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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6화
1. 열일곱 봄 (6)
부엌보다는 수압이 나오는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찬물에 놓고 돌렸다. 호스를 통해 찬물이 쏟아졌다. 물을 불리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4인 가족이 씻을 물이었다.
연두는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 기억부터 이미 가난했다. 여태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후로는 더 가난해졌다. 중학교 입학식과 동시에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고, 연두는 그 해 유달동 판자촌으로 이사를 왔다. 그 뒤로 살림살이는 점점 더 가난해졌다.
술을 마시면 손찌검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아버지가 돈을 벌던 때가 조금 더 나았다. 좀 덜하다 뿐이지 손찌검을 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판자촌의 겨울은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혹독했다. 2005년의 겨울은 특히 추웠다. 매년 오는 눈이지만, 작년에는 말 그대로 폭설이었다. 학교에 가다 집 앞 돌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동사무소에서 나눠 주는 연탄은 고마웠지만, 그걸로 겨울을 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기왕 주는 김에 LPG도 한 통씩 적선해 줬으면 싶었다. 전기장판도 어디서 넓은 걸로 바꿔 줬으면 싶었다. 아니, 어디 남는 집이 있으면 그 집을 줬으면 싶었다. 부끄러워 말로 뱉지는 못했다.
가난은 열일곱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염치없게 만들었다.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연두의 속눈썹에 맺혔다. 손을 담가 보니 물 온도가 적당히 따뜻했다.
“엄마, 인나. 출근한담서.”
연두가 안방 문을 소리 없이 열고 잠든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색이 연한 눈썹을 찡긋거리던 그녀가 눈을 껌뻑거리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엄마 입으로 젊을 때는 자기가 브룩 쉴즈와 똑같았다던데, 지금은 그냥 서양 아줌마로밖에 안 보였다.
“목욕물 받아 놨어. 씻어.”
“응. 아들, 고마워.”
어눌한 한국말로 연두를 부른 그녀가 아들의 볼에 자신의 퍼석한 볼을 붙이고 입으로 짧게 쪽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할매는 어휴, 하고 길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화투로 시선을 돌렸다.
다 쉬어 빠진 김치, 말라비틀어진 멸치와 콩자반, 엉성하게 끓인 찌개가 밥상의 전부였지만 엄마는 밥을 털어 넣으면서 “고마워, 연두. 내 아들.” 하고 말했다. 연두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싫었지만, 엄마의 입에서 이렇게 제 이름이 어눌하게 튀어나오는 순간들은 좋아했다.
초등학교 애들이 제 이름 끝자리에 부를 붙여 두부 새끼라고 놀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엄마가 항상 낮 시간에 잠들어 있어서 할매에게 왜 하필 자기 이름이 연두냐고 물었다. 연두는 그 때 밖에서 이미 한바탕 울고 들어왔고, 그 꼴을 본 할매가 연두를 안아 주며 그랬다.
‘느그 애미가 연두색을 좋아해 가꼬 그랬단다. 니 애미 젊을 때 사진 안 봤냐? 미친년 맨치로 고놈의 연두색 남방만 쳐 입고 댕기디, 안. 하여튼 저 망할 년이 씨엄씨 무선 줄을 몰라 갖고……. 느그 애비랑 둘이 동사무소 가 갖고 신고를 해 부렀어.’
할매는 그때 일이 아직도 분했던지 콧김까지 씩씩거리며 성을 냈었다. 하지만 막상 이름의 당사자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눈물을 그쳤다. 달동네 문턱에 사는 강아지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 붙인 연두는 어머니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어쩌면 강아지가 꾀돌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두의 엄마가 출근 준비를 할 때면 할매는 습관처럼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아무리 못난 막둥이였다지만 보도방 아가씨와 눈이 맞아 집으로 끌고 올 줄은 몰랐다. 그 아가씨가 외국 아가씨인 줄은 더욱이 몰랐고, 그 아가씨 배 속에 손주 새끼가 자라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밥투정 없이 식사를 마친 그녀는 구두 굽이 몇 번이나 떨어져 본드로 얼기설기 붙여 놓은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나서야 연두는 숟가락을 들었다. 기껏 끓여 놓은 된장찌개 대신 김치와 김에다만 밥을 먹었다. 할매는 연두의 밥그릇에 자기 몫의 감자를 올려 주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쿠린내가 집 전체에 번지기 시작했다.
