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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농담이 아니다.

이미 사람 한둘쯤 옥상에서 밀어 본 적 있대도 믿길 만큼 싸늘한 경고가 금요일 밤,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



유채의 금요일 저녁은 망했다. 그것도 아주 장렬하게.

시간은 어느덧 밤 아홉 시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퇴근하지 못한 채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철장 안에 갇혀 정형행동을 반복하는 짐승인 양 로비를 빙글빙글 돈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남자와의 대화를 곱씹어 본다.



“저기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진짜 아무것도 못 들었거든요? 김선호 씨와 저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라고요. 생판 남. 저를 찾아오셔 봤자 하등 쓸모없는 짓이에요. 그러니 두 분 일은 두 분이서 해결 보세요. 아시겠죠?”

시치미를 뚝 떼고 정색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그리고 다시 낮은 목소리.

― 뭘 들었냐고 물은 적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뭘 듣긴 들은 모양이고, 김선호 이 새, ……자식의 이름을 아는 것 보니 면식은 없어도 이미 더럽게 얽힌 것 같고요. 그러니 이 전화번호 검색해서 나오는 주소로 찾아가면 됩니까?

그러더니 바로 덧붙이기를.

― 서울시 XX구 XX동, 공감 심리 상담소. 여기서 멀지 않네요.

맙소사. 그새 상담소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있었나 보다. 유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그런 유채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종전에 비해 다소 누그러진 말투를 사용했다.

― 잠깐이면 됩니다. 대화 좀 하죠.

그쯤 되자 협박이 아니라 설득처럼 들렸다. 실제로 남자는 몹시 여유롭게 굴었다. 그럴수록 유채가 쪼그라든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처럼. 그러다 한순간 태도를 돌변해 다시 경고했다.

― 도망치면 죽습니다.

“……네? 죽? 죽, 뭐요?”

―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

아닌 것 같더라, 전혀.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느덧 유채의 시선은 스피커폰 모드의 전화기 옆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가 말했다.

― 혹시 경찰에 신고하겠단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버려요.

어디서 독심술이라도 배워 와 쓰는 모양이다. 이다음은 또 자연스러운 협박으로 귀결됐다.

― 뭐 그쪽도 알다시피, 돌아가신 우리 박 이사님께서 평범한 자살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라면서,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뚝.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효과음과 비슷하게 들렸다. 앞서 김선호가 올려 둔 쐐기 위에 이 남자가 망치로 꽝꽝 대못을 때려 박은 엔딩이랄까.



……그렇게 유채의 금요일 저녁은 망했다. 그녀는 허망한 눈으로 상담소 출입문을 곁눈질했다.

“혹시 방송국 실험 카메라일 확률은?”

물론 없겠지…….

아주 작은 중얼거림, 확신 없는 말투였다. 유채의 눈동자에는 이 일련의 사태가 질 나쁜 예능 프로그램의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보다 현실적인 두려움이 훨씬 더 크게 도사리고 있었다. 다시금 생각을 정리해 본다.

지금 당장 경찰서로 찾아가 신변 보호 요청을 한다면?

상리그룹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언론사에 접촉한다면?

다짜고짜 검찰청에 찾아가 증인으로 나선다면?

그런다면 사람들이 유채를 도울까? 과연? 설마.

끝도 없이 머리를 쥐어 짜내 보았으나 그럴싸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명확한 물리적 증거 없이 증인이 되는 건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아니 미친 짓이다. 부와 권력의 횡포에 맞서 용감하게 나서기엔 유채는 보고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통화 녹취록이 있어도 안심할까 말까 하는 판국에, 아니 오히려 녹취록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더 위험할 수도 있지, 그녀는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긴 싫었다. 무서웠다.

그저 긴 한숨만 새어 나온다.

“이게 웬 날벼락이야.”

마침 적당한 표현이었다. 같은 순간 출입문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니까.

뚜벅.

뚜벅.

뚜벅…….

“…….”

가까워진다. 그것은 곧 덜컹! 하는 울림으로 출입문을 뒤흔들었다.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유채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남자를 마중 나갔다.

어둑어둑한 복도, 미리 잠가 둔 유리 출입문 너머에 키 큰 남자가 우뚝 서 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일순 유채는 보란 듯이 가슴을 쭉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약해 보이지 않으려는 그녀 나름의 본능이었다. 그대로 눈을 부라리며 남자의 머리 위를 눈짓한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요. 그쪽 얼굴 다 찍혔어요.”

명확한 물리적 증거가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지.

그녀는 또박또박하게 부연했다.

“이제 내가 실종되거나, 다치거나, 신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제1 용의자는 무조건 그쪽이 되는 거예요. 저건 사설 CCTV라서 상담소 직원 휴대전화로도 언제든지 실시간 영상 시청이 가능하거든요.”

“…….”

“알겠어요?”

“…….”

