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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7화
1. 열일곱 봄 (7)
교무실에서 나온 후에는 도서실로 향했다. 책을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도서실이 화장실보다 조금 나아서였다. 어차피 교실에 가 봐야 핸드폰도 없고 짝꿍도 요즘 김혁 따라 어딜 그렇게 다니는지 점심시간 직전이나 되어야 돌아왔다.
아무 책이나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읽는데, 내용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는 좋았다.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5교시 종이 치기 딱 15분 전에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은 김혁과 평화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수호는 자리에 없었다. 연두가 앞문으로 들어오자 김혁이 연두를 불러 세웠다.
“야! 강연두. 칠판 좀 지워 줘라.”
‘내가 왜.’ 하고 티라노사우르스에게 한마디를 하기에는 연두가 너무 연약했다. 결국 알았다고 불퉁하게 대답해 놓고 칠판지우개를 집었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 키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다른 데는 다 지웠는데 맨 위에 적힌 필기가 안 지워졌다. 왜 쓸데없이 저렇게 높이 필기를 해 놨는지 모르겠다. 맨 뒷자리까지 자기 의자를 가져오기는 너무 귀찮아 깨금발을 딛고 손을 쭉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살짝 부족해서 낑낑거리고 있자 뒤에서 이평화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 쟤는 이 밑줄까지도 안 닿을 게 뻔한데.’
연두가 팔을 길게 뻗고 애를 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청량한 소다 향이 풍겨 왔다.
“연두야, 도와 달라고 말을 해야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주석)’는 수호의 손에서 지워졌고, 연두의 마음에는 새겨졌다.
<2006. 03. 29. 수요일>
수호가 준 사탕이 아직도 주머니에 남아 있었다.
화이트 데이 날, 마고 1학년 2반으로 사탕 배달이 두 번이나 왔다. 최수호 앞으로 온 배달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발신자가 인터넷에서 유명한 얼짱녀였다. 연두가 수호에게 여친이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아는 누나라고 했다. 그냥 아는 누나가 저렇게 비싼 꽃바구니 사탕을 보내나 싶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수호는 좀 짜증 난 얼굴을 했다. 좀처럼 짜증 난 얼굴은 본 적이 없어 신기했지만 금방 사라졌다. 수호는 받은 사탕을 반 친구들에게 거의 다 나눠 줬다. 연두에게도 줬다. 다 나눠 주고도 열 몇 개가 남았다.
사탕을 마저 처리하기 위해서인지 수호가 불쑥 물어 왔다. 연두는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사탕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매가 매일 사탕을 물고 살았다. 남은 사탕은 전부 연두의 몫이 됐다.
할매에게 사탕을 다 드렸는데, 주머니에 넣어 놨던 먼젓번 사탕은 까먹고 못 드렸다. 벌써 2주째 마이 주머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
오늘은 건강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 밤 12시부터 금식하라고 했는데, 어제 하필 딱 이백 원이 부족해서 알바 가는 길에 빵을 못 사 먹었다. 알바도 눈 돌아가게 바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연두는 밤이 아니라 낮 12시부터 금식이었다. 머리가 좀 어질어질했다.
검진이 있다니까 체육 시간이 미술로 바뀌어서 다행이었다. 미술실로 이동하는데 이번에는 평화가 수호를 데려가 제 옆에 앉혔다. 평화는 수호가 반장이 되고 나서 부쩍 수호에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미술실에 도착하자 물감 냄새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연두는 한 달 동안 관찰한 결과 수호가 못하는 걸 하나 찾았는데, 바로 미술이었다. 수호는 그림을 정말 못 그렸다. 얼마나 못 그리느냐면 미술 선생님이 수호가 그린 초상화를 애들에게 보여 주더니 이게 사람 그린 건 맞느냐 물어볼 정도였다. 오늘은 미술 선생님 대신 평화가 수호를 놀렸다. 안 보여서 몰랐지만 진짜 못 그린 모양이었다.
