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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나도 그게 궁금해.”

방금 택배 기사가 다녀갔다. 커다란 박스와 진땀을 흘리는 택배 기사를 보아 크기와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하연과 진혁은 입구 주변에 놓인 박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름이…… 권서우. 그래, 그 인턴 것 같네.”

진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택배의 주인을 확인했다. 대체 뭘 주문했길래 입사한 지 하루 만에 온갖 택배를 다 회사로 주문한 걸까. 진혁은 서우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골 때리는 인간이라며 어이없어했다.

“안녕하세요.”

“어어, 어서 와요. 근데 이거 권서우 씨 택배 같은데?”

하연은 말없이 서우를 바라봤다. 서우는 거대한 박스의 향연에도 놀라지 않았는지 그러려니 했다. 그 반응에 진혁은 더더욱 어이없어했고, 하연은 택배와 서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많이 시킨 것 같은데…… 잘못 주문한 건 아니죠?”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하연이 물어봤다. 서우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했다.

“제대로 온 것 같은데요? 어제 보니까 커피 종류도 적고 먹을 만한 것도 없어서 주문해 봤어요. 같이 마셔요.”

“예?”

“제가 믹스커피가 잘 안 맞아서요. 그나마 커피 머신이 괜찮을 것 같아서 주문해 봤어요. 사무실에 둬도 괜찮을 크기고요.”

서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와 박스를 툭툭 쳤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인턴이 사무실에 다짜고짜 커피 머신부터 시작해서 별별 물품과 다과를 주문한단 말인가.

하연은 황당한 상황에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고급스러운 커피 머신을 보니 갑자기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커피는 여기에도 구비되어 있어요. 필요할 때 마시면 돼요.’

‘믹스만 있나 보네요.’

‘네. 휴게실에 머신이 있지만 편하게 오가기에는 좀 멀어서…… 아,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윤 대리님은 그 커피가 입맛에 맞나요?’

‘그냥 편하니까 마시는 거죠, 뭐. 매번 저 멀리까지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긴 귀찮겠네요. 그냥 하나 사 두는 게 편하겠어요.’

떠오른 장면은 바로 어제 있던 일이었다. 서우에게 자주 오갈 곳들의 위치를 알려 줄 겸, 함께 탕비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너무 소소한 내용이라 기억에도 없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

농담처럼 한 말인 줄 알았더니 진심이었다니. 서우에게는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농담인 걸까. 혼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신을 향한 술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우는 칼로 택배를 뜯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커피 머신을 비롯해 고급스러운 포장의 쿠키와 원두가 잔뜩 나왔다. 진혁의 표정이 뜨악해졌고 하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더럽게 비쌀 텐데 저걸 샀다고? 혹시 저 인턴 금수저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진혁의 합리적인 추론을 뒤로하고 하연이 빈 박스를 구석으로 밀었다. 그런 와중에 서우는 가뿐하게 머신을 들고 이동했다. 어제 자리까지 봐 둔 건지 적당한 곳에 머신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마침 들어온 채영이 아침부터 사무실에 가득히 쌓인 박스와 반짝거리는 머신을 보고 흠칫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한 채영이 저 정도로 놀랄 정도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태인 듯싶었다.

채영은 설명해 달라며 연신 힐끗거렸지만 그 누구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다들 한마음으로 서우의 뒷모습을 보며 멍청하게 서 있는 게 다였다.



*****



서우가 일으킨 해프닝은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출근하는 족족 다들 흠칫거리기 일쑤였고 하다 하다 옆 부서까지 기웃거렸다. 무슨 돈으로 저걸 사무실에 구비했냐고 물었을 때 어제 들어온 인턴이 했다고 하자 다들 못 믿는 눈치였다. 별 헛소리를 다 한다며 놀리지 말라는 반응이 나올 때마다 하연을 비롯한 팀원들은 억울해했다.

“윤 대리! 회의 준비 좀 부탁해. 오늘 강우 씨가 미팅 가서 자리에 없네. 겸사겸사 권 인턴한테도 알려 줘.”

“네. 서우 씨, 같이 회의 준비하러 가요.”

하연은 바쁘게 이것저것을 챙기더니 서우에게 손짓하며 회의실로 향했다. 조급한 걸음의 하연과 달리 서우는 긴 다리로 느긋하게 그녀의 속도에 맞춰 움직였다. 부랴부랴 움직이는 하연을 재밌게 내려다보며 서우가 미소 지었다.

“회의 준비는 이렇게 하면 돼요. 미리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 목록도 확인해 두면 좋고요. 오늘처럼 간단한 팀 회의는 자주 있으니까 위치 잘 기억해 두세요.”

“회의에는 저도 참석하나요?”

하연의 맞은편에 선 서우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했다.

“당연하죠. 서우 씨도 팀이니까요.”

“좋은 어감이네요.”

두 사람이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준비를 마쳤을 무렵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최근 큰 프로젝트 하나가 끝났던 만큼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였다. 하연은 서우를 옆에 앉히고 자신도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조만간 M 광고 대행사랑 하반기 워크숍 진행할 거예요. 그때는 홍보팀도 같이 참여할 예정이니 알아 두세요. 추후 야유회도 계획되어 있으니까 참고하면 좋겠네요. 그럼 일단 팀장님이 말씀하셨던 것부터…….”

또 얼마나 광고사를 쥐어짰을까. 하연은 못마땅하게 대석을 훔쳐봤다. 광고사와 워크숍이라니. 광고사 쪽에서 허겁지겁 준비하면서 골치 아파할 게 뻔했다.

