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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10화
1. 열일곱 봄 (10)
멈추고 나서 겨우 숨을 고르는데 사람도 차도 많은 큰 사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까지 온 줄도 몰랐다. 양 무릎에 손을 올리고 건물들의 간판을 눈으로 훑는데, 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걸 포기한 연두는 대로변 홈플러스 건물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대며 지나가는 통에 부끄러웠지만, 모든 체력을 쥐어짠 탓에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너무 뛰어서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맞을 때 벗겨졌나. 이제 보니 안경도 없었다. 눈앞이 흐릿흐릿했다. 연두는 차가운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참 나…….”
헐떡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꼴이 엉망이었다. 아무 신발이나 끌고 나온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닦아 놓은 운동화 대신 한쪽에는 삼선 슬리퍼, 다른 한쪽에는 할매의 갈색 모카신을 신고 나왔다. 이럴 때조차 바보 같다.
계단에서 구르다가 어디 돌부리에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잠옷으로 입던 중학교 체육복은 무릎이 다 찢어져 휑했다. 무릎은 돌바닥에 갈려서 이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연두는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 오늘 그랬을까. 아버지는 간암 말기라면서 힘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자기 꼴이 초라하고 웃겼다. 고개를 뒤로 꺾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찬 공기에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숨을 고르고 나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연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했다. 행인들 중에 키가 아주 큰 남자가 하나 있었다. 흐릿해서 잘 안 보였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너……. 너 강연두야?”
연두의 소원이 그래도 하나는 이루어졌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복 차림의 최수호는 꼭 어른 같았다. 곱게 다려 놓은 제 사복도 집에 있는데, 더 이상 초라할 수 없는 꼴로 수호를 만났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안 울었던 연두는 까만색 아디다스 트랙 톱을 입은 최수호 앞에서 엉엉, 하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연두를 어정쩡하게 안은 수호의 품에서는 알싸한 소주 냄새와 함께 첫날 맡았던 소다 아이스크림 향이 났다.
<2006. 4. 10. 월요일>
“어…… 저기.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울음보가 터진 연두는 쉽게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수호는 한참 동안이나 연두를 안고 달래다 안 되겠는지 몸을 먼저 일으켰다. 그리고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연두는 꺼이꺼이 울며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강한 힘에 끌려 몸이 일으켜졌다. 최수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뜨끈뜨끈했다.
수호의 손에 이끌려 걷는데, 그제야 아픈 게 실감났다. 오랫동안 뛰고도 아픈 줄 몰랐던 다리가 갑자기 아팠다. 연두가 저릿한 고통에 절뚝거리자 수호는 “업어 줄까?” 하고 물었다. 연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연두는 계속 울었다. 우는 게 창피해서 땅을 보고 터덜터덜 걸었다. 짝꿍은 자신의 느린 걸음에 발을 맞춰 주었다.
수호의 집은 용해동에 있는 고층 아파트였다. 유달동에서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몰랐다. 버스를 타도 한 30분은 걸릴 텐데 많이도 왔다. 짝꿍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니 시간이 벌써 12시가 넘어 있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연두네 집과는 달리 현관에서부터 좋은 냄새가 났다.
연두를 안으로 들인 수호는 방으로 가더니 서랍을 뒤져 옷가지를 꺼내 왔다. 항상 태연한 모습이던 수호도 자기 꼴에는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어, 저기……. 이, 일단 좀 씻고 나와. 소독해 줄게.”
수호는 연두를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줬다.
화장실 문을 열고나서 연두는 아픈 걸 잠깐 잊고 기함을 토했다. 화장실이 할매와 연두가 있는 방만 했다. 다 낡아 빠진 다라이가 아니라 넓은 욕조가 있었고, 긴장이 탁 풀릴 만큼 달달한 밀크 커피 향이 났다.
화장실을 둘러보다 맨 마지막으로 본 거울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외계인이 서 있었다. 연두는 히익, 하고 거울에 코를 박았다. 얼굴이 아주 난리였다. 뺨이 팅팅 부어오르고, 눈썹 위가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핏자국이 선명했다. 눈알에는 실핏줄이 터져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 같았다. 김혁 보고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옷을 벗고 나니 더했다.
“세상에…….”
