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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2화
1. 열일곱 봄 (2)
김혁은 초등학교 때부터의 악연이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두부를 왈칵 토한 날,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김혁이 연두의 코에 쌍코피를 터뜨렸다.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까지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 그나마 중학교 때는 다른 반이었는데, 고등학교 입학식 날 받은 배정표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어서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름이 연두야? 성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연두가 우물쭈물하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짧은 말인데도 사투리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강……. 강연두.”
“그렇구나, 난 최수호. 반가워, 친하게 지내자. 근데…….”
말씨가 어쩜 이렇게 곱지. 할매가 곱다, 곱다 할 때마다 ‘곱다’와 ‘예쁘다’의 차이가 뭔지 궁금했는데, 연두는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서울 전학생의 말투가 바로 고운 거였다. 귓바퀴가 괜히 간지러웠다.
“전학생아, 잡담은 이따 쉬는 시간에 해라잉. 느그 담임 아직 말 다 안 끝내쓰.”
“아. 네!”
수호의 말을 담임이 끊었다. 수호는 짧고 적당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연두를 향해 씩 웃었다. 시원시원한 입매 안으로 보이는 치아가 하얗고 가지런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 주에 연합 학력 평가가 있을 거라고 했다. 연두는 담임의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짝꿍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아직 다 못 푼 수학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수호가 노트 위에 숫자들을 꾹꾹 눌러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연두의 흰 손을 흘깃 쳐다봤다. 샤프를 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숫자 하나마다 노트가 깊게 패여 들어갔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호가 오른쪽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연두의 책상이었다.
대뜸 기다란 손가락이 책상을 침범하자 연두가 휙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안경알 안쪽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빛났다. 색깔이 밝아 눈알 안쪽까지 다 비쳤다. 수호는 연두의 눈을 잠깐 쳐다보다 담임 몰래 속삭였다.
“이거, 플러스 2가 아니고 마이너스 2로 해야지.”
마이너스로 풀고 답을 보니 수호의 말대로였다. 나누는 수가 왜 마이너스냐고 묻고 싶었는데, 물어봤다간 화라도 낼까 봐 입을 다물었다. 질문 대신 수학 교과서 끄트머리에 세 글자를 적어 자신의 짝꿍에게 보란 듯 내밀었다.
[고마워]
아까부터 눈도 맞추지 않는 연두를 향해 수호는 혼자 피식 웃었다.
***
자율 학습 시간 동안 연두는 몰래 전학생을 훔쳐봤다. 전학생은 책도 없었고, 거기다 말도 없는 연두의 짝이 된 게 영 불만이었는지 책상 밑에서 폰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책상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키가 커서 불편한지 의자를 몇 차례 뒤로 뺐다. 연두가 앉은 자리보다 두 배는 멀리에 의자를 놓고 상체를 숙였다. 몇 번 몸을 들썩거리더니 이번에는 팔을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편해 보였다.
책상 위에 볼을 붙인 수호가 눈을 꾹 감자 연두는 이 때다 싶어 수호의 얼굴을 대놓고 봤다. 잘생긴 서울 전학생은 피부까지 좋았다. 너무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은 피부는 여드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서울 애들은 다 이럴까. 만지면 어쩐지 할매의 오래된 밍크코트처럼 부들부들한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연두는 괜히 자신의 창백한 손을 내려다봤다.
반의 반쪽짜리 혼혈이라고는 해도 얼굴색과 눈동자가 엄마와 똑같았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피부가 너무 허옜고 눈은 너무 노랬다. 한국 사람처럼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백인처럼도 안 보였다. 그나마 짙은 머리색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색이 옅었다. 외계인 같았다.
조금만 더 까매졌으면 하고 바랐다. 건강해 보이게, 한국 사람처럼 보이게. 그래서 작년 여름에는 일부러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녔는데, 땅보다 해가 더 가까운 달동네의 고도는 피부를 까만 게 아니라 빨갛게 만들었다. 할매는 벌겋게 익은 연두의 얼굴에 오이 팩을 해 주며,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다 시꺼멓게 타면 *튀기(주석) 소리 듣기 딱 좋겠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건강해 보이는 수호의 피부가 부러웠다. 햇빛을 머금어도 여전히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썹도 좀 부러웠다. 자세히 보니 속눈썹 색도 짙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생김새에 넋을 뺀 사이 수호가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연두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화내면 어떡하지. 징그럽다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수호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신기하네.”
