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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눈을 뜨기도 전에 들린 생소한 목소리 때문에 곽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억지로 눈을 떠 보려 했지만 눈꺼풀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말이 없자 목소리는 재촉하는 것처럼 한 번 더 들려왔다.
“내 이름? 곽선우.”
얼떨결에 대답하자 대번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눈을 뜬 곽선우가 멍한 상태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한 번 더 들렸다.
< 환영합니다, 곽선우 님. 지금부터 곽선우 님의 광공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플레이 되시기 바랍니다. >
목소리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이 목소리가 대체 어디에서 들리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광공 여정이라는 게 대체 뭔데…….’
멍하니 생각하면서 곽선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지금 처음 보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새까만 베개를 베고 같은 색 이불을 가지런히 덮은 채였다. 시트 역시 검은색인데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몸을 일으켜 앉아 보니 방바닥은 매끈한 대리석이고 벽면은 온통 검정 단색이었다. 천장에는 벌레 한 마리도 들어가지 않은 듯 깨끗한 LED 전등이 달려 있었다.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모델 하우스에 가도 이렇게 인간미 없이 삭막한 인테리어는 찾아보기 힘들 텐데.
침대 옆 서랍장에는 세련된 무선 무드 등이 놓여 있었는데, 역시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멍한 기분으로 무드 등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더니 컴퓨터 알림 창 같은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침대 옆 무드 등」
: 광공 인테리어의 필수품이다. 단, 무드 등을 착실하게 충전해 사용할 경우 광공 실격이므로 충전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음.
‘윈도우도 아니고 알림 창이 뜬다고?’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그에 비해 상당히 가벼워서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다.
‘충전 기능도 없으면 뭐 하러 침대 옆에 둔 건데?’
잠깐만. 생각에 잠겨 있던 곽선우는, 갑자기 상황 파악이 되는 기분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설마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까, 아까도 플레이어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었고…….’
안타깝게도 그는 게임이라고는 지뢰찾기나 핸드폰 스도쿠 말고는 딱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임의 공략법은커녕 시스템조차 모르는 게 당연했다. 정말 게임 속에 들어온 거라면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골치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꿈인가?’
아니었다. 입 안을 씹어 보니 생생하게 아팠다. 한숨이 나왔지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곽선우는 우선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어떻게 된 게 거실 풍경도 방 안과 다를 바 없이 살풍경했다. 벽면까지 윤기 나는 검정 대리석 재질이란 걸 빼면 방과 거의 비슷한 느낌이었다. 소파도 새카만 색, 부엌 식탁은 하얀색, 냉장고는 검은색. 커튼을 걷어 창밖 하늘이 파란색이라는 걸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흑백으로 된 세상에 들어온 줄 알았을 것이다.
냉장고치고는 너무 삭막하게 생긴 냉장고를 열어 본 그는 어이없음에 입이 벌어졌다. 냉장고 안에는 에비앙 생수 한 병만이 들어 있었다. 분명히 전원이 들어와 있는데 고작 에비앙 한 병이라니, 생수 하나를 위해서 작동시키는 전력이 아깝지도 않은 걸까?
“정말 사람 살던 집이긴 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대답하듯 알림 창이 떠올랐다.
< 예 | 아니오 >
‘정말 게임 같네.’
알림 창이 허공에 뜬 순간부터 현실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스마트폰 터치하듯 허공에 손을 휘두르기는 조금 머쓱했다. 곽선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러자 허공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 비서에게 냉장고를 채우도록 지시한다.
‣ 인터넷 쇼핑을 통해 주문한다.
비서도 있다는 설정인가? 하긴 지나치게 넓은 집 크기를 보아하니 보통 재력이 아닌 것 같긴 했다. 비서에게 장을 보도록 시키는 건 너무 부려 먹는 것처럼 느껴졌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식재료의 신선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곽선우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직접 장을 보러 갈 수는 없나요?”
허공에 떠드는 꼴이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머릿속 목소리는 곽선우의 물음에 응답해 주었다.
광공이 대체 뭐라고……. 아무래도 인터넷 주문보다는 사람이 직접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곽선우는 ‘비서에게 냉장고를 채우도록 지시한다.’라는 선택지를 골랐다.
< ※주의. 광공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다나까체’ 혹은 ‘반존대체’를 사용해야 합니다. ‘직접 장을 보러 갈 수는 없나요?’라는 물음은 너무 유순합니다. 광공 수치가 3 하락합니다. >
< 현재 광공 수치는 97입니다. 광공 수치가 50 이하로 하락할 경우 상태 이상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
어이가 없었다. 그럼 대체 광공이 할 수 있는 건 뭐란 말인가? 곽선우는 머릿속 목소리에게 무슨 반박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도 결국 정해진 입력값대로만 움직이는 프로그램일 텐데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 안을 마저 둘러봤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요?”
< 현재 광공 수치는 92입니다. 광공 수치가 50 이하로 하락할 경우 상태 이상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
“…….”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광공 수치가 하락해 생긴다는 상태 이상이 대체 뭘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봤을 때 좋은 일은 결코 아닐 듯했다.
이윽고 다시 한번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출근 준비를 한다.
‣ 출근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일은 해야지…….’
곽선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을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한국 회사원이라서, 이 영문 모를 상황에서도 출근을 선택했다. 그는 샤워부터 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방이 워낙 많아 어느 곳이 화장실인지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먼저 눈에 띈 현관이나 신발장을 들여다보니 신발은 온통 가죽 구두뿐이고, 모두 사이즈가 같았다. 이런 걸 보면 딱 이 광공 한 사람만 사는 집이 맞는 것 같은데 무슨 방이 이렇게 많은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다가 방마다 인테리어도 전부 똑같은 흑백투성이였다.
고생 끝에 화장실을 찾아낸 곽선우는 바닥과 벽을 수놓은 검은색 타일과 검은색 욕조를 발견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도 원래 곽선우의 것과는 달랐다. 곽선우는 시력이 나빠 안경을 꼈고, 과로와 야근 때문에 늘 다크서클이 뺨에 닿을 듯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거울 속에 보이는 건 배우 뺨치는 도회적 미남이었다.
그냥 표정 없이 서 있는 것뿐인데도 눈빛이 강렬했고, 턱선은 베일 듯 날카로웠다. 또한 마른 체형이었던 곽선우와 달리 거울 속 광공은 딱 벌어진 어깨와 상대적으로 가는 골반을 갖춘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외모는 잘생긴 사람을 광공이라고 부르는 걸까…….’
생각하던 곽선우는 일단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틀자 머리 위 고정된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앗 차거!”
< 현재 광공 수치는 83입니다. >
한 번에 떨어지는 수치가 많기도 했다. 찬물 때문에 광공 수치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곽선우는 물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수도꼭지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움직이지가 않았다.
“…….”
모르긴 몰라도 이 게임에는 ‘광공 되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다른 제목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광공으로 살아남기’ 같은 것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