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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입사를 피하는 방법
엄마는 말씀하곤 하셨다. 언제 중요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전화기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지 말라고. 백번 되뇌어 보아도 백번 지당하신 충고다.
이 전화는 처음부터 받지 말았어야 했다.
― 선생님. 전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네에, 그러시군요.”
힐끔, 유채는 성의 없는 대꾸와 함께 힐끔 시계를 쳐다보았다.
PM 07:58
원래 퇴근했어야 할 시각에서 어느덧 두 시간 가까이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어째서 여태 퇴근을 못 하고 데스크에 앉아 있단 말인가? 그건 수화기 너머 울려 퍼지는 김선호 씨의 목소리가 너무나, 여전히 쌩쌩했기 때문이다.
― 정말로 진짜로 굉장히 이해가 안 간다고요! 왜 경영전략 실장님 개자식 새…… 나쁜 놈께서는 강 전무님이 흡연실 갈 때마다 저더러 따라가라고 등 떠미는 걸까요? 심지어 전 담배도 안 피우거든요!
“그러게요…….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람…….”
또박또박 낭랑한 음성이 어찌나 귀에 쏙쏙 박혀 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김선호 씨는 회사를 다닐 게 아니라 전문 성우로 활약해 마땅한 인재다.
그는 두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동안 헛기침 한 번으로 목청을 가다듬어 보지도 않았다. 글쎄 어쩌다 그런 귀한 재능을 썩힌 채 ‘경영전략 실장님 개자식 새ㄲ…… 나쁜 놈’ 밑에서 구르고 있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하다.
진유채에게 죄가 있다면 이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각을 1분 남기고 데스크에 울려 퍼진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것뿐.
이 비극은 그녀가 서울 시내의 모 상담 심리소 데스크 직원이라는 데서 출발했고, 오늘따라 상담사들의 상담 업무가 빠르게 마무리 지어져서 평소보다 3분가량 일찍 사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는 데서 불씨를 틔웠다.
유채는 언제나처럼 상냥한 말씨로 ‘금일 상담 업무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예약을 잡아 드릴까요?’라고 응대하려 했으나, 그 전에 김선호 씨의 입이 먼저 터졌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조만간 화병으로 콱 죽어 버릴 거예요.
예의 바른데 막무가내인 놈. 그게 바로 김선호였다.
유채는 정해진 매뉴얼대로 ‘저는 상담사가 아니고 데스크 직원이랍니다. 상담이 필요하시다면 일정을 잡아 드릴게요.’라고 상냥하게 안내해 주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김선호가 다짜고짜 작정이라도 한 듯 한풀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 왜긴 왜겠어요! 제 건강을 해치려는 못된 심보겠죠! 왜, 직접흡연보다 간접흡연이 더 몸에 안 좋다고 하잖아요? 아무래도 그 악마가 저를 악성 호흡기질환에 노출시켜서 엿 먹이려는 게 틀림없어요. 하지만 순순히 엿 먹어 줄 줄 알고요? 웃기지 말라 그래요. 만에 하나, 제가 향후 30년 이내로 관련 질환을 앓게 된다면 전 반드시 회사 상대로 산재 신청을 할 거예요. 승소한 다음엔 그놈에게 민사를 걸 거라고요! 두고 보세요!
보아라. 이토록 긴 대사를 단 한 번 더듬지도 않고 매끄럽게 소화해 내더라니까.
그러니까 하루빨리 퇴사해서 성우 오디션을 본다면 모두가 해피 엔딩이겠거늘 어째서 벼랑 끝 직장인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거듭 의문이란 말이다. 그 와중에 시곗바늘이 기어코 PM 08:00을 넘겨 버리자, 유채의 대꾸에선 성의가 사라지다 못해 영혼이 날아갔다.
“아 예 뭐 잘해 보세요. 아마 상리그룹 상대로 그런 짓을 벌였다간 취업 길이 영원히 막히겠지만.”
―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차. 유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맹세코 악의 없이 한 말이다.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다.
“농담이에요! 풍문에 상리그룹이 뒤끝이 워낙 길다고 하길래요! 하, 하하!”
어차피 물 건너간 퇴근, 유채는 사회생활 스트레스로 자살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이 남자를 굳이 제 손으로 등 떠밀어 주고 싶진 않았다. 요컨대 측은지심이라 이거다. 다른 말로 인간 된 도리라 이거다. 결코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 선생님.
웬걸, 김선호가 바로 정색했다.
― 제가 상리그룹 다니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
― 완전 귀신이시네요?
“뭐라고요?”
이번엔 유채도 더럭 반문하고 말았다.
뒷골이 확 당기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녀는 순간 뻗쳐 오른 화를 참지 못하고 오도도 반론을 쏟아 냈다.
“그러게요. 제가 김선호 씨가 상리그룹 건설 자회사 견적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선호 씨께서 장장 두 시간에 걸쳐서 제게 털어놓은 회사 생활의 고충 에피소드를 통해서 자연스레 유추했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어 지난달에 카타르 상대로 체결했다는 단독 건설 수주나, 그로 인해 전 임직원에게 일괄 지급되었다는 상여금 액수 같은 것 말이에요. 지금 상리그룹에서 그 건으로 대대적으로 기사 내고 주가 올리는 중이잖아요. 그 중간중간 언급한 라이벌 회사들의 기업명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고요. 그 기업들이 수주 경매에서 얼마를 불렀는지까지도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던가요?”
