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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유채는 그 말뜻을 쉽게 헤아리지 못했다.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가 되물었다.
“출근이요?”
“네.”
“웬 출근이요?”
아직 퇴근도 못 했는데, 그것도 님들 때문에, 다짜고짜 출근 타령을 하고 있어?
……라고 불평할 새 없었다. 순간 율의 머리 위로 뿅! 까치발을 세운 선호가 튀어 올라 외쳤기 때문이다.
“우리 회장님께서 선생님을 스카우트하고 싶으시대요!”
“……뭐라고요?”
그래서 유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또다시 멍청한 반문뿐이었다.
그녀는 제가 잘못 들었거나 선호가 한국말이 아닌 것을 지껄였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믿었다. 그때까지는.
“그게요, 제가 사무실에 남아 실장님이 시킨 시말서를 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따라 회장님께서 이 늦은 밤까지 자진해서 근무 중인 사원을 찾아 암행을 나오셨더라고요? 제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을 보시더니 무척 기특하다며, 어떻게 된 사연이냐 물으시길래 여차여차 설명을 해 드렸죠. 하하하! 어찌나 재미있어하시던지! 물개 박수까지 치시면서 박장대소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선생님을 꼭 우리 상리그룹에 스카우트해서 오래오래 두고두고 직접 눈여겨보시겠다면서, 저더러 가서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시겠어요? 하하하!”
근심 걱정이라곤 전무한 순도 100퍼센트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크게 메아리쳤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화사하게.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선생님께 알려 드리고자, 이 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왔답니다!”
“……저기, 잠깐만요. 김선호 씨.”
유채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선호의 고개가 갸웃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넹?”
너 말투가 왜 그따위냐고 물어봤자 별로 말귀가 통할 것 같지 않다.
결국 유채는 설마와 혹시 사이에 넘실대는 불길함을 애써 외면한 채 뻔한 질문을 꺼내야 했다.
“회장님께 설명을…… 여차여차 정확히 어떤 식으로 했는데요……?”
말해 무엇하랴.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고 혹시는 역시로 귀결되는 법. 선호는 끝까지 빙그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죠.”
“…….”
“박 이사님 투신 사건, 평범한 자살이 아니었다고 선생님한테만 몰래 알려 드렸는데 퇴근하시던 선율 실장님이 우연히 제 통화 내용을 듣고는 대뜸 난입하시더니 제게 시말서를 강요한 뒤 혼자 선생님을 만나러 가셨다고요.”
“…….”
아무리 긍정 회로를 전체 가동해 보아도, 상리그룹의 흉악한 비리를 알게 된 외부인이 허튼 마음을 먹을까 봐 눈에 닿는 곳에 두고 밀착 감시하다가 여차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속셈으로밖에 해석 불가능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올려다본 율의 얼굴은 선호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끄덕,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느지막이 운을 뗀다.
“방금 전화해서 확인해 봤습니다.”
이럴 수가.
“사실이더군요.”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휘청, 유채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지금 호랑이 굴을 피하려다 호랑이 아가리를 만난 것인가? 들어가면 죽고 안 들어가면 쫓긴다. 먹혀 죽느냐 할퀴여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역시 지금이라도 해외로 튀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만한 돈은 없는데? 생각하자마자 선호가 냉큼 사족을 달았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정규직이래요!”
이 미친놈이, 그러니 마음껏 기뻐하라는 투였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유채에게 회사 욕을 다발로 늘어놓은 기억을 통째로 날려 먹은 것이 아니라면 결코 저러지는 못하리라. 그런 주제에 그는 경망하게 실실대는 것마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 이름이 유채인가요? 진, 유, 채……! 히힛, 이름 예쁘다. 신기해요! 제가 유채꽃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그렇죠?”
좋단다. 이 또라이가.
유채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인연은 개뿔 악연 아니냐…….”
머리에 유채 꽃밭이 펼쳐져 있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저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직장에 저런 부하 직원을 둔 상사의 삶이란 얼마나 참혹할까? 유채는 이쯤에서 다시 율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
침묵 속에 주고받은 눈빛이 짧은 대화를 대신한다.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선율 실장님. 계책을 좀 내놓아 보시죠?’
‘없습니다.’
그리고 율이 말했다.
“그러게 이놈이 이런 미친놈인 줄 진작에 눈치챘어야죠.”
까딱, 턱짓으로 선호를 가리키면서.
인정하긴 싫지만 옳은 소리였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저기 저 김선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글쎄 저 미친놈이 자발적으로 미친 건지 회사 때문에 미쳐 가는 중인지 헷갈린 나머지 좀 지켜본다는 게 그만,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도록 그의 하소연을 들어 준 죄로다가 말이다.
“이렇게 됐으니 조속히 입사해 주셔야겠습니다, 진유채 선생님.”
“아 제발.”
