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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본격적인 수련 (1)
“아니, 여보. 애 앞에서 남일권이라니. 거, 너무한 거 아니오?”
“그럼 사고를 치지 말든가.”
“아니, 아직 아무 사고도 치지 않았습니다만.”
엄마는 잠시 일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야. 그 표정은 3일 내에 반드시 사고 칠 얼굴이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어?”
“…응.”
“응?”
“…네, 미래 누나.”
부릅뜬 유미래의 눈빛에 소심하게 움츠러드는 일권.
사실 두 사람은 네 살 차이 나는 연상 연하 커플이다.
젊은 시절, 미래를 보고 한눈에 반한 일권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로 나름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가끔씩 일권이 사고를 치는 경우가 있어 미래가 지금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는 것이었다.
물론 준혁은 자주 보던 일이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준혁은 아옹다옹 거리는 부모님을 놔두고 방에 들어가 책가방을 메고 나왔다.
“그럼 학교 다녀올게. 동네 창피하니까 그만 좀 싸우고.”
그러자 일권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들, 그럼 혹시 야구부 안 할래?”
“아니, 진짜 이 인간이? 공부 잘하는 애 놔두고 갑자기 야구부는 무슨 야구부야? 준혁이는 그런 거 안 할 거지?”
다시 2차전이 시작되려는 분위기에 준혁이 얼른 대답했다.
“엄마, 우리 학교에 야구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시 존댓말로 인사한 준혁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에휴~”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몇 가지 사항들을 전달했다.
“자, 그럼 여기까지. 반장.”
“차렷, 경례.”
“그래, 고생들 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자, 아이들도 하나둘 하교 준비를 했다.
준혁도 가방을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혁아, 축구하고 갈래?”
그때,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준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철승이던가.
축구라니…….
사실 별로 당기진 않지만, 누가 이렇게 운동하자고 제안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중학교에 와서 처음 알게 된 터라 준혁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아직 몰라서 그런 듯했다.
일단 안 한다고 대답하려는 순간에 누가 끼어들었다.
“야, 준혁이는 몸이 약해서 운동 같은 거 안 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였다.
그러자 철승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준혁을 훑어봤다.
“그래? 그렇게 약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 말에 끼어든 아이도 준혁을 흘끔 살폈다.
“흠, 중학교 들어오면서 키는 좀 컸네? 근데 몸이 약해서 초등학교 때는 체육 같은 거 거의 안 했어. 암튼 우린 얼른 가자.”
“할 수 없지, 뭐. 그럼 나머지 애들을 어디서 구하나?”
그렇게 사라지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들끼리 떠들다가 가네.”
사실 축구를 할 생각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준혁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벗어났다.
운동장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축구나 농구 등을 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사실 중학생이라면 에너지가 넘쳐서 주체를 하지 못하는 나이였다.
그러니 저렇게 남아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겠지.
학교에서 준혁의 집까지는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걸린다.
버스를 타기엔 살짝 애매한 감이 있어 준혁은 운동 삼아 걸어 다니기로 했다.
무엇보다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 한몫했다.
아마 예전이라면 고민도 없이 버스를 탔을 것이다.
“자, 오늘은 어느 길로 가 볼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어넘길 이야기지만, 준혁은 등하교 시간에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평소와 다른 길로 한 번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산 준혁은 느긋하게 주위를 구경하며 유유자적 걷기 시작했다.
마침 날씨도 선선하니 상쾌하고 좋았다.
어느 정도 걷던 준혁의 눈에 철조망이 둘러 쳐진 공터가 보였다.
“저게 뭐지?”
철조망에 붙어 확인해 보니, 누런 흙으로 덮여 있는 공터였다.
그리고 한쪽에서부터 하얀 선 두 개가 직각으로 맞닿아 쭉 뻗어 있었다.
“어? 저 모양은…….”
왠지 익숙한 두 개의 선.
베이스가 있어야 할 위치엔 아무것도 없지만, 야구장이 분명했다.
