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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들어가 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재현이 안방 문을 살짝 열어 놓고 앞에 서 있는 재인에게 눈짓했다. 재인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떼어 내며 막 안방 문고리를 잡았다.
“엄마랑 절대 싸우지 말고.”
재현이 걱정되는지 신신당부를 했다. 싸울 생각도 말대꾸할 생각도 없다. 이미 그러지 않겠다고 여준과 약속을 했으니 말이다.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저의 팔을 잡고 있는 재현의 손을 한 번 꾹 잡아 준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앉아 혼이 빠진 것처럼 앉아 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닫지 않은 문으로 다시 도망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도망가지 말라고 했다. 여준이 그랬고 배 속의 아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재인은 걸음을 천천히 떼어 내 숙자의 곁으로 향했다.
“엄마…….”
텁텁한 입 밖으로 간신히 비집고 나온 부름에도 숙자는 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숙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때릴까 봐 무서웠고, 비록 집을 나와 도망을 갔지만 다시는 안 본다고 할까 봐서 겁이 났다.
“엄마…….”
재인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숙자를 불렀다. 하지만 숙자는 듣기도 싫다는 듯 그나마 앞을 보고 있던 얼굴을 뒤로 확 돌려 버렸다.
“엄마…….”
재인이 숙자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거칠게 홱 내쳐 버렸다. 하지만 재인은 놓치지 않고 숙자의 옷자락을 다시 쥐었다. 이번엔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래도…… 애 지울 수가 없어……. 애가 무슨 죄야. 애는 아무 죄 없잖아. 엄마…… 내가 이 애 지우면 평생 죄책감에 살 텐데. 자식 보는 맛에, 자식 지키는 의무감에 사는 게 엄마라며……. 엄마가 그랬잖아……. 살인자라는 죄책감을 지고 사는 삶보다 엄마가 되는 삶이 더 좋은 거잖아. 그렇잖아, 엄마.”
자꾸만 기어 올라오는 눈물을 끝끝내 참지 못하고 퐁퐁 쏟아 내는 재인에게로 시선을 돌린 숙자 또한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원망보다는 애처로움에 더 가까운 숙자의 눈길이 재인을 또 한 번 울려 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엄마. 정말 미안해.”
하도 닦아서 눈 주위가 따가웠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손등으로 아무리 훔쳐 내도 사라지지 않는 눈물로 인해 눈앞이 희부옇게 변할 때쯤, 엄마가 팔을 뻗어 재인을 끌어안았다. 안온하고 따뜻하며 익숙하고 편한 품이었다.
“엄마가 나가라고 했다고 진짜 나가? 그 몸으로 나가서 얼마나 고생하려고! 애 낳고 키우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어떻게든 집에서 버티고 있어야지. 이 못난 계집애야.”
슬픔과 눈물에 잠긴 목소리와 어쩌면 영원히 느끼지 못할 줄 알았던 숙자의 손길에 재인은 엄마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 다시는 안 보려고 했니? 엄마한테는 너랑 재현이밖에 없는데. 엄마 되겠다는 애가 왜 엄마 마음은 그렇게도 몰라주고……. 너 정말 못된 딸이야, 정말.”
아프지 않게 재인의 등을 콩콩 때리는 숙자의 손길마저 그리웠던 터라, 재인은 숙자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눈물이 가로막아 차마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한 말을 하염없이 속으로 되새기면서.



3.


남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갔던 동봉과 여준은 새벽 2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들어왔다. 재인을 비롯한 세 식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당황해하며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친척들이나 친구들 모임에서 단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주당인 동봉이 여준의 등에 보란 듯이 업혀서 들어온 것이다.
동봉과 같이 속도를 맞추면서 마신 술 때문에 붉어진 건지, 아니면 해롱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동봉을 업고 와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여준의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고……. 미쳤어! 미쳤어!”
숙자는 여전히 여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동봉을 부축했다. 그런 아내의 손길에 몸이 편안해졌는지, 동봉이 배시시 웃으며 뒤에 서 있는 여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우리 사위 최고!”
“우리 아버님도 최고!”
“최고! 최고!”
여준과 동봉이 주고받고 하는 것을 숙자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엄지를 푹 잡아 내렸다.
“조용히 해요! 동네 사람들 다 깨우려고 그래요?”
“사위! 오늘 꼭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냥 가면! 나 엄청 섭섭해할 거야! 당신도, 우리 사위 자고 가는 거 뭐라고 하지 마. 알았지?”
동봉이 숙자와 여준에게 단단히 주입시켰다.
“알았어? 몰랐어? 어?”