미술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와 수호의 냄새가 물감 냄새를 덮자 좀 살 것 같았다. 어느새 향기가 많이 옅어져서 아쉬웠지만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연두가 너무 대놓고 킁킁대선지 수호가 “나 냄새나?” 하고 물어봤다.
연두는 괜히 미안해서 아니야, 하고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저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칠 뻔해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3교시가 끝난 후에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수호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수호가 이리 오라며 연두에게 손짓을 했는데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뒷자리 대신 중간 자리에 혼자 앉았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수호 옆에 앉은 김혁이 양예림이라는 누나를 소개시켜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김혁 때문에 버스 뒷자리가 시끌시끌했다.
“나 양예림 존나 좋아한단 말이여. 소개팅 고고.”
“예림이 누나? 남친 있을걸? 잠깐만, 문자 한번 해 볼게.”
“야, 근디 양예림 된장녀 아니냐? 저번에 싸이에다 샤넬 백 샀다고 올려 놨드만. 된장녀 존내 싫은디.”
“그런 말 하지 마. 예림이 누나 그 소리 엄청 싫어해.”
“아니, 씨바. 존나 다 비싼 거만 산께 그라제.”
“누나네 집 잘 살아서 그래. 어? 누나한테 전화 왔다.”
수호가 전화를 받은 후 김혁에게 넘겨준 모양이었다. 혁은 된장녀라고 1초 전에 뒷담화를 하더니 간드러지게 표준어까지 써 가며 “예림이 누나 안녕하세요.” 하고 깍듯이 인사했다. 꼴 보기 싫었다.
연두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한쪽으로 기운 동그란 뒤통수에 수호의 눈길이 닿았다.
***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병원 냄새는 언제 맡아도 별로였다.
여러 가지 검사 중 소변 검사를 먼저 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수호를 만나 좀 창피했다. 수호는 혼혈아의 성기가 궁금했는지 소변기 안쪽을 자꾸 훔쳐보려 했다. 연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변기에 몸을 딱 붙였다. 그래 놓고 저는 수호의 소변기를 슬쩍 봤다.
“와, 씨이발! 존나…… 최수호 개쩐다. 말 새끼냐?”
김혁의 욕이 연두의 감상평을 대신했다.
소변을 제출한 후 피 검사를 하는데 주삿바늘에 찔리자마자 느낌이 이상했다. 메스꺼운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반대쪽 팔을 한 번 더 찔려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피를 뽑은 후 연두가 일어나 걷는데 얼마 못 가 땅바닥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문득 아침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배고프다. 그치?’
‘응. 나 어제 저녁도 못 먹었어.’
‘헐, 진짜? 왜?’
‘알바 바빠서…….’
요즘 짝꿍과의 대화가 익숙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어, 어?”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더니 곧 하얘졌다. 눈이 먼 사람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고 삐이 하는 이명이 울렸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줄줄 샜다. 그대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아 줄 서 있는 아이들 중 하나의 팔을 붙잡았는데, 그게 최수호의 팔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호의 긴 팔이 배를 감쌌다. 그대로 고꾸라졌으면 코가 깨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몸의 고도가 순간 낮아졌다. 등 뒤로 최수호의 무릎이 닿았다. 연두는 수호의 품에 완전히 감싸였다.
“연두야, 괜찮아?”
식은땀이 나면서 안 그래도 허연 얼굴이 허옇다 못해 누래졌다. 귀도 먹먹해져 수호의 말이 잘 안 들렸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기절을 하면 편해질 성싶었는데 기절도 마음대로 안 됐다.
“너 너무 굶어서 당 떨어진 거 아니야? 사탕이라도 먹을래?”
정신이 없었다. 연두는 수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여전히 안 들렸다. 자신이 시선을 어디에 고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멀리서 간호사가 달려왔고,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수호가 교복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껍질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작은 사탕 한 알이 입에 들어왔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입 속에 수호의 손가락이 잠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았다. 화한 맛 사이에 짭쪼름한 소금기가 머물렀다. 금방 사라져 약간 아쉬웠다. 사탕을 볼에 문 채 고개를 위로 해 올려다보는데, 수호가 눈가를 살짝 휜 채 웃고 있었다.