“야구장인가 보네. 그런데 시설이…….”
영 꽝이었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작은 창고 같은 건물 하나와 좌우 덕아웃 위치에 있는 의자가 전부였다.
그나마 지붕 같은 것이 태양을 가려 주기는 했다.
“상태가 별로네.”
꿈속의 야구장에 너무 익숙해진 준혁이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공터의 모습은 실망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정도 시설이면 없는 것보다 백배 낫고, 사설 야구장이나 훈련장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대단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준혁이 그런 현실을 알 수는 없었다.
“뭐, 이런 데서 야구하는 사람들은 잘 못 하는 사람들이겠네.”
준혁은 사람도 없이 덩그라니 비어 있는 야구장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집에나 가자. 그래도 이쪽 길은 야구장이 있다는 게 반갑긴 하네.”
준혁은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
“왔느냐, 제자야.”
사부 놀이에 흠뻑 빠져 버린 이공자는 준혁이 나타나자마자 득달같이 다가왔다.
“넵, 싸부.”
장난스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는 준혁.
두 사람은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름 친해졌다.
야구의 진정한 실체를 어느 정도 깨달으며 충격을 받은 이공자도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포기를 한 건지, 야구에 흥미를 느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야구 교본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 일단 스트레칭부터 하자.”
“네, 싸부.”
준혁이 씩씩하게 대답하면서 덕아웃에 잠옷을 벗어 놓고 연습용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몇 가지 색상이 있지만, 이공자가 골라 준 것은 하늘색 유니폼이었다.
물론 이공자도 똑같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스트레칭은 간단해 보였지만 쉽지는 않았다.
이공자는 교본에 나와 있는 방식에 자신이 알고 있는 호흡법과 기를 다스리기에 좋은 몇 가지 동작들을 접목시켜 매일 반복하게 했다.
무림으로 친다면 일종의 동공 수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준혁은 알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축기를 할 수 있었고, 예전보다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무림인들처럼 극적인 효과, 예를 들어 장풍이나 경공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이 쌓이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인 현대인들보다 뛰어난 신체를 가질 수 있었다.
준혁 본인도 몇 개월간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며 그 효과를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밖에도 일반적인 스트레칭보다 더욱 몸을 유연해지는 효과도 있어 부상 방지에도 탁월했다.
“으윽, 아윽, 윽.”
“제자야, 넌 그 소리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준혁은 양다리를 쫙 찢은 상태에서 허리를 굽힌 채 이마를 땅에 대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는 유독 특이했다.
몸이 허약할 때부터 습관이 되어 버린지라 고치는 것은 무리였다.
“으윽, 이 소리를 안 내면 왠지 운동한 것 같지가… 아으윽, 않아요.”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못마땅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는 이공자이지만, 그래도 더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꼭 춤을 추는 것 같아요. 태극권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좀 더 호흡에 신경 써라.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다.”
잠시 후, 스트레칭을 마치며 일어난 준혁의 눈에 덕아웃 한쪽에 놓인 글러브와 하얀 야구공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길 이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내 제자가 된 이상 무공 연습을 안 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나의 동작을 따라 하도록 하여라.”
“윽! 네… 싸부.”
준혁은 무공 연습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반항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이공자의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공자의 가문에서 가장 기초적인 권법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다.
원래는 아무리 제자라도 가문의 허락 없이 가르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는데, 비밀 엄수의 다짐을 받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사실 딱히 알려 줄 사람도 없기는 했다.
꿈속에서 무공을 배웠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간단한 몸 풀기와 권법 수련이 끝나자, 이공자와 준혁은 글러브를 하나씩 꺼내 들었다.
“자, 이제 캐치볼 시간이다.”
캐치볼은 야구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정 거리를 두고 선 상대방의 가슴 높이로 송구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립과 자세다.
투수는 공 끝이 지저분할수록, 그러니까 무브먼트가 클수록 유리하지만, 야수들은 깔끔한 송구가 필수였다.