― 헉! 그건 비밀이에요.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새, 아니, 이 사람이 장난하는가 싶다. 유채의 언성이 올라갔다.
“당연히 비밀로 해야죠! 전 고소당하기 싫거든요?!”
누굴 저와 같은 급으로 취급해도 유분수지. 김선호와 달리 사리 분별을 매우, 무척, 되게 잘할 줄 아는 진유채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상태다.
“김선호 씨가 근무 중인 상리그룹 본사 부지가 서울시 XX구 XX동에 있으며 김선호 씨가 현재 앉아 있는 견적팀 사무실은 그중 A동 27층이고, 그 회사 내부에 직원 식당이 무려 일곱 군데나 설비되어 있는 데다 동과 동 사이에 셔틀버스가 운행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어딜 가서 떠들고 다니겠어요? 그리고 김선호 씨로 말할 것 같으면 작년에 해외 유명 대학 관련 과를 졸업한 직후 국내로 귀국해서, 상리그룹 건설사 개발사업부에 지원 입사한 뒤 건축 견적팀에 배정받은 막내 사원이라는 걸 제가 어디에 가서 떠들겠냐고요!”
그뿐이랴. 유채는 김선호의 고향과 생일과 혈액형과 가족관계와 신체 특징까지 꿰차고 있었다. 장장 두 시간짜리 하소연에 시달린 결과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미국 테네시 주, 생일은 1월 1일, 혈액형은 O형, 방령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이고, 사랑하는 홀어머니께서는 현재 미국에 계신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물론 유채의 귀에는 자랑으로 들렸지만―188cm의 큰 키에다가 돈 주고도 못 살 넓은 어깨를 가졌으며 팔다리까지 길어서 모델 제의도 심심찮게 듣는다나.
모두 무려 두 시간, 아니, 불과 두 시간 만에 이 수다쟁이가 유채의 귀에 일방적으로 메다꽂은 정보들이다.
김선호가 말했다.
―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제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경청해 주셨다니 감동했어요.
“…….”
유채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짜증 나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 선생님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정말 딱 사표 쓰고 뛰쳐나가기 일보 직전이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이럴 수가. 정말 짜증 나는 세상 순한 놈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유채는 꾸욱 이마를 짚으며 사무실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돌려 버렸다.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었더니 팔이 다 아프다. 책상에 두 팔꿈치를 괴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말투는 하릴없는 겸연쩍음에 젖어 있었다.
“뭐어……. 어쨌든 기분이 나아졌다니 다행이고요…….”
기왕 무보수 야근에 시달린 김에 이런 순한 맛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다. 어차피 저쪽은 이쪽이 아무리 상담사가 아니라고 외친들 듣지 않기도 했고…….
“어쨌든 나중에 성우 시험 한번 알아보시기를 추천,”
― 선생님. 제가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싹뚝, 유채의 말이 잘렸다.
―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요.
언제부터인가 김선호의 목소리에선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다정함보다는 의뭉스러움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유채는 곧장 표정을 굳혔다.
“아뇨, 전 남의 비밀에 관심 없어요.”
이 사람과 더 얽히면 위험하다. 본능적인 직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 순간에도 김선호는 계속 유들유들한 말씨를 이어 가고 있었다.
― 괜찮아요. 제 비밀은 아닌걸요. 굳이 따지자면 회사 비밀이랄까요? 마침 상리그룹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모양이니…….
“그만해요. 김선호 씨.”
유채가 급히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이만 끊겠습니다. 퇴근해야 해서요.”
그때였다.
― 얼마 전에 본사 옥상에서 투신한 박 이사님이요, 사실 자살 아니에요.
“…….”
아니래요, 가 아니고 아니에요. 라고.
마치 쐐기를 박는 듯 단호했다.
불현듯 유채의 머릿속으론 뉴스 기사 몇 개가 조로록 스쳐 지나갔다. 너무 유명한 사건이라 모를 수 없었다. 올해 초 상리그룹 본사 옥상에서 간부 하나가 뛰어내렸던 사건.
그게 자살이 아니라니? 그럼 설마 살인……. 유채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춘 순간이었다. 전화 건너편에서 불쑥 새로운 질문이 튀어나왔다.
― 선생님은 이름이 뭐예요?
“네?”
유채는 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통화가 종료될 텐데,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 이름이요.
“……제 이름은 갑자기 왜 물으시죠?”
― 그야 선생님은 제 이름을 알고 계시, 허억……!
쿠당탕!
갑자기 무거운 물체가 나뒹구는 소음이 일었다. 이쪽 말고, 저쪽에서.
“왜, 왜 그래요? 김선호 씨? 이봐요!”
― 으악!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실장님!
“뭐?! 실장?!”
유채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혹시 조금 전 대화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김선호가 직전까지 험담에 박차를 가하던 그의 상사인 상황만은 아니길 바랐다.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달칵.
순간 스피커폰 너머에서 수화기를 집어 드는 소리가 울렸다.
― 당신.
그 목소리가 김선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귀를 막고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까마득한 저음. 왜인지 발아래가 푹푹 꺼지는 듯한 불쾌한 느낌에 유채는 괜히 발끝을 바르작거려 보았다. 달랑 두 글자만으로 이렇게 위협적인 목소리라니…….
남자는 그런 목소리로 덧붙였다.
―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
― 인생 귀찮아지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