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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필요 없어요.”
유채는 서류에 시선을 박은 상태로 그의 말을 잘라 냈다. 곧 제게 와 닿는 뾰족한 시선을 느끼곤 바로 인상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으! 서명 안 하겠다는 소리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말아 주실래요? 선율 실장님.”
그러잖아도 마지막 장을 펼친 참이었다. 그녀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로 펜을 들었다.
뽁! 펜 뚜껑을 따자, 한참 가늘어졌던 율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유채가 혀를 내둘렀다.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잊어버리고 싶거든요? 오늘 들은 얘기 전부, 다.”
“그러게 왜 그런 놈 얘기를 두 시간이나 들어 주고 있었습니까?”
질세라 율이 물었다.
“그 자식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중간에 감이 안 오던가요?”
“감이 올락 말락 했는데, 자발적으로 미친 건지 회사 때문에 미쳐 가는 건지 헷갈려서 지켜본다는 게 그만 그렇게 됐네요.”
“……일단 서명부터 하시죠.”
율의 손바닥이 서명란을 가리켰다.
기다란 손가락이 정말로 피아니스트의 그것인 양 곧다. 무슨 남자 손이 저렇게 거스러미 하나 없이 예쁘담. 손톱 바디도 반질반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유채는 기어이 그따위 사소한 특징마저 잡아낸 자신의 눈썰미를 원망하며 펜을 휘적거려야 했다. 서명 끄트머리에 마침표가 찍힌 순간, 다시 율이 말했다.
“안 물어보네요.”
“네?”
그러면서 다가온 그의 손이 서류 모서리를 집어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유채의 고개도 자연히 앞을 바라보게 되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율의 눈동자는 색소가 유난히 옅은 갈색이었다.
“박 이사님이요. 누가 죽였는지 안 물어보길래.”
“…….”
“돈도……, 안 받겠다고 하고.”
스윽, 유채의 손끝을 빠져나간 종잇장이 눈앞에서 팔랑거린다.
빤히 유채를 향하던 율의 시선이 이윽고 그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맨 마지막 장에 휘갈긴 유채의 서명을 확인했는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린다.
“진유채 씨?”
서명 왼편에 이름을 적는 칸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통성명한 셈이다. 유채는 어색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네.”
“진유채 씨는 원래 돈에 관심이 없습니까? 그런 사람 흔치 않은데.”
“……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요.”
망설이다가 유채가 대답했다.
“먹으면 탈 나는 돈에 안 좋은 추억이 있거든요.”
“그렇군요.”
율은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안간 아무렴 어떠냐는 듯, 서류와 펜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테이블엔 유채 몫의 각서 사본과 그의 명함만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좋은 습관이네요. 계속 그렇게 사십시오.”
그 말투가 어찌나 미묘한지 하마터면 칭찬인지 욕인지 되물을 뻔했다. 율이 부단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13분 40초 지났습니다. 친구와 즐겁게 통화하길 바라요.”
“네? 아.”
벌써 데드라인까지 1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니. 유채의 손이 휴대전화를 찾아 허겁지겁 상의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러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몹시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 율은 그녀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훌쩍 몸을 돌린 뒤였다.
“그럼 이만.”
바로 그때였다.
덜컹!
굳게 잠긴 출입문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제삼자의 인기척이 문밖에서 울려 퍼진 것은.
“선생님!”
이 목소리는.
휙, 유채와 율의 시선이 동시에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장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침묵할 따름이었다.
“…….”
“…….”
설마…….
불길한 추측이 예고 없이 머리를 쳐든다.
“선생님, 제가 왔어요!”
그래, 이 목소리.
이 씩씩하고도 발랄한 목소리는.
“저예요, 선호! 문 좀 열어 주세요!”
김선호였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의 원흉이 본체가 되어 나타났다고? 유채는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저,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길……?”
