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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
몽유도(夢遊島)
선무지로 1권(1화)
서(序)
혜각.
소림사의 고승인 혜각은,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인(因)이요, 그 인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결과를 과(果)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소림을 떠나 인세에서 인과율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인이라면, 그 인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과란 무엇인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 생각의 결과가 궁금해진 혜각은, 그날로 미련 없이 소림을 떠나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세상 떠돌기를 삼십 년.
삼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동과 그 행동이 낳은 결과를 본 혜각은, 중원의 남쪽 해안에서 걸음을 멈춘 채 푸른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과 과.
불도에서 말하길 인이란 과를 낳게 하는 한 과정이라 하였다. 행동인 인이 먼저 행해지고 그 행동으로 결과인 과가 생기니, 이것이 불도에서 말하는 인과의 수순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깨달은 세상은 다르다.
이미 인을 행하는 순간, 과 역시 함께함이니. 내가 맨 처음 불도를 버리고 소림사를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 지금 내가 이곳에 서서 깨달음을 생각하는 과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과 과는 그 순서가 있는 듯하나, 그 순서 속엔 이미 과가 포함된 인과가 동시에 존재함이니……. 그렇구나! 하하, 그래, 그거였어! 어떤 식의 행동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의 좋고 나쁨이 이미 결정되어 있음이나, 이는 정해진 운명과는 그 갈래를 달리하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이라 함은 그려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이나, 인과는 운명과는 달리 스스로의 결정인 인을 낳고, 그 스스로의 결정이 결국 정해진 과와 함께함이로다.’
인과의 법칙을 인세에서 찾고자 소림사를 나와 세상이란 물결 속에 몸을 담근 순간부터 이미 결정된 깨달음이다. 혜각은 지금 자신의 깨달음이 인을 행했을 때부터, 그 인과 함께한 결과인 과라 여겼다.
과연 그의 생각이 옳았음인지, 단 한 점 구름도 없던 바다 위로 보이지 않던 길이 생겨났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혜각은 언뜻 놀람의 빛을 내비쳤다.
‘지금 이 길은 나를 부르고 있다. 이 또한 내가 인과의 법칙을 알고자 한 나의 마음이 낳은 결과란 말인가? 그렇다면 응당 따르는 것이 옳을 터. 이미 사문을 떠났을 때부터 불도를 버리고 인세에 속해 인과의 법칙에 매진했음이니, 지금 내 결정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를 쫓는 것이 맞겠지.’
처음부터 거부할 뜻이 없었던 혜각은 바다에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 한 발 부드러이 나아가는 그의 걸음은 곧 바람을 타고 인세에서 기른 긴 머리를 휘날리니, 혜각의 마음은 자신이 걷고 있는 잔잔한 바다와 같았다.
한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바다를 걷는 혜각의 모습에, 근방의 어부들은 신선이 나타났다 난리법석을 떨며 연방 절을 하기 바빴다. 지금 혜각의 모습은 인간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음이니, 그것은 곧 바다 위를 마치 육지와도 같이 걷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쳐 든 까닭이다.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신선(神仙)으로서…….
一章. 네 이름은 목해운(木海雲)이다!(1)
몽유도(夢遊島).
그것은 중원지도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섬이다.
저승[黃泉]과 이승[今世]의 경계점이 어디 하늘에만 존재하리오. 그 틈바구니는 세상 곳곳에 존재함이니, 몽유도 또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섬이다.
그 섬의 주민은 이십 년 전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 해로(海路)를 따라 걸어왔던 혜각이었으며, 혜각은 섬에 와서야 자신이 이 경계점에 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간(人間)도, 신선(神仙)도 아닌, 반선.
반선이란 의미는 곧 인간과 신선의 경계점이니, 섬이 존재하는 위치의 이유와 그 자신이 얻은 반쪽짜리 깨달음이 하나로 일치했던 것이다.
또한 부족한 깨달음을 완벽히 터득할 수 있다면 혜각은 더 이상 몽유도가 아닌, 선계(仙界)에 들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혜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골머리를 앓기보단 몽유도에 서식하는 보도 못한 영물과 이제는 볼 수 있게 된 세상의 또 다른 존재인 정령귀(精靈鬼)들과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어이, 혜각. 오늘은 무얼 잡아 볼 텐가?”