“야, 이 호로 새끼야. 밥을 쳐 했으면 사람을 불러야제.”
어느새 술기운이 가신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더니 밥을 먹고 있던 연두의 뒤통수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려쳤다. 말라빠진 손은 김혁의 손보다 훨씬 아팠다.
“에이, 지미……. 씨벌년. 예배당은 그렇게 가재도 안 가는 년이 몸은 팔고 싶은 갑네.”
아버지는 제 주제도 모르고 또 욕을 했다. 대상은 말하지 않아도 엄마일 게 뻔했다. 개새끼. 연두는 속으로 욕하고 남은 밥을 해치웠다. 저녁을 먹고, 목욕 순서가 돌아오는 동안에는 교복을 다렸다.
어서 학교에 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얼른 친구가 보고 싶었다.
<2006. 03. 13. 월요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담임이 자신 과목인 영어를 좀 일찍 마쳤다. 1년간 학급을 이끌어 갈 반장, 부반장을 뽑겠다고 했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수호가 추천으로 후보에 올랐다. 중학교 때도 반장, 부반장을 했다는 모양이었다. 저 앞자리에 앉은 이평화가 수호를 추천했다.
수호는 각오를 발표하러 나간 교탁 앞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간식은 많이 쏘겠다 했다. 고등학생들에게는 그게 가장 확실한 공약이었다.
연두는 쪽지에 ‘반장: 최수호, 부반장: 박선재’를 썼다. 선재는 자기와 비슷한 조용한 느낌의 안경잡이였다. 수호가 스물여덟 표를 받아 반장이 됐다. 담임이 어지간히 귀찮은 걸 싫어해서 부반장 선거는 따로 안 했다. 반장 후보로 나온 세 명 중 1등은 반장, 2등은 부반장을 시켰다.
담임이 당선 소감을 발표하라고 하자 수호는 별 긴장도 않고 단상에 서 천연덕스럽게 감사 인사와 포부를 전했다. 말을 더듬지도 않고, 그 흔한 ‘음…….’ 소리도 안 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도 있다.’라는 간디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간지러운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했다.
연두더러 신기하다더니 알면 알수록 신기한 짝꿍이었다. 수호는 자리에 돌아와 앉더니 연두에게 속삭였다.
“연두야, 간식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
3교시에서 4교시 사이에 간식으로 햄버거가 배달됐다. 점심시간이 머지않았지만, 이 시간이 되면 고등학생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수호는 애들에게 햄버거를 다 나눠 준 후에야 자리로 돌아와 자기 몫을 먹었다. 한참 늦게 시작했는데 연두보다 두 배는 빨리 먹었다.
“그렇게 먹다 체하겠다.”
할매를 따라 뭐든 꼭꼭 씹어 먹는 연두가 수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말을 좀 잘 한 것 같아 뿌듯했다.
“너야말로 그렇게 먹다 나한테 뺏긴다?”
수호가 눈가를 접고 웃었다. 햄버거가 더 먹고 싶은가 해서 먹다 남은 햄버거를 수호에게 내밀었더니 뭐에 웃음이 터졌는지 혼자 또 웃었다. 표정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됐어, 너 먹어.”
수호는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남은 콜라를 쪽 빨아 마시며 연두를 쳐다봤다.
4교시는 문학이었다. 국어 선생님은 키가 컸다. 아마 수호보다 조금 더 크거나 비슷해 보였다.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이라는 시를 배웠는데, 배가 불러 그런지 꾸벅꾸벅 연두의 고개가 자꾸 떨어졌다. 수호는 국어 선생님이 이쪽을 향할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연두를 쿡쿡 찔러 깨웠다.
