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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두부 12화

1. 열일곱 봄 (12)





수호가 고개를 내렸다. 이제 보니 자기 허벅지나 오는 반바지가 연두의 무릎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바지 아래의 허여멀겋고 빼빼마른 다리가 꼭 여자애 같았다. 수호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금방 돌아왔다.

“자.”

수호가 내민 건 여자애들이 쓰는 머리끈이었다.



***



수호네 기사님 차를 타고 하당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갔다. 수호가 연두의 짝짝이 신발을 보고 자기 운동화를 신겨 줬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발이 푹푹 빠졌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X-ray를 이곳저곳 다 찍었다.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은 없다고 했다. 다리가 아픈 건 단순 염좌라며 파스만 뿌려 줬고, 눈썹 위에 찢어진 곳만 세 바늘을 꿰맸다. 꿰매는 건 안 아팠는데 마취 주사가 너무 아파 기절할 뻔했다. 다른 곳은 거의 긁힌 상처라 소독만 받았다.

입 안에도 소독을 받았는데, 수호가 계속 옆에서 구경을 했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뿐인데 꼭 은밀한 곳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연두는 치료를 다 받고 로비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수호가 약을 타 오겠다 했다. 머릿속에 병원비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 와중에 병원에 있던 사람들이 한 번씩 연두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부끄러워서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끈뜨끈한 손바닥이 목 뒤를 덮었다. 연두의 목은 수호의 손에 한 줌이었다.

“하루에 세 번씩 먹으래. 밥도 꼭 먹고. 이건 가글.”

하얀 약 봉투를 받아 들었다. 병원비를 묻자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했다. 분명히 비쌌을 게 뻔해서 수호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겁이 나 결국 모른 체했다. 나중에, 나중에 돈이 생기면 수호에게 두 배로 돌려주겠노라 속으로 꼭꼭 다짐했다.

“근데 집에 아버지만 계셔? 혹시 다른 분한테 연락 안 드려도 돼?”

“……드려야지.”

할매가 울며불며 걱정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핸드폰 빌려줄까?”

“응.”

수호가 핸드폰이 없는 연두를 위해 자기 폰을 내밀었다. 까만색 모토로라 스타택이었다. 수호는 집 전화번호를 묻더니 직접 눌러 줬다. 뚜르르, 뚜르르 하고 발신음이 크게 났다. 스피커폰 모드를 누른 모양이었다.

-여보시요.

할매의 힘없는 목소리에 연두는 마음이 안 좋았다. 어제 울던 모습이 생생했다.

“할머니…….”

-오메, 오메! 연두야, 어디여 시방?

핸드폰 밖으로 할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할매……. 할머니, 나 어제 친구 집에서 잤어. 아부지는?”

-지금은 나갔다. 아침에도 느그 엄마 줘 패 놔 갖고 다른 집서 갱찰 부르고 얼마나 난리 났는지 아냐. 오메, 내 새끼. 어디 아프든 않고? 은제 들어올라고…….

할매의 내 새끼 소리에 연두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눈물을 참느라 입 안쪽 살이 짓이겨졌다. 코를 한 번 훌쩍거리고 말을 뱉는데 결국 못 참고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지금 병원 왔는디…… 이상 없다 그런께 곧 가께.”

의자가 들썩거리길래 뭐지 싶어 봤더니 수호가 전화 내용을 엿듣다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연두는 울컥해서 자기도 모르게 수호의 팔을 때렸다. 때리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수호는 신경도 안 쓰고 실실거리고 있었다.

연두는 할매의 오냐 소리를 듣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 수호는 대놓고 웃었다.

“여기. 그…… 미안.”

“풉, 크흐흑. 너 사투리 쓰는 거 왜 이렇게 웃기지? 아, 진짜 웃긴다. 근데 뭐가? 뭐가 미안해?”

“아까 때려서.”

수호는 방금 전의 표정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웃었다.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나한테 편하게 해도 된다니까. 우리 친구잖아. 오늘은 내가 네 보호자도 했고.”

연두는 한 번 더 수호에게 고맙다고 했다. 친구라는 소리에 가슴이 싸했는데 그냥 그러려니 했다.

둘은 병원에서 나와 빵집에 들렀다. 수호가 비싼 롤 케이크를 집었다. 빵도 여러 가지 집었고, 오렌지 주스도 샀다. 2만 원이 넘게 나왔다. 연두는 미용실 값으로 낸 7천 원도 비쌌는데, 아무렇지 않게 돈을 쓰는 게 부러웠다.

빵집에서 나온 뒤 연두는 수호와 그 길로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기사님 잠깐 어디 가셨나 봐. 5분이면 온대. 좀 기다리자.”

헤어지기 전 기다리는 시간이 5분이나 있어서 좋았다. 연두는 수호를 위해서라면 5분이 아니라 한 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10년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벤츠가 곧 도착했다. 까만 벤츠는 얼마나 깨끗하게 닦았는지 차체에 연두의 얼굴이 다 비췄다. 다시 봐도 엉망이었다. 연두는 수호에게 잘 가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말로도 하고 마음속으로도 했다. 어제 오늘 민폐를 너무 많이 끼쳤다. 정이 떨어졌을 거 같아 그랬는데 수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해? 얼른 타.”

