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
회의실 사건을 끝으로 자중할 줄 알았지만 그건 너무 큰 기대였던 것 같다. 하연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서우는 회의실 때의 만행을 기점으로 고삐가 풀린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폭탄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우르르 터지기 바빴다.
“제가 복사기를 다룰 줄 몰라서요.”
“뭐?”
“신입이잖아요? 역시 그런 건 잘 다룰 줄 아는 사람한테 시키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싶은데.”
“너, 이…….”
“아니면 팀장님이 알려 주실래요? 그러면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빈정 상한 대석은 내내 무시했던 서우를 다그쳤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서우는 그럴 때마다 의연하게 넘겼고,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대석의 속까지 긁어 대는 기행을 보였다.
“이런 중요한 서류를 저한테 맡겨도 되겠어요? 하하. 이러다 실수하면 어쩌려고. 저를 믿어 주시니 감동적이긴 한데…… 아, 일부러 실수한다는 건 아니고. 원래 인생이란 게 한 치 앞을 모르잖아요.”
하연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우는 기세등등했고 빙글거리며 대석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사람들은 서우가 입을 열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리를 쏟아 내니 제발 그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윤하연! 윤하연 어디 갔어!”
“부, 부르셨어요?”
“대체 윤 대리는 인턴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리고 해 오라는 보고서는 왜 이렇게 늦어? 지금 나 엿 먹어 보라는 거야! 어?”
하연은 식은땀을 흘렸다. 서우로 인한 불똥이 자신에게 튀었기 때문이다. 서우 때문에 화가 났으면서 어째서 자신에게 푸는 건지. 마음 같아서는 이미 대석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다.
“서우 씨? 권서우 씨!”
대석이 시킨 일은 쳐다도 안 보고 서우가 느긋하게 바깥으로 나갔다.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깨달은 하연은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았다.
사고를 쳐도 앞에서 치는 게 낫다. 자신의 눈 밖에서 서우가 사고를 친다 생각하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렴풋이 등 뒤에 꽂히는 진혁의 안쓰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저 망나니를 시야에 두는 게 우선이었다.
“하, 이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무리 다리 길이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한들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윤 대리님은 뭐 좋아하세요?”
“어, 어디서 튀어나온 거예요?”
하연이 구시렁거리자마자 귀신처럼 서우가 나타났다. 하연은 까득 이를 갈던 걸 멈추고 멈칫했다. 홧김에 욕이라도 했었다가는 상당히 뻘쭘한 상황이 펼쳐질 뻔했다.
“아침부터 커피만 마시던데 상큼한 생과일주스는 어때요? 카페인도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워요.”
기가 막혔다. 사무실을 온종일 대판 뒤집어 놓은 주인공이면서 어찌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하연은 뜬금없는 서우의 제안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사내 카페였다.
“권서우 씨, 혹시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올 생각인 건…….”
“딸기 좋아해요? 아니면 청포도?”
“……딸기요. 딸기로 주문해 주세요.”
하연은 도저히 서우의 흐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제대로 들어 놓고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하연의 대답에 서우는 기분 좋게 주문을 하고 주스를 받아 왔다. 어울리지 않게 딸기라도 좋아하는 건지 서우의 앞에도 딸기 주스가 놓였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별말씀을.”
편하게 마시라는 듯 서우가 방긋거렸다. 카페에 앉아서 조용히 있는 모습만 보면 정상인인데 왜 사무실에만 들어가면 이상한 인간이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서우는 달달한 딸기 주스를 마시며 창밖을 봤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하연이 심호흡을 하면서 용기를 냈다. 하연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서우가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목이 꽤나 탔는지 하연의 주스가 벌써 반은 사라진 상태였다.
“제가 궁금해요?”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연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어 갔다. 마냥 친절하고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하연이 한 꺼풀, 한 꺼풀 본래 모습을 보이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서우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나중에 물어봐요.”
“…….”
“아, 그래. 여러모로 윤 대리님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원래 거슬리는 걸 곱게 넘기는 인간이 아니라서. 또 회사 생활을 오래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서우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 줘요. 나중에…… 아니, 아니지. 틈틈이 보답은 확실히 하도록 할게요.”
서우는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며 선선한 인사를 건넸다. 홀로 남은 하연은 얼이 빠진 채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복잡한 감정이 어이없는 상황에 팍 식어 버렸다.
*****
팀장이 기분 따라 행동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다짜고짜 회식이라니. 하연은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차라리 야근을 시켜 달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 사라지고 싶은데 마땅히 꺼낼 변명도 없었고, 설령 꺼낸다고 한들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대석이 흔쾌히 보내 줄 리도 없었다.