“…….”
하얀 백사장에 앉아 낚싯대를 손질하던 혜각의 귀로, 문득컬컬한 노인의 음성이 흘러든다. 이곳 몽유도에 기거하는 오행(五行)의 정령귀 중, 불의 정령왕인 화령(火靈)의 말에 혜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요, 그 행동에 따라 물고기가 결정되었음이니, 당연 바다에 사는 고기를 낚아 올리겠지요.”
“허허,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 내 말은 고기에도 종류가 수천 가진데 그중 어떤 것을 잡느냔 말일세?”
“종류가 수천 가진데 그중 어떤 것을 잡을지 미리 안다는 것은, 곧 정해진 운명에 따라 길을 가는 것과 같거늘, 그것은 내가 깨달은 인과의 법칙과는 그 뜻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단지 소인은 물고기가 낚여 올린다는 것만을 알 뿐.”
“에잉, 이 사람 또 어려운 소리만 늘어놓는구먼. 어찌 자네 같은 사람이 불가에 있었던가? 허허, 내가 보기엔 오히려 도사 노릇이 딱이었거늘.”
혜각의 전직을 들먹이는 화령의 핀잔에, 오히려 혜각은 태연히 미소 지었다.
“인과를 찾기 위해 불가를 버린 저에겐 불도(佛道)도, 선도(仙道)도 중요치 않습니다. 불도와 선도를 나눈다는 것은, 곧 하나의 틀에 박혀 있는 생각이니, 어찌 그 틀 속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또, 또! 에고고, 됐네, 됐어! 자네에게 말을 건 내가 잘못이지. 쯧, 난 화산에 올라가 온천욕이나 해야겠구먼.”
그 나이를 따지자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화령의 계속된 핀잔에, 혜각은 구태여 답을 하지 않았다. 섬의 중심부에 위치한 화산에 올라가 그가 뜨거운 용암 속에 몸을 담그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이 인이요, 그 인과 함께하는 결과에 따라 그는 조만간 용암 속에 몸을 담군 채 콧노래를 부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건만 이미 화령이 사라졌음을 안 혜각은, 곧 손질하던 낚싯대를 든 채 섬의 동쪽 벼랑을 향해 걸음을 노닐었다.
결코 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하는 낚시가 아니다.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운다는 것은 낚시를 하기 위함이나, 그것은 혜각에게 있어 홀로 사색을 보낼 수 있는 즐거움의 의미 역시 함께하는 것이다.
잡은 물고기라 해 봐야 어차피 먹지도 않으니 다시 놔줄 것이며, 혜각은 또다시 놓아준 고기를 잡기 위해 보내는 무료한 시간 속에 사색을 즐겨 왔다.
하늘도 잊고, 바다도 잊은 채, 오로지 무(無)의 세상 속에 홀로 잠겨 들 자신. 그 고요함과 함께 사색이란 긴 시간 속으로 빠져 들 자신을 떠올리니, 혜각의 입가엔 절로 즐거움에 찬 미소가 그려진다.
“…….”
그렇게 걷고 또 걷기를 얼마.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혜각의 코와 턱밑으로 난 긴 백염(白髥)과 백발(白髮)을 휘날리니, 벼랑 끝에 다다른 혜각은 거친 바람결에 휘날리는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잠시 그렇게 수염을 쓰다듬던 혜각은, 이내 웃차 소리와 더불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웠다.
그리곤 천천히 벼랑 끝에 앉아 사색에 빠져 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하늘은 혜각의 즐거움을 방해하려는 듯, 고요하게만 잠겨 있던 혜각의 주름 진 노안으로 한줄기 이채를 불러들였다.
“……?!”
‘저것이 대체 뭔가?’
저 멀리 보이는 망망대해 속을 한줄기 구름처럼 떠다니는 물체를 발견한 혜각은, 곧 단전이 사라진 채 전신에 퍼져 있던 내기를 끌어올려 천안통(天眼通)을 시전했다.