대답을 할 때까지 시끄럽게 굴 것 같은 동봉에 숙자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좀 조용해요. 재현아, 네 아버지 좀 같이 부축하자.”
“예! 마미!”
비틀거리며 노래라도 걸쭉하게 한 곡 뽑아내려는 동봉을 재현과 엄마가 부축하며 안방으로 향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여전히 냉랭한 엄마의 반응에 재인은 여준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빠 업고 오느라 힘드셨죠? 그냥 연락하시지. 그럼 재현이가 데리러 나갔을 텐데요.”
“하나도 안 힘들어서 연락할 생각도 못 했어.”
여준이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서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피로함이 잔뜩 스며든 여준의 눈은 얼굴만큼이나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왠지 자신 때문에 그가 힘든 것도 억지로 참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재인은 미안하기만 했다.
“아버님하고 너무 즐거웠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놀러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되나?”
나쁠 것은 없다. 배가 점점 불러 올수록 그에게 의지를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재인은 그다지 솔깃한 제안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에게 냉정하기만 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뭐, 시간 날 때.”
우물쭈물거리는 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준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몸도 불편한데 자기 눈치까지 보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재인아.”
“네?”
“아까 들었지? 아버님이 이렇게 하시면서 우리 사위 최고! 라고 하신 거.”
여준이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공중에 높이 치켜들고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최고! 최고! 최고 의미가 뭔지 알지? 최고!”
그의 웃음이 바이러스처럼 퍼져서는 재인에게도 스며들고 말았다. 재인은 자신도 모르게 여준이 올린 엄지손가락 옆에 자신의 엄지를 가져다 댔다.
“네. 알아요.”
“어머니께도 꼭 최고의 사위가 될게. 어머니가 엄지손가락 이렇게 드시고 우리 사위 최고! 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내가 잘할게.”
여준이 자신의 엄지를 재인의 엄지에 꾹 찍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찾아뵐 거야.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좋은 곳도 모시고 가려면 사실 일주일에 한 번도 부족해. 어머니 뵈러 오는 거 나 때문에 절대로 눈치 볼 필요 없어. 내가 꼭 와야 하는 곳이고, 내가 꼭 오고 싶은 곳이니까.”
재인은 여준의 모든 것이 고마웠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이 고맙고 모든 것이 따뜻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자신의 마음이 그로 인해서 빠르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여준은 부족함 없는 남자이듯, 자신 또한 여준에게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힘들 때 기댈 수 있고 버거운 일에 유일한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그런 여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차갑게 식어 버린 그의 손을 따뜻하게 녹여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여준의 손을 막 잡으려던 찰나였다.
“와. 아빠 장난 아니야! 지금 엄마랑 아빠 뽀뽀한다?”
눈치 없이 이 타이밍에 안방에서 튀어나온 재현이 여전히 신발장 앞쪽에 서 있는 여준에게 득달같이 달려왔다.
“매형!”
넉살도 좋게 웃으며 재인이 잡으려던 여준의 손을 낚아채더니 무작정 거실로 끌고 들어와 소파에 앉혔다.
“우리 아버지랑 나가고 나서 엄마랑 누나 대화하는 거 듣다가 매형이 셰프라는 거 들었어요. 맞아요?”
“응. 맞아.”
“와, 이것이 바로 셰프의 손이구나!”
재현은 재인과는 달리 낯가림이 전혀 없이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친화력을 가진 듯 보였다. 칼에 베이고 오븐에 덴 흔적이 가득한 상처투성이인 여준의 손을 공중에 치켜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매형, 셰프가 되려면 어떡해야 돼요?”
“왜 셰프가 되고 싶은데?”
“폼 나잖아요. 여자들도 좋아하고.”
우쭐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재현이 귀여웠는지, 여준이 인자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간단해. 나 같은 경우에는 18살 때, 유학 간 미국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바닥 일부터 시작했어. 말이 잘 안 통했던 터라 몸으로 모든 것을 배웠지. 손등에서부터 팔꿈치까지 한 80개 정도의 상처가 날 즈음에 막내 생활이 끝나.”
“와, 대박. 파…… 팔십 개요?”
“그때 그 레스토랑의 셰프가 말해 줬어. 그래도 나는 요리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좀 덜 다치고 막내 생활에서 조금 더 빨리 탈출하는 거라고.”
“아, 매형. 그러면…….”
“최재현!”
여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 하는 재현의 입을 재인이 이름을 부름으로써 틀어막았다.
물어보면 성심성의껏 자상하게 대답을 해 주려고 했던 여준 또한 재인의 단호한 부름에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재인이 성큼성큼 걸어와 억척스럽게 재현의 팔을 끌어 올렸다.
