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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강호출도 (3)
“네?”
아니, 갑자기 왜 유니폼을?
며칠 전엔 사부도 유니폼 걱정을 하더니, 이젠 감독님까지 그런다.
준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자, 털보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준혁이 너, 아무래도 다른 팀으로 들어가야겠다.”
“네?”
“주니어부 말고 리틀부. 아직 만 12세가 안 넘었으니, 이번 대회는 참가가 가능해.”
털보 감독의 말에 철승이가 놀라 물었다.
“설마… 준혁이 데리고 거기 가시려고요?”
“응. 아마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준혁이에게나 팀에나.”
반응을 보니 철승이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이 어린 애들 팀으로 가라니, 준혁은 좀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감독님, 그건 좀 그런데요. 중학생인 제가 초등학생들하고 노는 것도 그렇고…….”
“걱정 마라. 리틀부라고 해도 어차피 세계 대회에 나오는 애들은 다 열두 살짜리 애들이야. 그게 당연하지 않겠어?”
“아, 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12세 이하의 팀이라 해서 그보다 어린 애들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나이에 딱 맞추면 되니까.
“잠깐 전화 한 통화만 하자.”
뭐가 그리도 급한지, 양해를 구한 털보 감독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혹시 저번에 투수 한 명 빠진다고 하셨잖아요. 네, 네. 그래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두 아이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 철승이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준혁아, 너 근데 공 진짜 좋은 것 같아. 혹시 누구한테 배운 거야?”
또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물어본다.
그러면 준혁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응, 삼촌이 알려 줬어. 둘이서 같이 연습하고.”
“와! 혹시 나도 알려 줄 수 있으려나?”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어보는 철승이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미안. 지금은 잘 안 오셔서 힘들 거야. 약간 바쁘시거든.”
“그래? 아쉽네. 그나저나 갑자기 나도 대회에 나가고 싶어지는데…….”
“그럼 감독님한테 이야기해 봐.”
“아마도 남은 포수 자리가 없을 거야. 지금 너 가는 것도 마침 투수가 그만두게 돼서 가능하거든.”
“그 팀 포수가 너보다 잘해?”
준혁의 돌직구에 철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건 팀 단위로 나가는 거라 안 돼.”
“그래? 한국 대표를 뽑아서 하는 게 아니야?”
“응. 리틀 야구는 원래 그렇대.”
“그렇구나.”
준혁이 고개를 끄덕일 때, 털보 감독이 다가왔다.
얼굴 가득 웃음기가 어려 있는 것을 보니, 통화가 잘 끝난 것 같았다.
“됐다, 준혁아. 가능하대.”
“감독님, 혹시 저도 가능해요?”
아직 미련이 남은 듯 철승이 물어보자, 털보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러게 가랄 때 가지, 이제 와서 그러냐?”
“그때는 별로였는데, 준혁이가 하니까 저도 같이하고 싶어서요.”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긴 어렵다. 준혁이 경우는 마침 티오가 나서 가능한 거고. 대신 나도 코치로 팔려 갔다. 에이, 귀찮아서 안 맡으려고 했는데.”
말을 들어 보니 털보 감독도 함께 가는 것 같아 준혁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어색한데 혼자만 다른 팀으로 간다면 더 적응이 안 될 것이다.
사실 준혁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공자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어른들과의 대화가 예전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일단 하던 것부터 마저 하자. 철승이는 가서 공 잡아 주고, 준혁인 던질 수 있는 변화구 좀 보여 주고.”
“네.”
“네.”
“아! 그전에 유니폼부터 벗어라, 준혁아. 더러워지면 안 된다.”
“…….”
***
“아하, 이제 알겠다. 그렇게 된 것이군.”
준혁의 긴 설명을 들은 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일권이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우리나라 지역 예선은 끝났고, 6월에 아시아 지역 예선이라고?”
“응. 정확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래.”
“그래도 한국에서 하니 다행이네. 거기서 지면 끝이고?”
“응. 그리고 1등을 하면 미국에 가는 거래.”
“와! 기왕 하는 거, 미국까지 가면 좋겠다.”
일권과 준혁이 키득거리며 들떠 있을 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미래가 끼어들었다.
“잠시만, 거기 두 분.”
“응.”
“응?”
