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야구의 정석 (3)



순식간에 커다랗고 아름다운 야구장이 생겼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도 생겼다.

그것도 무려 둘이나.

“그러니까… 이게 야구장이라는 거지?”

“네, 그렇다니까요.”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이냐?”

“어… 훈련도 하지만, 시합도 해요. 사람이 많을 때는 저 관중석이 꽉 차기도 한대요.”

“좋아, 왠지 기운이 나는군. 어서 진도를 나가도록 하자.”

환경이 바뀌자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공자였다.



그렇게 둘만의 공간에 야구장이 생기고 1주일의 시간이 지난 현재.

그동안 잠들 때마다 이곳을 찾아온 준혁은 이공자에게 열심히 비급을 해석해 주며 함께 내용을 습득했다.

야구의 기초 룰을 배우고 용어까지 완벽히 외우는 데는 3일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다음 파트에서 문제가 생겨 버렸다.

다음 생성된 파트는 야구를 위한 스트레칭.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일단 이공자는 준혁의 설명과 그림으로 완벽하게 스트레칭을 습득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뭐, 무림인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숙지하고 클리어하면 그다음 파트가 활성화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깨달은 한 가지 결론!

바로 준혁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준혁과 이공자가 동시에 습득해야 하는 것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다.

문제는 준혁에게 쉽게 스트레칭을 따라 할 만한 유연성이나 체력이 없다는 것.

한마디로 어설펐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야구 룰과 용어, 게임 방식을 배울 때부터 슬슬 징조가 보이기는 했다.

완벽히 마스터를 하고 해당 파트가 불에 타 버린 순간부터 이공자가 이상해진 것이다.

다행히 몸을 쓰는 스트레칭 부분은 잘 넘기나 싶었는데, 준혁이 버벅대며 정체가 되는 순간, 증상이 심해져 버렸다.

“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었나? 나의 마지막 대역전 비급이 이런 것이었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혼자 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한마디로 멘탈이 나간 것이었다.

준혁은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스트레칭을 계속해 나갔다.

어차피 잠이 깰 때까지는 따로 할 일도 없고, 그 와중에 이공자는 계속 정신을 못 차렸다.

물론 준혁의 스트레칭은 최악이었다.



오늘도 꿈속의 야구장으로 소환된 준혁은 먼저 주위를 둘러봤다.

완벽한 상태의 그라운드와 넓은 관중석.

1, 3루 쪽에 마련된 덕아웃과 펜스 뒤의 불펜까지 완벽 구현이 되어 있고, 그 안에는 각종 장비들도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 자세히는 살펴보지 않았지만, 각종 훈련 장비들까지 갖춰져 있는 것 같았다.

야구장 위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덤이었다.

그리고 1루 쪽 덕아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공자.

고급스런 푸른 장포는 땅에 끌려 먼지가 가득했다.

“…야구가 뭐지? 야구 몰라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이 이공자가 앉아 있는 앞으로 슬쩍 걸어갔다.

“어? ‘야구 몰라요’라는 그 말, 야구에 대해 잘 알거나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요.”

“…….”

은근슬쩍 말을 걸어 보는 준혁이지만, 역시나 이공자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머쓱해진 준혁은 이내 비급을 펴고 스트레칭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친절하게 해야 할 동작들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아으, 으, 으헙!”

준혁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무려 10여 분씩이나 스트레칭을 하던 준혁이 끝내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대체. 난 운동이 싫은데.”

꿈이라 그런지 현실보다는 잘 움직여지기는 했다.

그래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야, 꼬마. 너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결국 보다 못한 이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이공자는 처음 준혁이 나타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의욕도 없고 귀찮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의욕 없이 스트레칭을 하는 준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순간, 참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아니, 저게 지금 뭐 하는 거야? 몸을 저렇게 쓰다니. 아니, 그전에 저 허약해 빠진 몸뚱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모른 체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삼 일째가 되는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가문에서 훈련 교두를 맡은 이공자로서는 그런 한심한 꼴을 지켜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이건 뭐 야구를 떠나서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도 힘들어하니.

급한 성격과 길게 생각하지 않는 습성이 결국 이공자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리로 와 봐라, 꼬마.”

준혁은 이공자의 부름에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처럼 우울하게 앉아 있더니, 언제 다시 살아났나 싶었다.

특히 이글거리는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손.”

이공자가 대뜸 말하자, 준혁은 이공자의 거대한 손에 자신의 손끝을 살포시 올렸다.

마치 강아지처럼.

“야! 사내놈이 손 올리는 자세가 이게 뭐냐?”

그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평을 터뜨린 이공자가 강하게 준혁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맥을 느끼려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준혁은 진지한 이공자의 모습에서 무림 고수의 향기를 느꼈다.

“아저씨, 지금 왠지 무림의…….”

“쉿! 말하지 마라.”

준혁을 제지한 이공자는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준혁의 맥을 확인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이공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왜요? 많이 안 좋은가요?”

“흠, 살펴보니 원래 허약한 체질이군.”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은 많이 들었다.

“…그리고요?”

준혁은 고개를 들어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이공자를 바라봤다.

그 표정에서 한심함을 느낀 것일까?

이공자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했다.

“내가 의원도 아니고, 무엇을 바란 게냐? 됐으니까, 일단 내 호흡법 하나를 알려 주마.”

“네? 호흡법이요?”