그러나 침착하게 묻고 따질 만한 정신이 없었다. 마침 그녀의 안주머니에서도 휴대전화 벨 소리가 대차게 울려 퍼진 탓이다. 또롱또롱, 밋밋한 기계음. 그리고 철컥철컥! 문짝 흔드는 소음이 동시에 귓전을 때린다.
그 가운데서 율이 말했다.
“진유채 씨, 전화부터 받아요.”
안 받으면 죽일 기세다. 유채는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곧장 휴대전화를 뺨에 점착시키고 외친다.
“어어! 나 괜찮아!”
그제야 율이 유채를 내버려 두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왜인지 그의 뒤통수에서 ‘내가 저 새끼 처리하는 동안 너는 내빼고 집에 가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바라던 바다. 유채는 냉큼 가방을 챙겨 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으응, 지영아.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돼. 나 완전 멀쩡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차피 경찰 운운했던 것은 율에게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CCTV 영상을 비롯해 상리그룹 법무팀 주소가 적힌 계약서까지, 물적 증거를 충분히 확보한 지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애먼 일로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다. 그런 건 남의 회사 기밀에 휘말려서 황금 같은 금요일 밤을 허비하고 있는 현 상황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쳤으니까.
제발 무던하게 살자!
그것이 진유채가 최우선으로 삼는 인생의 좌우명인 이상, 이 결정에 변함은 없다.
“하하. 아는 사람이 다단계 사업 설명회 끌고 들어가려고 하길래 기지 좀 발휘했지. 많이 걱정했구나? 미안해.”
그녀는 지영에게 적당히 둘러대며 출입문으로 향했다. 율이 출입문 밖 복도에 서서 김선호를 갈구는 광경이 보인다.
“조용히 해, 입 다물어, 시끄럽게 하지 마.”
“네, 율 실장님!”
“내가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네, 율 실장님!”
“부르지 말라고.”
복도 불빛이 어두워서 김선호의 외양은 흐릿한 형태로 비칠 뿐이었지만, 그림자만 보아도 그가 무척 길쭉하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말인즉슨 자칭 188cm라던 김선호의 TMI에 거짓은 없던 셈이다.
그런 김선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 듯 팔을 들어 올린 율 또한 무지막지한 장신임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 상태로 어찌나 험악하게 경고하던지.
“나한테 친한 척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아니 그냥 숨을 쉬지 마. 산소 아까워.”
정말 어지간히 싫어하는가 보다. 그는 한바탕 속사포처럼 쏘아붙인 뒤에야 후우, 긴 한숨을 내쉬고 심문에 나섰다.
“시말서 작성해서 내 책상에 올려 두랬더니, 여긴 왜 따라와서 기웃거리고 있지?”
“앗! 시말서는 다 써서 책상에 올려 뒀거든요!”
“다물어. 그따위 대답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니까.”
“앗.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정말 죄송하면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율의 말투에서 급격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그대로 선호를 잡아끌어 저편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은 자못 애처롭기까지 했다.
상담소 출입구 문단속을 하느라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게 된 유채는 저딴 대답을 남발하는 부하 직원을 둔 율에게 약간의 측은함마저 느꼈지만, 알게 뭐람. 그녀는 문단속을 끝내자마자 보안 카드를 찍어 버렸다. 삑.
드디어 이 악몽 같은 밤이 끝났다.
“고생 많았다, 진유채.”
보안 카드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홀가분하게 뒤를 돈다. 빙글. 그리고 괴한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
“악! 깜짝이야!”
“히히.”
히히? 방금 제가 들은 게 사람 웃음소리가 맞나?
충격에 어깨를 움츠린 때였다. 반짝, 복도 센서 등이 켜지며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방글방글 미소 띤. 선이 뚜렷한 미남. 그처럼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유채에게 알은체한다.
“저예요, 선호.”
“…….”
“되게 미인이시네요!”
“……이런 미친.”
유채는 욕설을 내뱉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김선호의 머리카락이 찰랑찰랑한 레몬색이었기 때문이다.