“권서우 씨는 바쁜 일 없어요?”
“글쎄요.”
서우는 묘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 않고 억지로 웃는 게 분명한데 주섬주섬 회식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서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하연을 올려다봤다.
“윤 대리님은 갈 거예요?”
“네, 그래야죠. 권서우 씨도 바쁜 일 없으면 같이 가요.”
하연은 뭘 물어보냐며 한숨을 쉬었다. 서우는 진혁과 대화를 나누며 바깥으로 나서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다가 마우스를 딸깍였다. 우르르 떠 있던 창이 한 번에 꺼지고 이내 모니터가 까맣게 변했다.
까만 모니터에 서우의 얼굴이 비쳤다. 서우는 모니터 속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텅 빈 사무실에서 표정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모든 것에 무심했다.
“갈까 말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무시하고 가면 된다. 그러나 아침에 회의실에서 있던 일로 하연을 쥐 잡듯 굴어 대던 대석을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본디 신입의 실수를 사수가 떠맡는 게 보통이라지만 대석의 행동은 사적인 감정이 가득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연을 걱정한다기보다는 회사에서 저런 짓을 일삼는 대석이 떳떳하다는 게 거슬렸다. 서우가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지만 회사 자체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권서우 씨? 얼른 나와요.”
“네. 지금 나갈게요.”
진혁과 일찌감치 나갔던 하연이 대뜸 돌아와 얼굴을 비죽 내밀었다. 팀장의 히스테리는 하도 당해서 익숙했는지 금세 털어 내고 업무를 보는 게 눈에 띄는 존재였다. 서우는 실소를 흘리며 하연에게 화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
회식은 상상 이상으로 지루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대석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게 급선무처럼 보였다. 들어가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마셔 댔고, 대석의 헛소리에도 반응해 주어야 했다.
서우는 실로 불쌍한 광경을 둘러보며 다리를 꼬았다. 팀원들에게 돈을 쓰기도 싫은 건지 싸구려만 잔뜩 시켜 둔 게 평소 행실을 알렸다. 서우가 질린 시선으로 맥주잔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맥주를 봐도 흥이 돋지 않았다.
“…….”
서우는 물끄러미 하연을 봤다. 술이 더는 들어가지 않는지 피곤한 기색이었다. 옆에 입사 동기라고 했던 진혁이 앉아 있어서 그나마 챙김을 받고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대석은 유독 하연을 저격해 술을 억지로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건 별로 재미없는데.”
재밌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영 꽝이었다. 미간을 매만지며 서우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용케 소리를 들었는지 하연이 의아하게 서우를 보는 게 느껴졌다. 서우는 그 시선을 느끼고 금세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으며 하연을 바라봤다.
“윤 대리님 힘드시죠?”
따뜻한 질문이었지만 하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대답했다가 서우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긴장한 것 같았다. 예상외로 눈치가 빠른 하연을 보며 서우가 픽 웃었다. 이틀 사이에 벌써 서우를 꽤 파악한 듯 조심성이 두터워졌다.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슬슬 집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일도 출근인데.”
“……2차 갈 때 벗어나야죠.”
서우는 직설적인 방향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의심하고 의심하는 하연을 살살 달래기로 했다. 사실 굳이 하연을 거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때를 기약하는 것보단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낫죠. 그래. 제가 이 상황을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줄까요?”
“……예? 뭐요? 무슨 짓을 한다고요? 저기요, 권서우 씨? 저기요?”
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인간이 이번에는 어떤 미친 짓을 하려는지 긴장한 듯싶었다. 확실히 술이 들어가니 매번 두르고 다니던 어수룩한 친절과 예의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저게 낮에 보았던 것처럼 본래 성격에 가까운 모습인 것 같았다. 역시 평소 재미없는 모습보다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하며 서우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우리 윤하연 대리님을 향한 갸륵한 제 마음도 알아주시고요.”
그리고 곧장 서우는 매끄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지갑을 꺼냈다. 하연의 눈동자가 가파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낌새를 느낀 듯 허겁지겁 손을 뻗어 서우를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였다.
“이만 가도 될까요? 집에 할 일이 있어서요. 회식도 흥이 안 나는 것 같고.”
훤칠한 서우가 일어나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하연은 그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신음했다. 서우는 모두에게 호감을 얻어 냈던 예의 첫 모습처럼 달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참. 입사한 기념으로 오늘 회식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웅성거림이 짙어졌다. 저 새파랗게 어린 인턴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까. 다들 경직되어 서우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지켜봤다. 팀장은 눈살을 구겼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삿대질만 할 뿐이었다.
