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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11화

1. 열일곱 봄 (11)





“……고마워, 수호야.”

수호는 한쪽만 진 쌍꺼풀을 접고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신비롭고 예뻤다.

“네가 그러니까 듣기 좋다.”

고맙다고 하면 저번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봐 내심 기대했는데, 안 그래서 좀 실망스러웠다. 수호는 연두 속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근데 어쩌지. 내일 소풍인데.”

연두는 소풍 소리에 염치도 없이 또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간 잘 참았던 눈물이 한번 터지고 나니 너무도 쉽게 콸콸 쏟아졌다. 수호는 잠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소파 옆에 있던 휴지를 여러 장 뽑아 연두에게 내밀었다. 연두는 눈물을 닦고 코도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를 풀어서 그랬는지 휴지에 피가 묻어났다. 곧이어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쪽팔리게 쌍코피였다.

연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수호는 고개 숙여, 하고 말하더니 자기 손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감싸고 꾹 눌러 줬다. 다른 손으로는 코 밑에 휴지를 댔다. 부끄러움에 연두의 귓바퀴가 발갛게 물들었다.

“코피 났을 때 고개 뒤로 하면 안 돼. 바보야.”

수호는 얼굴을 보지도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날 밝으면 병원부터 가자. 소독은 했는데 어디 부러졌을 수도 있으니까.”

“아, 아니야! 안 가도 돼.”

수호가 코를 막고 있어서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가야지.”

“아니……!”

“연두야, 나 말 여러 번 하는 거 싫어해.”

얼굴이 안 보여서 표정은 못 봤지만 김혁의 뒤통수를 때리던 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병원 가자. 알겠지?”

“응…….”

“그래.”

다행히 수호의 목소리는 금방 온화해졌다. 그러고는 코피가 멎을 때까지 코에 휴지를 대주었다. 연두가 괜찮다고 말했는데, 수호도 괜찮다고 했다. 코피가 멎은 후에는 담임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 반장인데요. 저랑 연두랑 내일 소풍 못 갈 것 같아서요.”

둘이라니, 왜?

“연두가 좀 다쳤어요. 아까 우연히 만나서 내일 병원에 좀 데려다 주려고요. 네, 네.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네. 내일 병원 갔다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선생님. 네.”

연두는 수호에게 안 그래도 된다 말하려다 그냥 안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수호야. 나 소파에서 잘게.”

“어? 왜? 그냥 여기서 자.”

“아니…… 나 다치기도 했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괜찮아. 이리 와.”

혹시라도 침대에 피가 묻을까 봐 그런 건데 수호는 친절하게도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면서까지 연두를 불렀다. 결국 못 이기는 척 침대 한구석에 몸을 눕혔다. 침대에서 수호의 냄새가 가득 났다. 너무너무 좋아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참았다. 수호가 너무 운다고 싫어할까 봐.

“두부야, 잘 자.”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뛰었다. 쿵쿵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얼마 안 있다 수호가 쌕쌕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가 잠들고도 한참을 뜬 눈이었던 연두는 결국 잠을 설쳤다. 눈을 떴는데 아직도 깜깜했다.

눈을 뜬 연두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옆에 수호가 있는 건 둘째 치고, 어느 틈인가 자신의 다리가 짝꿍의 배 위에 올라가 있었다. 심지어 수호는 이불도 안 덮고 있었다. 연두 쪽에만 이불이 두둑했다.

할매가 연두더러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잔다 할 때는 안 믿었는데, 진짜였나 보다. 수호가 혹시라도 깰까 봐 다리를 천천히 내리다 무릎 뒤로 수호 고추가 걸려서 심장이 그대로 멎는 줄 알았다. 수호가 “응…….” 소리만 하고 깨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연두는 무릎을 조심스럽게 위로 들어 올렸다. 수호의 바지춤이 아침이라 엄청 크게 부풀어 있었다. 건강 검진 날 보긴 했는데 정말 신기했다. 연두는 자기가 친 텐트와 수호의 텐트를 번갈아 봤다. 연두의 텐트는 2인용이었고 수호의 텐트는 8인용쯤 돼 보였다.

연두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뺏은 게 미안해 이제 와서 이불을 수호에게 덮어 주었다. 발까지 꼼꼼히.

거실로 나와 시계를 보니 아직 6시였다. 주인이 자는 집에서 괜히 부스럭거려 봤자 민폐일 것 같아 소파에 가서 얌전히 앉았다. 불을 켜기도 눈치 보여서 그냥 어스름한 채로 있었다.

앉은 김에 넓게 집 안을 둘러봤다. 깨끗하고 넓고, 정리도 잘 되어 있었다. 다 부러웠지만 제일 부러웠던 건 TV였다. 화면이 메가라인 극장만큼이나 컸다. 저런 큰 화면으로 영화를 보면 굳이 극장에 안 가도 되겠다 싶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신 모양이었다. 숨겨진 가족사가 있긴 한가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연두는 수호의 공간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얼굴은 멍으로 울긋불긋한데 마음속은 꽃밭이었다.

