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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유채가 정색했다.

“왜 자꾸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저 선생님 아니라니까요? 저는 이 상담소 상담사가 아니고요, 사무직 데스크 직원이라고 몇 번을 더 말씀드려야 해요?”

“그렇다고 유채야, 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유채야. 율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다정한 시늉을 했다. 누가 들으면 진짜 연인 사이라고 오해하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말장난을 싫어할 것 같던 첫인상과 달리 그는 극강의 뻔뻔함을 자랑하는 부류였다. 원하는 대로 휘말려 줄쏘냐. 유채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냥 진유채 씨라고 부르세요. 기왕이면 아예 안 부른다면 좋겠네요. 그런데 제 가방은 왜 맘대로 잡는 거예요?”

“음, 가방 대신 뒷덜미를 잡을 순 없으니까요?”

여전히 멀뚱한 무표정으로, 그가 정말 유채의 뒷덜미를 잡기라도 할 듯이 반대쪽 손을 휘적 들어 올리는데, 유채는 하마터면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이 변태야!’라고 소리치며 율의 정강이를 걷어찰 뻔했다. 물론 뒷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 째릿 노려보는 데 그친다.

“놓아 주시죠.”

“예.”

율은 맥 빠질 정도로 순순히 유채의 가방을 놓아 주었다.

그러나 유채가 이때다 싶어 호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면서 능숙하게 따라붙는다.

“안 지겹습니까? 이 패턴.”

“그 질문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저는 진유채 씨가 마음 바꿀 때까지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는데요.”

“으으!”

늘 이런 식이다. 유채가 진심으로 치를 떨 즈음이면 율은 넌지시 한발 물러서다가도 빠져나갈 틈은 주지 않고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유채는 오늘만은 그 도돌이표에서 벗어나고자 부지런히 다리를 놀려 계단을 내려갔다. 도도도도! 두 명분의 발소리가 비상계단에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전 되게 지겹거든요? 그러니까 그만 좀 따라오세요.”

“그래요? 진유채 씨가 지겹다고 하니, 이쯤에서 슬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도록 할까요. 적당한 분위기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건,”

“싫어요!”

유채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율은 실망한 기색 없이 바로 말꼬리를 잡았다.

“진유채 씨. 그래서 대체 언제쯤 퇴사할 생각입니까?”

타다다닥! 빠른 발걸음과 대비되는 여유로운 말투였다. 허, 유채가 코웃음을 쳤다.

“멀쩡히 잘 다니는 회사를 왜 퇴사해요? 조만간 도래할 재계약까지 무사 갱신해서 천년만년 다닐 계획인데요?”

“계약직이었군요. 마침 잘됐네요.”

마침 같은 소리. 잘도 남의 고용 형태에 대신 만족해 주고 자빠졌다. 그 꿍꿍이속이 너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니 화낼 마음도 안 생긴다.

“이참에 안정적인 정규직으로 옮깁시다.”

그럼 그렇지, 일주일 내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던 제안이 지치지도 않고 반복됐다.

“정년 보장에 주 4일제, 각종 복리후생과 명절 보너스 플러스 연말 상여금은 물론이고 3년 근속마다 열흘씩 유급휴가 지급을 보장하겠습니다.”

요컨대 율은 유채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상담소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그녀를 들볶는 중이었다.

당최 상리그룹 대외사업부 경영전략실 실장씩이나 되는 분께서 어쩜 이렇게 한가하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번번이 이 황홀한 낯짝을 들이밀며 유채의 인내심을 시험하니 그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저 얼굴로 사람 머리꼭지를 이만큼 돌게 만들 수 있다니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연봉은 지금과 비교하는 게 무색할 거예요.”

“하아.”

눈 돌아가게 파격적인 스카우트 조건이 대수랴, 당연히 그보다는 목숨이 백만 배쯤 중요한 것을. 유채는 사람이 죽어 나가도 자살로 위장해 버린다는 블랙 기업에 제 발로 감시당하러 들어가긴 싫었다. 거기서 살아남을 자신은 더더욱 없다.

“제가 상리그룹에 왜 들어가요? 인생 귀찮아지기 싫어서 각서에 서명까지 했는데. 회장님께 그 비밀 유지 각서 보여 드리면 되잖아요? 그래도 정 불안하다고 하시거든 그때 각서 내용 보완해서 가져오세요. 얼마든지 다시 사인해 드릴 테니까!”

“그러게 왜 김선호 같은 놈과 얽혀서 이 사달을 냈습니까? 내 선에서 도저히 수습이 안 되니 직접 나서서 진유채 씨를 설득할 수밖에 없잖아요.”