“……저, 저!”
서우가 영수증을 들고 나갔다. 뒤늦게 대석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서우는 사라진 뒤였다. 어느덧 웅성거림도 사라지고 고요해졌다. 하연은 이게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어처구니없게도 또렷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다시 서우가 등장했다. 허풍이 아니라 정말 계산을 한 듯 지갑에 카드를 꽂고 영수증을 버리고 있었다. 서우는 선선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들 여기서 해산하죠. 수고하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가 입을 크게 벌리고 서우를 올려다봤다. 모든 사람이 할 말을 잃었지만 경악에 물든 눈빛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려 주었다.
미친놈, 혹은 안하무인 또라이.
서우는 그 간단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회식 자리를 유유히 떠났지만 다들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다. 대석을 제외한 모두가 기피하는 회식이었을지언정 어떤 누구도 서우처럼 행동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쟤 뭐야?”
옆에 앉아 있던 진혁이 맥주를 주르륵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연은 멍하니 진혁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너무 황당해서 현실성이 없는 일이 눈앞에서 발생했다. 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권서우 인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보냐는 진혁의 책망 깃든 눈빛이 닿아 왔다. 하지만 하연은 억울했다.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문득 첫 만남 때가 떠올랐다. 초면에 일상의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오 팀장과 자신의 관계를 언급하던 그 무례한 태연함이 말이다.
하연은 미치도록 불편한 정적이 찾아온 테이블을 슬쩍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폭탄을 터트리고 떠난 서우가 보였다. 하연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우를 끔뻑끔뻑 응시했다.
“…….”
그 시선을 느꼈는지 서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하연 쪽을 바라봤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 하하. 미친놈.”
정말 저 인간은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연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하연과 눈이 마주친 서우는 늘 짓고 다니던 웃음을 걸치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 사태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평범하게 인사를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위화감 없는 모습이었다.
하연은 서우가 앉았던 옆자리를 보면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아 권서우라는 인간은 상식에서 몇 억 광년은 벗어난 인간이 분명했다. 첫 만남 때 서우가 하연의 머릿속에 경고등을 켰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회의실 사건을 끝으로 자중할 줄 알았지만 그건 너무 큰 기대였던 것 같다. 하연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서우는 회의실 때의 만행을 기점으로 고삐가 풀린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폭탄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우르르 터지기 바빴다.
“제가 복사기를 다룰 줄 몰라서요.”
“뭐?”
“신입이잖아요? 역시 그런 건 잘 다룰 줄 아는 사람한테 시키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싶은데.”
“너, 이…….”
“아니면 팀장님이 알려 주실래요? 그러면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빈정 상한 대석은 내내 무시했던 서우를 다그쳤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하지만 서우는 그럴 때마다 의연하게 넘겼고,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대석의 속까지 긁어 대는 기행을 보였다.
“이런 중요한 서류를 저한테 맡겨도 되겠어요? 하하. 이러다 실수하면 어쩌려고. 저를 믿어 주시니 감동적이긴 한데…… 아, 일부러 실수한다는 건 아니고. 원래 인생이란 게 한 치 앞을 모르잖아요.”
하연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우는 기세등등했고 빙글거리며 대석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사람들은 서우가 입을 열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리를 쏟아 내니 제발 그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윤하연! 윤하연 어디 갔어!”
“부, 부르셨어요?”
“대체 윤 대리는 인턴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리고 해 오라는 보고서는 왜 이렇게 늦어? 지금 나 엿 먹어 보라는 거야! 어?”
하연은 식은땀을 흘렸다. 서우로 인한 불똥이 자신에게 튀었기 때문이다. 서우 때문에 화가 났으면서 어째서 자신에게 푸는 건지. 마음 같아서는 이미 대석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다.
“서우 씨? 권서우 씨!”
대석이 시킨 일은 쳐다도 안 보고 서우가 느긋하게 바깥으로 나갔다.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깨달은 하연은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았다.
사고를 쳐도 앞에서 치는 게 낫다. 자신의 눈 밖에서 서우가 사고를 친다 생각하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렴풋이 등 뒤에 꽂히는 진혁의 안쓰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저 망나니를 시야에 두는 게 우선이었다.
“하, 이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하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무리 다리 길이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한들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윤 대리님은 뭐 좋아하세요?”
“어, 어디서 튀어나온 거예요?”
하연이 구시렁거리자마자 귀신처럼 서우가 나타났다. 하연은 까득 이를 갈던 걸 멈추고 멈칫했다. 홧김에 욕이라도 했었다가는 상당히 뻘쭘한 상황이 펼쳐질 뻔했다.
