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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막연한 과거지만 지금까지도 생생한 걸 보니 어지간히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혼자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일을 찾아 헤맸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뻘쭘했던 시기.

입사 후 첫날이 얼마나 길고 험난한지 경험해 본 하연은 업무를 보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연신 힐끔거리며 서우를 훔쳐봤다. 비록 껄끄러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사수로서 그를 책임지는 게 옳았다. 그러나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이 야속했다.

“윤 대리님.”

“……네?”

“하실 말씀이라도?”

그때였다. 텅 빈 모니터만 줄곧 바라보며 펜을 돌리던 서우가 말을 걸어왔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서우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그러니까.”

어떻게 알아차린 건가 싶지만 계속 힐끔거렸던 자신이 떠올라 창피함이 몰려왔다. 바로 옆에서 계속 훔쳐보는데 못 느끼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하연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애써 잠재우며 말을 더듬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진정하라는 듯 서우가 눈웃음을 지었다. 멋들어진 얼굴 위로 보이는 은은한 웃음에 하연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최악의 첫인상이 순간 흐려질 정도로 예쁜 미소였다. 하연은 그 미소에 홀리지 않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궈, 권서우 씨.”

“네.”

“일을 안 주려는 게 아니라…… 최근에 바쁜 일이 끝나서 비교적 여유로운 시기라 그래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느긋하게 적응하는 날이라 생각하고 계세요.”

하연은 서우에게 자신의 과거를 투영해 버린 만큼 그를 격려하고자 했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횡설수설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쏟아졌다. 여전히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일부터 차근차근 알려 드릴 테니까 긴장하지 마요. 그리고 또…….”

원하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는 흐름 속에 하연은 착잡함을 느꼈다. 이런 와중에 이놈의 입은 왜 멈추지도 않고 계속 움직이는 건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

설상가상으로 조용히 듣고 있던 서우의 얼굴이 묘하게 바뀌었다. 흥미로운 것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은근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의 의미를 헤아리고 싶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누가 와서 자신을 멈춰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윤하연 대리님.”

“예, 예?”

그런데 횡설수설하던 하연을 멈춘 건 의외로 서우였다.

“긴장하지 말아야 할 건 제가 아니라 윤하연 대리님 같은데.”

“…….”

“윤 대리님의 친절한 배려는 알아들었어요. 고마워요. 좋은 사람이네요.”

의미심장한 소리. 하연이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서우를 쳐다봤다. 서우는 어느새 턱을 괴고 하연을 즐거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일 보세요. 업무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그, 그래요.”

“커피라도 타 드릴까요? 그거 식은 것 같은데.”

서우가 차갑게 식은 하연의 종이컵을 턱짓하여 가리켰다. 하연이 슬쩍 곁눈질로 종이컵을 확인했다가 도리질했다. 굳이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하게 서우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알겠어요. 커피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가져다드릴 테니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거만한 태도 때문일까. 하연은 인턴에게서는 느끼려 해도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서우에게서 발견했다. 찜찜함이 다시 몰려왔다.

“…….”

다행히 살갑게 반응해 주니 고마웠으나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연이 입술 안쪽을 깨물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문을 여러 번 읽어 내렸다. 인턴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어쩐지 평범했던 일상에 균열이 가는 듯했다.



*****



“심부름 가?”

장난기가 스며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서우는 휘적휘적 걸어가던 걸 멈추고 픽 웃었다.

“심부름은 무슨.”

우스운 소리를 다 한다며 책망하듯 뒤를 돌아봤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상대로였다. 하긴 이 회사에서 현재 서우에게 저런 친근감을 나타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이왕 들어올 거면 우리 팀으로 배치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 어차피 바로 옆 부서인데.”

단정한 차림새의 상대방이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서우는 샐쭉 웃으며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퉁명스러우면서도 단조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부회장님의 깊은 뜻을 누가 알겠어. 말 안 듣는 자식새끼 엿 한번 먹어 보라는 의미였겠지. 뭐,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아. 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야 낫지.”

“…….”

“안 그래? 권희성 팀장.”

주변이 조용하다고 한들 엄연히 업무 시간이었다. 인턴이라 남들의 이목을 조심해도 부족할 판에 서우는 거침없었다. 팀장이라고 칭한 희성을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고 따분하다는 듯 하품까지 했다.

“철든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나 보네. 망나니처럼 날뛰는 걸 보니까.”

“알다시피 내가 무서울 게 없거든.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건들지 마세요, 권희성 팀장님. 인턴이라고 텃세 부리면 내가 슬퍼, 안 슬퍼?”

“텃세라…….”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희성이 헛웃음을 지었다.

“옆 부서 인턴 나부랭이한테도 이런 깊은 관심을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갔으면 어지간히 고생했을 게 눈에 그려져.”

서우는 슬픈 얼굴로 하소연했지만, 과장된 몸짓과 빈정거리는 어투는 진심이 아님을 알렸다. 하소연하는 척 빙글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희성은 기가 막혔지만, 곧 다정하게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난 누구처럼 치사하게 굴지는 않거든. 나름대로 열심히 알려 줬겠지. 회사라는 게 뭔지, 업무가 뭔지.”

“…….”

“그리고 까마득한 상사한테 어떻게 굴면 좋을지 말이야.”

상냥한 목소리에 가려진 뼈가 날카로웠다. 서우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이래서 회사에 들어오기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 곳곳에 있고 딱딱한 조직 생활은 거북했다. 물론 그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없기에 잠자코 들어온 거지만 말이다.

