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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지 엄연히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인데, 식탁 위에는 그 흔한 생선 요리나 고기 반찬 하나 없었다. 달랑 계란 프라이에 어제 먹다 남은 듯 보이는 김치찌개, 마른 밑반찬이 전부인 식탁에 재인은 숙자를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자신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을 텐데도 꿋꿋하게 밥을 먹는 숙자가 재인은 야속하기만 했다.
“어머니. 저 밥 한 그릇 더 먹어도 될까요?”
하지만 숙자에게 뭐라고 한마디 할 수가 없는 건 이 초라한 밥상에도 맛있다며 밥 한 그릇을 뚝딱해 버린 여준 때문이었다. 숙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준의 빈 밥그릇을 가져가 밥을 퍼 와 다시 앞에 놓아 주었다.
“반찬이 너무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
여준이 밥을 크게 한 입 떠서 먹자 속상해하는 재인과는 달리 동봉이 흐뭇하게 웃었다.
“복스럽게 잘도 먹네! 우리 사위!”
떠들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선 힐끔 자신의 아내 눈치를 살폈다. 툭, 숙자가 어서 말하라는 무언의 눈짓과 함께 동봉의 팔꿈치를 쳤다.
“큼.”
동봉의 기침 소리에 여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곤란해하는 동봉을 보자, 여준은 꽤나 심각한 말을 하려는가 싶어서 빳빳이 긴장했다.
“지금 재인이 너, 사위네 집에 머문다면서?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재인이는 당장 집으로 들어와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원래 동거를 하던 관계도 아니니, 결혼식이 준비되는 동안에는 각자의 집에서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준은 이제 겨우 만난 재인과 또다시 떨어져 지낼 것을 생각하니, 몰려드는 서운함에 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자네 부모님껜 말씀드렸나?”
“네. 실은 그저께 저녁에 어머니께 전화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선 제가 좋아하는 여자라는 것을 듣고 흔쾌히 결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재인은 여준의 어머니가 흔쾌히 허락했다는 것에 놀라고 안심해하는 반면, 자신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들어 해 주실지 걱정되고 불안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곧 다짐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부모님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여준만큼 자신도 모든 것을 진심으로 쏟아붓겠다고, 정성을 다하겠다고.
“그럼 상견례 날짜를 잡도록 하자고. 사돈께서 언제쯤이 괜찮다고 하시나?”
“다음 주에 귀국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귀국?”
동봉이 의아해하자 여준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국에 계십니다.”
익숙하지만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미국이라는 말에 동봉과 숙자의 눈길이 교차했다. 재인 또한 예기치 못한 말이었기에 다소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상견례는 다음 주로 잡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다음 주로 하도록 하지.”
흔쾌히 승낙하는 동봉과는 달리, 여전히 숙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끊겼던 식사를 마저 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어머니!”
숙자는 끝끝내 여준을 배웅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준은 숙자가 있는 안방 문 앞에서 씩씩하게 인사를 하고서는 신발장으로 향했다.
“이번 달 말쯤에 새벽 낚시 한번 가자고. 어때?”
동봉이 기다렸다는 듯이 흥분한 얼굴로 여준에게 말했다.
“저 새벽 낚시 정말 좋아합니다, 아버님.”
말을 끝으로 여준이 재인의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동봉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귓속말을 속삭였다. 동봉이 호기심 강한 표정으로 여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양손 엄지를 올려 마구 흔들었다.
“역시! 내 사위는 남달라. 하하하하!”
“어? 나도! 나도 껴 줘.”
옆에서 팔을 뻗으며 방방 뛰는 재현을 보면서 여준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동봉에겐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살이 에일 것 같은 찬 바람에 재인이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까 봐 여준은 걱정되었다.
“들어가. 추운데.”
“괜찮아요.”
재인은 끝내 배웅을 해 주지 않는 야속한 엄마 때문에 여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에 올라탄 여준이 창문을 내렸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무리하지 말고 잘 쉬고 있어.”
“네.”
“이불 꼭 덮고 자.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전화할게.”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들어가.”
“네……. 조심히 가세요.”
막 걸리는 시동에 재인이 여준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별생각 없이 집을 바라보는 순간, 입 밖으로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엄마?”
안방 창문에 서서는 운전석에 있는 여준을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빼고 있는 숙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재인은 저도 모르게 뭉클해져 버렸다.
“어머니?”
여준은 재인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나온 엄마라는 단어에 집 쪽을 바라보았다. 환한 불이 켜져 있던 창문에 커튼이 홱 쳐졌다. 숙자를 보고 나오지 못해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는데, 한결 편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

“이 나쁜 계집애야!”
한적하고 고요한 카페에 울려 퍼진 우렁찬 목소리는 모두의 이목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다. 카페 문을 통해 사람보다 목소리가 먼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재인은 낯익은 목소리로 말하는 ‘나쁜 계집애’가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고 창피해서 얼른 고개를 수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몰래 빠져나갈 궁리까지 하던 재인의 손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알지? 나는 네 머리카락만 봐도 네가 너인 거 아는 거.”
