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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며칠 전에 주인공이 게임에 빙의하는 웹소설을 읽었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무인도의 숲>은 힐링 게임이었다. 삼시 세끼를 챙겨 먹지 않아도 괜찮았고, 솜씨가 없어도 DIY 기능을 이용하면 뚝딱뚝딱 만들 수 있었다. 박복한 현실을 떠나서 자유롭게 낚시도 하고 곤충도 채집하고. 평화로운 라이프!
게임의 아기자기한 느낌과 달리 너무 사실적이라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아침 새 무인도에 떨어졌다는 설정보다는 힐링 게임에 빙의됐다는 설정이 훨씬 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무서운 거 아니고, 제발 힐링 게임 빙의 같은 내용이기를……! 하민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 집을 다 둘러본 도형이 여상하게 말했다.
“방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 같이 한방 써야겠네.”
“뭐? 여기를 쓰자고? 다른 사람이 오면 어쩌려고? 그리고 어떻게 이 좁은 집에서 셋이 살아?”
하민이 날을 세우고 대답했다. 아무리 무인도치고 좋은 집이라고 하지만, 남자 혼자 살기도 좁을 것 같은데 어찌 셋이 같이 산단 말인가.
하민이 말도 안 된다며 대꾸하자, 도형이 특유의 날렵한 눈으로 하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나가든지.”
“……아, 아니. 누가 나간대……? 그냥 그렇다는 거지…….”
강경하게 나오는 도형에 하민은 급히 의견을 굽히고 집 안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도형에게서 어이가 없다는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차라리 좁게 사는 게 낫지 밖에서 살고 싶진 않았다.
하민의 행동에 유현이 역시 배시시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무릎 위에 놓여 있는 하민의 손을 맞잡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재밌겠다. 우리 꼭 어디 놀러 온 것 같지 않아?”
“…….”
하민은 그런 유현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얘는 이렇게 좁은 집에서 셋이 같이 살게 됐는데도 불만은커녕 즐거워 보였다. 애가 다정하고 착하긴 한데…… 이렇게 위기감이 없을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
***
집에서 한참을 쉬던 중, 하민은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하민은 이곳이 꿈 혹은 게임 속 세계일 테니 배고픔도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꼬르륵거리며 울리는 뱃고동 소리는 너무나 진짜였다. 결국 속이 위액으로 뜨거워질 즈음이 되어서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야, 지금 나만 배고파?”
<무인도의 섬> 게임 빙의라면 배도 고프지 않아야 정상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인도의 숲> 세계였으면 좋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는데, 이렇게 배가 고프니 스멀스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몸뚱어리는 제때 영양분을 챙겨 먹지 않으면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솜씨가 좋지 않으면 좋은 재료가 있어도 쓰레기를 만든다. 모든 게 게임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심각한 하민에 비해 도형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배고픈 사람이 알아서 다녀와.”
“넌 진짜…… 매정하다. 같이 가 줄 수 있잖아.”
하민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서운하게 대답했다. 하민은 단지 다른 애들도 배가 고플까 물어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물론 만약에 애들도 배고프다고 하면 같이 바깥에서 재료를 챙겨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바깥에 혼자 나가긴 아직 무서웠다.
하민이 칭얼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유현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민아, 그럼 나랑 다녀오자. 나도 배고파.”
“너랑……?”
하민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유현이도 체격이나 힘이 좋지만, 무언가 듬직한 느낌은 없었다. 겁도 없이 앞장서던 도형이 놈까지 같이 가야 완벽하게 구성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계속해서 도형이한테 같이 가자고 조르면 유현이가 기분 나빠하겠지……. 하민이 그러자며 유현에게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한가롭게 누워 있던 도형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됐어. 가자.”
“뭐야, 갑자기 웬 변덕이래?”
“…….”
도형은 말없이 먼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섰다.
절대로 안 나갈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다 같이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대? 하민은 툴툴대긴 했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셋이 나가는 것이야말로 제가 그리던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우르르 집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기온도 낮보다 서늘해진 것이 곧 밤이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무인도. 인공 불빛 하나 없는 곳이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식량을 구해야 했다.
모두 초행길인지라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안가로 나와 쭉 둘러보기로 했다. 도형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하민과 유현이 졸졸 쫓았다.
다행히 식량이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모래사장 위에 자그마한 조개 같은 것들이 파도에 밀려 들어와 있었다. 하민이 그것들을 주섬주섬 티셔츠에 주워 담자, 도형이 그 모습을 보고 비아냥댔다.
