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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시스템의 이상한 지문을 흘려듣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망가진 옷을 겨우 수습하고 출근하는 내내 머릿속 목소리는 자꾸만 감정을 강요했다.
< 서은재의 미소는 어쩐지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고……. >
< 서은재가 웃을 때 눈이 휘어지는 모양은……. >
< 서은재의 목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
서은재의 목소리나 미소는커녕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곽선우였지만 시스템의 염불을 듣고 있으려니 ‘그랬던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세뇌에 가까웠다. 시스템이 왜 이렇게 오버를 떠는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도, 곽선우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겨우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출근 시간이 이미 30분 정도 지난 뒤였다. 내심 시말서라도 쓰게 될까 봐 걱정하던 곽선우는 광공이 사실 일하는 회사의 대표 이사고, 그래서 아무 때나 출근해도 상사에게 혼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재벌 2세라더니 역시나 낙하산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로비에 들어선 그는 눈치가 보였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걸었다. 금세 모르는 사람이 따라와 말을 붙였다. 옆에 서서 오늘 일정을 알려 주는 걸 보니 대충 비서쯤 되는 것 같았다. 곽선우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고, 대충 ‘음.’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누가 오는 건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먼저 돌아보는 것은 광공의 품격에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십시오. >
이제 정말 별걸 다 시켰다. 다가오는 사람이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에 곽선우는 그냥 고개 돌리기를 포기하고 계속해서 멋진 척 앞을 쏘아보기만 했다. 지척에 다가온 상대에게서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웬일로 이렇게 출근이 늦으셨어요?”
어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말이었는데, 남자는 상당히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다시 시선을 돌려 보니 이번에는 고개가 원만하게 돌아갔다. 저쪽이 먼저 인사했으니 이제 고개를 돌려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곽선우의 옆에는 목소리만큼 인상이 좋고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초콜릿 같은 머리색에 상쾌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먼저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이쪽과 적당히 친분이 있는 사이이겠거니 했다.
‘그래, 좋은 아침.’이라고 해야 할지 ‘예,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곽선우의 눈앞에, 불시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 “웃는 꼴이 천박하기 짝이 없군.”
‣ “할 일이 없나 보지? 나한테 인사를 다 하는 걸 보니.”
‘아니…… 사람이 그냥 인사를 한 건데…….’
선택지의 상태에 당황한 곽선우는 황급히 다른 것이 없나 살펴봤지만, 무정한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걸까.
광공은 이 남자를 어지간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렇지 서글서글하게 인사한 상대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먼저 다가와 준 상대가 웃는 상에 성격이 좋아 보여서 곽선우는 더 미안해졌다.
그나마 최대한 싸가지 있는 대답이 뭘까? 고민 끝에 세 번째를 골랐다.
“할 짓이 없는 모양이지? 나한테 인사나 하고 있는 걸 보니.”
< 실로 광공다운 대사입니다. 광공 수치가 3 상승합니다. >
< 현재 광공 수치는 86입니다. >
아니, 선택지에 있던 것보다 말이 더 심하잖아! 곽선우는 방금 전보다도 더 당황했지만,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은커녕 싸늘한 미소만이 지어졌다. 그 와중에 감탄하듯 광공 수치를 올려 주는 시스템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곽선우는 차갑게 일그러지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삼켰다.
‘미안합니다! 진심이 아니에요!’
< 광공답지 않은 속마음입니다. 광공 수치가 3 하락합니다. >
< 현재 광공 수치는 83입니다. >
기껏 올린 광공 수치가 바로 떨어졌다. 이제 어이가 없는 걸 넘어 거의 해탈한 선우가 무심코 한숨을 뱉었다. 다른 말은 죄다 입이 막힌 듯 나오지 않더니 한숨은 잘만 쉬어졌다. 그러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더 차가워졌다.
“하…… 그래, 언제는 안 이러셨다고.”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일갈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곽선우를 지나쳐 갔다. 이쯤 되니 곽선우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러다간 정말 세상 모든 사람과 척을 지게 생겼다. 광공이 되기 전에도 딱히 주위에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친한 사람이 적은 것과 모든 사람과 사이가 나쁜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길 가다 칼을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광공의 처지도 이해가 가긴 했다.
‘평생 시커먼 집에서 차가운 물로만 샤워하고,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살았다면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어쨌든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쉰 곽선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때 머릿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 [!] 인물 정보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
< 예 | 아니오 >
“예.”
