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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주 잠시간, 방심한 순간 일어난 사고였다. 큰 사고가 날 법한 일이었으나 유현이 빠르게 하민을 붙잡고 안아 든 덕분에 다리 하나를 희생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민아, 괜찮아?”

“아야야…….”

하민이 대답 대신 왼쪽 발목을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많이 다치진 않았지만, 다리가 접질린 듯 아팠다.

그나저나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꿈 아닌 것 같은데. 꿈인데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

하민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발목을 살폈다.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했다. 삔 건가? 하민이 눈으로 제 다리 상태를 훑고 있자 유현이 처연한 얼굴로 하민의 발목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미안해. 내가 더 꽉 잡았어야 했는데…….”

“으…… 아니야, 그건 괜찮은데…….”

넘어진 것은 온전히 하민의 실수였다. 그러니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삐었는지 시큰시큰 아팠다. 아직 일어나 보진 않았지만 걷기조차 힘들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니 대뜸 무인도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이렇게 안 좋은 일까지 생기다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민은 어제 낮에 게임을 하며 애들과 함께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인도에 떨어지면 누가 가장 먼저 죽을 것 같냐고, 별 의미 없었던 물음. 그때 도형이가 저보고 가장 먼저 죽을 것 같다고 했었는데……. 인정하기 싫었으나 너무나도 정확했다.

하민이 씁쓸함에 작은 한숨을 내쉬자, 유현이 삔 발목을 이리저리 살피다 안 되겠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벌써? 열매 하나밖에 못 땄는데?”

“괜찮아. 내가 식사거리는 준비해 줄 테니까.”

“으응. 고마워…….”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제 한 입 채우기도 힘들 텐데 내 몫까지 챙겨 주겠다니. 도형이 새끼와는 달리 배려가 넘쳤다.

유현은 하민을 업고 모래사장을 저벅저벅 걸었다. 사박사박 모래 알갱이가 밟히는 소리, 부드럽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와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민은 그의 등에 기대어 끝없이 이어진 바다와 반짝거리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정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데……. 이 완벽한 경치를 사내자식한테 업힌 채로 보게 됐다는 건 무척이나 아쉬웠다.



***



유현은 하민을 집에 있는 의자에 앉혀 놓고는 삔 다리에 얇은 천을 둘둘 둘러맸다. 하민은 하얀 천으로 묶인 다리를 공중에 들고 까딱거리며 물었다.

“피 나는 것도 아닌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이럴 때 보통 깁스하던데.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

……결국 잘 모르겠다는 거군. 의학에 대해서는 무지렁이다 보니, 그냥 어디선가 본 대로 한 듯했다.

돌팔이 같은 처방이었지만 그래도 엉성하게나마 치료를 해 주는 녀석이 기특해 보였다. 하민은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유현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그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유현아, 너밖에 없다.”

도형이 보면 토 나온다며 지랄할 광경이긴 했지만 가끔 유현이랑 둘이 남으면 이러곤 했다. 하민이 고마움의 의미로 배시시 웃음을 흘리자, 유현이 두 눈을 마주한 채 능구렁이처럼 대답했다.

“알면 형님한테 뽀뽀 좀 해 주지 그래?”

“뭐? 형님? 뽀뽀? 남자끼리 무슨……. 징그럽다. 치워라.”

“하민이 입술 맛 좀 볼까.”

하민이 변태 같은 농담 말라며 질색했지만, 유현은 굽히고 있던 다리를 일으키더니 의자 양쪽 팔걸이에 손을 짚었다.

뒤는 의자 등받이에, 양옆과 앞은 유현에게 가로막혔다. 녀석이 원래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고 이런 장난을 많이 치는 편이어서 이번에도 장난이라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왜일까. 오늘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불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위태롭게 깜빡거리는 조명과 은은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 어쩐지 이 상황이 전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민이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거리는 동안 유현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며, 코에 있는 미인점이며,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며……. 새삼스럽게 유현이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술을 부비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야아, 비켜…….”

하민이 장난은 이만하면 됐다며 유현의 가슴팍을 밀었지만, 꼭 커다란 돌덩이를 밀어내려고 했던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뒀다간 정말 뽀뽀할 기세였다.

얘가 징그럽게 왜 이래? 거부감에 아등바등하는 사이에도 입술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는 피할 구석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현실도 아니었다. 얘랑 뽀뽀해 봤자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한 번 하고 말까……. 하민이 반쯤 체념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 퍽,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민이 꽉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뜨자, 도형이 유현을 밀어낸 채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밥 먹기 전에 토 나오는 짓 하지 마라.”