“아, 안 데려다줘도 돼.”

“타라고. 데려다줄게.”

“아, 아니…….”

아니라고 말하다 연두는 이번에도 못 이기는 척 고집불통 독불장군의 차에 탔다.

가는 길에도 잠시 다른 주소를 말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곧 수호가 반장이라는 걸 떠올리고 관뒀다. 혹시라도 주소를 보면 거짓말을 했다고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솔직하게 유달동 주소를 실토했다.

수호의 눈에는 역시 마법이 걸려 있었다. 쌍꺼풀이 있는 쪽일까, 아니면 없는 쪽일까. 아마 있는 쪽일게 분명하다. 연두가 항상 보는 쪽.

자신을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수호는 빵 무더기를 들고 연두와 함께 돌계단을 올랐다.

“근데 왜?”

“너 사투리 쓰는 거 구경하고 싶어서.”



***



할매는 연두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찍었다. 할매의 투박한 손이 연두의 볼이며 팔이며 허리춤이며 안 만지는 곳 없이 다 만졌다. 그러고 나서야 연두의 뒤에 서 있던 멀대같은 수호를 발견했다. 수호가 고개를 숙이고 “안녕하세요, 할머니.” 하자 울던 할매 입이 귀에 걸렸다.

연두가 친구를 데려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매일같이 어디서 쥐어 터져 가지고 오는 연두를 보며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할매는 말로 다 못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더니 웬 훤칠한 친구를 집까지 데려왔다. 손주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할매는 삶은 감자와 보리차를 꺼내 주었다. 연두는 낯이 다 뜨거웠다. 저렇게 비싼 빵을 선물로 줬는데, 내올 게 감자밖에 없다니. 수호가 올 줄 알았으면 저 밑에 행복 수퍼에서 과자라도 사 올 거였는데. 아니면 좀 비싸더라도 과일이라도 사 올걸.

지금이라도 슈퍼에 다녀올까 생각하며 연두가 집에 남아 있던 안경을 찾아 썼다. 어제까지 쓰던 플라스틱 안경은 다 깨져서 할매가 버렸다고 했다. 몇 년 전에 쓰던 안경이라 시력이 좀 안 맞아서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단 나았다. 하루 종일 침침하게 다니느라 미간이 다 쪼글쪼글했는데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연두는 시선을 돌려 수호의 기색을 살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감자를 우물거리며 삼킨 수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은 매일 봐도 한 번도 안 질렸다. 오히려 매일이 새롭고 신기하고 예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밤새 안경이 없었던 게 좀 속상했다.

“할머니, 지금까지 먹은 감자 중에 제일 맛있어요. 우와…….”

“오메, 우리 연두 친구가 어찔라고 이라고 말도 이쁘게 한대? 오메 이쁜그.”

“저 자주 놀러 와도 돼요? 감자 다음에 또 먹고 싶을 거 같은데.”

“그라믄. 당연히 와도 되제. 감자만 쌂아 주간디? 다음에 말하고 오믄 할매가 맛있는 거 더 해 주께.”

“진짜요? 연두야. 나 다음에 또 데려와. 알았지?”

연두는 낯을 많이 가려서 다른 어른들을 보면 무섭기만 했다. 고깃집에서도 숫기가 없다고 사장님에게 몇 번이나 잔소리를 얻어 들었다. 엄친아 최수호는 넉살까지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는 아예 연두네 집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좀 있으면 할매의 무릎베개가 수호의 차지가 될 지도 몰랐다. 할매는 수호가 어지간히 예쁜지 연신 “오메, 오메 장동건이랑 똑같애야!” 하며 혀를 내둘렀다.

“아따, 그만 좀 하쑈.”

괜히 부끄러워져 할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한 거였는데, 수호가 지금까지 웃은 것 중 가장 크게 웃었다. 푸하하, 배까지 붙잡고 뒹굴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다 웃고 나서 눈물 찍는 시늉까지 했다.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올 때까지 수호는 연두의 집에 머물렀다. 최수호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할매 말마따나 아침부터 엄마를 잡도리해서 그런지 아버지는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자신 때문에 난리가 난 아들의 꼴을 보고도 콧방귀 한 번을 안 뀌었다.

수호는 저녁까지 먹고 갈 요량인 듯했다. 연두가 밥을 안치는 게 신기했는지 좁디좁은 부엌을 떠날 줄을 몰랐다. 부엌에서 수호 냄새가 나서 한동안 밥 차리는 게 즐거울 것 같았다. 연두의 아버지는 다행히 밖에서 밥까지 해결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너무 취했거나.

요리 재료가 마땅히 없어서 그냥 김치 볶음밥을 했다. 김치가 시큼털털했는데 볶음밥에 넣으니 딱 맞아서 다행이었다. 수호는 볶음밥을 먹으면서 오버를 해 댔다.

“헐……! 대박. 완전 맛있다. 강연두 짱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