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선배, 혹시 광공이라고 알아요?”

“광공?”

식사 도중 후배가 물었다. 곽선우는 국자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요새 새 게임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더니 그것과 관련 있는 단어인가 싶었다. 후배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로 유쾌하게 웃었다.

“BL 장르 있죠? 보이즈 러브요. 선배도 왜 야오이는 알 거 아니에요. 거기 남자들 중에 박는 쪽을 공이라고 하는데, 공 중에서도 미친놈을 광공이라고 한대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들이었다. 아마 오늘 듣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내용이다. 곽선우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후배는 선우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광공……. 그게 왜? 요새 게임 만든다는 게 장르가 BL이니?”

곽선우야 그 흔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한 번 플레이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니 BL 게임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게 당연했다. 중요한 말인가 싶어 내려놓았던 국자를 다시 집어 들고 닭다리 한 개를 건져 낸 곽선우가 힐끗 고개를 들어 후배의 눈을 쳐다보았다. 후배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저도 이런 쪽 게임은 만들어 본 적 없긴 한데…… 이번에 회사가 이북 출판사 쪽이랑 계약을 맺었거든요. 요새 제일 잘나가는 연재작이랑 콜라보예요. 그쪽 작가가 좀 참신하고 개그성 짙은 게임을 원한다는 것 같아요. 원작이 너무 어두워서 게임이라도 좀 웃기게 나왔으면 좋겠다나?”

이럴 때 뭐라고 대답해야 좋은 대답일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던 곽선우는 그냥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도 딱히 그에게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냥 본인이 하는 말 자체가 우스운지 알아서 이야기를 잘만 이어 나갔다.

“그래서 저희끼리 좀 알아봤는데 요새 이 광공 어쩌고 하는 게 좀 핫한가 봐요.”

“만들려는 게임 소재가 그거야?”

“네. 이 광공이란 게 참 웃기더라고요. 약간 멜로드라마 남주인공 같은 건가 봐. 차가운 재벌 2세들 있잖아요. 집은 꼭 모던한 블랙 앤 화이트 인테리어여야 돼, 아무리 추워도 롱패딩은 입으면 안 돼, 감정 표현이 격하면 안 되고 웃을 때는 입꼬리만, 냉장고에는 양주랑 에비앙만 들어 있고, 커피 마실 땐 꼭 에스프레소만 먹고……. 선배처럼 이렇게 닭한마리 좋아하는 것도 당연히 안 되고요.”

“닭한마리가 뭐가 어때서……. 광공은 그럼 뭐 먹고 살아. 굶어 죽어야 돼?”

어이없다는 듯한 곽선우의 질문에 후배가 박장대소했다.

“제 말이 그거예요. 웃기지 않아요? 그래서 그 소재로 만들어 보려는 거거든요. 광공 되기 시뮬레이션.”

“게임 업계란 거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근데 확실히 웃길 것 같긴 하네.”

“그렇죠? 웃긴 거 또 있어요. 이거 원작에서 광공 이름이 선배랑 똑같거든요. 곽선우.”

하지만 곽선우는 재벌 2세면서 닭한마리도 못 사 먹을 거라면 광공 같은 건 절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볍게 얘기하고 지나갔던 후배와의 대화는 선우의 머릿속에서 금세 잊혔다.



*



‘그거였나…….’

운전기사가 몰아 주는 차 안에 편안하게 앉아 기억을 되짚던 중, 곽선우는 언뜻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게임 회사에서 일하는 후배와 그런 대화를 했었던 것 같았다. 워낙 바쁠 때였기도 하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일이라 금세 까먹었는데, 상황에 맞물려 겨우 떠오른 것이었다.

선우 자신이 이 게임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그 후배가 게임 개발에 성공한 걸까. 사실 이게 어떤 게임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이미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닭한마리도 못 먹는다고 했을 때 알아봤지만 광공이란 역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냉장고에 에비앙밖에 없어서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집을 나선 곽선우는 속이 헛헛해서 입맛을 다셨다. 그런 것치고 허기는 그리 심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광공의 신체는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지 모를 일이었다.

‘가는 길에 서브웨이 샌드위치라도 사면 안 될까…….’



< 샌드위치는 광공이 선택할 수 없는 메뉴입니다. 점심식사 시간에 회사 중역들과 한정식집 예약이 잡혀 있습니다. >




혼자만의 생각에 대답이 돌아온 걸 좋아해야 할지 아닐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주 굶어야 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샤워할 때 물 온도 조절도 할 수 없는 불쌍한 광공이 이대로 굶어 죽어 버릴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그러고 보니 찬물에 샤워한 여파인지 따뜻한 차 안에 앉아 있어도 몸이 조금 으슬으슬한 것 같았다.

‘따뜻한 커피를 사 가도 될까?’



< [!] 커피를 구매해 출근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선우는 흔쾌히 전자를 선택했고, 차는 인근의 커피숍 앞에 정차했다. 익숙한 프랜차이즈 간판이 보였다. 녹색 강조선 안에 박스를 뒤집어쓴 사람의 모습이……. 잠깐, 박스?

유심히 살펴보니 커피숍 간판에는 ‘STARBOX’라는 상호가 적혀 있었다. 당황에 빠져 멀뚱멀뚱 간판을 바라보다가 곧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저작권 문제인가…….’