“야, 그거 먹는다고 배 차겠냐?”
“배고파서 뒤지는 것보다 낫잖아.”
하민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조개라도 안 주우면 쫄쫄 굶게 될지도 모르는데 도형이 놈은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민은 도형이 자식이 배고프다고, 조개 조금만 나눠 달라고 빌어도 절대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주웠다.
그렇게 하민이 이삭 줍는 여인처럼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열심히 줍고 있을 때, 갑자기 유현이 하민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하민아, 저기에 코코넛이 있다?”
“뭐? 어디에?”
“저, 위를 봐 봐.”
유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야자나무 위에 초록색 코코넛 열매가 탐스럽게 달린 것이 보였다.
예전에 무인도를 체험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말 맛있게 먹던데……. 하민은 평소 코코넛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군침이 돌았다. 무인도에서 직접 따서 먹는 건 왠지 다를 것 같았다.
하민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유현이 좋은 방법이 있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하민이가 가벼우니까, 내가 들어 올려 줄게. 따 먹자.”
“내, 내가 위로 올라간다고? 그냥 나무 흔들어서 따면 안 돼?”
“에이, 저게 흔든다고 떨어질 것 같아? 아니면 하민이가 나 받쳐서 올려 줄래? 그러면 내가 따 올게.”
“…….”
내가 받치라고? 하민은 유현을 제가 들 수 있을지 눈을 위아래로 굴리며 탐색했다.
유현이는 얼굴은 레트리버처럼 순하게 생겨선 몸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지, 레트리버도 대형견이니까 닮은 점이 많아도 너무 많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너무 커다래서 하민이 그를 들진 못할 듯했다.
하민은 비록 고소 공포증이 있긴 하지만 무인도라는 극한의 상황이니 이겨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잠깐 고심하던 그는 큰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내가 올라갈게.”
“그래? 그러면 일단 목마 타 봐.”
유현이 모랫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라타기 수월하게 해 주었다.
하민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넓게 펼쳐 담아 두었던 조개들을 바닥에 조심스레 모아 놓고, 유현의 어깨에 허벅지를 올렸다.
목마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것이 언제였더라? 하민이 까마득한 추억을 회상하며 유현의 어깨에 올라타고 있자, 먼저 가고 있던 도형이 이쪽을 돌아보며 핀잔을 줬다.
“하이고, 저거 하나 먹겠다고 쇼를 한다…….”
도형의 눈에는 야자수 열매 따 먹겠다고 이러는 모습이 한없이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에 하민은 한쪽 입꼬리를 거만하게 올리며 도발했다.
“곽도형, 너 조금 이따가 먹고 싶다고 울어도 안 준다?”
“넌 걱정도 팔자다.”
도형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꾸하고는 열매를 따든 말든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먼저 가 버렸다. 언제까지 저렇게 고고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하민이 주먹을 파르르 떨며 꼭 열매를 따 먹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하민이 도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새 유현이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현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목마를 타면 많이 올라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그런데도 하민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열매에는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하민이 걱정스레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자, 유현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독려했다.
“떨어질까 봐 무섭다 생각하지 말고. 내가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일어나 봐.”
“으응…….”
하민은 고소 공포증에 벌써 눈앞이 아득해지고 손에 땀이 찼지만, 이만큼이나 왔는데 무섭다고 포기하긴 아까웠다.
하민은 유현의 드넓은 어깨에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굽히고 있던 무릎을 폈다. 그러자 시야가 쑥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또 자신의 키만큼 높아지자, 공포가 확 몰려오며 더욱 아찔해지고 초조해졌다.
다시금 하민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열매를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생각보다 열매가 나무에 단단하게 달려 있어 양손을 이용해야 할 듯싶었다. 하민이 열매를 잡고 힘껏 잡아당기자, 그제야 톡 소리를 내며 열매가 품에 안겨졌다.
“와악! 땄다!”
“그거 아래에 던지고, 더 따서 나눠 먹자.”
“그래!”
내 손으로 열매를 따다니! 방금까지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으면서, 자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솟았다.
하민이 싱글벙글 웃으며 두 번째 열매에 손을 뻗었다. 좀 전에 열매를 땄던 것처럼 그대로 열매를 쥐어 잡아당기려던 순간 하민은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높다.
갑자기 머리가 울렁거리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이런…… 고소 공포증…….
하민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유현의 어깨를 딛고 있던 발이 앞으로 죽 미끄러졌다.
“으아아아악!”
하민의 애처로운 비명이 무인도에서 메아리쳤다.