유채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악몽 같은, 아니, 엿 같은 금요일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누가 꿈이라고 해 줘…….”
그녀의 절규에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은 채로.
*
유채는 근무 중인 심리 상담소에서 좀 유명해졌다. 단 며칠 만에.
“어머? 유채 씨. 오늘도 남자 친구가 데리러 왔네요?”
콕, 함께 데스크를 보는 인턴 상담사가 유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유채는 실수로라도 상담소 출입문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이를 꽉 깨물고, 어색한 웃음을 쥐어짠다.
“아하하……. 쌔앰……. 저 사람 제 남자 친구 아니라니까요……?”
출입문 밖에 누가 서 있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다. 상리그룹 대외사업부 경영전략실 선율 실장.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예쁜 이름에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퇴폐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손가락이 길고 곧은 황홀한 미남자.
선율.
그는 오늘도 보나 마나 완벽한 와이셔츠 핏을 자랑하며 세 번째 단추 아래 넥타이핀을 고정해 둔 채, 좌우대칭이 완벽한 하관이 드러나도록 적당히 넘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서 상담소 출입구 복도에 버티고 서 있을 터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면 지난 일주일 내내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또다시 금요일, 유채가 김선호발 폭탄 투하의 여파로 빅 엿을 끌어안게 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유채 씨.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따라다니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하아, 그게 말씀드리기가 아주 곤란…….”
“설마 스토커예요?”
“네?”
흠칫, 유채의 어깨가 굳어졌다. 밖에서 기다리는 율의 귀에 들어갔다간 인턴 상담사 선생님의 안위가 무사하지 못할까 걱정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인턴 선생님은 참지 않았다.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야 말이죠. 저렇게 잘생긴 남자라고 해서 변태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유채 씨, 혹시 위험한 상황이라면 솔직하게 말해 줘요. 경찰에 신고할 때 내가 증인 서 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어느 때보다 진중했기에 유채도 덩달아 심각하게 대꾸해 주어야 했다.
“경찰은 곤란해요. 이미 계약서에 서명해 버렸거든요.”
“계약서요?”
“……저 재계약 갱신할 때 되지 않았나요? 아닌가?”
계약직 팔자를 이리 요긴하게 써먹는 날이 올 줄이야. 천연덕스러운 유채의 연기에 인턴 상담사도 곧 의심을 거두고 다시 오지랖으로 돌아갔다.
“뭐, 스토커나 변태가 아니라면 눈 딱 감고 세 번만 만나 봐요. 만나 보고 별로면 그때 차 버리면 되죠. 제가 살아 보니까 남자는 얼굴이 전부더라고요. 뜯어먹고 살 건 정말이지 얼굴밖에 없어요. 정말 얼굴뿐이더라고.”
어째 쌓인 게 많은 듯한 말투다.
“저 정도 얼굴이면 3년이 아니고 30년은 뜯어먹겠다.”
“…….”
끝내 율의 미모 예찬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유채는 끔뻑끔뻑 눈꺼풀을 여닫으며 마음속으로 본심을 삭였다.
하긴. 말이야 바른말이라고, 율이 잘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심하게 잘생겼지.
‘그런데 날 따라다니는 이유가 로맨틱이 아니고 헤드 헌팅이니까 그렇지…….’
헤드 헌팅. 다른 말로 취업 스카우트 중계 행위.
심지어 평범한 헤드 헌팅조차 아닌 사기 공모 헤드 헌팅이란 말이다.
유채의 잇새로 허망한 한탄이 흘러나왔다.
“쌤……. 저 남자 따라가면 저 상담소 그만둬야 해요…….”
“뭐라고요? 설마 연애 건너뛰고 바로 결혼하재요?”
“네? 제가 방금 뭐라고 했나요?”
아차. 뒤늦게 시치미를 떼 보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어느덧 인턴 상담사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혼 후엔 직장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 달래요? 유채 씨 의견은 듣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런 의미에서 곤란한 남자인 거예요? 어쩜, 그렇다면 유채 씨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네요……. 고민이 많겠어요.”
“아, 아뇨. 그게…….”
뭐라고 수습해야 하지. 해명하자니 이실직고 혹은 완전히 거짓말을 지어내야 했고 내버려 두자니 율에게 티끌만큼의 죄책감이 앞섰다. 결국 그녀는 안면 몰수를 선택했다.
“이번 주도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꾸벅! 우렁차게 인사한 뒤엔 냅다 가방을 고쳐 멘다. 유채는 그대로 출입문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를 스치고 비상계단으로 달려가는 경로를 밟았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율에게 간파당한 동선이었다.
“진유채 선생님?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이미 비상계단 방화벽 앞을 막아선 율이 유채의 숄더백을 붙잡아 구석으로 이끌었다.
유채는 그 말뜻을 쉽게 헤아리지 못했다.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다가 되물었다.