“지금 아무 허락도 안 떨어졌는데 벌써 마음은 미국에 가 계시네요?”
저들끼리 신이 난 두 남자를 바라보는 미래의 표정에서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눈치 빠른 일권이 잽싸게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여보. 이제 허락을 받으려고 했지. 그리고 준혁이가 야구를 잘한대요, 글쎄.”
능청스러운 일권의 말에도 미래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갑자기 야구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대회를 나가고, 그다음에는 미국엘 간다고?”
“엄마, 미국 이야기는 그냥 기분 내느라 말한 거고, 어차피 아시아 예선에서 1등 못 하면 못 가. 열두 팀이나 온대.”
준혁이 과장되게 팔을 저으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미래에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몇 팀이 참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준혁이가 문제였다.
지금은 건강해지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문제가 생길지 너무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일권이 미래를 다독여 주었다.
“여보, 이제 준혁이도 건강해진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난 준혁이가 이렇게 운동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은걸.”
“그래도 또 아프면 어떡해?”
“이제 준혁이도 다 컸어. 봐. 키도 크고, 몸에 근육도 붙고. 완전 어른이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을 하며 일권이 준혁의 허리를 쿡, 찔렀다.
“응?”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리둥절해하는 준혁에게 일권이 눈짓을 주었다.
그제야 준혁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이제 다 컸습니다.”
평소와 달리 의젓하게 존댓말을 하는 준혁.
“걱정은 그만하시고, 야구 대회 참가를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윙크는 덤이었다.
“풉, 애가 뭐래?”
준혁의 애교에 결국 미래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일권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보탰다.
“봐, 이제 존댓말도 하잖아. 준혁이가 다 컸다니까, 여보.”
“그래, 좋아. 하지만 아플 것 같거나 다치면 즉시 그만두는 거다?”
비록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허락이 떨어졌다.
사실 조건이랄 것도 없지만.
“아싸! 고마워, 엄마!”
기뻐하는 준혁의 모습에 일권과 미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
“…이렇게 된 겁니다, 싸부.”
덕아웃 앞 땅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부와 제자.
준혁은 잠이 들어 이곳에 오자마자 낮의 일을 보고하듯 말했다.
그에 전후 사정을 파악한 이공자가 다시 한번 되새기듯 말했다.
“그럼 이제 대회에 나간다는 말이구나.”
“네.”
이공자는 현재 수련의 진행도를 곰곰이 따져 봤다.
“지금 수련 상태라면… 투수?”
“네. 주로 투수를 하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포지션도 할 수 있을 거래요.”
“대단하군.”
이공자의 말에 준혁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날 인정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준혁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 이공자가 말하는 패턴은 익숙하다.
준혁은 괜히 심통이 난 얼굴로 되물었다.
“고작 그런 실력으로 대회를 나가는 것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죠?”
“호오, 대단하군. 이건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심술을 배웠느냐, 제자야?”
“치.”
역시 이공자의 눈에 준혁의 실력이 찰 리가 없다.
그래도 털보 감독님이나 철승이,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잘한다고 생각하던데.
작게 구시렁거리는 준혁의 모습을 보던 이공자가 혀를 끌끌 찼다.
“쯧, 어쩔 수가 없군.”
“네?”
“괜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훈련 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겠다, 제자야.”
아니, 인정받았다고요!
준혁이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닿을 수 없는 절규였다.
“네가 망신을 당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네 부모님께도 누를 끼치는 일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이공자의 마음이 급해졌다.
“좋은 부모님이시다. 실망을 끼쳐 드리지는 말아야지.”
“그, 그렇죠.”
“안 되겠다. 이제부터 특별 훈련이다. 내 너를 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만들어 주겠다.”
준혁은 갑자기 열을 내는 이공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처음에 보여 주던 모습과 너무 달라진 이공자의 모습.
분명 본인도 모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 하느냐, 제자야! 일단 체력 단련부터 다시 시작이다.”
“네, 싸부!”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마! 일단 달려라!”
“…….”
그렇게 두 사제는 처음부터 되짚어 가며 특별 훈련에 돌입했다.
***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준혁과 이공자는 강도 높은 수련을 했고, 그 결과 투수 파트와 타자 파트까지 마스터했다.
이후의 파트는 수비 부분인데, 시간이 부족해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준혁이 맡을 포지션이 주로 투수와 1루수이기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준혁은 실제로도 소속된 팀에서도 틈틈이 훈련을 진행하며 대회를 준비했다.