연두는 오늘부터 박하사탕을 가장 좋아하기로 했다.
<2006. 04. 03. 월요일>
“대학교를 안 갈라고야.”
“……네.”
“연두야. 느그 집 사정은 안디……. 그래도 대학은 가는 게 낫어야. 아직 3년이나 남았응게 좀만 공부해서 대불대라도 써 봐. 그라고 선생님이 다른 새끼들이 니 점수 나왔으믄 뚜드러 팼는디, 니는 열심히 사는 거 안께 선생님이 안 때린다잉. 알았제?”
“네.”
힘없는 연두의 대답에 담임은 한숨을 쉬었다.
“가서 재준이 불러온나.”
학력 평가 점수가 엉망이었다. 평균이 60점이 조금 넘었다. 연두에 이어 진로 상담실에 들어갔던 애들 중 몇몇이 엉덩이 한쪽을 부여잡고 어기적거리며 돌아왔다.
어느새 4월이었다. 3월에는 학교와 알바를 오가느라 몸이 힘들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달력이 넘어가자 좀 살 만해졌다. 오전에는 상담이 있었고, 오후에는 건강 검진 결과가 도착했다. 담임이 교탁에서 한 장씩 나눠 줬는데, 연두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결과지를 한참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강연두는 밥 좀 잘 먹어야 쓰겄다.”
선생님의 말에 결과지를 들여다보니 이것저것 쓰여 있는 게 많았다.
[신장: 169.8cm 몸무게: 55kg]
[근육량, 체지방량, 무기질 부족, 저체중]
[Hgb: 11 gdl 빈혈 소견이 보입니다.]
[의사 소견: 대두 알레르기로 인한 영양 부족으로 보입니다. 대체 가능한 식품을 섭취하여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식품: 미역, 김, 해산물류]
빈혈 때문에 병원에서 현기증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수호가 옆에서 보고는 너 되게 말랐다, 라며 웬일로 연두를 놀렸다.
1. 열일곱 봄 (7)
교무실에서 나온 후에는 도서실로 향했다. 책을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도서실이 화장실보다 조금 나아서였다. 어차피 교실에 가 봐야 핸드폰도 없고 짝꿍도 요즘 김혁 따라 어딜 그렇게 다니는지 점심시간 직전이나 되어야 돌아왔다.
아무 책이나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읽는데, 내용이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는 좋았다.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5교시 종이 치기 딱 15분 전에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은 김혁과 평화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수호는 자리에 없었다. 연두가 앞문으로 들어오자 김혁이 연두를 불러 세웠다.
“야! 강연두. 칠판 좀 지워 줘라.”
‘내가 왜.’ 하고 티라노사우르스에게 한마디를 하기에는 연두가 너무 연약했다. 결국 알았다고 불퉁하게 대답해 놓고 칠판지우개를 집었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 키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다른 데는 다 지웠는데 맨 위에 적힌 필기가 안 지워졌다. 왜 쓸데없이 저렇게 높이 필기를 해 놨는지 모르겠다. 맨 뒷자리까지 자기 의자를 가져오기는 너무 귀찮아 깨금발을 딛고 손을 쭉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살짝 부족해서 낑낑거리고 있자 뒤에서 이평화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 쟤는 이 밑줄까지도 안 닿을 게 뻔한데.’
연두가 팔을 길게 뻗고 애를 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청량한 소다 향이 풍겨 왔다.
“연두야, 도와 달라고 말을 해야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주석)’는 수호의 손에서 지워졌고, 연두의 마음에는 새겨졌다.
<2006. 03. 29. 수요일>
수호가 준 사탕이 아직도 주머니에 남아 있었다.