딱 7시가 되자 수호의 방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에픽하이 노래였다. 곧 나오겠지 싶어 방문을 바라보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으헉, 깜짝이야!”

연두의 귀신같은 꼴을 보고 수호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 같았다.

“아. 미안.”

“일어났으면 깨우지.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아니, 너무 빨리 깨서…….”

입을 오물거리자 터진 입가가 말도 못하게 따가웠다. 수호는 벌써 수염이 나는지 밤사이 턱 밑이 약간 푸르스름해졌다. 마른세수를 한 수호가 소파 쪽으로 걸어오며 생각났다는 듯 말을 걸었다.

“연두야, 너 잠버릇 장난 아니더라.”

“미안…….”

“이불 다 가져갔어. 너 일어나서 나한테 이불 덮어 줬지?”

“응…….”

아침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배는 낮은 목소리였다. 귀가 간지러웠다.

수호가 옆으로 넓은 소파를 놔두고 연두가 있는 소파에 와 앉았다. 조금만 뒤척여도 허벅지가 닿을 거리였다. 쭉 기지개를 편 수호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7시 뉴스에 채널을 고정하고는 갑자기 허벅지를 연두의 허벅지에 딱 갖다 붙였다. 그리고 손으로 자기 허벅지와 연두의 허벅지를 비교했다.

연두는 숨을 멈췄다. 귓가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딱 절반이네. 너 왜 이렇게 말랐어?”

“벼, 별로 안 말랐어.”

“말랐는데. 근데 너 진짜 다리털 없다. 부럽다.”

“뭐가 부러워?”

“볼래? 나 다리털 엄청 많이 났어. 콤플렉스라 반바지도 안 입잖아.”

수호가 말하며 추리닝 바지를 걷어 다리를 보여 줬다. 근육이 탄탄한 종아리는 정말로 털이 많이 나 있었다.

“너 같은 애도 콤플렉스가 있구나…….”

연두가 중얼거리자 수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같은 애가 뭔데? 나 콤플렉스 되게 많아. 봐 봐. 나 눈도 짝짝이잖아.”

수호가 연두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자기 눈을 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덕분에 새까만 눈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연두는 속으로 저 쌍꺼풀에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 허버, 아니, 엄청 예뻐.”

예쁘단 말에 수호는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에 하는 말실수였다. 연두가 볼을 붉게 물들이고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예쁜 게 아니고 멋있어! 잘생겼어!”

수호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래, 연두야. 너도 예쁘고 잘생겼어.”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 보니 8시가 금방이었다. 수호가 아침으로 토스트를 구워 줘서 먹었다. 수호는 자신이 두 개를 해치울 동안 연두가 반절도 못 먹고 있자 짓궂은 얼굴로 농담을 했다.

“진짜 늦게 먹네. 뺏어 먹어 버린다?”

사소한 대화도, 장난도 낯설었던 연두는 고분고분히 자기 몫의 토스트를 내밀었다. 수호는 피식 웃더니 딱 한 입을 뺏어 먹었다. 하필 입댄 부분을 물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빼앗아 먹을 땐 언제고, 수호가 토스트를 하나 더 구워 주는 바람에 연두는 아침부터 과식을 했다.



***



연두는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머리는 도저히 팔이 안 올라가 못 감았다. 여전히 까치집을 지은 채 나가자 수호는 사람이 어디까지 다정할 셈인지 머리를 감겨 주겠다며 화장실에 연두를 다시 들이밀었다. 여러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더니 수호도 은근히 고집불통이었다.

처량한 꼴을 한 연두가 욕조에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 앉았다. 수호가 화장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샤워기로 머리에 물을 뿌렸다. 머리를 만지면서 계속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연두의 연한 머리색이 물에 닿으면 짙어지는 게 신통한 모양이었다.

“손님, 무릉도원이세요?”

수호는 가끔 영문 모를 개그를 했는데, 그럴 때면 연두는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몰라 커다란 눈만 꿈뻑거렸다. 개그 타율이 반절도 안 되는데 왜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반응에 실망한 수호가 머리를 감기면서 괜히 귀를 건드렸다. 연두는 머리통도 작고 귀도 작았다.

잠옷으로 입었던 옷을 하루만 더 빌려 입기로 했다. 자기 옷은 엉망이라 봐 줄 수가 없었다. 잠옷 말고 다른 옷을 준다는 걸 겨우 마다했다.

연두는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가다 바지가 흘러내리는 걸 손으로 쥐었다. 크다, 크다 했는데 옷이 정말 컸다. 좀만 늦었으면 팬티 바람을 내비칠 뻔했다. 사실 수호가 빌려준 팬티도 컸다. 버티다 못한 연두가 염치불고하고 수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기.”

“응?”

“나 고무줄 좀 주면 안 돼?”

“무슨 고무줄?”

“바지가 내려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