물론 투수 자리가 비어 보결로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굴러온 돌이기에 처음엔 많이 견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혁의 실력을 알아본 아이들이 차츰 인정하며 어려움 없이 하나가 되어 훈련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 아시아―태평양 & 중동 지역 예선의 날이 밝았다.
장소는 화성 드림 파크 리틀 야구장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한때는 미군 폭격기의 시험 사격이 벌어지던 장소이지만, 지금은 어린 꿈나무들의 뜨거운 열정을 쏟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리틀 야구의 랜드 마크로 거듭났다.
넓은 주차장과 푸른 잔디 공원에 펼쳐진 최신식 시설, 그리고 총 여덟 개의 경기장.
그중 네 개는 리틀 야구장으로, 세 개는 주니어부, 나머지 한 개는 여성부 경기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지역 예선을 위해 아시아 지역 각국에서 선발된 리틀 야구팀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이번 지역 예선에 참가하는 국가는 총 12개국이며, 2개 조 풀 리그로 경기를 치른 후, 각 조의 1, 2위 네 팀이 교차로 토너먼트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중 한국 선발팀은 뉴질랜드, 괌,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함께 A조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우승팀은 아시아 지역 대표로 미국 펜실베니아 주 윌리엄스 포트에서 열리는 월드시리즈에 참가할 수 있다.
사실 리틀 야구는 로컬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대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기는 했다.
첫날의 일정을 위해 준혁도 팀원들과 함께 드림 파크 야구장에 도착했다.
대절한 버스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내리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흥분한 모습이었다.
“야, 오늘 이승협 선수도 온대.”
“응, 왜?”
“개회식에 참석한다는데.”
“오오, 그럼 사인도 받을 수 있으려나?”
“그건 아마 힘들지 싶다. 잠깐 왔다 가겠지.”
지금은 은퇴한 국민타자, 이승협.
야구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사람이다.
“와, 근데 사람 엄청 많네.”
“외국 사람들도 진짜 많아.”
명색이 국제 대회라 드림 파크 리틀 야구장에는 취재하러 온 기자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다.
모든 이들이 한껏 흥분된 모습으로 이 축제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자자, 개회식 시작이다.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에게 총감독이 말했다.
그의 가슴에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KOREA’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박혀 있었다.
한국 대표팀의 전통적인 색상인 파랑과 하얀색이 섞인 유니폼은 새삼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잠시 후, 각국 선수들이 메인 경기장으로 들어서고,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준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위로 한가로이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마치 꿈속에서의 하늘과 비슷했다.
‘기분이 좋아.’
준혁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개회식이 끝나고…….
드디어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 지역 예선이 시작됐다.
“네?”
아니, 갑자기 왜 유니폼을?
며칠 전엔 사부도 유니폼 걱정을 하더니, 이젠 감독님까지 그런다.
준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자, 털보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준혁이 너, 아무래도 다른 팀으로 들어가야겠다.”
“네?”
“주니어부 말고 리틀부. 아직 만 12세가 안 넘었으니, 이번 대회는 참가가 가능해.”
털보 감독의 말에 철승이가 놀라 물었다.
“설마… 준혁이 데리고 거기 가시려고요?”
“응. 아마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준혁이에게나 팀에나.”
반응을 보니 철승이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이 어린 애들 팀으로 가라니, 준혁은 좀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감독님, 그건 좀 그런데요. 중학생인 제가 초등학생들하고 노는 것도 그렇고…….”
“걱정 마라. 리틀부라고 해도 어차피 세계 대회에 나오는 애들은 다 열두 살짜리 애들이야. 그게 당연하지 않겠어?”
“아, 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12세 이하의 팀이라 해서 그보다 어린 애들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나이에 딱 맞추면 되니까.
“잠깐 전화 한 통화만 하자.”
뭐가 그리도 급한지, 양해를 구한 털보 감독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혹시 저번에 투수 한 명 빠진다고 하셨잖아요. 네, 네. 그래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두 아이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 철승이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준혁아, 너 근데 공 진짜 좋은 것 같아. 혹시 누구한테 배운 거야?”
또 누구에게 배웠는지를 물어본다.