급기야 율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유채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김선호 씨가 모자란 미친놈인 거 누가 모른대요? 핑계 대지 마세요!”

“모자란 미친놈이라, 아주 적당한 표현이네요. 마음에 드는데 나도 사용해도 됩니까?”

갑자기 핀트 어긋난 소리를 해 댄다. 유채의 표정이 더욱 떫어졌다. 일단은 차분하게 오류를 정정해 주기로 했다.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요. 저도 그 모자란 미친놈과 얽힌 데 충분히 후회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김선호 씨가 아니고 상리그룹 회장님이시잖아요? 회장님께서 저를 입사시키라고 선율 실장님한테 지시하셨다면서요. 그래서 지금 실장님이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달달 볶고 있는 거 아니에요?”

“네, 아닌데요.”

단박에 반려당했다. 기가 막혀라.

“제가 매일 진유채 씨를 찾아와서 설득하는 이유는 김선호가 회장님께 진유채 씨를 콕 집어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전후 관계는 바로잡아야죠.”

“뭐라고요?”

“김선호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회장님께서 그쪽처럼 능력 검증도 안 된 비경력직을 낙하산 특채로 고용하겠다고 나서진 않으셨을 거라고요. 다시 말해, 진유채 씨가 회사 출근하기 전까지 절대 해결 안 난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율은 억지바가지로 새 콘셉트를 잡은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뻔뻔하게 우겨 댈 수는 없다.

제아무리 김선호가 K-사회생활 스킬 최저 하한가를 찍은 막무가내의 순한 놈이라고는 해도 고작 평사원에 불과하거늘, 고작 그런 인간 하나 때문에 회사에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가며 유채를 낙하산으로 들어다 앉히겠다니?

심지어 국내 10대 기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리그룹에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말은 안 되지만 사실이요. 좀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알긴 안다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요.”

“진유채 씨. 정 안전이 걱정된다면 계약서에 진유채 씨의 신변과 관련된 조항을 명시해 주겠습니다. 제가 1년 365일 진유채 씨의 경호원 노릇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이 위험하게 두진 않을게요.”

갑작스레 웬 프러포즈받는 분위기란 말인가. 유채는 질색하며 양팔을 휘저었다.

“악! 솔직히 실장님이 제일 무섭거든요? 내 신변에는 당신이 제일 위험햇!”

버럭, 분노를 토해 낸다.

저 허무맹랑한 헛소리에 좋은 말로 대처하기엔 어처구니가 너무나 애저녁에 증발해 버렸음이라. 그러나 유채가 막말을 하거나 말거나 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정답. 바로 그겁니다.”

“네? 정답이요?”

제대로 찡그릴 새 없이 율이 말했다.

“김선호가 반드시 당신과 함께 일해야만 안심이 될 것 같대요. 그냥 두면 제가 몰래 진유채 씨를 감시하다가 어느 날 죽여 버릴까 봐 두렵다나요. 내가 총을 들고 당신을 미행하는 불길한 상상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면서 회장님께 하소연했다는군요. 아마 그 모자란 미친놈이 나를 살인마로 보는 모양이에요.”

“아아아…….”

드디어 복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유채는 비틀거리며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나름의 진심을 담아 율에게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선율 실장님, 설령 그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요. 회장님께서 절 강제 낙하산으로 입사시키시려는 배경이 너무 섬뜩하지 않나요? 제가 거기 들어가면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 전부 감시당할 게 불 보듯 훤하잖아요. 책상 밑에서 도청 장치 발견 안 된다는 보장 있느냐고요.”

그러자 율이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하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김선호가 진유채 씨를 워낙 싸고도는 중이라서요.”

“…….”

또 또 김선호 핑계.

심지어 너무 단호해서 딴죽 걸기도 힘들다.

“뭣보다 우리 회장님께서는 그런 살벌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부분은 진유채 씨가 오해한 거예요.”

이제는 고매하신 회장님의 인격까지 주입식으로 칭송하려 든다. 유채가 계속 아무런 반응도 비치지 않자, 갑자기 율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진유채 씨. 부탁인데 제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게 해 주세요.”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설득과 협박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물론 유채가 백만 배는 더 피곤할 테지만. 이내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재개했다.

“아 예 뭐 열심히 해 보세요. 제가 이래 봬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간이라서요. 털면 소소한 먼지야 쪼끔 나올지 몰라도 가족, 친지, 지인을 통틀어도 협박할 만한 건수는 없을 거랍니다. 다시 말해 선율 실장님께서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든 말든, 저의 취업 상황은 오로지 저의 의사와 결을 같이 할 예정이라는 거죠.”