다행히 교본에는 정확한 자세와 팔 뻗는 방법, 그립 방법까지 나와 있었다.
휙― 퍽!
휙― 퍽!
이공자와 준혁은 서로에게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서히 거리를 벌려 나갔다.
무공으로 단련된 이공자야 별 어려움이 없지만, 준혁은 초반에 꽤 힘들어했다.
잘 던지지도 못했지만, 받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이공자의 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결국 이공자는 준혁에게 맞춰 힘을 뺀 채 던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캐치볼 단계를 패스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꾸준한 스트레칭과 체력 훈련, 권법 수련을 통해 몸이 단련지자 캐치볼에서도 효과가 나타났다.
공이 왔다 갔다 하며 둘 사이의 거리도 점점 벌어졌다.
“준혁아, 글러브에서 더 빨리 공을 꺼내야 한다.”
이공자의 잔소리가 이어지자, 준혁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싸부. 제가 알려 드린 거잖아요!”
“그러면 알려 준 대로 해야지, 왜 따르질 않느냐?”
이공자는 말을 하면서도 재빠른 동작으로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준혁에게 던졌다.
슈욱― 쾅!
조금 전과 달리 힘이 느껴지는 송구.
“아야야!”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고통에 준혁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릴리즈까지 신경 쓰며 이공자에게 다시 던졌다.
“아파요! 좀 살살 던지시라니까요!”
“이게 살살이다. 도대체 얼마나 힘을 더 빼라는 거냐?”
오히려 더 빠르고 강해지는 이공자의 공 때문에 준혁은 점점 더 뒤로 물러났다.
소위 말하는 롱 토스의 단계.
거리가 벌어질수록 점점 곡선의 형태가 되어 가는 준혁과 달리 이공자의 공은 여전히 직선을 유지했다.
“좀 더 일직선으로 던지라니까, 이 허약한 제자 놈아!”
“싸부님이 너무 강한 거예요!”
“뭐, 그렇긴 하겠지.”
“에잇, 정말 힘만 무식하게 세 가지고.”
그렇게 실전 같은 캐치볼을 끝낸 두 사람은 다시 덕아웃 앞으로 모였다.
“자, 이제 몸은 풀린 것 같은데.”
“풀리다 못해 분리가 될 것 같습니다, 사부님.”
“까불지 말고, 이제 비급을 연마하도록 하자. 오늘도 투수 와인드업 자세지?”
이공자의 물음에 준혁이 교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넵, 싸부. 와인드업 자세에서의 투구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마운드로 가자.”
이공자의 지시에 준혁은 덕아웃에서 투수용 글러브와 볼 박스를 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그나저나 싸부, 이제 영어가 자연스러운데요?”
“이 정도야 기본이지. 내가 못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공자를 추켜세워 주는 준혁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몇 개월간의 시간 동안 이공자의 성격을 파악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 와인드업 투구 자세는 마스터한 것 같은데, 왜 다음으로 안 넘어갈까요?”
“내가 보기에도 정확하게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두 사람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우리가 놓친 것이 있을까요?”
비급을 꺼낸 준혁이 다시 해당 부분을 읽어 보았다.
“와인드업에서의 투구 자세는 아래와 같은 자세들이 있다. 그런 다음에 오버핸드 자세가 나와 있고요.”
“잠깐! 자세들이라고?”
“네.”
“그럼 설마 다른 자세도 있는 것이냐?”
“그런가 본데요. 어? 잠깐, 이 밑줄은 뭐지?”
그제야 준혁은 ‘와인드업에서의 투구 자세’라는 글자 밑의 파란색 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줄이다.
준혁이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글자 위에 올려놓자, 마치 강조라도 하듯 글자가 진해졌다.
그 부분을 슬쩍 눌러 보는 준혁.
그러자 오버핸드 스로, 쓰리쿼터 스로, 사이드암 스로, 언더핸드 스로 등의 새로운 항목들이 추가로 생겨났다.
“…이 자세를 다 마스터하라고?”