천안통이라 하면,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통의 하나로 사람의 업과 인과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불도를 깨우친 자만이 쓸 수 있다 알려진 육신통 중 하나인 천안통은, 사람의 인과뿐만이 아닌 천 리까지 내다본다 할 정도로 육안을 극도로 밝게 하는 능력 역시 갖고 있었다.
그 능력을 이용해 밝아진 시야 속으로 비쳐 든 물체를 파악하니, 주름 진 혜각의 눈으로 짧은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허, 저것은 여인이 아닌가?’
물체.
그것은 배의 일부분이었던 것이 확실한 작은 나무토막을 의지한 채, 바다 위를 떠도는 여인이었다. 너무 거리가 멀어 그 용모마저 확인하진 못하였으나, 얼핏 보기엔 아직 삼십도 넘지 못한 젊은 여인임이 확실했다.
드넓은 바다 위를 나뭇조각 하나만을 의지해 떠도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위험해 보였다. 더군다나 여인은 나무 위로 올라설 공간이 없어 가슴 아랫부분은 물에 잠겨 있으니, 이대로 둔다면 필시 물의 차가운 수온에 체온이 떨어져 죽고 말 것이다.
이에 혜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모습을 보아, 이틀 전 폭풍이 불던 날 배가 난파되었음이 분명하다. 허허, 이를 어찌한다. 저대로 둔다면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터. 그렇다고 생과 사의 경계선인 이곳 몽유도에 평범한 인간을 들일 수도 없는 일이니……. 허허, 어찌할꼬, 어찌할꼬,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불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생명이다.
불가에서 이르는 사미신도오계(沙彌信徒五戒)를 보면 그 첫째가 생명을 죽이지 말라였다.
그러나 이미 인과율의 참뜻을 찾기 위해 소림을 나오며 불가를 버린 혜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의 그였다면 이처럼 고민할 것도 없이 여인을 구하려 했겠으나, 지금의 그는 몽유도의 보이지 않는 법도에 얽매여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들일 수 없다는 법도에 매여…….
‘아미타불, 내 어찌 이런 속된 고민을 한단 말인가? 지금 저 여인이 몽유도 근처에 이르렀음은, 곧 생과 사의 경계선에 들어섰음이거늘.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죽을 것이 뻔한 생명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결단.
잠시나마 법도에 얽매여 여인을 구할 것을 두고 고민했던 혜각은 스스로를 꾸짖은 후,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의 양손이 황금빛 서기로 물들이니, 그 찬란한 빛은 곧 위태로워 보이는 여인을 향했다.
거리가 수십 장에 이름에도 아무 무리 없이 여인의 곁에 이른 금빛 서기는, 이내 여인의 몸을 감싸 허공 위로 떠오른 채 혜각의 곁으로 돌아왔다.
“…….”
여인의 복장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낯선 의복을 갖춘 여인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미약한 숨결만을 내뱉고 있었다. 이에 혜각은 그녀의 명문혈에 자신의 진기를 주입해, 여인의 생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한기가 전신에 퍼져 몸의 체온을 앗아 간 채 사(死)의 길로 접어들었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녀의 생을 짧게나마 유지시킬 수 있을 뿐.’
자신의 힘으로도 여인을 살릴 수 없음을 안 혜각은 연민에 찬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천금보다 무거운 그의 한숨이 여인의 정신을 일깨웠음인가.
파르르 떨리던 여인의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그 속에서 애절함이 가득 찬 빛을 발한다.
“아이를,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간절한 염원이 깃든 여인의 말은 송과 인접한 고려의 말이었으니, 그것을 알아들을 리 없는 혜각은 단지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의 눈짓에서, 그녀의 품속을 바라볼 뿐이다.
여인이 가리키고 있는 가슴 부위의 옷깃 사이에는, 물에 젖지 않은 갓난아기가 죽음을 눈앞에 둔 어미의 젖을 문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아기를 본 혜각은 여인이 유독 가슴을 나뭇조각 위에 걸친 채 힘겹게 버티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은 죽더라도 이 아기만은 살리려 했던가? 어미의 정은 그 어떤 속세의 정보다 강하다 하더니, 그것이 사실이었구나. 허허, 이를 어찌할꼬. 이 여인의 말을 알아들을 순 없으나, 필시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부탁하는 것일 터.’