화이트 데이 날, 마고 1학년 2반으로 사탕 배달이 두 번이나 왔다. 최수호 앞으로 온 배달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발신자가 인터넷에서 유명한 얼짱녀였다. 연두가 수호에게 여친이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아는 누나라고 했다. 그냥 아는 누나가 저렇게 비싼 꽃바구니 사탕을 보내나 싶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수호는 좀 짜증 난 얼굴을 했다. 좀처럼 짜증 난 얼굴은 본 적이 없어 신기했지만 금방 사라졌다. 수호는 받은 사탕을 반 친구들에게 거의 다 나눠 줬다. 연두에게도 줬다. 다 나눠 주고도 열 몇 개가 남았다.
사탕을 마저 처리하기 위해서인지 수호가 불쑥 물어 왔다. 연두는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사탕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매가 매일 사탕을 물고 살았다. 남은 사탕은 전부 연두의 몫이 됐다.
할매에게 사탕을 다 드렸는데, 주머니에 넣어 놨던 먼젓번 사탕은 까먹고 못 드렸다. 벌써 2주째 마이 주머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
오늘은 건강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전날 밤 12시부터 금식하라고 했는데, 어제 하필 딱 이백 원이 부족해서 알바 가는 길에 빵을 못 사 먹었다. 알바도 눈 돌아가게 바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연두는 밤이 아니라 낮 12시부터 금식이었다. 머리가 좀 어질어질했다.
검진이 있다니까 체육 시간이 미술로 바뀌어서 다행이었다. 미술실로 이동하는데 이번에는 평화가 수호를 데려가 제 옆에 앉혔다. 평화는 수호가 반장이 되고 나서 부쩍 수호에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미술실에 도착하자 물감 냄새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연두는 한 달 동안 관찰한 결과 수호가 못하는 걸 하나 찾았는데, 바로 미술이었다. 수호는 그림을 정말 못 그렸다. 얼마나 못 그리느냐면 미술 선생님이 수호가 그린 초상화를 애들에게 보여 주더니 이게 사람 그린 건 맞느냐 물어볼 정도였다. 오늘은 미술 선생님 대신 평화가 수호를 놀렸다. 안 보여서 몰랐지만 진짜 못 그린 모양이었다.
미술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와 수호의 냄새가 물감 냄새를 덮자 좀 살 것 같았다. 어느새 향기가 많이 옅어져서 아쉬웠지만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연두가 너무 대놓고 킁킁대선지 수호가 “나 냄새나?” 하고 물어봤다.
연두는 괜히 미안해서 아니야, 하고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저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칠 뻔해서 심장이 콩닥거렸다.
3교시가 끝난 후에는 단체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수호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수호가 이리 오라며 연두에게 손짓을 했는데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뒷자리 대신 중간 자리에 혼자 앉았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수호 옆에 앉은 김혁이 양예림이라는 누나를 소개시켜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김혁 때문에 버스 뒷자리가 시끌시끌했다.
“나 양예림 존나 좋아한단 말이여. 소개팅 고고.”
“예림이 누나? 남친 있을걸? 잠깐만, 문자 한번 해 볼게.”
“야, 근디 양예림 된장녀 아니냐? 저번에 싸이에다 샤넬 백 샀다고 올려 놨드만. 된장녀 존내 싫은디.”
“그런 말 하지 마. 예림이 누나 그 소리 엄청 싫어해.”
“아니, 씨바. 존나 다 비싼 거만 산께 그라제.”
“누나네 집 잘 살아서 그래. 어? 누나한테 전화 왔다.”
수호가 전화를 받은 후 김혁에게 넘겨준 모양이었다. 혁은 된장녀라고 1초 전에 뒷담화를 하더니 간드러지게 표준어까지 써 가며 “예림이 누나 안녕하세요.” 하고 깍듯이 인사했다. 꼴 보기 싫었다.
연두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한쪽으로 기운 동그란 뒤통수에 수호의 눈길이 닿았다.
***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병원 냄새는 언제 맡아도 별로였다.
여러 가지 검사 중 소변 검사를 먼저 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수호를 만나 좀 창피했다. 수호는 혼혈아의 성기가 궁금했는지 소변기 안쪽을 자꾸 훔쳐보려 했다. 연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변기에 몸을 딱 붙였다. 그래 놓고 저는 수호의 소변기를 슬쩍 봤다.