“아니, 여보. 애 앞에서 남일권이라니. 거, 너무한 거 아니오?”
“그럼 사고를 치지 말든가.”
“아니, 아직 아무 사고도 치지 않았습니다만.”
엄마는 잠시 일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야. 그 표정은 3일 내에 반드시 사고 칠 얼굴이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어?”
“…응.”
“응?”
“…네, 미래 누나.”
부릅뜬 유미래의 눈빛에 소심하게 움츠러드는 일권.
사실 두 사람은 네 살 차이 나는 연상 연하 커플이다.
젊은 시절, 미래를 보고 한눈에 반한 일권의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로 나름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가끔씩 일권이 사고를 치는 경우가 있어 미래가 지금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는 것이었다.
물론 준혁은 자주 보던 일이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준혁은 아옹다옹 거리는 부모님을 놔두고 방에 들어가 책가방을 메고 나왔다.
“그럼 학교 다녀올게. 동네 창피하니까 그만 좀 싸우고.”
그러자 일권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들, 그럼 혹시 야구부 안 할래?”
“아니, 진짜 이 인간이? 공부 잘하는 애 놔두고 갑자기 야구부는 무슨 야구부야? 준혁이는 그런 거 안 할 거지?”
다시 2차전이 시작되려는 분위기에 준혁이 얼른 대답했다.
“엄마, 우리 학교에 야구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시 존댓말로 인사한 준혁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에휴~”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몇 가지 사항들을 전달했다.
“자, 그럼 여기까지. 반장.”
“차렷, 경례.”
“그래, 고생들 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나가자, 아이들도 하나둘 하교 준비를 했다.
준혁도 가방을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혁아, 축구하고 갈래?”
그때,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준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철승이던가.
축구라니…….
사실 별로 당기진 않지만, 누가 이렇게 운동하자고 제안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중학교에 와서 처음 알게 된 터라 준혁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아직 몰라서 그런 듯했다.
일단 안 한다고 대답하려는 순간에 누가 끼어들었다.
“야, 준혁이는 몸이 약해서 운동 같은 거 안 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였다.
그러자 철승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준혁을 훑어봤다.
“그래? 그렇게 약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 말에 끼어든 아이도 준혁을 흘끔 살폈다.
“흠, 중학교 들어오면서 키는 좀 컸네? 근데 몸이 약해서 초등학교 때는 체육 같은 거 거의 안 했어. 암튼 우린 얼른 가자.”
“할 수 없지, 뭐. 그럼 나머지 애들을 어디서 구하나?”
그렇게 사라지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지들끼리 떠들다가 가네.”
사실 축구를 할 생각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준혁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벗어났다.
운동장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축구나 농구 등을 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사실 중학생이라면 에너지가 넘쳐서 주체를 하지 못하는 나이였다.
그러니 저렇게 남아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겠지.
학교에서 준혁의 집까지는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걸린다.
버스를 타기엔 살짝 애매한 감이 있어 준혁은 운동 삼아 걸어 다니기로 했다.
무엇보다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 한몫했다.
아마 예전이라면 고민도 없이 버스를 탔을 것이다.
“자, 오늘은 어느 길로 가 볼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어넘길 이야기지만, 준혁은 등하교 시간에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평소와 다른 길로 한 번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산 준혁은 느긋하게 주위를 구경하며 유유자적 걷기 시작했다.
마침 날씨도 선선하니 상쾌하고 좋았다.
어느 정도 걷던 준혁의 눈에 철조망이 둘러 쳐진 공터가 보였다.
“저게 뭐지?”
철조망에 붙어 확인해 보니, 누런 흙으로 덮여 있는 공터였다.
그리고 한쪽에서부터 하얀 선 두 개가 직각으로 맞닿아 쭉 뻗어 있었다.
“어? 저 모양은…….”
왠지 익숙한 두 개의 선.
베이스가 있어야 할 위치엔 아무것도 없지만, 야구장이 분명했다.
“야구장인가 보네. 그런데 시설이…….”