온몸이 멍이었다. 엄마를 감싸면서 팔을 되게도 맞았더니, 팔뚝이 부어 잘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 침착한 수호가 어쩔 줄 몰라 한 게 이해됐다. 이런 꼴을 보였으니 없던 정도 떨어질 게 분명했다. 억울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코를 크게 훌쩍인 연두는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어 서러워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호에게 미안해 몸을 씻었다. 핏물이 한참이나 욕조 바닥에 흘렀다.
***
수호가 건넨 바지는 연두에게 한참 컸다. 반바지를 줬는데, 엉덩이에 겨우 걸쳐졌다. 고무줄이라도 달라고 해서 바지춤을 좀 묶고 싶었다. 하지만 염치가 없어 말을 못 했다.
다 씻고 나가자 수호가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다. 연두는 바지 한쪽을 부여잡고 절뚝거리며 소파에 가 앉았다. 머리를 덜 말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팔이 안 올라가 제대로 못 닦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호가 마른 수건을 하나 가져와 연두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물기가 어느 정도 없어지고 나자 얼굴을 붙잡혔다. 연두는 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부끄러워서 짝꿍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짝에게서는 여전히 소주 냄새가 났다. 아까 아버지에게서도 맡았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소독약을 바르고 그 위에 연고를 덮는 손길이 재작년 응급실의 간호사만큼이나 능숙했다. 다친 데가 하도 많아서 소독도 한참 걸렸다. 다른 건 따끔해도 잘 참았는데, 수호가 다 터진 입술 위에 빨간 약을 발라 줄 때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야…….”
얼굴과 팔다리의 치료가 끝나자 수호가 자연스레 웃옷을 들췄다. 할매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가슴을 보인 건 처음이라 민망했지만, 연두는 그냥 얌전히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상처를 살피는 수호 때문에 그새 심장이 또 콩닥거렸기 때문이었다.
멍이 든 옆구리를 소독하던 수호가 아예 웃통을 벗으라고 했을 때도 시키는 대로 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맨살을 훑자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참느라 혼이 났다. 연두는 짝꿍의 코앞에 배와 가슴을 훤히 드러내놓은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쇄골 주변에 약을 펴 바른 수호가 어깨를 붙잡아 뒤를 돌렸다. 저처럼 긴장이라도 한 걸까. 숨이 좀 떨리는 것 같았다.
수호가 등에 상처가 크게 났다고 말했다. 생각건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그런 것 같았다. 야무진 손이 등에도 커다랗게 거즈를 덧대고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최수호는 의사 선생님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연두야, 혹시 누가 이랬는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어?”
소독을 다 마친 수호가 구급함을 정리하며 물었다. 연두는 사실대로 말했다.
“……아버지가.”
“음…… 그랬구나. 혹시 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을까?”
도와줄 수 있는 거라니. 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걸까. 연두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수호는 질문을 바꿔 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응. 옛날에 몇 번.”
정말 이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같이 밥도 안 먹는 사이인데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그의 눈에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눈에 사로잡히면 무조건 진실만을 토하게 되는 그런 마법.
수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연두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돌이 아니라 바위가, 바위도 보통 바위가 아니라 커다란 영산강 갓바위가 연두의 가슴 한가운데를 꾹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수호가 문득 허벅지로 시선을 돌렸다. 살이 흉하게 접힌 쪽 다리였다.
“이것도 아버지가 그런 거야?”
“아, 아니야. 그거는, 재작년에 물 끓이다가 디, 뎄어.”
디었다고 하려다 연두가 급하게 말을 바꿨다. 누가 들어도 어색한 말소리에 수호가 굳은 얼굴을 풀고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웃으며 구급함을 들고 가더니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푸흐……. 사투리 편하게 써도 돼. 연두야.”
“어?”
“아니, 저번부터 사투리 쓰려다 마는 거 같아서. 혹시 내가 저번에 너무 크게 웃어서 기분 나빠서 그래?”
“아냐, 아냐. 나 원래 밖에서는 사투리 잘 안 써.”
“밖에서?”
“어. 할머니랑 있으면 사투리 쓰는데, 밖에서는 잘 안 써. 애들이 놀리니까.”
“누가 누굴 놀려. 다 거기서 거기던데. 나랑 있을 땐 편하게 해도 돼.”
다정하게 말하는 수호를 보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셋째 줄 애들이 뒷담화를 할 때 아무 말도 못한 게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불현듯 입술에 피딱지가 진 채 고맙다고 해 달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오늘은 정말 고마운 날이었다. 두 번 다시없을.