수호는 딱 그 말만 하고는 늘어뜨렸던 팔을 들어 올려 그 안에 고개를 묻었다. 연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두야, 안녕.’ 하던 수호의 말이 귓바퀴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
0교시 수업이 끝나고 1교시로 넘어가기 전의 짧은 10분이었다. 아이들이 수호가 앉은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대놓고 몸을 돌려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은 가만히 엎드려만 있어도 이목을 끌었다. 단지 서울에서 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분명 목포의 다른 중학교에서 왔대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다. 연두는 정확히 쉬는 시간이 시작되기 1분 전에 방금 전의 수호처럼 고개를 팔에 묻었다.
가장 먼저 수호의 책상에 엉덩이를 붙인 건 김혁이었다. 쭉 찢어지고 사납게 생긴 김혁은 잘생긴 이름과는 영 딴판이었다. 혁을 필두로 중학교에서 잘나가기로 유명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수호의 주변에 몰렸다. 김혁이 특유의 쇠 긁는 듯한 목소리로 전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최수호? 니 허뻐 잘생겼다잉. 서울 어디서 왔냐? 내 사촌도 서울 산디.”
“아, 진짜? 난 강남 쪽에서 왔어. 사촌도 서울 살아? 이름이 뭔데.”
“와, 씨발. 표준말 존나 소름 돋는다. 김태성인디. 알어? 지 말로는 서울서 존나 잘나간다 하든디.”
“글쎄, 들어 본 적 없는데. 친구한테 물어볼게. 넌 이름이 뭐야?”
통성명이 이어졌다. 고개를 파묻고 아직 잠들지 않은 연두는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김혁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시끄럽기만 했다. 가래가 잔뜩 낀 쉰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자기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누가 들어도 싫어할 목소리였다.
10분이라도 억지로 잠들어 보려고 눈을 질끈 감는데, 그새를 못 참고 김혁이 “야, 자냐?” 하며 연두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여기서 한마디라도 했다간 더 심한 반응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연두는 대꾸하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자는 체를 계속했다.
“두부 새끼 존나 자는 척하네. 있냐. 니도 존나 짠하다. 전학 오자마자 왜 하필 이 새끼 옆에 앉냐. 자리 바까 주까?”
연두보고 들으라는 듯 혁이 목소리를 키웠다. 수호가 눈썹을 한쪽 올리나 싶더니 표정을 고쳤다. 웃는 얼굴이었다.
“아냐, 괜찮아. 근데 얘 별명이 두부야? 왜?”
“어. 이 병신 새끼 두부만 처먹으면 토하거든. 존나 역겨워.”
“그렇구나. 난 또 하얘서 두부라는 줄 알았어.”
두부 새끼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 그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수호가 다정하고 착해 보여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그른 모양이었다. 김혁 때문이었다. 얻어맞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까지 못 사귀게 된 건 억울했다. 연두는 팔 밑에 달아오른 눈가를 숨겼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는데 소란스러워서 계속 못 잤다. 듣기 싫어도 귀가 계속 쫑긋거렸다. 전학생은 키가 183센티미터라고 했다. 헐, 하며 김혁이 감탄하자 익숙한 듯 부모님이 다 키가 크다고 답했다.
김혁 무리는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평화라고 싸이 투데이가 200명이 넘는 애도 전학생을 보며 잘생겼다, 키도 크다 하며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얼핏 듣자하니 수호의 싸이는 투데이가 천이 넘는다고 했다. 유명한 얼짱하고 일촌이라며 애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수호는 오자마자 반 친구들 여럿에게 핸드폰 번호를 따였다. 핸드폰도 미니 홈피도 없는 연두는 결국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도망쳤다.
“어차피 이번 주에 자리 바꾸긴 한디, 저 새끼랑 앉기 싫으믄 나한테 얘기해. 내 짝꿍이 바까 준대. 호성아! 그치?”
뒤에서 괜히 자기 짝을 부르며 센 척을 하는 혁의 말소리가 들렸다.
연두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예비 종소리가 나고도 숫자를 백까지 세고 교실로 돌아갔다. 복도가 가까운 맨 끝자리는 어느새 조용했다. 수호는 자기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연두가 터덜터덜 걸어 자리에 앉자 그를 지켜보던 수호가 핸드폰을 탁, 소리가 나게 접어 닫았다.
“혁이 되게 시끄럽다.”
“어?”
이제 두 번 다시 말을 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호는 처음과 똑같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는 김혁더러 시끄럽다고까지 했다.
“나 사실 시끄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나, 나도 그래. 조용한 게 좋아.”
연두는 기뻤다. 그렇지만 너무 대놓고 좋아하면 수호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입꼬리를 열심히 내렸다. 억양에 사투리가 묻어나올까 봐 조심도 했다.
“근데 혹시 혼혈이야? 애들이 그러던데.”
“응……. 외할아버지가 러시아 분이셔.”
“어쩐지. 눈동자 색깔 되게 예쁘다.”