“와, 씨이발! 존나…… 최수호 개쩐다. 말 새끼냐?”
김혁의 욕이 연두의 감상평을 대신했다.
소변을 제출한 후 피 검사를 하는데 주삿바늘에 찔리자마자 느낌이 이상했다. 메스꺼운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반대쪽 팔을 한 번 더 찔려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피를 뽑은 후 연두가 일어나 걷는데 얼마 못 가 땅바닥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문득 아침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배고프다. 그치?’
‘응. 나 어제 저녁도 못 먹었어.’
‘헐, 진짜? 왜?’
‘알바 바빠서…….’
요즘 짝꿍과의 대화가 익숙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어, 어?”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더니 곧 하얘졌다. 눈이 먼 사람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고 삐이 하는 이명이 울렸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줄줄 샜다. 그대로 곤두박질 칠 것 같아 줄 서 있는 아이들 중 하나의 팔을 붙잡았는데, 그게 최수호의 팔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호의 긴 팔이 배를 감쌌다. 그대로 고꾸라졌으면 코가 깨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몸의 고도가 순간 낮아졌다. 등 뒤로 최수호의 무릎이 닿았다. 연두는 수호의 품에 완전히 감싸였다.
“연두야, 괜찮아?”
식은땀이 나면서 안 그래도 허연 얼굴이 허옇다 못해 누래졌다. 귀도 먹먹해져 수호의 말이 잘 안 들렸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기절을 하면 편해질 성싶었는데 기절도 마음대로 안 됐다.
“너 너무 굶어서 당 떨어진 거 아니야? 사탕이라도 먹을래?”
정신이 없었다. 연두는 수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여전히 안 들렸다. 자신이 시선을 어디에 고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멀리서 간호사가 달려왔고,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수호가 교복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껍질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작은 사탕 한 알이 입에 들어왔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입 속에 수호의 손가락이 잠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았다. 화한 맛 사이에 짭쪼름한 소금기가 머물렀다. 금방 사라져 약간 아쉬웠다. 사탕을 볼에 문 채 고개를 위로 해 올려다보는데, 수호가 눈가를 살짝 휜 채 웃고 있었다.
연두는 오늘부터 박하사탕을 가장 좋아하기로 했다.
<2006. 04. 03. 월요일>
“대학교를 안 갈라고야.”
“……네.”
“연두야. 느그 집 사정은 안디……. 그래도 대학은 가는 게 낫어야. 아직 3년이나 남았응게 좀만 공부해서 대불대라도 써 봐. 그라고 선생님이 다른 새끼들이 니 점수 나왔으믄 뚜드러 팼는디, 니는 열심히 사는 거 안께 선생님이 안 때린다잉. 알았제?”
“네.”
힘없는 연두의 대답에 담임은 한숨을 쉬었다.
“가서 재준이 불러온나.”
학력 평가 점수가 엉망이었다. 평균이 60점이 조금 넘었다. 연두에 이어 진로 상담실에 들어갔던 애들 중 몇몇이 엉덩이 한쪽을 부여잡고 어기적거리며 돌아왔다.
어느새 4월이었다. 3월에는 학교와 알바를 오가느라 몸이 힘들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달력이 넘어가자 좀 살 만해졌다. 오전에는 상담이 있었고, 오후에는 건강 검진 결과가 도착했다. 담임이 교탁에서 한 장씩 나눠 줬는데, 연두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결과지를 한참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강연두는 밥 좀 잘 먹어야 쓰겄다.”
선생님의 말에 결과지를 들여다보니 이것저것 쓰여 있는 게 많았다.
[신장: 169.8cm 몸무게: 55kg]
[근육량, 체지방량, 무기질 부족, 저체중]
[Hgb: 11 gdl 빈혈 소견이 보입니다.]
[의사 소견: 대두 알레르기로 인한 영양 부족으로 보입니다. 대체 가능한 식품을 섭취하여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식품: 미역, 김, 해산물류]
빈혈 때문에 병원에서 현기증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수호가 옆에서 보고는 너 되게 말랐다, 라며 웬일로 연두를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