“출근이요?”
“네.”
“웬 출근이요?”
아직 퇴근도 못 했는데, 그것도 님들 때문에, 다짜고짜 출근 타령을 하고 있어?
……라고 불평할 새 없었다. 순간 율의 머리 위로 뿅! 까치발을 세운 선호가 튀어 올라 외쳤기 때문이다.
“우리 회장님께서 선생님을 스카우트하고 싶으시대요!”
“……뭐라고요?”
그래서 유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또다시 멍청한 반문뿐이었다.
그녀는 제가 잘못 들었거나 선호가 한국말이 아닌 것을 지껄였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믿었다. 그때까지는.
“그게요, 제가 사무실에 남아 실장님이 시킨 시말서를 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따라 회장님께서 이 늦은 밤까지 자진해서 근무 중인 사원을 찾아 암행을 나오셨더라고요? 제가 혼자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을 보시더니 무척 기특하다며, 어떻게 된 사연이냐 물으시길래 여차여차 설명을 해 드렸죠. 하하하! 어찌나 재미있어하시던지! 물개 박수까지 치시면서 박장대소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선생님을 꼭 우리 상리그룹에 스카우트해서 오래오래 두고두고 직접 눈여겨보시겠다면서, 저더러 가서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시겠어요? 하하하!”
근심 걱정이라곤 전무한 순도 100퍼센트의 웃음소리가 복도에 크게 메아리쳤다. 그의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화사하게.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선생님께 알려 드리고자, 이 밤중에 여기까지 찾아왔답니다!”
“……저기, 잠깐만요. 김선호 씨.”
유채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선호의 고개가 갸웃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넹?”
너 말투가 왜 그따위냐고 물어봤자 별로 말귀가 통할 것 같지 않다.
결국 유채는 설마와 혹시 사이에 넘실대는 불길함을 애써 외면한 채 뻔한 질문을 꺼내야 했다.
“회장님께 설명을…… 여차여차 정확히 어떤 식으로 했는데요……?”
말해 무엇하랴. 설마는 언제나 사람을 잡고 혹시는 역시로 귀결되는 법. 선호는 끝까지 빙그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죠.”
“…….”
“박 이사님 투신 사건, 평범한 자살이 아니었다고 선생님한테만 몰래 알려 드렸는데 퇴근하시던 선율 실장님이 우연히 제 통화 내용을 듣고는 대뜸 난입하시더니 제게 시말서를 강요한 뒤 혼자 선생님을 만나러 가셨다고요.”
“…….”
아무리 긍정 회로를 전체 가동해 보아도, 상리그룹의 흉악한 비리를 알게 된 외부인이 허튼 마음을 먹을까 봐 눈에 닿는 곳에 두고 밀착 감시하다가 여차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속셈으로밖에 해석 불가능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올려다본 율의 얼굴은 선호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끄덕,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느지막이 운을 뗀다.
“방금 전화해서 확인해 봤습니다.”
이럴 수가.
“사실이더군요.”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휘청, 유채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지금 호랑이 굴을 피하려다 호랑이 아가리를 만난 것인가? 들어가면 죽고 안 들어가면 쫓긴다. 먹혀 죽느냐 할퀴여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역시 지금이라도 해외로 튀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만한 돈은 없는데? 생각하자마자 선호가 냉큼 사족을 달았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정규직이래요!”
이 미친놈이, 그러니 마음껏 기뻐하라는 투였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유채에게 회사 욕을 다발로 늘어놓은 기억을 통째로 날려 먹은 것이 아니라면 결코 저러지는 못하리라. 그런 주제에 그는 경망하게 실실대는 것마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 이름이 유채인가요? 진, 유, 채……! 히힛, 이름 예쁘다. 신기해요! 제가 유채꽃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그렇죠?”
좋단다. 이 또라이가.
유채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인연은 개뿔 악연 아니냐…….”
머리에 유채 꽃밭이 펼쳐져 있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저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직장에 저런 부하 직원을 둔 상사의 삶이란 얼마나 참혹할까? 유채는 이쯤에서 다시 율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
침묵 속에 주고받은 눈빛이 짧은 대화를 대신한다.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선율 실장님. 계책을 좀 내놓아 보시죠?’
‘없습니다.’
그리고 율이 말했다.
“그러게 이놈이 이런 미친놈인 줄 진작에 눈치챘어야죠.”
까딱, 턱짓으로 선호를 가리키면서.
인정하긴 싫지만 옳은 소리였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저기 저 김선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글쎄 저 미친놈이 자발적으로 미친 건지 회사 때문에 미쳐 가는 중인지 헷갈린 나머지 좀 지켜본다는 게 그만,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도록 그의 하소연을 들어 준 죄로다가 말이다.
“이렇게 됐으니 조속히 입사해 주셔야겠습니다, 진유채 선생님.”