레몬색이라니.
그의 멀끔한 이목구비가 대체로 동양인의 특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미루건대, 저 정도 색을 만들어 내려면 최소한 탈색을 세 번 이상 진행하고도 미용실 컬러 차트 좌측 최상단에 위치한 모발 샘플을 골라서 염색약을 도포해야 한다.
그리고 유채는 연예인, 외국인, 패션모델, SNS 스타, 헤어디자이너 이외에 저런 머리색을 가진 일반인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사무직 직장인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물며 사내 문화가 극도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건설업계, 그것도 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키는 상리그룹에 다니면서 가능할쏘냐. 시도는커녕 상상조차 못 하는 게 일반적일 터다.
아! 마침내 유채는 깨달았다.
이놈이 회사 때문에 미쳐 가는 놈이 아니고 태생이 미친놈이었구나.
“스톱! 가까이 오지 말아요!”
황급히 양 손바닥을 내보인 유채가 선호를 저지했다. 흡사 맹수를 조련하는 사육사 같은 자세에 선호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힝, 그런 효과음이 들리는 듯하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유채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의 남다른 옷차림까지 눈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연한 빛의 데님 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가 위풍당당하다. 그의 다리가 긴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디자인인지, 바짓단 밑으로 빼꼼 드러난 복사뼈 아래엔 끈 없는 로퍼가 매끈했다.
당연히 넥타이 같은 걸 멨을 리가 없었다. 그 대신 살짝 걷은 소매 아래 감겨 있는 손목시계는 제법 올드한 느낌의 오토매틱이었다. 진갈색 가죽 스트립이 전체적으로 캐주얼한 분위기를 너무 가볍지 않게끔 가라앉혀 준다.
그리고 다시 이마를 뒤덮은 찰랑이는 백금발이 모든 것을 상큼한 레몬빛으로 물들인다. 물론 가장 상큼한 것은 옷이나 머리색이 아니고 김선호의 얼굴이었다.
총평을 하자면 무슨무슨 패션잡지에서 소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센스 만점짜리 코디였으나, 그 카테고리가 결코 ‘오피스 비즈니스’ 근처에도 갖다 붙이진 못하리라는 점에서 통탄해 마땅했다.
새삼 이런 놈을 부하 직원으로 두었다는 율이 불쌍해진다.
무심코 유채가 질문했다.
“혹시 회사에서 바로 온 건가요?”
“네.”
“집에서 옷 갈아입고 온 거 아니고요?”
“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하니 이제는 정말로 율이 불쌍해졌다. 아니, 아니지. 역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유채 자신이다. 미남 둘과 한 공간에 있는데 눈요기는 고사하고 가슴만 답답해지다니.
고개를 돌리자, 율이 복도 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며 휴대전화를 뺨에서 떼어 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급한 통화를 하느라 김선호를 놓쳤던 모양이다.
유채는 어서 빨리 그가 김선호를 데리고 꺼져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영영 안 볼 사람처럼 나가 버릴 땐 언제고 이런 혹을 자신에게 떠넘길 줄이야.
슬프게도 율은 당장 김선호의 뒷덜미를 낚아채 질질 끌고 가 주지 않았다. 대신 김선호의 어깨 뒤에 서서, 아주 뜬금없이 유채에게 말을 붙였다.
“진유채 씨.”
“…….”
“아니, 진유채 선생님.”
왜 갑자기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일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위화감에 유채가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뒤늦게 율의 표정을 살필 생각이 든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푸르뎅뎅하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안색이 꼭 느와르 영화에서 배신당한 주인공인 양 참혹했다. 불시에 김선호의 어깨를 옆으로 휙 밀어 버리고는 성큼 유채 앞으로 나서는 행동도 이상하기만 했다.
그래 놓고는 또 갑자기, 큼지막한 두 손으로 유채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출근해 주셔야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필요 없어요.”