“어쩌다 보니 말이 길어졌네. 딱히 텃세를 부리러 온 건 아니야. 입사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코빼기도 안 내밀기에 궁금해서 말 좀 걸어 봤어. 오랜만에 입국한 친척 동생한테 형이 관심 가지는 건 당연하잖아? 심지어 같은 회사에 입사까지 했는데.”

친척 관계의 형과 동생이라니. 참 부질없고 허울 좋은 소리였다. 서우는 이제 더 상대하기도 귀찮다며 혀를 차고 등을 돌렸다.

“참.”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성이 잊고 있었다며 짧은 소리를 냈다. 서우가 고개를 돌렸다.

“굳이 화려한 가족 관계를 숨기고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너랑 상황이 달라. 그러니까 엮이기 싫고 들키기 싫으면 알아서 처신해. 난 상관없지만 넌 그리 밝히고 싶은 것처럼 안 보이거든.”

서우는 자신이 부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들어왔다. 인사팀도 위에서 떨어진 명령에 쉬쉬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면 서우의 배경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희성은 상황이 달랐다. 옛적에 회사에 입사했던 희성은 처음부터 자신의 배경을 숨기지 않았다. 오너 일가의 한 사람이라는 게 명명백백했던 희성은 빠른 승진을 거듭해서 팀장 자리를 얻어 냈다. 실력이 좋은 것도 있지만 역시 어느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압도적인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희성의 조언 아닌 조언을 서우는 쓸데없는 일로 치부했다. 흥미가 뚝 떨어졌는지 더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멀어졌다.

희성은 서우의 뒷모습을 재미나게 지켜보며 조소했다. 살다 보니 서우를 회사에서 볼 줄이야. 세상 살고 볼 일이었다.

“쉬운 길을 돌아서 가는 건 누구의 뜻이려나.”

서우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희성은 의문스러운 서우의 행보에 고개를 갸웃했다. 서우의 말을 들어 보면 부회장의 뜻인 것 같은데 희성이 아는 부회장은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서우를 당당히 앞에 세우고 후계자로 키우려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한 사람을 가리켰다.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고 늘 못을 박고 한국에 발도 들이기 싫어하던 권서우, 바로 자유분방한 망나니 하나였다. 언젠간 밝혀질 일임에도 구태여 저러는 건 서우의 고집일 게 뻔했다.



*****



본가에 들어선 서우는 심드렁하게 주변을 살폈다. 굳게 닫힌 안방을 보아하니 백훈은 서재에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붙잡는 이들을 뒤로하고 서우는 성큼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쯧. 시끄럽게도 나타나는구나.”

백훈이 서류를 내려 두며 안경을 벗었다. 중후하지만 날카로운 인상이 엿보였다. 부자지간인 만큼 두 사람은 지독하게 닮았지만 풍겨 오는 분위기가 오묘하게 달랐다.

“미국까지 우르르 사람을 보내 하나뿐인 아들내미 잡아 오라던 아버지보다 낫지 않겠어요?”

“그러게 두 발로 알아서 걸어오면 좀 좋았겠냐. 언제부터 네가 학문에 뜻이 있었다고.”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려던 무렵 서우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충분히 반항할 수는 있었으나 더 귀찮아질 게 뻔했기에 잠자코 온 것이었다.

서우는 보기 좋게 다듬어진 손톱을 시큰둥하게 매만지며 백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지만 백훈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지적하지 않았다.

“도망칠 줄 알았더니 제대로 출근을 했다던데.”

“인턴이 첫날부터 빠꾸 내는 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잖아요? 이왕 시작한 거 출근은 해야죠.”

열심히 한다거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출근만 적당히 잘하겠다는 의미였다. 교묘하게 선을 긋는 서우를 무심하게 쳐다본 백훈이 입을 열었다.

“네가 배경을 숨기고 들어간 것이 기특한 생각에서 기인한 게 아니란 것 즈음은 안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업무나 차근차근 배워. 다음 인사 개편 때 바로 승진시켜 줄 테니까.”

서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조만간 오피스텔 얻어서 나가려고요. 본가에서 출퇴근하기 껄끄럽네요. 아버지랑 달리 저는 나름 인턴이라 지각하기가 영 눈치 보여서.”

백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우가 또 머리를 굴려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의식한 서우가 손을 대충 내저었다.

“본가에는 자주 들어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출퇴근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니까.”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둬.”

“생각도 안 했어요.”

서우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들에 대한 의심이 어찌나 강한 건지 툭하면 의심이었다. 전적이 화려하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으나 신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웃길 노릇이었다.

“팀 분위기는 어때. 적응할 만해?”

느긋하게 일어나던 서우가 무의미하게 천장을 올려다봤다. 팀 분위기라. 딱히 소속된 느낌이 들지 않아 낯선 어감이었다. 애초에 적응하고 소속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뭐, 회사 생활이 특별한 게 뭐가 있겠어요. 거기서 거기지.”

“…….”

“아.”

미련 없이 서재 바깥으로 향하던 서우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멈췄다. 그러더니 가볍게 웃어 대며 백훈을 돌아봤다.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아요.”

“…….”

“꽤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겨서.”

서우가 아침의 상황을 떠올리며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젊은 대리를 상대로 꼴사나운 짓을 하는 팀장의 모습이 참으로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이 즐거움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따분한 회사 생활에 소소한 재미는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