“그래. 우리 가문의 비전은 아니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몸도 좀 손봐야겠구나. 아마 이것을 다 익히고 나면 지금보다는 훨씬 건강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 어?”

준혁은 이공자의 말에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건강해질 수 있다니.

그동안 얼마나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던가.

잠시만 달려도 숨이 차고, 심하면 며칠을 앓아누워야 했는데… 그런 저주 같은 천형을 고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고, 고맙습니다, 이공자님.”

준혁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 저도 모르게 입에서 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됐고, 너 하는 꼴을 보니 답답해서 그런다. 그래야 비급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고.”

“네, 네. 감사합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부터 일러 주는 호흡법을 외우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하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사부님!”

“응?”

“호흡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사부님이 맞지요. 아닌가요?”

반짝이는 눈으로 이공자에게 말을 하는 준혁.

이공자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을 느끼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큼, 큼.”

교두와 사부.

그 느낌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사실 이공자가 맡은 훈련 교두는 일종의 한직이었다.

그것도 가문의 주요 전력에 대한 훈련 교두가 아니라 이제 막 입문하거나 낙오자들을 위한 훈련 교두였다.

그 모든 것은 대공자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마련한 계책이었다.



―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라.



그것은 대공자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철저한 안배였다.

배다른 형제이기에 다른 집안에서와 같은 우애도 없고, 꽤 나이 차이가 났기에 상황을 뒤집기엔 이미 늦은 뒤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손발이 묶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그나마 직계였기에 무공은 어찌어찌 배웠지만, 그것이 이공자가 가질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기에 비급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절실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뒤엎을 만한 비장의 수.

물론 그 결과로 인해 지금 이곳에 갇히게 된 셈이지만.

무력감과 좌절, 허탈함.

비급의 해석이 지체되자 며칠간 이공자를 사로잡은 감정들이다.

그냥 포기하면 편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한창 고뇌에 빠져 있는데, 눈앞에 있는 꼬마가 거슬려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말았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기에는 너무 답답하고 눈에 밟혀서.

몸이 약한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냥 신경 쓰지 않았을 뿐.

그런데… 지금 그 꼬마가 자신을 사부라 부르고 있다.

“흠, 흠, 사부라…….”

“네, 이제 싸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좋아, 그럼 앉아 보거라. 당장 호흡법부터 시작하자.”

“넵! 싸부님!”

두 사람은 그렇게 자리에 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비록 구배지례도 없고, 서로 이름을 묻는 것도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사제지간이 되었다.

뭐, 아직 어린 준혁과 언제까지 이곳에 있게 될지 모르는 이공자에게는 서로에 대해 알아 갈 많은 시간이 남아 있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렇게 두 사제의 야구 마스터가 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시간이 흘러 준혁이 중학교에 입학을 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들, 교복 다 입었니? 얼른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부엌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준혁은 벽에 붙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좋아, 오늘도 잘생겼네.”

복장 점검을 마무리하고 방에서 나오자, 아버지는 벌써 식탁에 앉아 계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그래. 준혁아, 아침 먹자.”

평상시 반말을 쓰는 준혁이지만, 인사만큼은 꼭 존댓말로 했다.

그 모습이 대견스러운지 아버지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벌써 중학생이라니, 이제 다 컸네.”

남일권.

외국계 회사의 과장인 그는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제법 능력 있는 남자였다.

일권은 어리게만 보이던 준혁이 벌써 중학교에 들어간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항상 허약해서 걱정을 끼치던 아들이 언젠가부터 몸도 굵어지고 튼튼해지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일권이 부지런히 밥을 입에 넣고 있는 준혁을 보며 물었다.

“학교는 다닐 만해?”

“아빠는 회사에 다닐 만해서 다녀?”

“풉! 뭐?”

“나도 똑같아. 그냥 다니는 거지. 물론 공부를 열심히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때, 엄마가 식탁에 국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준혁이가 공부는 잘하지.”

“흠, 이 아빠는 말이야, 공부도 좋지만 준혁이가 운동 같은 것도 좀 하면 좋겠어. 이제 준혁이도 어느 정도 컸으니 아빠랑 조기 축구라도 같이 나가 볼까?”

“이 사람이 미쳤어? 다 큰 어른들 뛰는 데 준혁이가 어떻게 나가?”

일권의 말에 엄마가 기겁을 하며 타박을 늘어놓았다.

자칫하면 들고 있던 젓가락을 집어 던질 기세다.

“나도 축구는 별로. 야구면 몰라도.”

“야구는 좋다고? 야구를 할 줄은 알아?”

전혀 예상치 못한 준혁의 대답에 일권이 놀라며 물었다.

준혁의 입에서 운동에 관한 말이 나오다니, 준혁이 태어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실 아들이 태어나면 얼른 키워서 같이 운동하는 것이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꿈이었는데, 준혁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포기를 하고 살아왔다.

물론 몸이 약한 준혁을 그만큼 더 사랑하고 챙겼지만, 마음 한 켠에선 항상 아쉬움이 있었다.

아버지의 로망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준혁의 입에서 야구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하아, 야구라…….”

제 입으로 말을 꺼내 놓고 문득 한숨을 내쉬는 준혁.

매일 합니다. 밤마다 꿈에서. 지겹도록. 미친 사부와.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지만, 결국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축구는 몰라서 싫은데, 야구는 좀 알거든.”

“그래? 아빠는 그것도 몰랐네.”

준혁의 말을 들은 일권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엄마가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사고 치지 마라, 남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