유채는 서류에 시선을 박은 상태로 그의 말을 잘라 냈다. 곧 제게 와 닿는 뾰족한 시선을 느끼곤 바로 인상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으! 서명 안 하겠다는 소리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말아 주실래요? 선율 실장님.”
그러잖아도 마지막 장을 펼친 참이었다. 그녀는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로 펜을 들었다.
뽁! 펜 뚜껑을 따자, 한참 가늘어졌던 율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유채가 혀를 내둘렀다.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잊어버리고 싶거든요? 오늘 들은 얘기 전부, 다.”
“그러게 왜 그런 놈 얘기를 두 시간이나 들어 주고 있었습니까?”
질세라 율이 물었다.
“그 자식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중간에 감이 안 오던가요?”
“감이 올락 말락 했는데, 자발적으로 미친 건지 회사 때문에 미쳐 가는 건지 헷갈려서 지켜본다는 게 그만 그렇게 됐네요.”
“……일단 서명부터 하시죠.”
율의 손바닥이 서명란을 가리켰다.
기다란 손가락이 정말로 피아니스트의 그것인 양 곧다. 무슨 남자 손이 저렇게 거스러미 하나 없이 예쁘담. 손톱 바디도 반질반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유채는 기어이 그따위 사소한 특징마저 잡아낸 자신의 눈썰미를 원망하며 펜을 휘적거려야 했다. 서명 끄트머리에 마침표가 찍힌 순간, 다시 율이 말했다.
“안 물어보네요.”
“네?”
그러면서 다가온 그의 손이 서류 모서리를 집어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유채의 고개도 자연히 앞을 바라보게 되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율의 눈동자는 색소가 유난히 옅은 갈색이었다.
“박 이사님이요. 누가 죽였는지 안 물어보길래.”
“…….”
“돈도……, 안 받겠다고 하고.”
스윽, 유채의 손끝을 빠져나간 종잇장이 눈앞에서 팔랑거린다.
빤히 유채를 향하던 율의 시선이 이윽고 그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맨 마지막 장에 휘갈긴 유채의 서명을 확인했는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린다.
“진유채 씨?”
서명 왼편에 이름을 적는 칸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통성명한 셈이다. 유채는 어색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네.”
“진유채 씨는 원래 돈에 관심이 없습니까? 그런 사람 흔치 않은데.”
“……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요.”
망설이다가 유채가 대답했다.
“먹으면 탈 나는 돈에 안 좋은 추억이 있거든요.”
“그렇군요.”
율은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안간 아무렴 어떠냐는 듯, 서류와 펜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테이블엔 유채 몫의 각서 사본과 그의 명함만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좋은 습관이네요. 계속 그렇게 사십시오.”
그 말투가 어찌나 미묘한지 하마터면 칭찬인지 욕인지 되물을 뻔했다. 율이 부단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13분 40초 지났습니다. 친구와 즐겁게 통화하길 바라요.”
“네? 아.”
벌써 데드라인까지 1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니. 유채의 손이 휴대전화를 찾아 허겁지겁 상의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러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몹시 귀찮은 일이 벌어진다. 율은 그녀의 사정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훌쩍 몸을 돌린 뒤였다.
“그럼 이만.”
바로 그때였다.
덜컹!
굳게 잠긴 출입문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제삼자의 인기척이 문밖에서 울려 퍼진 것은.
“선생님!”
이 목소리는.
휙, 유채와 율의 시선이 동시에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장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침묵할 따름이었다.
“…….”
“…….”
설마…….
불길한 추측이 예고 없이 머리를 쳐든다.
“선생님, 제가 왔어요!”
그래, 이 목소리.
이 씩씩하고도 발랄한 목소리는.
“저예요, 선호! 문 좀 열어 주세요!”
김선호였다.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의 원흉이 본체가 되어 나타났다고? 유채는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저,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길……?”