도형은 식량을 막 구하고 돌아왔는지 반대쪽 손에는 무슨 종인지 모를 커다란 물고기가 들려 있었다.

저만치 멀리 밀쳐진 유현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있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

딱히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유현이 놈이 장난으로 한 말에 또 죽자고 달려들면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무인도. 괜히 사이 틀어져서 좋을 거 하나 없었다.

하민이 반박 대신 가만히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만 있자, 도형이 하민을 힐끗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다리가 그 꼴이냐?”

“아, 이거……. 야자열매 따다가 삐었어.”

“하이고, 과일 따 먹는다고 지랄할 때부터 알아봤는데…….”

“뭐? 지랄?”

“맞잖아. 하여튼, 불 피우게 나와.”

도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곤 먼저 집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바로 나갈 거면 집에는 왜 들어온 건지…….

하민이 절뚝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유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하민의 허리를 손으로 감쌌다. 뱀처럼 스르륵 허리를 휘감는 손에 하민이 움찔했다. 거부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떨어트리려고 했으나, 유현이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부축해 줄게.”

“……으응. 고맙다.”

놈이 좀 전까지 뽀뽀할 것처럼 굴어서 그런가, 스킨십이 유난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민은 괜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집 밖으로 나왔다.

도형이는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물고기를 불에 익히고 있었다. 무인도니까 예능 프로그램처럼 나무를 싹싹 비벼서 불을 피워야 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도형이는 생선을 굽고, 유현이는 아까 따 왔던 야자열매 껍질을 깠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무인도에 온 것이 아니라 야영을 왔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하민이만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민은 애꿎은 모랫바닥을 나뭇가지로 긁으며 일하고 있는 두 녀석을 힐끗힐끗 봤다. 유현이랑은 분위기가 좀 그랬었으니……. 하민은 괜히 도형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생선은 어디서 났어?”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바다에서 났지.”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잡았냐고.”

“그냥 잡으려고 하니까 잡히던데? 나무 깎아서 던졌어.”

‘참 쉽죠?’ 하는 유명한 아저씨가 떠오를 정도로 가벼운 말투였다.

나랑 유현이는 열매 하나도 제대로 못 따고 부상이나 얻었는데……. 게다가 낚시를 한 것도 아니고 던졌댄다. 하민은 진심으로 그의 능력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야, 넌…… 무인도가 체질이다. 무인도에서 평생 사는 게 어때?”

도형이 놈은 한국에 있을 땐 컴퓨터 외에는 별달리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섬에 오니 능력이 두드러졌다. 이 정도면 정말 무인도가 체질 아닌가?

하민의 진심 어린 감탄에 도형은 생선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옮겨 하민과 눈을 마주했다. 도형은 안 그래도 눈이 가로로 찢어져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그는 더 살벌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삼엄히 대답했다.

“하민아, 넌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마라. 빡치니까.”

“……야, 노, 농담이거든. 뭐 그렇게 살벌하게 봐. 어어, 물고기 탄다. 뒤집자.”

하민이 뒤늦게 수습하자, 도형이 한숨을 쉬며 생선을 뒤집었다.

이리저리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생선이 먹기 좋게 노릇노릇 구워졌다. 하민은 평소 생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하루 내 쫄쫄 굶어서 그런지 군침이 절로 돌았다.

하민이 얌체처럼 먼저 나무젓가락으로 생선을 발라 먹었으나, 다행히 도형은 먹지 말라며 깐깐하게 굴지 않았다. 은근슬쩍 작은 생선 하나를 통째로 가져가도 아무 말 없었다.

도형이 새끼가 시시때때로 욕을 하며 조롱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잡아 온 물고기는 군말 없이 나눠 준다. 입에는 걸레를 물었어도 마음은 착한 친구…….

“이하민 존나 돼지 새끼네. 손 하나 까딱 안 해 놓고 생선 한 마리를 다 처먹냐? 양심도 없는 새끼.”

“…….”

……라고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욕설 폭탄이 떨어졌다. 정정하겠다. 도형이는 그냥 재수 없는 호로 새끼다.

하민은 볼에 빵빵하게 물고 있던 생선을 꿀꺽 삼키고는 적반하장으로 나갔다.

“야,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잖아. 좀 가만히 두면 안 돼?”

“어휴, 저 뻔뻔한……. 그래, 이 개새끼야. 많이 처먹어라.”

도형이 후식까지 잘 먹으라는 듯 가운뎃손가락을 들이밀었다.

하민은 빳빳하게 세워진 그의 손가락을 보다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생선도 주고 다 해 줄 거면서 왜 저렇게 이미지를 깎아 먹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