“…….”

그들이 갑질을 당하는 게 일상이라지만 이런 인간을 만난 적은 처음일 것이다. 워크숍도 말이 워크숍이지 그만큼 접대를 받고 시간이나 대충 보내겠다는 속셈이겠지. 속이 훤히 보이는 구질구질한 목적이었다.

“그 건은 디자인이 우선 넘어와야 가능할 것 같네요.”

“그럼 보류해 놓고…….”

“이 부분 이상한 것 같은데.”

덤덤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착각이기를 바랐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하연의 옆에 앉은 서우였다. 하연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원래 이렇게 많이 드나요? 과장 좀 보태서 천문학적인 액수 같은데.”

서우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연은 서우가 펼쳐 든 페이지를 확인했다. 모든 팀원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지만 거한 백을 가진 낙하산 팀장에게 차마 말할 수 없던 지점이었다. 하연은 대체 서우가 무슨 생각으로 저걸 대놓고 언급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권서우 인턴?”

아니나 다를까 대석은 곧장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서우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동공을 가만히 두지 못할 때 서우는 나긋나긋 말을 이었다.

“제 착각인가요? 별다른 뜻은 없고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다들 말씀을 안 하는 걸 보니 문제는 없나 보네요. 전 횡령이라도 하는 줄 알았죠.”

서우의 발언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다. 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인턴인 주제에 저런 배짱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걸까. 하연은 부디 고약한 팀장의 짜증스러운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죠.”

험악해진 대석의 표정을 살핀 진혁이 재빨리 회의를 정리했다. 하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석이 거칠게 의자에서 일어나 회의실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팀원들이 하나둘 따라나섰다.

빈 회의실에는 간간이 웃음소리를 내는 서우와 침묵을 지키던 하연만 남게 되었다.

“……권서우 씨는 여러모로 대단하네요.”

“그래요?”

칭찬이 아닌데 칭찬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하연은 무거운 숨을 뱉으며 홱 몸을 틀었다.

“오대석 팀장님이랑은 웬만해선 엮이지 마요. 심기 거스르는 것도 하지 마시고요. 좋을 것 없으니까.”

“왜요?”

서우가 드물게 눈을 빛냈다. 하연은 그 반응에 머뭇거리다가 결국 대답해 주었다. 서우를 위해서라도 말을 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석이 임원들과 긴밀한 관계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니 말단 직원이 그를 건들면 모가지라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백이 대단한 사람이니까요. 안 좋게 엮이면 서우 씨만 손해니 조심하세요. 서우 씨가 좀 지나치게 솔직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때와 장소는.”

“윤하연 대리님.”

서우가 하연의 말을 끊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죠. 조상님의 지혜가 깃든 말이 널리 널리 알려져 있는데도 대범하게 횡령하려는 꼴이 신기해서 말한 거예요. 무엇보다 우리 팀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저랑은 상관도 없고.”

“…….”

“무엇보다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원래 무서울 것 없이 자라 온 인간이거든.”

꾸준히 존댓말을 사용했던 서우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어 위화감이 감돌았다. 자신을 낮추던 서우가 처음의 그 거만한 모습을 얼핏 내비쳤다. 하연이 본능적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거죠. 내가 팀장이랑 엮이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

“팀장이 나랑 엮이는 걸 무서워해야지.”

서우가 하연을 내려다보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무심했다. 그 괴리감이 선뜩했다. 하연은 불안하게 자신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



서우는 자기가 회의실을 정리할 테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 하연은 처음으로 서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적막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하연은 고양이를 피하는 쥐처럼 황급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환장할 정도로 대책 없는 인간이네.”

하연이 자신의 두 팔을 쓸어내리며 진저리를 쳤다. 서우가 한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압도당해 버렸다. 정말 진혁의 말마따나 금수저라도 되는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 여유 만만한 태도가 설명되지 않았다. 당장 회사에서 쫓겨나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대책 없는 것도 없는 거지만 근본적인 정신머리가 나간 것 같은데?”

“뭐야? 인기척 좀 내.”

“난 피가 바싹 말랐어. 쟤 뭐 하는 놈이야? 오대석 눈깔 뒤집히려는 거 겨우 막았다고. 아니 어떤 인간이 회의실에서 그런 발언을 해?”

진혁이 가슴을 퍽퍽 쳤다. 그새 대석에게 시달린 건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와. 아직도 오싹하네. 팀장 표정을 네가 봤어야 해. 넌 지금 들어가지 마라. 불똥 튄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하연을 진혁이 붙잡았다. 하연은 그 정도냐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걔는 뭐 때문에 그런 거래? 내일부터 안 나온대? 아침에도 그렇고 회의 때도 그렇고. 강남 땅 부자라거나 명동 한복판 건물주라도 되나? 저 정도면 완전 겁대가리를 상실했잖아.”

“진정해. 인턴이라 뭘 몰라서 그런 거겠지.”

하연은 애써 서우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연의 확신 없는 목소리를 알아차린 진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혁은 안타깝게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고생이다.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맡았어? 너한테도 저랬어?”

긍정했다가는 진혁이 당장이라도 서우에게 해코지를 할 기세였다. 하연은 고개를 내저으며 얼버무렸다.

“다들 똑같이 말하고 있어. 회의 때 심장 떨어질 뻔했다고.”

“내가 잘 말해 둘게.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자신의 말을 서우가 들어줄 가능성은 미지수였지만 하연은 진혁을 진정시키기 위해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