짧게나마 고민하던 혜각은 곧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를 구하고자 마음먹고 행한 것이 인이오. 그 인을 통해 그대를 구하였으나 정작 그대의 생명을 구하진 못하였으며, 대신 그대의 품에 안긴 또 다른 생명을 마주하였으니 이것이 과이로다. 내 인으로 말미암아 생긴 과가 그대의 죽음과 아기의 생이라면, 내 어찌 나의 행동으로 인해 생긴 결과를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마오. 내 그대의 아이를 맡을 것이며, 그 어떤 아이보다 훌륭히 키워 낼 것을 약조하리다.”
“가, 감사드립니다. 감사…….”
여인은 눈물을 흘렸다.
비록 노인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안 것이다.
본시 여인은 고려 사람으로 그 이름을 박화연이라 한다.
그녀의 남편인 이한성은 고려의 상인으로, 해상을 통해 송(宋)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한성은 사랑하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기의 백일 기념을 맞아, 이번 송나라 여행길에 부인 박화연과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뜻인즉슨 아기와 아내에게 중원의 넓은 대륙을 구경시켜 주기 위함이었으나, 그들이 탄 배는 송과 고려의 경계점에 접어들던 중 거친 폭풍을 만나 바다 속에 가라앉아야만 했다.
이한성은 가라앉는 배와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나, 박화연만은 운이 좋아 나뭇조각에 매달린 채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품 안에 안긴 아기를 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가슴만을 나뭇조각 위에 걸친 채, 바다를 떠돌며 아기가 배가 고파 울을 시에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다해 겨우 젖을 물려 왔던 것이다.
바다에서 그렇게 떠돌기를 이틀.
이틀 만에 그녀는 혜각에게 구출되었으나, 물의 한기가 이미 심장까지 침투한 박화연은 더 이상 생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가…….”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몽유도(夢遊島)
선무지로 1권(1화)
서(序)
혜각.
소림사의 고승인 혜각은, 나이 오십 줄에 이르러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인(因)이요, 그 인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결과를 과(果)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소림을 떠나 인세에서 인과율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인이라면, 그 인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과란 무엇인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 생각의 결과가 궁금해진 혜각은, 그날로 미련 없이 소림을 떠나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세상 떠돌기를 삼십 년.
삼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행동과 그 행동이 낳은 결과를 본 혜각은, 중원의 남쪽 해안에서 걸음을 멈춘 채 푸른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과 과.
불도에서 말하길 인이란 과를 낳게 하는 한 과정이라 하였다. 행동인 인이 먼저 행해지고 그 행동으로 결과인 과가 생기니, 이것이 불도에서 말하는 인과의 수순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깨달은 세상은 다르다.
이미 인을 행하는 순간, 과 역시 함께함이니. 내가 맨 처음 불도를 버리고 소림사를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 지금 내가 이곳에 서서 깨달음을 생각하는 과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과 과는 그 순서가 있는 듯하나, 그 순서 속엔 이미 과가 포함된 인과가 동시에 존재함이니……. 그렇구나! 하하, 그래, 그거였어! 어떤 식의 행동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의 좋고 나쁨이 이미 결정되어 있음이나, 이는 정해진 운명과는 그 갈래를 달리하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이라 함은 그려진 길을 따라 걷는 것이나, 인과는 운명과는 달리 스스로의 결정인 인을 낳고, 그 스스로의 결정이 결국 정해진 과와 함께함이로다.’
인과의 법칙을 인세에서 찾고자 소림사를 나와 세상이란 물결 속에 몸을 담근 순간부터 이미 결정된 깨달음이다. 혜각은 지금 자신의 깨달음이 인을 행했을 때부터, 그 인과 함께한 결과인 과라 여겼다.
과연 그의 생각이 옳았음인지, 단 한 점 구름도 없던 바다 위로 보이지 않던 길이 생겨났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혜각은 언뜻 놀람의 빛을 내비쳤다.