“아침부터 커피만 마시던데 상큼한 생과일주스는 어때요? 카페인도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워요.”
기가 막혔다. 사무실을 온종일 대판 뒤집어 놓은 주인공이면서 어찌 저리 여유로울 수 있을까. 하연은 뜬금없는 서우의 제안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사내 카페였다.
“권서우 씨, 혹시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올 생각인 건…….”
“딸기 좋아해요? 아니면 청포도?”
“……딸기요. 딸기로 주문해 주세요.”
하연은 도저히 서우의 흐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제대로 들어 놓고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하연의 대답에 서우는 기분 좋게 주문을 하고 주스를 받아 왔다. 어울리지 않게 딸기라도 좋아하는 건지 서우의 앞에도 딸기 주스가 놓였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별말씀을.”
편하게 마시라는 듯 서우가 방긋거렸다. 카페에 앉아서 조용히 있는 모습만 보면 정상인인데 왜 사무실에만 들어가면 이상한 인간이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서우는 달달한 딸기 주스를 마시며 창밖을 봤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하연이 심호흡을 하면서 용기를 냈다. 하연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서우가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목이 꽤나 탔는지 하연의 주스가 벌써 반은 사라진 상태였다.
“제가 궁금해요?”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연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어 갔다. 마냥 친절하고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했던 하연이 한 꺼풀, 한 꺼풀 본래 모습을 보이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서우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나중에 물어봐요.”
“…….”
“아, 그래. 여러모로 윤 대리님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원래 거슬리는 걸 곱게 넘기는 인간이 아니라서. 또 회사 생활을 오래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서우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 줘요. 나중에…… 아니, 아니지. 틈틈이 보답은 확실히 하도록 할게요.”
서우는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들어가 보겠다며 선선한 인사를 건넸다. 홀로 남은 하연은 얼이 빠진 채 그의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복잡한 감정이 어이없는 상황에 팍 식어 버렸다.
*****
팀장이 기분 따라 행동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다짜고짜 회식이라니. 하연은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차라리 야근을 시켜 달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 사라지고 싶은데 마땅히 꺼낼 변명도 없었고, 설령 꺼낸다고 한들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대석이 흔쾌히 보내 줄 리도 없었다.
“권서우 씨는 바쁜 일 없어요?”
“글쎄요.”
서우는 묘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 않고 억지로 웃는 게 분명한데 주섬주섬 회식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서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하연을 올려다봤다.
“윤 대리님은 갈 거예요?”
“네, 그래야죠. 권서우 씨도 바쁜 일 없으면 같이 가요.”
하연은 뭘 물어보냐며 한숨을 쉬었다. 서우는 진혁과 대화를 나누며 바깥으로 나서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다가 마우스를 딸깍였다. 우르르 떠 있던 창이 한 번에 꺼지고 이내 모니터가 까맣게 변했다.
까만 모니터에 서우의 얼굴이 비쳤다. 서우는 모니터 속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텅 빈 사무실에서 표정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모든 것에 무심했다.
“갈까 말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무시하고 가면 된다. 그러나 아침에 회의실에서 있던 일로 하연을 쥐 잡듯 굴어 대던 대석을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본디 신입의 실수를 사수가 떠맡는 게 보통이라지만 대석의 행동은 사적인 감정이 가득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연을 걱정한다기보다는 회사에서 저런 짓을 일삼는 대석이 떳떳하다는 게 거슬렸다. 서우가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지만 회사 자체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권서우 씨? 얼른 나와요.”
“네. 지금 나갈게요.”
진혁과 일찌감치 나갔던 하연이 대뜸 돌아와 얼굴을 비죽 내밀었다. 팀장의 히스테리는 하도 당해서 익숙했는지 금세 털어 내고 업무를 보는 게 눈에 띄는 존재였다. 서우는 실소를 흘리며 하연에게 화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
회식은 상상 이상으로 지루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대석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게 급선무처럼 보였다. 들어가지도 않는 술을 억지로 마셔 댔고, 대석의 헛소리에도 반응해 주어야 했다.
서우는 실로 불쌍한 광경을 둘러보며 다리를 꼬았다. 팀원들에게 돈을 쓰기도 싫은 건지 싸구려만 잔뜩 시켜 둔 게 평소 행실을 알렸다. 서우가 질린 시선으로 맥주잔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맥주를 봐도 흥이 돋지 않았다.
“…….”