며칠 전에 주인공이 게임에 빙의하는 웹소설을 읽었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무인도의 숲>은 힐링 게임이었다. 삼시 세끼를 챙겨 먹지 않아도 괜찮았고, 솜씨가 없어도 DIY 기능을 이용하면 뚝딱뚝딱 만들 수 있었다. 박복한 현실을 떠나서 자유롭게 낚시도 하고 곤충도 채집하고. 평화로운 라이프!
게임의 아기자기한 느낌과 달리 너무 사실적이라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아침 새 무인도에 떨어졌다는 설정보다는 힐링 게임에 빙의됐다는 설정이 훨씬 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무서운 거 아니고, 제발 힐링 게임 빙의 같은 내용이기를……! 하민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 집을 다 둘러본 도형이 여상하게 말했다.
“방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 같이 한방 써야겠네.”
“뭐? 여기를 쓰자고? 다른 사람이 오면 어쩌려고? 그리고 어떻게 이 좁은 집에서 셋이 살아?”
하민이 날을 세우고 대답했다. 아무리 무인도치고 좋은 집이라고 하지만, 남자 혼자 살기도 좁을 것 같은데 어찌 셋이 같이 산단 말인가.
하민이 말도 안 된다며 대꾸하자, 도형이 특유의 날렵한 눈으로 하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나가든지.”
“……아, 아니. 누가 나간대……? 그냥 그렇다는 거지…….”
강경하게 나오는 도형에 하민은 급히 의견을 굽히고 집 안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도형에게서 어이가 없다는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차라리 좁게 사는 게 낫지 밖에서 살고 싶진 않았다.
하민의 행동에 유현이 역시 배시시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무릎 위에 놓여 있는 하민의 손을 맞잡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재밌겠다. 우리 꼭 어디 놀러 온 것 같지 않아?”
“…….”
하민은 그런 유현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얘는 이렇게 좁은 집에서 셋이 같이 살게 됐는데도 불만은커녕 즐거워 보였다. 애가 다정하고 착하긴 한데…… 이렇게 위기감이 없을 수가 있는지 신기했다.
***
집에서 한참을 쉬던 중, 하민은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하민은 이곳이 꿈 혹은 게임 속 세계일 테니 배고픔도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꼬르륵거리며 울리는 뱃고동 소리는 너무나 진짜였다. 결국 속이 위액으로 뜨거워질 즈음이 되어서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야, 지금 나만 배고파?”
<무인도의 섬> 게임 빙의라면 배도 고프지 않아야 정상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인도의 숲> 세계였으면 좋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는데, 이렇게 배가 고프니 스멀스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몸뚱어리는 제때 영양분을 챙겨 먹지 않으면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솜씨가 좋지 않으면 좋은 재료가 있어도 쓰레기를 만든다. 모든 게 게임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심각한 하민에 비해 도형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배고픈 사람이 알아서 다녀와.”
“넌 진짜…… 매정하다. 같이 가 줄 수 있잖아.”
하민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리며 서운하게 대답했다. 하민은 단지 다른 애들도 배가 고플까 물어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물론 만약에 애들도 배고프다고 하면 같이 바깥에서 재료를 챙겨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바깥에 혼자 나가긴 아직 무서웠다.
하민이 칭얼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유현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민아, 그럼 나랑 다녀오자. 나도 배고파.”
“너랑……?”
하민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유현이도 체격이나 힘이 좋지만, 무언가 듬직한 느낌은 없었다. 겁도 없이 앞장서던 도형이 놈까지 같이 가야 완벽하게 구성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계속해서 도형이한테 같이 가자고 조르면 유현이가 기분 나빠하겠지……. 하민이 그러자며 유현에게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한가롭게 누워 있던 도형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됐어. 가자.”
“뭐야, 갑자기 웬 변덕이래?”
“…….”
도형은 말없이 먼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섰다.
절대로 안 나갈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다 같이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대? 하민은 툴툴대긴 했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셋이 나가는 것이야말로 제가 그리던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우르르 집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기온도 낮보다 서늘해진 것이 곧 밤이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무인도. 인공 불빛 하나 없는 곳이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식량을 구해야 했다.
모두 초행길인지라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안가로 나와 쭉 둘러보기로 했다. 도형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하민과 유현이 졸졸 쫓았다.
다행히 식량이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모래사장 위에 자그마한 조개 같은 것들이 파도에 밀려 들어와 있었다. 하민이 그것들을 주섬주섬 티셔츠에 주워 담자, 도형이 그 모습을 보고 비아냥댔다.