1. 열일곱 봄 (10)
멈추고 나서 겨우 숨을 고르는데 사람도 차도 많은 큰 사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까지 온 줄도 몰랐다. 양 무릎에 손을 올리고 건물들의 간판을 눈으로 훑는데, 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걸 포기한 연두는 대로변 홈플러스 건물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대며 지나가는 통에 부끄러웠지만, 모든 체력을 쥐어짠 탓에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너무 뛰어서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맞을 때 벗겨졌나. 이제 보니 안경도 없었다. 눈앞이 흐릿흐릿했다. 연두는 차가운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참 나…….”
헐떡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꼴이 엉망이었다. 아무 신발이나 끌고 나온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닦아 놓은 운동화 대신 한쪽에는 삼선 슬리퍼, 다른 한쪽에는 할매의 갈색 모카신을 신고 나왔다. 이럴 때조차 바보 같다.
계단에서 구르다가 어디 돌부리에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잠옷으로 입던 중학교 체육복은 무릎이 다 찢어져 휑했다. 무릎은 돌바닥에 갈려서 이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연두는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 오늘 그랬을까. 아버지는 간암 말기라면서 힘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자기 꼴이 초라하고 웃겼다. 고개를 뒤로 꺾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찬 공기에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숨을 고르고 나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연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했다. 행인들 중에 키가 아주 큰 남자가 하나 있었다. 흐릿해서 잘 안 보였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너……. 너 강연두야?”
연두의 소원이 그래도 하나는 이루어졌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복 차림의 최수호는 꼭 어른 같았다. 곱게 다려 놓은 제 사복도 집에 있는데, 더 이상 초라할 수 없는 꼴로 수호를 만났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이를 악물고 안 울었던 연두는 까만색 아디다스 트랙 톱을 입은 최수호 앞에서 엉엉, 하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연두를 어정쩡하게 안은 수호의 품에서는 알싸한 소주 냄새와 함께 첫날 맡았던 소다 아이스크림 향이 났다.
<2006. 4. 10. 월요일>
“어…… 저기.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울음보가 터진 연두는 쉽게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수호는 한참 동안이나 연두를 안고 달래다 안 되겠는지 몸을 먼저 일으켰다. 그리고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연두는 꺼이꺼이 울며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강한 힘에 끌려 몸이 일으켜졌다. 최수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뜨끈뜨끈했다.
수호의 손에 이끌려 걷는데, 그제야 아픈 게 실감났다. 오랫동안 뛰고도 아픈 줄 몰랐던 다리가 갑자기 아팠다. 연두가 저릿한 고통에 절뚝거리자 수호는 “업어 줄까?” 하고 물었다. 연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연두는 계속 울었다. 우는 게 창피해서 땅을 보고 터덜터덜 걸었다. 짝꿍은 자신의 느린 걸음에 발을 맞춰 주었다.
수호의 집은 용해동에 있는 고층 아파트였다. 유달동에서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몰랐다. 버스를 타도 한 30분은 걸릴 텐데 많이도 왔다. 짝꿍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니 시간이 벌써 12시가 넘어 있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연두네 집과는 달리 현관에서부터 좋은 냄새가 났다.
연두를 안으로 들인 수호는 방으로 가더니 서랍을 뒤져 옷가지를 꺼내 왔다. 항상 태연한 모습이던 수호도 자기 꼴에는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어, 저기……. 이, 일단 좀 씻고 나와. 소독해 줄게.”
수호는 연두를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줬다.
화장실 문을 열고나서 연두는 아픈 걸 잠깐 잊고 기함을 토했다. 화장실이 할매와 연두가 있는 방만 했다. 다 낡아 빠진 다라이가 아니라 넓은 욕조가 있었고, 긴장이 탁 풀릴 만큼 달달한 밀크 커피 향이 났다.
화장실을 둘러보다 맨 마지막으로 본 거울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외계인이 서 있었다. 연두는 히익, 하고 거울에 코를 박았다. 얼굴이 아주 난리였다. 뺨이 팅팅 부어오르고, 눈썹 위가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핏자국이 선명했다. 눈알에는 실핏줄이 터져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 같았다. 김혁 보고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옷을 벗고 나니 더했다.
“세상에…….”