1. 열일곱 봄 (2)
김혁은 초등학교 때부터의 악연이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두부를 왈칵 토한 날,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김혁이 연두의 코에 쌍코피를 터뜨렸다.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까지 같은 중학교를 나왔다. 그나마 중학교 때는 다른 반이었는데, 고등학교 입학식 날 받은 배정표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어서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름이 연두야? 성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연두가 우물쭈물하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짧은 말인데도 사투리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강……. 강연두.”
“그렇구나, 난 최수호. 반가워, 친하게 지내자. 근데…….”
말씨가 어쩜 이렇게 곱지. 할매가 곱다, 곱다 할 때마다 ‘곱다’와 ‘예쁘다’의 차이가 뭔지 궁금했는데, 연두는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서울 전학생의 말투가 바로 고운 거였다. 귓바퀴가 괜히 간지러웠다.
“전학생아, 잡담은 이따 쉬는 시간에 해라잉. 느그 담임 아직 말 다 안 끝내쓰.”
“아. 네!”
수호의 말을 담임이 끊었다. 수호는 짧고 적당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연두를 향해 씩 웃었다. 시원시원한 입매 안으로 보이는 치아가 하얗고 가지런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번 주에 연합 학력 평가가 있을 거라고 했다. 연두는 담임의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짝꿍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아직 다 못 푼 수학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수호가 노트 위에 숫자들을 꾹꾹 눌러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연두의 흰 손을 흘깃 쳐다봤다. 샤프를 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숫자 하나마다 노트가 깊게 패여 들어갔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호가 오른쪽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연두의 책상이었다.
대뜸 기다란 손가락이 책상을 침범하자 연두가 휙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안경알 안쪽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빛났다. 색깔이 밝아 눈알 안쪽까지 다 비쳤다. 수호는 연두의 눈을 잠깐 쳐다보다 담임 몰래 속삭였다.
“이거, 플러스 2가 아니고 마이너스 2로 해야지.”
마이너스로 풀고 답을 보니 수호의 말대로였다. 나누는 수가 왜 마이너스냐고 묻고 싶었는데, 물어봤다간 화라도 낼까 봐 입을 다물었다. 질문 대신 수학 교과서 끄트머리에 세 글자를 적어 자신의 짝꿍에게 보란 듯 내밀었다.
[고마워]
아까부터 눈도 맞추지 않는 연두를 향해 수호는 혼자 피식 웃었다.
***
자율 학습 시간 동안 연두는 몰래 전학생을 훔쳐봤다. 전학생은 책도 없었고, 거기다 말도 없는 연두의 짝이 된 게 영 불만이었는지 책상 밑에서 폰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책상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키가 커서 불편한지 의자를 몇 차례 뒤로 뺐다. 연두가 앉은 자리보다 두 배는 멀리에 의자를 놓고 상체를 숙였다. 몇 번 몸을 들썩거리더니 이번에는 팔을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편해 보였다.
책상 위에 볼을 붙인 수호가 눈을 꾹 감자 연두는 이 때다 싶어 수호의 얼굴을 대놓고 봤다. 잘생긴 서울 전학생은 피부까지 좋았다. 너무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은 피부는 여드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서울 애들은 다 이럴까. 만지면 어쩐지 할매의 오래된 밍크코트처럼 부들부들한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연두는 괜히 자신의 창백한 손을 내려다봤다.
반의 반쪽짜리 혼혈이라고는 해도 얼굴색과 눈동자가 엄마와 똑같았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피부가 너무 허옜고 눈은 너무 노랬다. 한국 사람처럼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백인처럼도 안 보였다. 그나마 짙은 머리색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색이 옅었다. 외계인 같았다.
조금만 더 까매졌으면 하고 바랐다. 건강해 보이게, 한국 사람처럼 보이게. 그래서 작년 여름에는 일부러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녔는데, 땅보다 해가 더 가까운 달동네의 고도는 피부를 까만 게 아니라 빨갛게 만들었다. 할매는 벌겋게 익은 연두의 얼굴에 오이 팩을 해 주며,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다 시꺼멓게 타면 *튀기(주석) 소리 듣기 딱 좋겠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건강해 보이는 수호의 피부가 부러웠다. 햇빛을 머금어도 여전히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썹도 좀 부러웠다. 자세히 보니 속눈썹 색도 짙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생김새에 넋을 뺀 사이 수호가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연두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화내면 어떡하지. 징그럽다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수호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신기하네.”