바로 율의 반문이 따라붙었다.

“제가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진유채 씨를 협박할 것 같습니까?”

“부디 아니길 바랄 뿐이죠.”

“난 협박보다는 회유를 좋아합니다. 이런 건 어때요. 입사하는 즉시 사택과 차량을 지원해 줄게요. 서울 시내 아파트라면 어디든, 자가용도 진유채 씨가 원하는 모델로 골라 와요. 원래 차량 지원은 상무급부터 시작이지만, 회장님께서 직접 꽂아 넣은 낙하산이 수억짜리 스포츠 세단을 끌고 다닌다고 해서 눈치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저 운전 못 하는데요.”

“우리 회사 차량 지원엔 운전기사도 포함인데요.”

얼토당토않은 율의 감언이설이 끝나 갈 즈음엔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상계단도 끝을 보여 가고 있었다.

유채는 지체하지 않고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붙잡아 돌렸다. 덜컥! 그러나 문을 홱 열어젖힌 순간엔 잠깐이나마 율을 돌아보고 그와 눈을 맞췄다.

“선율 실장님. 제가 일주일 전에도 말씀드렸었죠?”

“…….”

“저, 먹으면 탈 나는 돈에 안 좋은 추억 있다니까요.”

쿵!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 버린다. 육중한 철문이 갈라낸 차가운 공기가 유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



파출소 순경이었던 아버지가 어쩌다 불법 정치 자금 수수 의혹에 휘말려 옥살이를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유채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린 유채가 동네에서 수군거리는 소문을 알아챘을 땐, 이미 세상엔 아버지에 대한 기사도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유채는 어린 시절, 매일 방구석에 앉아 퀭한 눈으로 전화기를 바라보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초라하고 무력한 옆모습을.

유채의 어머니는 늘, 언제 중요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수화기를 오래 붙잡고 있어선 안 된다고 어렸던 유채에게 신신당부하곤 했다. 당신께서 강조하시던 ‘중요한 연락’이 다름 아닌 남편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소식임을 유채는 어느 날엔가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기대에 발목이 잡혀 세월을 허비하였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다 옛날 일이다.



“어떤 안 좋은 추억이 있었는지는 안 물어볼게요.”

율은 버스 정류장까지 그녀를 따라왔다. 선심 쓰듯 내뱉은 뒤엔 슬쩍 유채와 같은 벤치에 앉았다.

오늘따라 유독 끈질기다. 금요일이라 그런가? 그렇다면 이 남자는 금요일에 약속도 없나. 저 얼굴에……. 유채는 불어오는 바람에 뺨의 열감을 식히며 쌀쌀맞게 받아쳤다.

“물어보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안 알려 드릴 거니까.”

“저도 상관없습니다. 비밀은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아도 써먹기 충분하거든요. 그 추억이 진유채 씨의 비밀이라는 것만 기억해 둘게요.”

“…….”

스윽, 유채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율은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깎아내린 듯 완벽한 옆모습이 퍽 냉정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하늘 저편에 깔린 노을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고, 붉게 물든 그의 얼굴에서 속내를 가늠해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저 물끄러미 시선만 기울이는데 툭 질문이 떨어졌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진유채 씨는 입이 얼마나 무거운 편입니까?”

“네?”

“남의 비밀을 잘 지키는 편이냐고요.”

율은 계속 정면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야 당연히 정해져 있다. 유채는 어느 때보다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믿으셔도 돼요. 어디 가서 상리그룹 박 이사 사망 사건이니, 김선호니, 선율 실장님이니, 함부로 알은척은커녕 입도 벙긋 안 할 거예요. 제 인생 목표가 죽을 때까지 무던하게 사는 거라서요, 귀찮은 일에 얽히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비밀 지킬 자신 없었으면 애초에 각서도 안 썼어요.”

일부러 중언부언, 몇 번이나 강조했다. 율을 안심시켜서 스카우트니 뭐니 쓸데없는 제안을 그만두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해 줄 수 있었다. 유채의 진심이 가닿았을까? 불현듯 율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유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이제 저 귀찮게 안 하시는…….”

“안심하고 내 비밀도 알려 줄 수 있겠어요.”

이건 무슨 소리지? 제대로 곱씹을 틈이 없었다. 어쨌든 ‘내 비밀’이라는 단어를 인지한 순간 유채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안 돼! 하지 말아요, 절대! 하기만 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