샤프 뒤로 찔릴 때마다 연두는 몸을 움찔하며 튀었다. 세 번째 찔렸을 때 수호가 책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문학 교과서 끝에 ‘두부 잔다.’ 하고 흔적을 남겼다. 옆에는 네모반듯한 두부를 그려 넣었다. 두부에 감은 눈을 그리고 위에는 ‘ZZZ’를 썼다. 연두는 용기를 내서 쥐고 있던 연필을 문학 교과서로 옮겼다.
[잠 와.]
[ㅋㅋ졸려?]
[응. 잠 와.]
수호가 알려 주기 전까지 연두는 잠 오다가 사투리인 걸 몰랐다.
그 뒤로도 두 번 정도 낙서가 오갔는데, 연두가 완전히 고개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는 점심시간이었다.
***
수호는 반 아이들과 두루두루 다 친했다. 시끄럽고 애가 못돼서 그렇지 잘나가는 애들과는 친화력이 좋은 김혁이 점심시간마다 수호를 제 무리에 끼워 넣었다. 오늘도 그랬다. 그에 비해 연두는 오늘도 혼자였다.
오늘 점심 메뉴는 그래도 저번 주보단 좀 나았다. 된장이 들어간 게 없어서 골고루 먹었다. 소불고기가 나와서 연두 혼자 천천히 먹고 교실로 향했다. 수호랑 조금 친해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진짜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밥을 같이 안 먹었다.
용기만 좀 있었으면 밥을 같이 먹자고 할 텐데……. 수호는 착하니까 거절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용기를 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연두는 교실로 바로 가려다 교무실에 잠깐 들렀다. 담임이 생활 수급자 지원 신청 서류를 쓰라고 했다. 사인을 하고 가려는데 담임이 박카스 하고 빵을 줬다. 하필 땅콩 빵이었다. 못 먹는데. 연두는 가져가서 할매나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담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1. 열일곱 봄 (6)
부엌보다는 수압이 나오는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찬물에 놓고 돌렸다. 호스를 통해 찬물이 쏟아졌다. 물을 불리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4인 가족이 씻을 물이었다.
연두는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 기억부터 이미 가난했다. 여태 가난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후로는 더 가난해졌다. 중학교 입학식과 동시에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았고, 연두는 그 해 유달동 판자촌으로 이사를 왔다. 그 뒤로 살림살이는 점점 더 가난해졌다.
술을 마시면 손찌검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아버지가 돈을 벌던 때가 조금 더 나았다. 좀 덜하다 뿐이지 손찌검을 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판자촌의 겨울은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혹독했다. 2005년의 겨울은 특히 추웠다. 매년 오는 눈이지만, 작년에는 말 그대로 폭설이었다. 학교에 가다 집 앞 돌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삔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동사무소에서 나눠 주는 연탄은 고마웠지만, 그걸로 겨울을 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기왕 주는 김에 LPG도 한 통씩 적선해 줬으면 싶었다. 전기장판도 어디서 넓은 걸로 바꿔 줬으면 싶었다. 아니, 어디 남는 집이 있으면 그 집을 줬으면 싶었다. 부끄러워 말로 뱉지는 못했다.
가난은 열일곱 살짜리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염치없게 만들었다.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연두의 속눈썹에 맺혔다. 손을 담가 보니 물 온도가 적당히 따뜻했다.
“엄마, 인나. 출근한담서.”
연두가 안방 문을 소리 없이 열고 잠든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색이 연한 눈썹을 찡긋거리던 그녀가 눈을 껌뻑거리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엄마 입으로 젊을 때는 자기가 브룩 쉴즈와 똑같았다던데, 지금은 그냥 서양 아줌마로밖에 안 보였다.
“목욕물 받아 놨어. 씻어.”
“응. 아들, 고마워.”
어눌한 한국말로 연두를 부른 그녀가 아들의 볼에 자신의 퍼석한 볼을 붙이고 입으로 짧게 쪽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할매는 어휴, 하고 길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화투로 시선을 돌렸다.