온몸이 멍이었다. 엄마를 감싸면서 팔을 되게도 맞았더니, 팔뚝이 부어 잘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 침착한 수호가 어쩔 줄 몰라 한 게 이해됐다. 이런 꼴을 보였으니 없던 정도 떨어질 게 분명했다. 억울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코를 크게 훌쩍인 연두는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어 서러워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호에게 미안해 몸을 씻었다. 핏물이 한참이나 욕조 바닥에 흘렀다.
***
수호가 건넨 바지는 연두에게 한참 컸다. 반바지를 줬는데, 엉덩이에 겨우 걸쳐졌다. 고무줄이라도 달라고 해서 바지춤을 좀 묶고 싶었다. 하지만 염치가 없어 말을 못 했다.
다 씻고 나가자 수호가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다. 연두는 바지 한쪽을 부여잡고 절뚝거리며 소파에 가 앉았다. 머리를 덜 말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팔이 안 올라가 제대로 못 닦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호가 마른 수건을 하나 가져와 연두의 머리를 털어 주었다. 물기가 어느 정도 없어지고 나자 얼굴을 붙잡혔다. 연두는 제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부끄러워서 짝꿍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짝에게서는 여전히 소주 냄새가 났다. 아까 아버지에게서도 맡았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소독약을 바르고 그 위에 연고를 덮는 손길이 재작년 응급실의 간호사만큼이나 능숙했다. 다친 데가 하도 많아서 소독도 한참 걸렸다. 다른 건 따끔해도 잘 참았는데, 수호가 다 터진 입술 위에 빨간 약을 발라 줄 때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야…….”
얼굴과 팔다리의 치료가 끝나자 수호가 자연스레 웃옷을 들췄다. 할매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가슴을 보인 건 처음이라 민망했지만, 연두는 그냥 얌전히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상처를 살피는 수호 때문에 그새 심장이 또 콩닥거렸기 때문이었다.
멍이 든 옆구리를 소독하던 수호가 아예 웃통을 벗으라고 했을 때도 시키는 대로 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맨살을 훑자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참느라 혼이 났다. 연두는 짝꿍의 코앞에 배와 가슴을 훤히 드러내놓은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쇄골 주변에 약을 펴 바른 수호가 어깨를 붙잡아 뒤를 돌렸다. 저처럼 긴장이라도 한 걸까. 숨이 좀 떨리는 것 같았다.
수호가 등에 상처가 크게 났다고 말했다. 생각건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그런 것 같았다. 야무진 손이 등에도 커다랗게 거즈를 덧대고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최수호는 의사 선생님을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연두야, 혹시 누가 이랬는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어?”
소독을 다 마친 수호가 구급함을 정리하며 물었다. 연두는 사실대로 말했다.
“……아버지가.”
“음…… 그랬구나. 혹시 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을까?”
도와줄 수 있는 거라니. 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걸까. 연두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수호는 질문을 바꿔 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응. 옛날에 몇 번.”
정말 이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같이 밥도 안 먹는 사이인데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그의 눈에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눈에 사로잡히면 무조건 진실만을 토하게 되는 그런 마법.
수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연두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돌이 아니라 바위가, 바위도 보통 바위가 아니라 커다란 영산강 갓바위가 연두의 가슴 한가운데를 꾹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수호가 문득 허벅지로 시선을 돌렸다. 살이 흉하게 접힌 쪽 다리였다.
“이것도 아버지가 그런 거야?”
“아, 아니야. 그거는, 재작년에 물 끓이다가 디, 뎄어.”
디었다고 하려다 연두가 급하게 말을 바꿨다. 누가 들어도 어색한 말소리에 수호가 굳은 얼굴을 풀고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웃으며 구급함을 들고 가더니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푸흐……. 사투리 편하게 써도 돼. 연두야.”
“어?”
“아니, 저번부터 사투리 쓰려다 마는 거 같아서. 혹시 내가 저번에 너무 크게 웃어서 기분 나빠서 그래?”
“아냐, 아냐. 나 원래 밖에서는 사투리 잘 안 써.”
“밖에서?”
“어. 할머니랑 있으면 사투리 쓰는데, 밖에서는 잘 안 써. 애들이 놀리니까.”
“누가 누굴 놀려. 다 거기서 거기던데. 나랑 있을 땐 편하게 해도 돼.”
다정하게 말하는 수호를 보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셋째 줄 애들이 뒷담화를 할 때 아무 말도 못한 게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불현듯 입술에 피딱지가 진 채 고맙다고 해 달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오늘은 정말 고마운 날이었다. 두 번 다시없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