“무슨 일이십니까, 이사님?”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거란 생각에 흔쾌히 답했는데, 무심코 대답을 입 밖으로 내 버린 것이었다. 옆에 선 비서가 곧장 물어 왔다. 허공에 대고 떠든 꼴이 된 곽선우는 민망함을 숨기며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다행인지 뭔지 몰라도 광공 수치는 깎이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인물 정보 창이 떠올랐다.
< 인물 정보 >
곽선우 ‣ 열람하기
서은재 ‣ 열람하기
곽승현 ‣ 열람하기
「곽선우」
원작 메인공 | 키워드: 광공, 재벌공, 미인공, 집착공, 냉혈공
신이 내린 잘생긴 얼굴과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 인간미 없는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잘 웃지 않는다. 수완이 좋은 일벌레로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 서은재를 만나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워 간다.
「서은재」
원작 메인수 | 키워드: 평범수, 다정수, 명랑수, 회사원수
언뜻 평범하지만 자세히 보면 단정하고 청아한 외모의 소유자. 곽선우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친 뒤로, 사람을 믿지 않는 곽선우에게 다정한 관심을 보이며 그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곽승현」
원작 서브공 | 키워드: 능글공, 한량공, 다정공, 짠내공
곽선우의 사촌 동생이지만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정받지 못해 일부러 한량 행세를 하고 다닌다. 곽선우에게 열등감을 느껴 그가 관심을 보이는 서은재에게도 흥미를 갖지만, 점차 진심으로 서은재를 대하게 된다.
‘솔직히…… 뭐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모두 읽은 이후에도 곽선우에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아까 만난 서은재가 광공의 짝이라서 시스템이 그토록 감정을 강요한 모양이었다.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회사에 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보아하니 인사성이 밝은 줄 알았던 남자가 곽승현인 모양이었다. 꽤나 격없이 말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친척이라서 그랬던 걸까.
단순히 광공의 성격이 나빠서 좋은 사람에게 무작정 화를 내는 줄 알았는데 나름 얽힌 사연도 있는 것 같았다. 사촌 동생임에도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아마 출생의 비밀 쪽일 것이다. 게다가 연적이 될 운명이었다고 하니 적대적인 태도가 납득은 갔다.
하지만 시스템의 세뇌와 달리 서은재에게 별 관심이 없는 곽선우는 광공의 사회성이 걱정되기만 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곽선우는 사무실의 규모에 한 번, 멋들어진 ‘대표 이사 곽선우’라는 명패에 한 번, 그리고 집과 똑같이 흑백으로만 가득한 사무실 인테리어에 또 한 번, 총 세 번을 놀랐다.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게임 속인데도 생각보다 일의 내용이 복잡했던 것이다. 대표 이사라는 직함답게 그의 선에서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 이걸 멋대로 처리해도 괜찮은 걸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중공업 계열사의 인도 거래처 변동? 도장 찍어도 되는 거 맞아?’
처음에는 모든 서류를 꼼꼼히 읽으려 했는데, 갈수록 피곤해졌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광공이 격분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곽선우가 이 몸으로 사고를 쳐 봤자 몸 주인인 광공은 아무 짓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던 중이었다. 선우는 어느 순간 시스템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 서류들 틈에 눈에 띄는 내용이 보입니다. >
< 곽상철 전무의 비리 정황이 의심됩니다. >
밥도 못 먹고 단 커피도 못 마신 곽선우는 사실 게임 속 인물이 탈세를 하든 말든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충 도장을 찍고 넘기려 해도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시스템의 강제력이 또 시작된 모양이었다.
‘하…….’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 서류를 꺼내 살펴보았다. 곽상철 전무라는 사람이 회삿돈을 빼돌리기 위해 불필요한 재단을 세운 모양이었다. 졸지에 재벌 비리에까지 발을 담그게 된 곽선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시스템은 착실하게 그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
“후…….”
곽선우는 강제로 한숨을 뱉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강제로 비서를 불렀다.
“이 비서.”
“예,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대충 일 처리라도 시키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그는 시스템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비서가 책상 앞까지 다가오자, 상상을 초월하는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하……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하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미쳤어!’
곽선우는 내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한숨 소리 빼고 다 똑같은 선택지 세 개가 그를 비웃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침도 못 먹고 빈속에 쓴 커피만 들이마신 뒤, 그나마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선우에게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소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티려는데 시스템이 자꾸만 재촉을 했다.
‣ “하……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하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친절한 리플레이에 이를 악물고, 곽선우가 간신히 말했다.