영 꽝이었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작은 창고 같은 건물 하나와 좌우 덕아웃 위치에 있는 의자가 전부였다.
그나마 지붕 같은 것이 태양을 가려 주기는 했다.
“상태가 별로네.”
꿈속의 야구장에 너무 익숙해진 준혁이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공터의 모습은 실망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정도 시설이면 없는 것보다 백배 낫고, 사설 야구장이나 훈련장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대단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준혁이 그런 현실을 알 수는 없었다.
“뭐, 이런 데서 야구하는 사람들은 잘 못 하는 사람들이겠네.”
준혁은 사람도 없이 덩그라니 비어 있는 야구장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집에나 가자. 그래도 이쪽 길은 야구장이 있다는 게 반갑긴 하네.”
준혁은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다시 집으로 향했다.
***
“왔느냐, 제자야.”
사부 놀이에 흠뻑 빠져 버린 이공자는 준혁이 나타나자마자 득달같이 다가왔다.
“넵, 싸부.”
장난스레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는 준혁.
두 사람은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름 친해졌다.
야구의 진정한 실체를 어느 정도 깨달으며 충격을 받은 이공자도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포기를 한 건지, 야구에 흥미를 느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야구 교본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 일단 스트레칭부터 하자.”
“네, 싸부.”
준혁이 씩씩하게 대답하면서 덕아웃에 잠옷을 벗어 놓고 연습용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몇 가지 색상이 있지만, 이공자가 골라 준 것은 하늘색 유니폼이었다.
물론 이공자도 똑같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스트레칭은 간단해 보였지만 쉽지는 않았다.
이공자는 교본에 나와 있는 방식에 자신이 알고 있는 호흡법과 기를 다스리기에 좋은 몇 가지 동작들을 접목시켜 매일 반복하게 했다.
무림으로 친다면 일종의 동공 수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준혁은 알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축기를 할 수 있었고, 예전보다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무림인들처럼 극적인 효과, 예를 들어 장풍이나 경공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이 쌓이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인 현대인들보다 뛰어난 신체를 가질 수 있었다.
준혁 본인도 몇 개월간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며 그 효과를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밖에도 일반적인 스트레칭보다 더욱 몸을 유연해지는 효과도 있어 부상 방지에도 탁월했다.
“으윽, 아윽, 윽.”
“제자야, 넌 그 소리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준혁은 양다리를 쫙 찢은 상태에서 허리를 굽힌 채 이마를 땅에 대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는 유독 특이했다.
몸이 허약할 때부터 습관이 되어 버린지라 고치는 것은 무리였다.
“으윽, 이 소리를 안 내면 왠지 운동한 것 같지가… 아으윽, 않아요.”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못마땅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는 이공자이지만, 그래도 더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꼭 춤을 추는 것 같아요. 태극권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좀 더 호흡에 신경 써라.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다.”
잠시 후, 스트레칭을 마치며 일어난 준혁의 눈에 덕아웃 한쪽에 놓인 글러브와 하얀 야구공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보아 넘길 이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내 제자가 된 이상 무공 연습을 안 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나의 동작을 따라 하도록 하여라.”
“윽! 네… 싸부.”
준혁은 무공 연습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반항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이공자의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공자의 가문에서 가장 기초적인 권법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다.
원래는 아무리 제자라도 가문의 허락 없이 가르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는데, 비밀 엄수의 다짐을 받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사실 딱히 알려 줄 사람도 없기는 했다.
꿈속에서 무공을 배웠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약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간단한 몸 풀기와 권법 수련이 끝나자, 이공자와 준혁은 글러브를 하나씩 꺼내 들었다.
“자, 이제 캐치볼 시간이다.”
캐치볼은 야구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정 거리를 두고 선 상대방의 가슴 높이로 송구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립과 자세다.
투수는 공 끝이 지저분할수록, 그러니까 무브먼트가 클수록 유리하지만, 야수들은 깔끔한 송구가 필수였다.