다 쉬어 빠진 김치, 말라비틀어진 멸치와 콩자반, 엉성하게 끓인 찌개가 밥상의 전부였지만 엄마는 밥을 털어 넣으면서 “고마워, 연두. 내 아들.” 하고 말했다. 연두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싫었지만, 엄마의 입에서 이렇게 제 이름이 어눌하게 튀어나오는 순간들은 좋아했다.
초등학교 애들이 제 이름 끝자리에 부를 붙여 두부 새끼라고 놀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엄마가 항상 낮 시간에 잠들어 있어서 할매에게 왜 하필 자기 이름이 연두냐고 물었다. 연두는 그 때 밖에서 이미 한바탕 울고 들어왔고, 그 꼴을 본 할매가 연두를 안아 주며 그랬다.
‘느그 애미가 연두색을 좋아해 가꼬 그랬단다. 니 애미 젊을 때 사진 안 봤냐? 미친년 맨치로 고놈의 연두색 남방만 쳐 입고 댕기디, 안. 하여튼 저 망할 년이 씨엄씨 무선 줄을 몰라 갖고……. 느그 애비랑 둘이 동사무소 가 갖고 신고를 해 부렀어.’
할매는 그때 일이 아직도 분했던지 콧김까지 씩씩거리며 성을 냈었다. 하지만 막상 이름의 당사자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눈물을 그쳤다. 달동네 문턱에 사는 강아지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과자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 붙인 연두는 어머니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어쩌면 강아지가 꾀돌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두의 엄마가 출근 준비를 할 때면 할매는 습관처럼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아무리 못난 막둥이였다지만 보도방 아가씨와 눈이 맞아 집으로 끌고 올 줄은 몰랐다. 그 아가씨가 외국 아가씨인 줄은 더욱이 몰랐고, 그 아가씨 배 속에 손주 새끼가 자라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밥투정 없이 식사를 마친 그녀는 구두 굽이 몇 번이나 떨어져 본드로 얼기설기 붙여 놓은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나서야 연두는 숟가락을 들었다. 기껏 끓여 놓은 된장찌개 대신 김치와 김에다만 밥을 먹었다. 할매는 연두의 밥그릇에 자기 몫의 감자를 올려 주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쿠린내가 집 전체에 번지기 시작했다.
“야, 이 호로 새끼야. 밥을 쳐 했으면 사람을 불러야제.”
어느새 술기운이 가신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더니 밥을 먹고 있던 연두의 뒤통수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려쳤다. 말라빠진 손은 김혁의 손보다 훨씬 아팠다.
“에이, 지미……. 씨벌년. 예배당은 그렇게 가재도 안 가는 년이 몸은 팔고 싶은 갑네.”
아버지는 제 주제도 모르고 또 욕을 했다. 대상은 말하지 않아도 엄마일 게 뻔했다. 개새끼. 연두는 속으로 욕하고 남은 밥을 해치웠다. 저녁을 먹고, 목욕 순서가 돌아오는 동안에는 교복을 다렸다.
어서 학교에 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얼른 친구가 보고 싶었다.
<2006. 03. 13. 월요일>
오전 9시 30분이었다. 담임이 자신 과목인 영어를 좀 일찍 마쳤다. 1년간 학급을 이끌어 갈 반장, 부반장을 뽑겠다고 했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수호가 추천으로 후보에 올랐다. 중학교 때도 반장, 부반장을 했다는 모양이었다. 저 앞자리에 앉은 이평화가 수호를 추천했다.
수호는 각오를 발표하러 나간 교탁 앞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간식은 많이 쏘겠다 했다. 고등학생들에게는 그게 가장 확실한 공약이었다.
연두는 쪽지에 ‘반장: 최수호, 부반장: 박선재’를 썼다. 선재는 자기와 비슷한 조용한 느낌의 안경잡이였다. 수호가 스물여덟 표를 받아 반장이 됐다. 담임이 어지간히 귀찮은 걸 싫어해서 부반장 선거는 따로 안 했다. 반장 후보로 나온 세 명 중 1등은 반장, 2등은 부반장을 시켰다.