“그, 그래.”
재인이 주위를 살폈다. 비웃음이 잔뜩 어려 있는 얼굴을 하고서는 이쪽을 보며 속닥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재인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민망함에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재인의 상태는 개의치 않고 맞은편에 앉은 혜은이 미지근하게 식은 재인의 커피를 시원한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탁! 빈 컵을 요란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혜은이 눈을 얇게 뜨고 재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토씨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말해 줄래?”
“말 그대로야. 임신 13주째.”
“그러니까! 누구 애를 임신했냐고, 이 계집애야! 설마 그때 그 양아치는 아니……!”
재인이 흥분을 이기지 못한 혜은의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김혜은 미쳤어? 조용히 안 해?”
“알았어. 알았다고.”
혜은이 재인을 간단하게 뿌리쳤다. 그리고 별안간 뭉클 무언가가 사무쳤는지, 금세 입술을 실룩거리고 눈이 붉어져서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재인의 손을 꽉 잡았다.
“너 못됐어. 알고는 있어?”
혜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고 왜 꾸역꾸역 눈물을 짜내고 있는지도 지독히도 잘 알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절친이었다. 원하는 것이 달라서 따로 다녀야 했던 대학교 때는 아쉬워서 매일 밤 서로의 집에 놀러가 밤새도록 수다를 떨어도 다음 날 전화로 또 1시간 넘게 수다를 떨 만큼 재인과 혜은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서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지내 온 시간이 10년이었다. 10년. 그렇게나 가깝게 지내고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낸 가장 친한 친구였었다. 그런데 정작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게 만들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다. 거기에 서운함까지 더해지니 눈물도 나고 재인을 다그치게 되는 것이었다.
“울지 마. 다 좋게 해결됐어.”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물론 네가 더 놀랐겠지만.”
혜은이 휴지를 한 움큼 집어 들어서는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재인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휴, 그래. 그만 울어야지.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니니까 그만 울어야지. 그래도 다행이야. 다 좋게 해결돼서.”
“그러니까. 참 다행이지.”
“요즘 남자들 여자 임신시켜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대. 그래도 네 남편 될 사람은 어느 정도의 책임감은 있나 보다.”
재인이 잠시 머릿속에서 접어 두었던 여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받아들여야 할 현실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가혹해서 도망치고 놔 버리려고 했던 자신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준 사람. 그 따뜻했던 품이 떠오르자, 재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네 남편 어떤 사람이야?”
“음…….”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그의 완벽한 자상함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처음 찾아갔을 때, 망설임 없이 자신을 끌어안아 주었던 사람. 강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에게까지 싹싹하게 대해 줬던 사람.
“따뜻한 사람? 그것도 부족해. 다정한 사람? ……그것도 부족해.”
재인이 혼잣말을 내뱉고 혼자 고개를 내젓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렇게도 좋냐?”
“어?”
혜은이 얄밉지 않을 정도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얼굴에 딱 쓰여 있어. 너무 좋아 미치겠다, 정말. 이렇게.”
“그 정도는 아니다.”
재인이 얼굴을 감싸 쥐며 부정했지만 이미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여준이 지워지지 않고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냥.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거뿐이야. 어쨌든 결론을 내리자면, 너무 좋은 사람이야.”
“웃기네. 아이고, 좋아 죽네. 지금 네 모습이 그 정도거든. 아이고. 부러운 계집애.”
혜은이 재인의 볼을 꽉 잡고 요리조리 꼬집다가 놓아주었다.
“아무튼 그때 그 양아치는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해?”
“다음 주에 상견례 하고 천천히 예식장 알아보기로 했어.”
“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는 건 남 얘기인 줄 알았는데,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다니. 세상이 참 요지경이야.”
뭐든 직설적으로 말하는 혜은에게 나쁜 뜻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재인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나도 속도위반 결혼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있을 만한 얘긴 줄 알았는데, 내가 그렇게 결혼할 줄이야.”
이렇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줄 또한 몰랐다. 며칠 사이 빈틈 하나 없이 무너져 버린 자신의 세상은 한 줄기 빛도 없는 암흑으로 덮였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압박들이 재인을 누르고 또 눌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자신을 웃게 만들어 준 여준에게 고마웠다.
“빨리 결혼식 날 왔으면 좋겠다. 너 웨딩드레스 입으면 진짜 예쁠 거 같아.”
두 손을 꽉 잡고서는 몸을 배배 꼬며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혜은을 보고 있자니, 재인도 은근히 그날이 기다려졌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예쁜 모습으로 여준의 앞에 설 그날이.

***

“안녕하세요. 셰프님!”
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여준은 곧장 사장실로 올라갔다.