대강 납득한 선우는 차에서 내려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광공이랍시고 프랜차이즈 커피는 못 마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페 특유의 커피 향이 났다.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을 보았다. 아이스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먹기엔 날이 춥고, 시그니처 핫초코나 카페라떼를 시킬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선택지가 떠올랐다.



‣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



‣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핫초코 안 되나요?’



< 핫초코는 주문할 수 없는 메뉴입니다. 광공은 아메리카노에 시럽도 넣어서는 안 됩니다. 광공 수치가 4 하락합니다. >

< 현재 광공 수치는 79입니다. >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벌써 광공 수치가 21이나 깎였다. 이러다가는 하루 만에 광공 수치가 50 이하로 내려가 페널티의 정체가 뭔지 알게 생겼다. 곽선우는 착잡한 심정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대충 다른 사람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몇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거울로 본 광공의 얼굴은 눈길이 갈 만한 미남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선우는 이런 관심을 받아 본 경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런 티를 냈다가는 또 머릿속 목소리에게 ‘광공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광공 지수가 하락합니다.’ 같은 말을 듣게 될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A-732번 고객님 시그니처 핫초코 드릴게요.”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선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카운터를 쳐다보았다. 선우 자신은 못 먹는 시그니처 핫초코를 주문한 사람이 내심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핫초코를 받으러 다가오는 것은 흰 피부에 단정한 생김새를 가진 남자였다. 저런 인상이어야 광공 같은 제약 없이 마음대로 음료를 시켜 먹을 수 있는 걸까. 내심 헛웃음을 지은 선우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앗!”

외마디 비명에 고개를 돌려보니 핫초코를 손에 든 남자가 곽선우 쪽으로 넘어지고 있었다.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뜨거운 핫초코가 선우의 셔츠 위로 쏟아졌고, 쓰러질 뻔한 남자는 곽선우의 양팔을 꽉 붙들어 자빠지는 것을 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황급히 손을 뗀 남자가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약간 뜨겁긴 했지만 화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광공의 몸은 어떻게 된 건지 차가운 물을 맞아도 그다지 춥지 않고 뜨거운 커피를 맞아도 그다지 뜨겁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핫초코를 못 먹는데 내 옷은 핫초코를 먹을 수 있네.’

곽선우가 그렇게 한가한 생각을 하는 동안,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사과를 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탁비는 제가 물어낼게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남자의 사과에 비해 선우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광공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돈은 많아 보였기에 세탁비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행히 출근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대충 아무 곳에서나 새 셔츠를 사 입고, 더러워진 건 세탁소에 맡기면 되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선우가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 “그런 푼돈 필요없습니다. 불쾌하니 손이나 치워주시죠.”

‣ “하, 기분 더럽게 하는군. 눈을 어디 두고 다니는 겁니까.”

‣ (말없이 코웃음을 치고 무시한다.)




‘아니…… 커피 좀 쏟을 수도 있지…….’

눈앞에 다시 선택지 창이 떠오른 것이었다. 야박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당황한 그가 선택지를 무시하고 ‘괜찮습니다, 그냥 가세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딱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진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코웃음을 치고’라는 부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셋 중에서는 마지막 선택지가 제일 나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세 번째를 선택하자 선우의 입에서는 자동으로 코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쿨한 코웃음의 정석이었다.



< 광공 수치가 3 상승합니다. >

< 현재 광공 수치는 82입니다. >




광공다운 반응을 하면 광공 수치가 올라가기도 하는 걸까. 슬슬 돌아가는 꼴에 적응한 선우가 내심 한숨을 내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어서 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무시를 당하고도 선우의 상태가 마음에 걸리는지 제자리에서 서성였다.

“저, 정말 괜찮으세요? 화상이라도 입으신 건……. 원하신다면 옷도 물어낼게요.”



‣ “됐습니다. 시간 뺏지 말고 그만 가 보시죠.”

‣ “이 옷이 얼마짜리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필요 없습니다.”

‣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고 무시한다.)




선우는 착잡한 마음으로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이 옷이 얼마인지는 남의 몸에 들어온 곽선우 본인도 몰랐고, 한 번 더 무시하자니 너무 싸가지가 없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이놈의 광공은 기껏 커피에 얻어맞는 봉변을 당하고도 별말 없이 넘어가는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여 놓고도 말을 밉게 해 점수를 깎아 먹었다.

“됐습니다. 시간 뺏지 말고 그만 가 보시죠.”



< 광공 수치가 1 상승합니다. >

< 현재 광공 수치는 83입니다. >




광공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는지 남자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표정을 수습한 남자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선우에게 건넸다.

“연락 주세요. 제가 세탁비는 꼭 물어 드릴게요.”

“괜…….”

찮습니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또다시 입이 꾹 다물렸다. 선우는 별수 없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 서은재라는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서은재는 그러고도 두어 번 더 뒤를 돌아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그사이 옷을 대충 수습하던 선우는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왔다는 말에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그때 의아한 일이 벌어졌다.



<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습니다. >

< 어쩐지 서은재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

< 심박수가 상승합니다……. >




머릿속의 목소리가 자꾸만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던 곽선우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