‘지금 이 길은 나를 부르고 있다. 이 또한 내가 인과의 법칙을 알고자 한 나의 마음이 낳은 결과란 말인가? 그렇다면 응당 따르는 것이 옳을 터. 이미 사문을 떠났을 때부터 불도를 버리고 인세에 속해 인과의 법칙에 매진했음이니, 지금 내 결정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를 쫓는 것이 맞겠지.’
처음부터 거부할 뜻이 없었던 혜각은 바다에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 한 발 부드러이 나아가는 그의 걸음은 곧 바람을 타고 인세에서 기른 긴 머리를 휘날리니, 혜각의 마음은 자신이 걷고 있는 잔잔한 바다와 같았다.
한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바다를 걷는 혜각의 모습에, 근방의 어부들은 신선이 나타났다 난리법석을 떨며 연방 절을 하기 바빴다. 지금 혜각의 모습은 인간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음이니, 그것은 곧 바다 위를 마치 육지와도 같이 걷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쳐 든 까닭이다.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신선(神仙)으로서…….
一章. 네 이름은 목해운(木海雲)이다!(1)
몽유도(夢遊島).
그것은 중원지도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섬이다.
저승[黃泉]과 이승[今世]의 경계점이 어디 하늘에만 존재하리오. 그 틈바구니는 세상 곳곳에 존재함이니, 몽유도 또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섬이다.
그 섬의 주민은 이십 년 전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 해로(海路)를 따라 걸어왔던 혜각이었으며, 혜각은 섬에 와서야 자신이 이 경계점에 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간(人間)도, 신선(神仙)도 아닌, 반선.
반선이란 의미는 곧 인간과 신선의 경계점이니, 섬이 존재하는 위치의 이유와 그 자신이 얻은 반쪽짜리 깨달음이 하나로 일치했던 것이다.
또한 부족한 깨달음을 완벽히 터득할 수 있다면 혜각은 더 이상 몽유도가 아닌, 선계(仙界)에 들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혜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골머리를 앓기보단 몽유도에 서식하는 보도 못한 영물과 이제는 볼 수 있게 된 세상의 또 다른 존재인 정령귀(精靈鬼)들과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어이, 혜각. 오늘은 무얼 잡아 볼 텐가?”
“…….”
하얀 백사장에 앉아 낚싯대를 손질하던 혜각의 귀로, 문득컬컬한 노인의 음성이 흘러든다. 이곳 몽유도에 기거하는 오행(五行)의 정령귀 중, 불의 정령왕인 화령(火靈)의 말에 혜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요, 그 행동에 따라 물고기가 결정되었음이니, 당연 바다에 사는 고기를 낚아 올리겠지요.”
“허허,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 내 말은 고기에도 종류가 수천 가진데 그중 어떤 것을 잡느냔 말일세?”
“종류가 수천 가진데 그중 어떤 것을 잡을지 미리 안다는 것은, 곧 정해진 운명에 따라 길을 가는 것과 같거늘, 그것은 내가 깨달은 인과의 법칙과는 그 뜻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단지 소인은 물고기가 낚여 올린다는 것만을 알 뿐.”
“에잉, 이 사람 또 어려운 소리만 늘어놓는구먼. 어찌 자네 같은 사람이 불가에 있었던가? 허허, 내가 보기엔 오히려 도사 노릇이 딱이었거늘.”
혜각의 전직을 들먹이는 화령의 핀잔에, 오히려 혜각은 태연히 미소 지었다.
“인과를 찾기 위해 불가를 버린 저에겐 불도(佛道)도, 선도(仙道)도 중요치 않습니다. 불도와 선도를 나눈다는 것은, 곧 하나의 틀에 박혀 있는 생각이니, 어찌 그 틀 속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또, 또! 에고고, 됐네, 됐어! 자네에게 말을 건 내가 잘못이지. 쯧, 난 화산에 올라가 온천욕이나 해야겠구먼.”