“아 제발.”
유채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악몽 같은, 아니, 엿 같은 금요일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누가 꿈이라고 해 줘…….”
그녀의 절규에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은 채로.
*
유채는 근무 중인 심리 상담소에서 좀 유명해졌다. 단 며칠 만에.
“어머? 유채 씨. 오늘도 남자 친구가 데리러 왔네요?”
콕, 함께 데스크를 보는 인턴 상담사가 유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유채는 실수로라도 상담소 출입문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이를 꽉 깨물고, 어색한 웃음을 쥐어짠다.
“아하하……. 쌔앰……. 저 사람 제 남자 친구 아니라니까요……?”
출입문 밖에 누가 서 있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다. 상리그룹 대외사업부 경영전략실 선율 실장.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예쁜 이름에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퇴폐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손가락이 길고 곧은 황홀한 미남자.
선율.
그는 오늘도 보나 마나 완벽한 와이셔츠 핏을 자랑하며 세 번째 단추 아래 넥타이핀을 고정해 둔 채, 좌우대칭이 완벽한 하관이 드러나도록 적당히 넘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서 상담소 출입구 복도에 버티고 서 있을 터였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면 지난 일주일 내내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또다시 금요일, 유채가 김선호발 폭탄 투하의 여파로 빅 엿을 끌어안게 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유채 씨.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따라다니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하아, 그게 말씀드리기가 아주 곤란…….”
“설마 스토커예요?”
“네?”
흠칫, 유채의 어깨가 굳어졌다. 밖에서 기다리는 율의 귀에 들어갔다간 인턴 상담사 선생님의 안위가 무사하지 못할까 걱정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인턴 선생님은 참지 않았다.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야 말이죠. 저렇게 잘생긴 남자라고 해서 변태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유채 씨, 혹시 위험한 상황이라면 솔직하게 말해 줘요. 경찰에 신고할 때 내가 증인 서 줄게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어느 때보다 진중했기에 유채도 덩달아 심각하게 대꾸해 주어야 했다.
“경찰은 곤란해요. 이미 계약서에 서명해 버렸거든요.”
“계약서요?”
“……저 재계약 갱신할 때 되지 않았나요? 아닌가?”
계약직 팔자를 이리 요긴하게 써먹는 날이 올 줄이야. 천연덕스러운 유채의 연기에 인턴 상담사도 곧 의심을 거두고 다시 오지랖으로 돌아갔다.
“뭐, 스토커나 변태가 아니라면 눈 딱 감고 세 번만 만나 봐요. 만나 보고 별로면 그때 차 버리면 되죠. 제가 살아 보니까 남자는 얼굴이 전부더라고요. 뜯어먹고 살 건 정말이지 얼굴밖에 없어요. 정말 얼굴뿐이더라고.”
어째 쌓인 게 많은 듯한 말투다.
“저 정도 얼굴이면 3년이 아니고 30년은 뜯어먹겠다.”
“…….”
끝내 율의 미모 예찬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유채는 끔뻑끔뻑 눈꺼풀을 여닫으며 마음속으로 본심을 삭였다.
하긴. 말이야 바른말이라고, 율이 잘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심하게 잘생겼지.
‘그런데 날 따라다니는 이유가 로맨틱이 아니고 헤드 헌팅이니까 그렇지…….’
헤드 헌팅. 다른 말로 취업 스카우트 중계 행위.
심지어 평범한 헤드 헌팅조차 아닌 사기 공모 헤드 헌팅이란 말이다.
유채의 잇새로 허망한 한탄이 흘러나왔다.
“쌤……. 저 남자 따라가면 저 상담소 그만둬야 해요…….”
“뭐라고요? 설마 연애 건너뛰고 바로 결혼하재요?”
“네? 제가 방금 뭐라고 했나요?”
아차. 뒤늦게 시치미를 떼 보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어느덧 인턴 상담사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혼 후엔 직장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 달래요? 유채 씨 의견은 듣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런 의미에서 곤란한 남자인 거예요? 어쩜, 그렇다면 유채 씨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네요……. 고민이 많겠어요.”
“아, 아뇨. 그게…….”
뭐라고 수습해야 하지. 해명하자니 이실직고 혹은 완전히 거짓말을 지어내야 했고 내버려 두자니 율에게 티끌만큼의 죄책감이 앞섰다. 결국 그녀는 안면 몰수를 선택했다.
“이번 주도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꾸벅! 우렁차게 인사한 뒤엔 냅다 가방을 고쳐 멘다. 유채는 그대로 출입문을 뛰쳐나가 엘리베이터를 스치고 비상계단으로 달려가는 경로를 밟았지만, 공교롭게도 이미 율에게 간파당한 동선이었다.
“진유채 선생님?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이미 비상계단 방화벽 앞을 막아선 율이 유채의 숄더백을 붙잡아 구석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