 보내고, 그는 그제야 자신이 그녀를 품고 있던 마음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날이 애틋하고 허망한 마음이 커져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집으로 들어온 여준은 잘 벗겨지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발로 흔들어 벗다가 문에 튕긴 반동으로 다시 재인 쪽으로 돌아오는 신발에 화들짝 놀라서 얼른 재인을 품에 가까이 껴안았다.
“하.”
놀란 표정으로 재인을 살폈다. 다행히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그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가 재인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여준은 이불을 덮어 준 후, 아래로 내려가 재인의 신발을 벗겨 주었다. 자신의 손바닥보다 아주 조금 큰 작은 발에 신기해하면서도 혼자 집에서 나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그 발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을 주물러 주었다.
이제 앞으로 갈 곳 없어 헤매게 하지 않겠다고, 절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 않게 하겠다고, 절대로 혼자 두지 않게 하겠다고 속으로 되새기면서 말이다.
“음…….”
재인의 옅은 신음이 들려왔다. 여준이 얼른 재인의 발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드는 듯했다.
그녀를 더 바라보고 싶고 그녀의 곁에 더 머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녀의 잠을 깨울까 싶어서 여준이 발꿈치까지 들고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아 주며 미세하게 남은 그 틈새로 끝까지 그녀를 눈 속에 담아 둔 여준의 눈빛은 하염없이 따뜻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