“하……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기운 없이 늘어지는 목소리는 광공답지 않습니다. 광공 수치가 1 하락합니다. >
‘됐다……. 이러다 굶어 죽고 말지.’
자포자기한 속마음이 갈 곳을 잃어버렸다. 곽선우는 슬픈 심정으로 서류들 틈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스템의 이상한 지문을 흘려듣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망가진 옷을 겨우 수습하고 출근하는 내내 머릿속 목소리는 자꾸만 감정을 강요했다.
< 서은재가 웃을 때 눈이 휘어지는 모양은……. >
< 서은재의 목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
서은재의 목소리나 미소는커녕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곽선우였지만 시스템의 염불을 듣고 있으려니 ‘그랬던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세뇌에 가까웠다. 시스템이 왜 이렇게 오버를 떠는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도, 곽선우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겨우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출근 시간이 이미 30분 정도 지난 뒤였다. 내심 시말서라도 쓰게 될까 봐 걱정하던 곽선우는 광공이 사실 일하는 회사의 대표 이사고, 그래서 아무 때나 출근해도 상사에게 혼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재벌 2세라더니 역시나 낙하산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로비에 들어선 그는 눈치가 보였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걸었다. 금세 모르는 사람이 따라와 말을 붙였다. 옆에 서서 오늘 일정을 알려 주는 걸 보니 대충 비서쯤 되는 것 같았다. 곽선우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고, 대충 ‘음.’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누가 오는 건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말 별걸 다 시켰다. 다가오는 사람이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에 곽선우는 그냥 고개 돌리기를 포기하고 계속해서 멋진 척 앞을 쏘아보기만 했다. 지척에 다가온 상대에게서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웬일로 이렇게 출근이 늦으셨어요?”
어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말이었는데, 남자는 상당히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다시 시선을 돌려 보니 이번에는 고개가 원만하게 돌아갔다. 저쪽이 먼저 인사했으니 이제 고개를 돌려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곽선우의 옆에는 목소리만큼 인상이 좋고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초콜릿 같은 머리색에 상쾌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먼저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이쪽과 적당히 친분이 있는 사이이겠거니 했다.
‘그래, 좋은 아침.’이라고 해야 할지 ‘예,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곽선우의 눈앞에, 불시에 선택지가 나타났다.
‣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 “웃는 꼴이 천박하기 짝이 없군.”
‣ “할 일이 없나 보지? 나한테 인사를 다 하는 걸 보니.”
‘아니…… 사람이 그냥 인사를 한 건데…….’
선택지의 상태에 당황한 곽선우는 황급히 다른 것이 없나 살펴봤지만, 무정한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걸까.
광공은 이 남자를 어지간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렇지 서글서글하게 인사한 상대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먼저 다가와 준 상대가 웃는 상에 성격이 좋아 보여서 곽선우는 더 미안해졌다.
그나마 최대한 싸가지 있는 대답이 뭘까? 고민 끝에 세 번째를 골랐다.
“할 짓이 없는 모양이지? 나한테 인사나 하고 있는 걸 보니.”
< 현재 광공 수치는 86입니다. >
아니, 선택지에 있던 것보다 말이 더 심하잖아! 곽선우는 방금 전보다도 더 당황했지만,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은커녕 싸늘한 미소만이 지어졌다. 그 와중에 감탄하듯 광공 수치를 올려 주는 시스템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곽선우는 차갑게 일그러지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삼켰다.
‘미안합니다! 진심이 아니에요!’
< 현재 광공 수치는 83입니다. >
기껏 올린 광공 수치가 바로 떨어졌다. 이제 어이가 없는 걸 넘어 거의 해탈한 선우가 무심코 한숨을 뱉었다. 다른 말은 죄다 입이 막힌 듯 나오지 않더니 한숨은 잘만 쉬어졌다. 그러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더 차가워졌다.
“하…… 그래, 언제는 안 이러셨다고.”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일갈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곽선우를 지나쳐 갔다. 이쯤 되니 곽선우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러다간 정말 세상 모든 사람과 척을 지게 생겼다. 광공이 되기 전에도 딱히 주위에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친한 사람이 적은 것과 모든 사람과 사이가 나쁜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길 가다 칼을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광공의 처지도 이해가 가긴 했다.
‘평생 시커먼 집에서 차가운 물로만 샤워하고,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살았다면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어쨌든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쉰 곽선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때 머릿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 예 | 아니오 >
“예.”