재인의 집에서 레스토랑까지 오는 내내, 전화를 어찌나 하든지 성질머리 급한 건 아무튼 알아줘야 했다. 사장실 앞에 선 여준이 예의상 똑똑 노크를 하고서는 문고리를 잡았다.
“나 들어가……. 윽.”
문을 열자마자 뒤에 몰래 숨어 있었던 모양인지, 성호가 튀어나와서는 여준의 머리를 팔로 우악스럽게 감고는 다른 손 주먹으로 마구 문질렀다. 그 마찰력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머리에 불이 날 것만 같았다.
“아!”
여준이 아프다고 버둥거릴수록 성호의 손에는 더 힘이 가해졌다.
“이 요물 같은 놈. 부주방장이 한 말이 사실이야?”
“일단 이것 좀 놔 봐.”
자신의 팔에 붙잡힌 여준이 버둥거리던 팔을 늘어뜨리며 사정했지만 성호는 냉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어 거절했다. 여준이 낑낑대며 성호의 팔을 위로 잡아당겼지만 빠질 리 만무했다.
“휴.”
체념의 한숨이 여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태권도로 어디에 가서도 힘이라면 뒤처지지 않은 여준이지만 고등학교 때 유도 선수로 활동했고 현재는 여준의 두 배나 되는 남다른 덩치를 가지고 있는 성호를 이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 요망한 것아. 당장 말해. 그저께 널 찾아온 여자는 누군지! 그 여자가 찾아오고 나서 왜 조퇴를 했고 심지어는 어제 휴무까지 냈는지!”
성호가 한 번 더 팍 힘을 주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여준이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다 다짐했다.
“아…… 아아악!”
여준이 성호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여 간신히 팔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간지러움에 소파에 드러누워 자지러지는 성호를 바라보며 참 덩칫값 못 하는 귀여운 형이라고 생각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여준이 성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빨리 말해. 그 여자 누구야.”
“호칭이 틀렸어.”
“호칭이 틀려?”
“그 여자 아니고 제수씨. 해 봐. 제수씨.”
“제수씨?”
장난기 가득한 여준의 돌발적인 발언에 단춧구멍만 한 성호의 눈이 단추만 해졌다.
“그래. 제수씨.”
“뭐야. 너 여자 없었잖아!”
“사귀는 여자는 없었지. 나 혼자 좋아하는 여자는 있었어도.”
“좋아하는 여자? 너 좋아하는 여자 있었어? 네가?”
성호는 정말 놀라워서 연거푸 침을 튀겨 가며 물었다.
여준을 처음 본 것은 7년 전 레스토랑에서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홀이며 주방이며 손님들까지 너 나 할 거 없이 여준에게 고백을 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예쁘다고 칭할 수 있는 여자들의 고백에도 매번 거절을 하던 여준이었다.
그 거절이 나중에는 지긋지긋했는지, 아예 여자들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차갑게 대했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었지만.
여자를 위해 뭐든 사다 바치고 넘치도록 사랑을 표현해야만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성호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시기하고 질투했던 적도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네가!”
“어. 그렇다니까.”
“정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는 게?”
“진짜, 이 형이. 그렇다고. 보는 낙에 매일을 즐겁게 해 주다가도…….”
여준이 잠시 말을 끊고서는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가 떴다. 좋아하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 순간들을 떠올렸다.
처음, 서울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만났던 재인을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만났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 만남을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여준은 생각했다. 그때부터 이 마음이 시작되었을 거라고
레스토랑에서 스케줄 표를 바라보고 있던 재인, 편의점 앞에서 마주쳐서 뻘줌하게 인사를 하던 재인,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벌컥 문을 열었다가 옷을 벗는 중이었던 자신으로 인해서 얼굴이 붉혀지며 허둥지둥 나가던 재인의 모습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레스토랑 앞으로 마중 나온 남자친구와 함께 가던 재인의 모습과 핸드폰 액정의 남자친구 사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재인의 모습까지도 떠올라 버렸다. 여준이 눈을 살며시 떴다.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매일을 서글프게 만들었던……. 그런 사람이었어. 그리고 이제 내가 평생 책임지고 대놓고 사랑할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밖에 없는?”
여준이 시선을 살며시 돌려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내 여자이자 아내야.”
“아내……. 아내? 아내라고? 그냥 제수씨가 아니가 진짜 결혼할 여자야?”
별생각 없이 여준의 말을 따라 하던 성호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여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여준을 성호가 또 억지로 끌어 앉혔다.
“응. 배가 더 불러 오기 전에 결혼 서둘러서 해야 돼. 그래서 좀 바빠.”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배가 더 불러 오기 전? 그 말은 즉…….”
성호가 배 쪽에 불룩한 모양을 그리며 임신을 표현했다. 여준이 담담하고 그윽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헉.”
성호가 덩치에 맞지 않게 두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어깨는 무거워졌지만 발걸음이 가벼워졌어. 그럼 나 일해요.”
너무 놀라워서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저를 바라보는 성호의 맞은편에서 일어난 여준이 사무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