그 나이를 따지자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화령의 계속된 핀잔에, 혜각은 구태여 답을 하지 않았다. 섬의 중심부에 위치한 화산에 올라가 그가 뜨거운 용암 속에 몸을 담그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이 인이요, 그 인과 함께하는 결과에 따라 그는 조만간 용암 속에 몸을 담군 채 콧노래를 부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건만 이미 화령이 사라졌음을 안 혜각은, 곧 손질하던 낚싯대를 든 채 섬의 동쪽 벼랑을 향해 걸음을 노닐었다.
결코 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하는 낚시가 아니다.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운다는 것은 낚시를 하기 위함이나, 그것은 혜각에게 있어 홀로 사색을 보낼 수 있는 즐거움의 의미 역시 함께하는 것이다.
잡은 물고기라 해 봐야 어차피 먹지도 않으니 다시 놔줄 것이며, 혜각은 또다시 놓아준 고기를 잡기 위해 보내는 무료한 시간 속에 사색을 즐겨 왔다.
하늘도 잊고, 바다도 잊은 채, 오로지 무(無)의 세상 속에 홀로 잠겨 들 자신. 그 고요함과 함께 사색이란 긴 시간 속으로 빠져 들 자신을 떠올리니, 혜각의 입가엔 절로 즐거움에 찬 미소가 그려진다.
“…….”
그렇게 걷고 또 걷기를 얼마.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혜각의 코와 턱밑으로 난 긴 백염(白髥)과 백발(白髮)을 휘날리니, 벼랑 끝에 다다른 혜각은 거친 바람결에 휘날리는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잠시 그렇게 수염을 쓰다듬던 혜각은, 이내 웃차 소리와 더불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웠다.
그리곤 천천히 벼랑 끝에 앉아 사색에 빠져 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하늘은 혜각의 즐거움을 방해하려는 듯, 고요하게만 잠겨 있던 혜각의 주름 진 노안으로 한줄기 이채를 불러들였다.
“……?!”
‘저것이 대체 뭔가?’
저 멀리 보이는 망망대해 속을 한줄기 구름처럼 떠다니는 물체를 발견한 혜각은, 곧 단전이 사라진 채 전신에 퍼져 있던 내기를 끌어올려 천안통(天眼通)을 시전했다.
천안통이라 하면,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통의 하나로 사람의 업과 인과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불도를 깨우친 자만이 쓸 수 있다 알려진 육신통 중 하나인 천안통은, 사람의 인과뿐만이 아닌 천 리까지 내다본다 할 정도로 육안을 극도로 밝게 하는 능력 역시 갖고 있었다.
그 능력을 이용해 밝아진 시야 속으로 비쳐 든 물체를 파악하니, 주름 진 혜각의 눈으로 짧은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허, 저것은 여인이 아닌가?’
물체.
그것은 배의 일부분이었던 것이 확실한 작은 나무토막을 의지한 채, 바다 위를 떠도는 여인이었다. 너무 거리가 멀어 그 용모마저 확인하진 못하였으나, 얼핏 보기엔 아직 삼십도 넘지 못한 젊은 여인임이 확실했다.
드넓은 바다 위를 나뭇조각 하나만을 의지해 떠도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위험해 보였다. 더군다나 여인은 나무 위로 올라설 공간이 없어 가슴 아랫부분은 물에 잠겨 있으니, 이대로 둔다면 필시 물의 차가운 수온에 체온이 떨어져 죽고 말 것이다.
이에 혜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모습을 보아, 이틀 전 폭풍이 불던 날 배가 난파되었음이 분명하다. 허허, 이를 어찌한다. 저대로 둔다면 필시 죽음을 면치 못할 터. 그렇다고 생과 사의 경계선인 이곳 몽유도에 평범한 인간을 들일 수도 없는 일이니……. 허허, 어찌할꼬, 어찌할꼬,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불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생명이다.
불가에서 이르는 사미신도오계(沙彌信徒五戒)를 보면 그 첫째가 생명을 죽이지 말라였다.
그러나 이미 인과율의 참뜻을 찾기 위해 소림을 나오며 불가를 버린 혜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날의 그였다면 이처럼 고민할 것도 없이 여인을 구하려 했겠으나, 지금의 그는 몽유도의 보이지 않는 법도에 얽매여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들일 수 없다는 법도에 매여…….