그러나 침착하게 묻고 따질 만한 정신이 없었다. 마침 그녀의 안주머니에서도 휴대전화 벨 소리가 대차게 울려 퍼진 탓이다. 또롱또롱, 밋밋한 기계음. 그리고 철컥철컥! 문짝 흔드는 소음이 동시에 귓전을 때린다.
그 가운데서 율이 말했다.
“진유채 씨, 전화부터 받아요.”
안 받으면 죽일 기세다. 유채는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곧장 휴대전화를 뺨에 점착시키고 외친다.
“어어! 나 괜찮아!”
그제야 율이 유채를 내버려 두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왜인지 그의 뒤통수에서 ‘내가 저 새끼 처리하는 동안 너는 내빼고 집에 가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바라던 바다. 유채는 냉큼 가방을 챙겨 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으응, 지영아.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돼. 나 완전 멀쩡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차피 경찰 운운했던 것은 율에게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CCTV 영상을 비롯해 상리그룹 법무팀 주소가 적힌 계약서까지, 물적 증거를 충분히 확보한 지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애먼 일로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다. 그런 건 남의 회사 기밀에 휘말려서 황금 같은 금요일 밤을 허비하고 있는 현 상황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쳤으니까.
제발 무던하게 살자!
그것이 진유채가 최우선으로 삼는 인생의 좌우명인 이상, 이 결정에 변함은 없다.
“하하. 아는 사람이 다단계 사업 설명회 끌고 들어가려고 하길래 기지 좀 발휘했지. 많이 걱정했구나? 미안해.”
그녀는 지영에게 적당히 둘러대며 출입문으로 향했다. 율이 출입문 밖 복도에 서서 김선호를 갈구는 광경이 보인다.
“조용히 해, 입 다물어, 시끄럽게 하지 마.”
“네, 율 실장님!”
“내가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네, 율 실장님!”
“부르지 말라고.”
복도 불빛이 어두워서 김선호의 외양은 흐릿한 형태로 비칠 뿐이었지만, 그림자만 보아도 그가 무척 길쭉하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말인즉슨 자칭 188cm라던 김선호의 TMI에 거짓은 없던 셈이다.
그런 김선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 듯 팔을 들어 올린 율 또한 무지막지한 장신임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 상태로 어찌나 험악하게 경고하던지.
“나한테 친한 척하지 마, 눈도 마주치지 마, 아니 그냥 숨을 쉬지 마. 산소 아까워.”
정말 어지간히 싫어하는가 보다. 그는 한바탕 속사포처럼 쏘아붙인 뒤에야 후우, 긴 한숨을 내쉬고 심문에 나섰다.
“시말서 작성해서 내 책상에 올려 두랬더니, 여긴 왜 따라와서 기웃거리고 있지?”
“앗! 시말서는 다 써서 책상에 올려 뒀거든요!”
“다물어. 그따위 대답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니까.”
“앗.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정말 죄송하면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율의 말투에서 급격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그대로 선호를 잡아끌어 저편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은 자못 애처롭기까지 했다.
상담소 출입구 문단속을 하느라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게 된 유채는 저딴 대답을 남발하는 부하 직원을 둔 율에게 약간의 측은함마저 느꼈지만, 알게 뭐람. 그녀는 문단속을 끝내자마자 보안 카드를 찍어 버렸다. 삑.
드디어 이 악몽 같은 밤이 끝났다.
“고생 많았다, 진유채.”
보안 카드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홀가분하게 뒤를 돈다. 빙글. 그리고 괴한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
“악! 깜짝이야!”
“히히.”
히히? 방금 제가 들은 게 사람 웃음소리가 맞나?
충격에 어깨를 움츠린 때였다. 반짝, 복도 센서 등이 켜지며 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방글방글 미소 띤. 선이 뚜렷한 미남. 그처럼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유채에게 알은체한다.
“저예요, 선호.”
“…….”
“되게 미인이시네요!”
“……이런 미친.”
유채는 욕설을 내뱉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김선호의 머리카락이 찰랑찰랑한 레몬색이었기 때문이다.