서우는 물끄러미 하연을 봤다. 술이 더는 들어가지 않는지 피곤한 기색이었다. 옆에 입사 동기라고 했던 진혁이 앉아 있어서 그나마 챙김을 받고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대석은 유독 하연을 저격해 술을 억지로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건 별로 재미없는데.”
재밌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영 꽝이었다. 미간을 매만지며 서우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용케 소리를 들었는지 하연이 의아하게 서우를 보는 게 느껴졌다. 서우는 그 시선을 느끼고 금세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으며 하연을 바라봤다.
“윤 대리님 힘드시죠?”
따뜻한 질문이었지만 하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대답했다가 서우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긴장한 것 같았다. 예상외로 눈치가 빠른 하연을 보며 서우가 픽 웃었다. 이틀 사이에 벌써 서우를 꽤 파악한 듯 조심성이 두터워졌다.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슬슬 집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일도 출근인데.”
“……2차 갈 때 벗어나야죠.”
서우는 직설적인 방향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의심하고 의심하는 하연을 살살 달래기로 했다. 사실 굳이 하연을 거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때를 기약하는 것보단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낫죠. 그래. 제가 이 상황을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줄까요?”
“……예? 뭐요? 무슨 짓을 한다고요? 저기요, 권서우 씨? 저기요?”
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인간이 이번에는 어떤 미친 짓을 하려는지 긴장한 듯싶었다. 확실히 술이 들어가니 매번 두르고 다니던 어수룩한 친절과 예의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저게 낮에 보았던 것처럼 본래 성격에 가까운 모습인 것 같았다. 역시 평소 재미없는 모습보다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하며 서우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집에 가서 푹 쉬세요. 우리 윤하연 대리님을 향한 갸륵한 제 마음도 알아주시고요.”
그리고 곧장 서우는 매끄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지갑을 꺼냈다. 하연의 눈동자가 가파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낌새를 느낀 듯 허겁지겁 손을 뻗어 서우를 붙잡으려 했지만 실패였다.
“이만 가도 될까요? 집에 할 일이 있어서요. 회식도 흥이 안 나는 것 같고.”
훤칠한 서우가 일어나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하연은 그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신음했다. 서우는 모두에게 호감을 얻어 냈던 예의 첫 모습처럼 달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참. 입사한 기념으로 오늘 회식비는 제가 내겠습니다.”
웅성거림이 짙어졌다. 저 새파랗게 어린 인턴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까. 다들 경직되어 서우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지켜봤다. 팀장은 눈살을 구겼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지 삿대질만 할 뿐이었다.
“……저, 저!”
서우가 영수증을 들고 나갔다. 뒤늦게 대석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서우는 사라진 뒤였다. 어느덧 웅성거림도 사라지고 고요해졌다. 하연은 이게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어처구니없게도 또렷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다시 서우가 등장했다. 허풍이 아니라 정말 계산을 한 듯 지갑에 카드를 꽂고 영수증을 버리고 있었다. 서우는 선선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들 여기서 해산하죠. 수고하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가 입을 크게 벌리고 서우를 올려다봤다. 모든 사람이 할 말을 잃었지만 경악에 물든 눈빛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려 주었다.
미친놈, 혹은 안하무인 또라이.
서우는 그 간단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회식 자리를 유유히 떠났지만 다들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다. 대석을 제외한 모두가 기피하는 회식이었을지언정 어떤 누구도 서우처럼 행동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쟤 뭐야?”
옆에 앉아 있던 진혁이 맥주를 주르륵 흘리며 중얼거렸다. 하연은 멍하니 진혁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너무 황당해서 현실성이 없는 일이 눈앞에서 발생했다. 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권서우 인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보냐는 진혁의 책망 깃든 눈빛이 닿아 왔다. 하지만 하연은 억울했다.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문득 첫 만남 때가 떠올랐다. 초면에 일상의 말을 하듯 자연스럽게 오 팀장과 자신의 관계를 언급하던 그 무례한 태연함이 말이다.
하연은 미치도록 불편한 정적이 찾아온 테이블을 슬쩍 둘러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폭탄을 터트리고 떠난 서우가 보였다. 하연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우를 끔뻑끔뻑 응시했다.
“…….”
그 시선을 느꼈는지 서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하연 쪽을 바라봤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 하하. 미친놈.”
정말 저 인간은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연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하연과 눈이 마주친 서우는 늘 짓고 다니던 웃음을 걸치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 사태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평범하게 인사를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위화감 없는 모습이었다.
하연은 서우가 앉았던 옆자리를 보면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아 권서우라는 인간은 상식에서 몇 억 광년은 벗어난 인간이 분명했다. 첫 만남 때 서우가 하연의 머릿속에 경고등을 켰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