담임이 당선 소감을 발표하라고 하자 수호는 별 긴장도 않고 단상에 서 천연덕스럽게 감사 인사와 포부를 전했다. 말을 더듬지도 않고, 그 흔한 ‘음…….’ 소리도 안 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도 있다.’라는 간디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간지러운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했다.
연두더러 신기하다더니 알면 알수록 신기한 짝꿍이었다. 수호는 자리에 돌아와 앉더니 연두에게 속삭였다.
“연두야, 간식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
3교시에서 4교시 사이에 간식으로 햄버거가 배달됐다. 점심시간이 머지않았지만, 이 시간이 되면 고등학생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수호는 애들에게 햄버거를 다 나눠 준 후에야 자리로 돌아와 자기 몫을 먹었다. 한참 늦게 시작했는데 연두보다 두 배는 빨리 먹었다.
“그렇게 먹다 체하겠다.”
할매를 따라 뭐든 꼭꼭 씹어 먹는 연두가 수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말을 좀 잘 한 것 같아 뿌듯했다.
“너야말로 그렇게 먹다 나한테 뺏긴다?”
수호가 눈가를 접고 웃었다. 햄버거가 더 먹고 싶은가 해서 먹다 남은 햄버거를 수호에게 내밀었더니 뭐에 웃음이 터졌는지 혼자 또 웃었다. 표정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됐어, 너 먹어.”
수호는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남은 콜라를 쪽 빨아 마시며 연두를 쳐다봤다.
4교시는 문학이었다. 국어 선생님은 키가 컸다. 아마 수호보다 조금 더 크거나 비슷해 보였다. 김동명 시인의 ‘내 마음’이라는 시를 배웠는데, 배가 불러 그런지 꾸벅꾸벅 연두의 고개가 자꾸 떨어졌다. 수호는 국어 선생님이 이쪽을 향할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연두를 쿡쿡 찔러 깨웠다.
샤프 뒤로 찔릴 때마다 연두는 몸을 움찔하며 튀었다. 세 번째 찔렸을 때 수호가 책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문학 교과서 끝에 ‘두부 잔다.’ 하고 흔적을 남겼다. 옆에는 네모반듯한 두부를 그려 넣었다. 두부에 감은 눈을 그리고 위에는 ‘ZZZ’를 썼다. 연두는 용기를 내서 쥐고 있던 연필을 문학 교과서로 옮겼다.
[잠 와.]
[ㅋㅋ졸려?]
[응. 잠 와.]
수호가 알려 주기 전까지 연두는 잠 오다가 사투리인 걸 몰랐다.
그 뒤로도 두 번 정도 낙서가 오갔는데, 연두가 완전히 고개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는 점심시간이었다.
***
수호는 반 아이들과 두루두루 다 친했다. 시끄럽고 애가 못돼서 그렇지 잘나가는 애들과는 친화력이 좋은 김혁이 점심시간마다 수호를 제 무리에 끼워 넣었다. 오늘도 그랬다. 그에 비해 연두는 오늘도 혼자였다.
오늘 점심 메뉴는 그래도 저번 주보단 좀 나았다. 된장이 들어간 게 없어서 골고루 먹었다. 소불고기가 나와서 연두 혼자 천천히 먹고 교실로 향했다. 수호랑 조금 친해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진짜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밥을 같이 안 먹었다.
용기만 좀 있었으면 밥을 같이 먹자고 할 텐데……. 수호는 착하니까 거절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용기를 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연두는 교실로 바로 가려다 교무실에 잠깐 들렀다. 담임이 생활 수급자 지원 신청 서류를 쓰라고 했다. 사인을 하고 가려는데 담임이 박카스 하고 빵을 줬다. 하필 땅콩 빵이었다. 못 먹는데. 연두는 가져가서 할매나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담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