“얼른 들어가서 자.”
“잠깐만, 누나. 나는 지금 내 멘토를 만난…….”
“지금 셰프님 피곤한 거 안 보여?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아빠랑 술 드시고 또 취한 아빠 업고 오기까지 하느라 기운 다 빠졌는데, 넌 눈치가 없어도 그렇게 없니?”
재인의 핀잔이 민망했는지 재현이 쩝,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붉게 충혈된 눈이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재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조아려 인사를 했다.
“그럼 매형, 안녕히 주무세요.”
마음 같아서는 괜찮다고, 옆에 앉아서 밤새도록 물어보고 싶은 거 다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럼 재인이 민망해질까 싶어서 여준은 말을 아꼈다.
“이름이 재현이라고 했나?”
“네? 네! 최재현이요!”
“이번 주 주말에 우리 레스토랑 놀러 와. 구경시켜 줄게.”
“아, 진짜 그래도 돼요?”
단순하게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다 꺼져라 한숨을 쉬던 재현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당연하지. 와서 맛있는 거도 먹고. 꼭 놀러 와.”
“우후! 신난다! 아, 그리고 누나는 남편 될 사람한테 셰프님이 뭐냐 셰프님이. 호칭을 바꿔야지. 아무튼 우리 매형은 최고!”
재현이 엄지손가락을 뻗고 엉덩이까지 흔들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재인이 쯧쯧 혀를 차며 한심스럽게 노려보다가 시선을 여준에게로 돌렸다.
“얼른 가서 주무세요. 피곤하실 텐데.”
재인을 따라 여준이 주방을 지나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왔다. 분홍색 벽지만 보아도 이 방이 재인의 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액자 속의 재인은 앳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크게 V를 그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의 모습. 아들이건 딸이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예쁜 그녀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여준은 생각했다.
“여기 제 방이에요.”
재인이 수줍게 말했다. 공부를 하고 잠을 자고, 웃고 울고 생각을 하고, 책을 보고 화장을 했을 그녀만의 공간이다. 이곳에 자신이 함께 있다는 것이 여준은 더없이 행복했다.
“근데 내가 네 방에서 자면 너는 어디서 자?”
“저는 재현이 방에서 엄마랑 같이 자기로 했어요.”
“그럼 재현이는?”
“거실에서요.”
“나 때문에 괜히 거실에서 자는 거 아니야? 불편할 텐데.”
“아니에요. 걔는 길바닥에서 자라고 해도 잘 자는 애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잠시 어색하고 버름한 기운이 맴돌았다. 여전히 서로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침묵이 싫었던 터라 재인이 다급하게 돌아서 막 방을 빠져나오려 한순간이었다.
“재인아.”
뒤에서 여준이 불렀고 재인이 빠르게 돌아섰다.
“네?”
“앞으로 부족함 없도록, 그리고 네가 날 좋아할 수 있도록, 내가 정말 잘할게.”
그의 따뜻한 눈빛과 말에 재인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앞으로 우리한테는 좋은 일들만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맘 편하게 잘 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셰…….”
고맙다는 말끝에 잘 자라고 했으니, 잘 주무시라고 대답을 해 줘야 하는데, ‘셰프님’ 하고 부르려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여준도 싫어했고 재현도 지적한 부분이라 멈칫했던 것이다. 그렇다. 분명히 다른 호칭이 필요하다. 어색하다고 무작정 피할 수는 없었다.
“저도, 잘할게요. 그리고 여준 씨도 잘 자요. 맘 편하게.”
말을 끝으로 재인이 방을 빠져나갔다.
“여준 씨…….”
재인이 나가고 나서 여준이 저도 모르게 말을 흘렸다. 셰프님이 아니라, 호칭이 여준 씨로 바뀌었다. 별말도 아닌데 셰프보다는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에 슬금슬금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여준을 점령하여 온몸에 퍼져 버렸고 기쁨에 겨운 몸이 중심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침대 위로 털썩 넘어졌다.
“여준 씨……. 여준 씨, 좋다. 여준 씨.”
하얀 천장에 재인의 얼굴이 그려졌다. 2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일을 하는 동안 손님을 보며 친절하게 웃던 모습까지, 전부 다. 놓치고도 잊고 싶지도 않은 모습들이었다.
“재인아…….”
그가 나지막하게 대답 없을 재인의 이름을 불렀다. 입가엔 자꾸만 미소가 떠올랐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보고 싶어져 버린 그녀를 실컷 볼 수 있게.
따뜻한 집에 와서인지, 아니면 이 방 곳곳에 묻어 있는 재인의 흔적과 향기가 포근해서인지 여준은 눈을 감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