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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달포 전. 운악산 금성사.

너른 처마 아래에 선 두 사람이 장대처럼 쏟아지는 굵은 달구비도 모자라 불안하게 우르릉거리기까지 하는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다. 한 사람은 그 절의 주지요, 한 사람은 곱게 쪽을 지고 비단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었다.

“귀인께서 납신 줄도 모르고 가을비가 이리 눈치 없이 쏟아지니 소승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아닙니다, 주지 스님. 날을 잘못 택한 제 잘못이지요.”

“잘못이라니요, 요즘 불공을 드리러 자주 오시니 이런 날도 만나게 되는 게지요.”

주지가 면구스러운 웃음을 지었지만 중전 윤씨는 그저 말없이 합장을 했다. 그녀가 절에 자주 오는 것이 주지 스님께는 반가운 일이겠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절을 찾은 이유는 겉으로야 궐내의 안녕을 비는 명목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불안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명부의 수장이 되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부처님의 힘이라도 빌고자 하는 것뿐. 그때 중궁전 상궁인 서 상궁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아뢨다.

“마마, 비가 오늘 중으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합니다.”

“저런.”

주지가 끼어들었다.

“예서 하룻밤을 거하시지요. 누추하지만 성심을 다해 마마를 모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 서 상궁도 중전도 난색을 표했다. 임금의 여인이 궐 밖에서 밤을 보낸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주상 전하와 지금껏 합궁을 한 적 없는 윤씨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니, 산을 내려가다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리거나, 혹은 벼락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나서야 했다.

비 때문에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워, 조금 그치기를 기다리다 괜한 시간만 낭비한 꼴이다. 날씨 때문에 날도 일찍 저물 터인데.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서 상궁이 빠르게 아뢴다.

“지금 출발하면 어둡기 전에 산을 내려갈 수 있다고는 합니다. 자칫 길이 무너져 끊긴 곳에서는 가마에서 내리셔야 할지 모르지만―”

중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네. 가마꾼들이 고생하겠구먼. 서둘러 출발하세.”



좁은 산길을 올라와야 하니 애초에 연이 아닌 육인교를 타고 왔었다. 장정 여섯이 드는 가마라 사가에서 타던 사인교보다 훨씬 안정적이라 여겼는데. 미끄러운 빗길에 내려가자니 역시나 덜컹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마꾼들이 번갈아 가며 발이 미끄러진 탓이었다.

중전 윤씨도 손마디가 하얗도록 손잡이를 움켜쥐고 용을 쓰던 와중. 밖에서 갑자기 몇몇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발을 헛디딘 소리와는 달랐다.

그리고 그 비명은 점점 수를 더했고 소리는 점점 커졌다. 궁인들이며 장정들까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밖에 무슨 일인가?”

윤씨의 하문은 비명 소리에 묻혔다. 놀라서 작은 창을 열어 보려는 순간, 그녀는 가마 구석으로 밀쳐지듯 쑤셔 박혔다. 가마가 땅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음 순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계곡이며 산허리를 울렸다. 그 울림이 어찌나 크고 괴기스러운지 오금이 다 저렸다. 윤씨는 대번에 무슨 소리인 줄 알아들었다. 호랑이의 포효. 바로 호환을 당할 참인 것이다.

가마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이리저리 멀어지는 것이 서로 도망가기 바쁜 모양이었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그때까지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가마 안의 중전이 안중에 들어올 리 없다. 목숨은 하나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가을이지만 윤씨의 이마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



햇살과 나른함만이 가득한 한 정자. 그리고 그 가운데에 드러누운 한 사내만이 세상 전부인 것 같은 공간. 탁 트였지만 고요한 그곳에 갑자기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러자 사내의 눈이 떠졌다. 드러난 검푸른 눈동자는 무심했지만 일순 가늘어졌다.

굳이 내려다보지 않아도 저 아래의 굴이 빈 줄은 알겠다. 낮잠을 자던 호랑이 놈이 슬슬 배가 고파진 게지.

몸을 일으켜 앉은 사내가 푸른빛이 돌 만큼 검은 머리칼을 걷어 냈다. 그러자, 수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하지만 눈동자에 담긴 것은 여전히 무심함뿐.

정자 난간에 팔을 기댔다. 난간 너머는 깎아지른 절벽. 저 아래 계곡이며 산을 감싼 뿌연 물기가 눈에 들어왔다. 낮부터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여전한 탓에 안개처럼 보이는 것이다. 고요하고 햇살 가득한 이곳과 달리, 온갖 고난과 악다구니가 들끓는 저곳.

다시 긴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사내가 표정만큼이나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날씨에 산 따위를 올라오니 호랑이 먹이가 되지.”

말은 매정한 데다가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다분했다. 호랑이 놈이 갔으니 그도 움직여야 하는 탓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인간의 혼백을 그냥 흩어지게 두었다가는 원귀가 되고 만다. 그것들은 구천을 떠도는 악귀가 되어 또다시 누군가를 괴롭히고. 그렇게 죽은 자는 원귀가 되어 괴상한 것들이 지천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 혼백을 거두는 것이 바로 사내, 호랑이 귀신 창(倀)이 할 일. 그럼으로써 그의 수명 또한 늘어난다. 자신이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는 없어도 제가 살아가야 할 방식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렇다고 자다 말고 일어나, 질척한 안개를 뚫고 인간의 혼백을 거두러 다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귀찮은데 가지 말까? 악귀 따위가 두려운 것도 아니고 수명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금껏 쌓아 둔 수명만으로도 저 아래 세상이 백 번쯤 뒤집히고 바뀔 정도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때 인간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세다 보니,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귀찮아도 일어나야 하는 연유가 생긴 것이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짐승이 폭주할 테고 그는 감히 짐승 따위가 자신의 명을 거역하는 꼴을 보아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2. 호랑이 귀신



이윽고 일어선 사내는 호리호리했지만 키는 육척이 훌쩍 넘었다. 그 몸을 감싼 것도 역시나 검은 옷.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을 다시 한 번 쓸어 넘긴 창은 정자 너머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 높이에서 뛰어내리다니. 보통 사람 같으면 절명하고 말겠지만 그는 마치 깃털처럼 절벽 아래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 바닥에 발이 닿지도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고. 역시나 비는 그의 검은 머리칼이나 옷깃에 범접하지 못했다.

죽은 인간의 혼백과 호랑이 정도나 상대해 본 창은 그러한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지는 못했다.

비와 눈, 추위와 더위 같은 자연이, 그리고 죽음과 질병 등이 해악을 끼치지 못하는 것 말고도 얼마나 더 큰 힘이 제 안에 도사리고 있는지, 오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그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고 천적을 만난 적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삶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면서 그는 그냥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욱 무심해지고 데면데면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를 걸어가는 동안 사람들이 도망가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그들의 숨이 끊어지는 단말마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군. 호랑이 놈이 이제 늙어서 인간 하나 잡는 것이 벅찬 건가? 다른 호랑이를 키워야 하나? 하며 걸음을 옮기던 와중 그제야 놈이 눈에 들어왔다.

한데 괴이쩍게도 길에서 벗어난 지점에 뒹굴고 있는 가마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운이 부족해 가마를 부수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제야 창의 기척을 눈치챈 짐승이 돌아보는데 그 낯짝에 불만스러움이 가득하다. 아직 배를 채우기 전임은 분명한 것 같은데, 왜 저리 늦장을 부리는 게지?

귀찮지만 물어봐야겠다.

“게서 뭐 하누?”

공기가 울리며 그의 뜻이 전달되었고 놈도 털이 부숭부숭한 입가를 씰룩거리며 답을 전해 왔다.

“배고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