‘아미타불, 내 어찌 이런 속된 고민을 한단 말인가? 지금 저 여인이 몽유도 근처에 이르렀음은, 곧 생과 사의 경계선에 들어섰음이거늘.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죽을 것이 뻔한 생명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결단.
잠시나마 법도에 얽매여 여인을 구할 것을 두고 고민했던 혜각은 스스로를 꾸짖은 후,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의 양손이 황금빛 서기로 물들이니, 그 찬란한 빛은 곧 위태로워 보이는 여인을 향했다.
거리가 수십 장에 이름에도 아무 무리 없이 여인의 곁에 이른 금빛 서기는, 이내 여인의 몸을 감싸 허공 위로 떠오른 채 혜각의 곁으로 돌아왔다.
“…….”
여인의 복장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낯선 의복을 갖춘 여인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미약한 숨결만을 내뱉고 있었다. 이에 혜각은 그녀의 명문혈에 자신의 진기를 주입해, 여인의 생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한기가 전신에 퍼져 몸의 체온을 앗아 간 채 사(死)의 길로 접어들었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녀의 생을 짧게나마 유지시킬 수 있을 뿐.’
자신의 힘으로도 여인을 살릴 수 없음을 안 혜각은 연민에 찬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천금보다 무거운 그의 한숨이 여인의 정신을 일깨웠음인가.
파르르 떨리던 여인의 속눈썹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그 속에서 애절함이 가득 찬 빛을 발한다.
“아이를,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간절한 염원이 깃든 여인의 말은 송과 인접한 고려의 말이었으니, 그것을 알아들을 리 없는 혜각은 단지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의 눈짓에서, 그녀의 품속을 바라볼 뿐이다.
여인이 가리키고 있는 가슴 부위의 옷깃 사이에는, 물에 젖지 않은 갓난아기가 죽음을 눈앞에 둔 어미의 젖을 문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아기를 본 혜각은 여인이 유독 가슴을 나뭇조각 위에 걸친 채 힘겹게 버티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은 죽더라도 이 아기만은 살리려 했던가? 어미의 정은 그 어떤 속세의 정보다 강하다 하더니, 그것이 사실이었구나. 허허, 이를 어찌할꼬. 이 여인의 말을 알아들을 순 없으나, 필시 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부탁하는 것일 터.’
짧게나마 고민하던 혜각은 곧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대를 구하고자 마음먹고 행한 것이 인이오. 그 인을 통해 그대를 구하였으나 정작 그대의 생명을 구하진 못하였으며, 대신 그대의 품에 안긴 또 다른 생명을 마주하였으니 이것이 과이로다. 내 인으로 말미암아 생긴 과가 그대의 죽음과 아기의 생이라면, 내 어찌 나의 행동으로 인해 생긴 결과를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마오. 내 그대의 아이를 맡을 것이며, 그 어떤 아이보다 훌륭히 키워 낼 것을 약조하리다.”
“가, 감사드립니다. 감사…….”
여인은 눈물을 흘렸다.
비록 노인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안 것이다.
본시 여인은 고려 사람으로 그 이름을 박화연이라 한다.
그녀의 남편인 이한성은 고려의 상인으로, 해상을 통해 송(宋)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한성은 사랑하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기의 백일 기념을 맞아, 이번 송나라 여행길에 부인 박화연과 동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뜻인즉슨 아기와 아내에게 중원의 넓은 대륙을 구경시켜 주기 위함이었으나, 그들이 탄 배는 송과 고려의 경계점에 접어들던 중 거친 폭풍을 만나 바다 속에 가라앉아야만 했다.
이한성은 가라앉는 배와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나, 박화연만은 운이 좋아 나뭇조각에 매달린 채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품 안에 안긴 아기를 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가슴만을 나뭇조각 위에 걸친 채, 바다를 떠돌며 아기가 배가 고파 울을 시에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다해 겨우 젖을 물려 왔던 것이다.
바다에서 그렇게 떠돌기를 이틀.
이틀 만에 그녀는 혜각에게 구출되었으나, 물의 한기가 이미 심장까지 침투한 박화연은 더 이상 생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가…….”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