다행히 교본에는 정확한 자세와 팔 뻗는 방법, 그립 방법까지 나와 있었다.
휙― 퍽!
휙― 퍽!
이공자와 준혁은 서로에게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서히 거리를 벌려 나갔다.
무공으로 단련된 이공자야 별 어려움이 없지만, 준혁은 초반에 꽤 힘들어했다.
잘 던지지도 못했지만, 받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이공자의 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결국 이공자는 준혁에게 맞춰 힘을 뺀 채 던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캐치볼 단계를 패스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꾸준한 스트레칭과 체력 훈련, 권법 수련을 통해 몸이 단련지자 캐치볼에서도 효과가 나타났다.
공이 왔다 갔다 하며 둘 사이의 거리도 점점 벌어졌다.
“준혁아, 글러브에서 더 빨리 공을 꺼내야 한다.”
이공자의 잔소리가 이어지자, 준혁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싸부. 제가 알려 드린 거잖아요!”
“그러면 알려 준 대로 해야지, 왜 따르질 않느냐?”
이공자는 말을 하면서도 재빠른 동작으로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준혁에게 던졌다.
슈욱― 쾅!
조금 전과 달리 힘이 느껴지는 송구.
“아야야!”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고통에 준혁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릴리즈까지 신경 쓰며 이공자에게 다시 던졌다.
“아파요! 좀 살살 던지시라니까요!”
“이게 살살이다. 도대체 얼마나 힘을 더 빼라는 거냐?”
오히려 더 빠르고 강해지는 이공자의 공 때문에 준혁은 점점 더 뒤로 물러났다.
소위 말하는 롱 토스의 단계.
거리가 벌어질수록 점점 곡선의 형태가 되어 가는 준혁과 달리 이공자의 공은 여전히 직선을 유지했다.
“좀 더 일직선으로 던지라니까, 이 허약한 제자 놈아!”
“싸부님이 너무 강한 거예요!”
“뭐, 그렇긴 하겠지.”
“에잇, 정말 힘만 무식하게 세 가지고.”
그렇게 실전 같은 캐치볼을 끝낸 두 사람은 다시 덕아웃 앞으로 모였다.
“자, 이제 몸은 풀린 것 같은데.”
“풀리다 못해 분리가 될 것 같습니다, 사부님.”
“까불지 말고, 이제 비급을 연마하도록 하자. 오늘도 투수 와인드업 자세지?”
이공자의 물음에 준혁이 교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넵, 싸부. 와인드업 자세에서의 투구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마운드로 가자.”
이공자의 지시에 준혁은 덕아웃에서 투수용 글러브와 볼 박스를 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그나저나 싸부, 이제 영어가 자연스러운데요?”
“이 정도야 기본이지. 내가 못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공자를 추켜세워 주는 준혁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몇 개월간의 시간 동안 이공자의 성격을 파악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 와인드업 투구 자세는 마스터한 것 같은데, 왜 다음으로 안 넘어갈까요?”
“내가 보기에도 정확하게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두 사람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우리가 놓친 것이 있을까요?”
비급을 꺼낸 준혁이 다시 해당 부분을 읽어 보았다.
“와인드업에서의 투구 자세는 아래와 같은 자세들이 있다. 그런 다음에 오버핸드 자세가 나와 있고요.”
“잠깐! 자세들이라고?”
“네.”
“그럼 설마 다른 자세도 있는 것이냐?”
“그런가 본데요. 어? 잠깐, 이 밑줄은 뭐지?”
그제야 준혁은 ‘와인드업에서의 투구 자세’라는 글자 밑의 파란색 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줄이다.
준혁이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글자 위에 올려놓자, 마치 강조라도 하듯 글자가 진해졌다.
그 부분을 슬쩍 눌러 보는 준혁.
그러자 오버핸드 스로, 쓰리쿼터 스로, 사이드암 스로, 언더핸드 스로 등의 새로운 항목들이 추가로 생겨났다.
“…이 자세를 다 마스터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