“야, 그거 먹는다고 배 차겠냐?”
“배고파서 뒤지는 것보다 낫잖아.”
하민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조개라도 안 주우면 쫄쫄 굶게 될지도 모르는데 도형이 놈은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민은 도형이 자식이 배고프다고, 조개 조금만 나눠 달라고 빌어도 절대 주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주웠다.
그렇게 하민이 이삭 줍는 여인처럼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열심히 줍고 있을 때, 갑자기 유현이 하민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하민아, 저기에 코코넛이 있다?”
“뭐? 어디에?”
“저, 위를 봐 봐.”
유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야자나무 위에 초록색 코코넛 열매가 탐스럽게 달린 것이 보였다.
예전에 무인도를 체험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말 맛있게 먹던데……. 하민은 평소 코코넛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군침이 돌았다. 무인도에서 직접 따서 먹는 건 왠지 다를 것 같았다.
하민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유현이 좋은 방법이 있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하민이가 가벼우니까, 내가 들어 올려 줄게. 따 먹자.”
“내, 내가 위로 올라간다고? 그냥 나무 흔들어서 따면 안 돼?”
“에이, 저게 흔든다고 떨어질 것 같아? 아니면 하민이가 나 받쳐서 올려 줄래? 그러면 내가 따 올게.”
“…….”
내가 받치라고? 하민은 유현을 제가 들 수 있을지 눈을 위아래로 굴리며 탐색했다.
유현이는 얼굴은 레트리버처럼 순하게 생겨선 몸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지, 레트리버도 대형견이니까 닮은 점이 많아도 너무 많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너무 커다래서 하민이 그를 들진 못할 듯했다.
하민은 비록 고소 공포증이 있긴 하지만 무인도라는 극한의 상황이니 이겨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잠깐 고심하던 그는 큰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내가 올라갈게.”
“그래? 그러면 일단 목마 타 봐.”
유현이 모랫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라타기 수월하게 해 주었다.
하민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넓게 펼쳐 담아 두었던 조개들을 바닥에 조심스레 모아 놓고, 유현의 어깨에 허벅지를 올렸다.
목마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것이 언제였더라? 하민이 까마득한 추억을 회상하며 유현의 어깨에 올라타고 있자, 먼저 가고 있던 도형이 이쪽을 돌아보며 핀잔을 줬다.
“하이고, 저거 하나 먹겠다고 쇼를 한다…….”
도형의 눈에는 야자수 열매 따 먹겠다고 이러는 모습이 한없이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에 하민은 한쪽 입꼬리를 거만하게 올리며 도발했다.
“곽도형, 너 조금 이따가 먹고 싶다고 울어도 안 준다?”
“넌 걱정도 팔자다.”
도형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꾸하고는 열매를 따든 말든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먼저 가 버렸다. 언제까지 저렇게 고고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하민이 주먹을 파르르 떨며 꼭 열매를 따 먹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하민이 도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새 유현이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현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목마를 타면 많이 올라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그런데도 하민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열매에는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하민이 걱정스레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자, 유현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독려했다.
“떨어질까 봐 무섭다 생각하지 말고. 내가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일어나 봐.”
“으응…….”
하민은 고소 공포증에 벌써 눈앞이 아득해지고 손에 땀이 찼지만, 이만큼이나 왔는데 무섭다고 포기하긴 아까웠다.
하민은 유현의 드넓은 어깨에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굽히고 있던 무릎을 폈다. 그러자 시야가 쑥 위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또 자신의 키만큼 높아지자, 공포가 확 몰려오며 더욱 아찔해지고 초조해졌다.
다시금 하민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열매를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생각보다 열매가 나무에 단단하게 달려 있어 양손을 이용해야 할 듯싶었다. 하민이 열매를 잡고 힘껏 잡아당기자, 그제야 톡 소리를 내며 열매가 품에 안겨졌다.
“와악! 땄다!”
“그거 아래에 던지고, 더 따서 나눠 먹자.”
“그래!”
내 손으로 열매를 따다니! 방금까지는 무서워 죽을 것 같았으면서, 자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솟았다.
하민이 싱글벙글 웃으며 두 번째 열매에 손을 뻗었다. 좀 전에 열매를 땄던 것처럼 그대로 열매를 쥐어 잡아당기려던 순간 하민은 자기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높다.
갑자기 머리가 울렁거리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이런…… 고소 공포증…….
하민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유현의 어깨를 딛고 있던 발이 앞으로 죽 미끄러졌다.
“으아아아악!”
하민의 애처로운 비명이 무인도에서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