레몬색이라니.
그의 멀끔한 이목구비가 대체로 동양인의 특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미루건대, 저 정도 색을 만들어 내려면 최소한 탈색을 세 번 이상 진행하고도 미용실 컬러 차트 좌측 최상단에 위치한 모발 샘플을 골라서 염색약을 도포해야 한다.
그리고 유채는 연예인, 외국인, 패션모델, SNS 스타, 헤어디자이너 이외에 저런 머리색을 가진 일반인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사무직 직장인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물며 사내 문화가 극도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건설업계, 그것도 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키는 상리그룹에 다니면서 가능할쏘냐. 시도는커녕 상상조차 못 하는 게 일반적일 터다.
아! 마침내 유채는 깨달았다.
이놈이 회사 때문에 미쳐 가는 놈이 아니고 태생이 미친놈이었구나.
“스톱! 가까이 오지 말아요!”
황급히 양 손바닥을 내보인 유채가 선호를 저지했다. 흡사 맹수를 조련하는 사육사 같은 자세에 선호의 눈썹이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힝, 그런 효과음이 들리는 듯하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유채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의 남다른 옷차림까지 눈에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연한 빛의 데님 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가 위풍당당하다. 그의 다리가 긴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디자인인지, 바짓단 밑으로 빼꼼 드러난 복사뼈 아래엔 끈 없는 로퍼가 매끈했다.
당연히 넥타이 같은 걸 멨을 리가 없었다. 그 대신 살짝 걷은 소매 아래 감겨 있는 손목시계는 제법 올드한 느낌의 오토매틱이었다. 진갈색 가죽 스트립이 전체적으로 캐주얼한 분위기를 너무 가볍지 않게끔 가라앉혀 준다.
그리고 다시 이마를 뒤덮은 찰랑이는 백금발이 모든 것을 상큼한 레몬빛으로 물들인다. 물론 가장 상큼한 것은 옷이나 머리색이 아니고 김선호의 얼굴이었다.
총평을 하자면 무슨무슨 패션잡지에서 소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센스 만점짜리 코디였으나, 그 카테고리가 결코 ‘오피스 비즈니스’ 근처에도 갖다 붙이진 못하리라는 점에서 통탄해 마땅했다.
새삼 이런 놈을 부하 직원으로 두었다는 율이 불쌍해진다.
무심코 유채가 질문했다.
“혹시 회사에서 바로 온 건가요?”
“네.”
“집에서 옷 갈아입고 온 거 아니고요?”
“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하니 이제는 정말로 율이 불쌍해졌다. 아니, 아니지. 역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유채 자신이다. 미남 둘과 한 공간에 있는데 눈요기는 고사하고 가슴만 답답해지다니.
고개를 돌리자, 율이 복도 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며 휴대전화를 뺨에서 떼어 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급한 통화를 하느라 김선호를 놓쳤던 모양이다.
유채는 어서 빨리 그가 김선호를 데리고 꺼져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영영 안 볼 사람처럼 나가 버릴 땐 언제고 이런 혹을 자신에게 떠넘길 줄이야.
슬프게도 율은 당장 김선호의 뒷덜미를 낚아채 질질 끌고 가 주지 않았다. 대신 김선호의 어깨 뒤에 서서, 아주 뜬금없이 유채에게 말을 붙였다.
“진유채 씨.”
“…….”
“아니, 진유채 선생님.”
왜 갑자기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일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위화감에 유채가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뒤늦게 율의 표정을 살필 생각이 든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푸르뎅뎅하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안색이 꼭 느와르 영화에서 배신당한 주인공인 양 참혹했다. 불시에 김선호의 어깨를 옆으로 휙 밀어 버리고는 성큼 유채 앞으로 나서는 행동도 이상하기만 했다.
그래 놓고는 또 갑자기, 큼지막한 두 손으로 유채의 어깨를 덥석 움켜쥐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출근해 주셔야겠습니다, 최대한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