스윽, 남자가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느지막이 굴러간 눈동자가 유채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다. 복도 천장에 매달린 방범 카메라를.

그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 문을 열어 달라는 듯 손짓하기에, 유채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잠깐만 대화하면 된다고 했죠? 정확히 얼마나 걸려요?”

“……그건 당신이 내가 제시한 안건에 얼마나 잘 협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요.”

긴 침묵 끝에 남자가 말했다. 수화 음으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낮고, 짜증이 여실한 목소리다. 어두운 조명 아래 파묻힌 남자의 얼굴도 위험해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유채는 바짝 쫄지언정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못 열어요.”

그러자 그림자 진 남자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좋은 말로 할 때 열죠.”

“경찰서 가서 얘기할까요?”

“……15분.”

흘끔,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그가 대답했다. 슬쩍 내리깐 고개에 빛이 들며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드러난다.

길쭉한 눈매에 속눈썹이 신기할 정도로 길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과 대비되는 높은 콧대 위에는 그 속눈썹 그림자가 한 올 한 올 선명하게 비쳐 있었다.

남자는 이목구비가 굉장히 뚜렷한 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미모에 넋 놓고 감탄했을지도 모를 만큼. ……그러나 그건 아주 쓸모없는 가정이고, 유채는 곧장 휴대전화를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몇 마디를 떠들어 댄다.

“응, 지영아! 난데!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15분 뒤에 나한테 전화 좀 걸어 줄래? 혹시 내가 안 받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 줘야 해? 하하. 별일 아니니까 아직 걱정하진 말고. 그럼 이따 통화합시다. 고마워!”

30초도 안 되는 통화를 끝내고 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가 무척 황당한 표정으로 유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 실소인지 헛웃음인지 짧은 날숨을 흘리며 묻는다.

“금속 탐지기는 안 지나도 됩니까?”

“총이나 칼을 포함한 흉기류를 소지하고 계신가요?”

“아뇨.”

“그런데 왜 물어보세요?”

“보다시피, 상황이 조금 억울해서?”

으쓱, 남자가 무표정으로 눈썹을 들었다 놓았다. 이제 유채가 헛웃음을 칠 차례였다.

웃기시네. 억울함으로 따지자면야 김선호와 이 남자와 진유채 셋 중에 단연 유채가 압승일 것이다. 그녀는 뚱하게 입술을 까뒤집은 뒤, 휴대전화를 품 안에 꼭꼭 숨겨 두고 까치발을 들어 출입문 빗장을 풀어냈다.

“들어오세요.”



*



“확인하고, 서명하십시오.”

툭. 테이블에 서류 봉투가 내려앉았다.

유채는 남자의 수려한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황색 서류 봉투 왼쪽 귀퉁이에 명함 한 장이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유채가 말했다.

“이 명함은 누구 거예요?”

“제 거겠죠.”

남자는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나마 바로바로 대답이 연달았다. 심지어 유채가 캐묻기도 전에 부연하기도 서슴지 않는다.

“챙겨 둬요. 유사시 공권력의 도움을 받으려면 당신을 협박한 남자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 할 테니까.”

비아냥거리긴. 유채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좀 억울하다.’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그러나 유채는 본인이 가장 억울하다는 판단에 변함이 없었던 고로, 유다른 위로 없이 명함부터 확인했다.



상리그룹

대외사업부 경영전략실 실장

선율 이사



선율. 피아니스트가 연상되는 이름이다.

그의 딱딱한 말씨와 어울리지 않게 섬약한 느낌이라, 유채는 별수 없이 율의 얼굴을 훔쳐보게 되었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상황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잘 벼린 칼날로 깎아 놓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가 마치 새벽녘 반짝이는 윤슬을 떠올리게 한다. 어릴 때 읽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곧잘 묘사하던 미청년 남신이 이런 얼굴이었을까?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뜨거운 지중해 태양과는 또 거리가 멀었다.

도무지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표정과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묵직한 저음, 그리고 소싯적에 육상선수로 활동하다가 부상 때문에 전직한 것은 아닐까 싶은 탄탄한 근육질의 체형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길쭉한 목선과 어우러져 더없이 예민한 인상을 자아낸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맹수 같은 얼굴에, 운동선수 못지않은 신체를 가진 남자다. 만약 유채가 그와 음성 통화가 아닌 영상 통화를 통해 첫 대화를 텄다면 율을 기다리는 내내 마냥 두려워하는 대신 약간쯤은 기대에 부풀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질구레한 상념을 뒤로한 채, 유채는 율의 명함을 옆으로 미뤄 두고 서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밀 유지 각서였다. 기밀 항목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금일 김선호와 나눈 통화 내용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서명하여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독소 조항을 피하고자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는데 불쑥 율이 입을 열었다.

“그 서류엔 안 적혀 있지만 소정의 사례비가 지급될 겁니다. 우리 회사 기준으로 대리급 1년 연봉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