“무슨 일이십니까, 이사님?”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거란 생각에 흔쾌히 답했는데, 무심코 대답을 입 밖으로 내 버린 것이었다. 옆에 선 비서가 곧장 물어 왔다. 허공에 대고 떠든 꼴이 된 곽선우는 민망함을 숨기며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다행인지 뭔지 몰라도 광공 수치는 깎이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인물 정보 창이 떠올랐다.
곽선우 ‣ 열람하기
서은재 ‣ 열람하기
곽승현 ‣ 열람하기
「곽선우」
원작 메인공 | 키워드: 광공, 재벌공, 미인공, 집착공, 냉혈공
신이 내린 잘생긴 얼굴과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 인간미 없는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잘 웃지 않는다. 수완이 좋은 일벌레로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 서은재를 만나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워 간다.
「서은재」
원작 메인수 | 키워드: 평범수, 다정수, 명랑수, 회사원수
언뜻 평범하지만 자세히 보면 단정하고 청아한 외모의 소유자. 곽선우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친 뒤로, 사람을 믿지 않는 곽선우에게 다정한 관심을 보이며 그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곽승현」
원작 서브공 | 키워드: 능글공, 한량공, 다정공, 짠내공
곽선우의 사촌 동생이지만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정받지 못해 일부러 한량 행세를 하고 다닌다. 곽선우에게 열등감을 느껴 그가 관심을 보이는 서은재에게도 흥미를 갖지만, 점차 진심으로 서은재를 대하게 된다.
‘솔직히…… 뭐라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모두 읽은 이후에도 곽선우에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아까 만난 서은재가 광공의 짝이라서 시스템이 그토록 감정을 강요한 모양이었다.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회사에 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보아하니 인사성이 밝은 줄 알았던 남자가 곽승현인 모양이었다. 꽤나 격없이 말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친척이라서 그랬던 걸까.
단순히 광공의 성격이 나빠서 좋은 사람에게 무작정 화를 내는 줄 알았는데 나름 얽힌 사연도 있는 것 같았다. 사촌 동생임에도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아마 출생의 비밀 쪽일 것이다. 게다가 연적이 될 운명이었다고 하니 적대적인 태도가 납득은 갔다.
하지만 시스템의 세뇌와 달리 서은재에게 별 관심이 없는 곽선우는 광공의 사회성이 걱정되기만 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곽선우는 사무실의 규모에 한 번, 멋들어진 ‘대표 이사 곽선우’라는 명패에 한 번, 그리고 집과 똑같이 흑백으로만 가득한 사무실 인테리어에 또 한 번, 총 세 번을 놀랐다.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게임 속인데도 생각보다 일의 내용이 복잡했던 것이다. 대표 이사라는 직함답게 그의 선에서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 이걸 멋대로 처리해도 괜찮은 걸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중공업 계열사의 인도 거래처 변동? 도장 찍어도 되는 거 맞아?’
처음에는 모든 서류를 꼼꼼히 읽으려 했는데, 갈수록 피곤해졌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인 광공이 격분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곽선우가 이 몸으로 사고를 쳐 봤자 몸 주인인 광공은 아무 짓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던 중이었다. 선우는 어느 순간 시스템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 곽상철 전무의 비리 정황이 의심됩니다. >
밥도 못 먹고 단 커피도 못 마신 곽선우는 사실 게임 속 인물이 탈세를 하든 말든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충 도장을 찍고 넘기려 해도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시스템의 강제력이 또 시작된 모양이었다.
‘하…….’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 서류를 꺼내 살펴보았다. 곽상철 전무라는 사람이 회삿돈을 빼돌리기 위해 불필요한 재단을 세운 모양이었다. 졸지에 재벌 비리에까지 발을 담그게 된 곽선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시스템은 착실하게 그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후…….”
곽선우는 강제로 한숨을 뱉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강제로 비서를 불렀다.
“이 비서.”
“예, 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대충 일 처리라도 시키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그는 시스템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비서가 책상 앞까지 다가오자, 상상을 초월하는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 “하……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하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미쳤어!’
곽선우는 내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한숨 소리 빼고 다 똑같은 선택지 세 개가 그를 비웃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침도 못 먹고 빈속에 쓴 커피만 들이마신 뒤, 그나마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선우에게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소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티려는데 시스템이 자꾸만 재촉을 했다.
‣ “하……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 “하아,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친절한 리플레이에 이를 악물고, 곽선우가 간신히 말했다.
“하…… 오늘 점심 예약은…… 취소하세요…….”
‘됐다……. 이러다 굶어 죽고 말지.’
자포자기한 속마음이 갈 곳을 잃어버렸다. 곽선우는 슬픈 심정으로 서류들 틈에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