수호는 딱 그 말만 하고는 늘어뜨렸던 팔을 들어 올려 그 안에 고개를 묻었다. 연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두야, 안녕.’ 하던 수호의 말이 귓바퀴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
0교시 수업이 끝나고 1교시로 넘어가기 전의 짧은 10분이었다. 아이들이 수호가 앉은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대놓고 몸을 돌려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전학생은 가만히 엎드려만 있어도 이목을 끌었다. 단지 서울에서 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분명 목포의 다른 중학교에서 왔대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다. 연두는 정확히 쉬는 시간이 시작되기 1분 전에 방금 전의 수호처럼 고개를 팔에 묻었다.
가장 먼저 수호의 책상에 엉덩이를 붙인 건 김혁이었다. 쭉 찢어지고 사납게 생긴 김혁은 잘생긴 이름과는 영 딴판이었다. 혁을 필두로 중학교에서 잘나가기로 유명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수호의 주변에 몰렸다. 김혁이 특유의 쇠 긁는 듯한 목소리로 전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최수호? 니 허뻐 잘생겼다잉. 서울 어디서 왔냐? 내 사촌도 서울 산디.”
“아, 진짜? 난 강남 쪽에서 왔어. 사촌도 서울 살아? 이름이 뭔데.”
“와, 씨발. 표준말 존나 소름 돋는다. 김태성인디. 알어? 지 말로는 서울서 존나 잘나간다 하든디.”
“글쎄, 들어 본 적 없는데. 친구한테 물어볼게. 넌 이름이 뭐야?”
통성명이 이어졌다. 고개를 파묻고 아직 잠들지 않은 연두는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 김혁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시끄럽기만 했다. 가래가 잔뜩 낀 쉰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자기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누가 들어도 싫어할 목소리였다.
10분이라도 억지로 잠들어 보려고 눈을 질끈 감는데, 그새를 못 참고 김혁이 “야, 자냐?” 하며 연두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여기서 한마디라도 했다간 더 심한 반응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연두는 대꾸하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자는 체를 계속했다.
“두부 새끼 존나 자는 척하네. 있냐. 니도 존나 짠하다. 전학 오자마자 왜 하필 이 새끼 옆에 앉냐. 자리 바까 주까?”
연두보고 들으라는 듯 혁이 목소리를 키웠다. 수호가 눈썹을 한쪽 올리나 싶더니 표정을 고쳤다. 웃는 얼굴이었다.
“아냐, 괜찮아. 근데 얘 별명이 두부야? 왜?”
“어. 이 병신 새끼 두부만 처먹으면 토하거든. 존나 역겨워.”
“그렇구나. 난 또 하얘서 두부라는 줄 알았어.”
두부 새끼라는 별명을 붙인 장본인이 그 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수호가 다정하고 착해 보여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그른 모양이었다. 김혁 때문이었다. 얻어맞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친구까지 못 사귀게 된 건 억울했다. 연두는 팔 밑에 달아오른 눈가를 숨겼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는데 소란스러워서 계속 못 잤다. 듣기 싫어도 귀가 계속 쫑긋거렸다. 전학생은 키가 183센티미터라고 했다. 헐, 하며 김혁이 감탄하자 익숙한 듯 부모님이 다 키가 크다고 답했다.
김혁 무리는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평화라고 싸이 투데이가 200명이 넘는 애도 전학생을 보며 잘생겼다, 키도 크다 하며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얼핏 듣자하니 수호의 싸이는 투데이가 천이 넘는다고 했다. 유명한 얼짱하고 일촌이라며 애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수호는 오자마자 반 친구들 여럿에게 핸드폰 번호를 따였다. 핸드폰도 미니 홈피도 없는 연두는 결국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도망쳤다.
“어차피 이번 주에 자리 바꾸긴 한디, 저 새끼랑 앉기 싫으믄 나한테 얘기해. 내 짝꿍이 바까 준대. 호성아! 그치?”
뒤에서 괜히 자기 짝을 부르며 센 척을 하는 혁의 말소리가 들렸다.
연두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예비 종소리가 나고도 숫자를 백까지 세고 교실로 돌아갔다. 복도가 가까운 맨 끝자리는 어느새 조용했다. 수호는 자기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연두가 터덜터덜 걸어 자리에 앉자 그를 지켜보던 수호가 핸드폰을 탁, 소리가 나게 접어 닫았다.
“혁이 되게 시끄럽다.”
“어?”
이제 두 번 다시 말을 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수호는 처음과 똑같이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는 김혁더러 시끄럽다고까지 했다.
“나 사실 시끄러운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나, 나도 그래. 조용한 게 좋아.”
연두는 기뻤다. 그렇지만 너무 대놓고 좋아하면 수호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입꼬리를 열심히 내렸다. 억양에 사투리가 묻어나올까 봐 조심도 했다.
“근데 혹시 혼혈이야? 애들이 그러던데.”
“응……. 외할아버지가 러시아 분이셔.”
“어쩐지. 눈동자 색깔 되게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