그러면 준혁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응, 삼촌이 알려 줬어. 둘이서 같이 연습하고.”
“와! 혹시 나도 알려 줄 수 있으려나?”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어보는 철승이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미안. 지금은 잘 안 오셔서 힘들 거야. 약간 바쁘시거든.”
“그래? 아쉽네. 그나저나 갑자기 나도 대회에 나가고 싶어지는데…….”
“그럼 감독님한테 이야기해 봐.”
“아마도 남은 포수 자리가 없을 거야. 지금 너 가는 것도 마침 투수가 그만두게 돼서 가능하거든.”
“그 팀 포수가 너보다 잘해?”
준혁의 돌직구에 철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건 팀 단위로 나가는 거라 안 돼.”
“그래? 한국 대표를 뽑아서 하는 게 아니야?”
“응. 리틀 야구는 원래 그렇대.”
“그렇구나.”
준혁이 고개를 끄덕일 때, 털보 감독이 다가왔다.
얼굴 가득 웃음기가 어려 있는 것을 보니, 통화가 잘 끝난 것 같았다.
“됐다, 준혁아. 가능하대.”
“감독님, 혹시 저도 가능해요?”
아직 미련이 남은 듯 철승이 물어보자, 털보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러게 가랄 때 가지, 이제 와서 그러냐?”
“그때는 별로였는데, 준혁이가 하니까 저도 같이하고 싶어서요.”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긴 어렵다. 준혁이 경우는 마침 티오가 나서 가능한 거고. 대신 나도 코치로 팔려 갔다. 에이, 귀찮아서 안 맡으려고 했는데.”
말을 들어 보니 털보 감독도 함께 가는 것 같아 준혁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어색한데 혼자만 다른 팀으로 간다면 더 적응이 안 될 것이다.
사실 준혁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공자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어른들과의 대화가 예전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일단 하던 것부터 마저 하자. 철승이는 가서 공 잡아 주고, 준혁인 던질 수 있는 변화구 좀 보여 주고.”
“네.”
“네.”
“아! 그전에 유니폼부터 벗어라, 준혁아. 더러워지면 안 된다.”
“…….”
***
“아하, 이제 알겠다. 그렇게 된 것이군.”
준혁의 긴 설명을 들은 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일권이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우리나라 지역 예선은 끝났고, 6월에 아시아 지역 예선이라고?”
“응. 정확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래.”
“그래도 한국에서 하니 다행이네. 거기서 지면 끝이고?”
“응. 그리고 1등을 하면 미국에 가는 거래.”
“와! 기왕 하는 거, 미국까지 가면 좋겠다.”
일권과 준혁이 키득거리며 들떠 있을 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미래가 끼어들었다.
“잠시만, 거기 두 분.”
“응.”
“응?”
“지금 아무 허락도 안 떨어졌는데 벌써 마음은 미국에 가 계시네요?”
저들끼리 신이 난 두 남자를 바라보는 미래의 표정에서 어딘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눈치 빠른 일권이 잽싸게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여보. 이제 허락을 받으려고 했지. 그리고 준혁이가 야구를 잘한대요, 글쎄.”
능청스러운 일권의 말에도 미래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갑자기 야구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대회를 나가고, 그다음에는 미국엘 간다고?”
“엄마, 미국 이야기는 그냥 기분 내느라 말한 거고, 어차피 아시아 예선에서 1등 못 하면 못 가. 열두 팀이나 온대.”
준혁이 과장되게 팔을 저으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미래에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몇 팀이 참가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준혁이가 문제였다.
지금은 건강해지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문제가 생길지 너무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일권이 미래를 다독여 주었다.
“여보, 이제 준혁이도 건강해진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난 준혁이가 이렇게 운동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은걸.”
“그래도 또 아프면 어떡해?”
“이제 준혁이도 다 컸어. 봐. 키도 크고, 몸에 근육도 붙고. 완전 어른이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을 하며 일권이 준혁의 허리를 쿡, 찔렀다.
“응?”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리둥절해하는 준혁에게 일권이 눈짓을 주었다.
그제야 준혁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이제 다 컸습니다.”
평소와 달리 의젓하게 존댓말을 하는 준혁.
“걱정은 그만하시고, 야구 대회 참가를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윙크는 덤이었다.
“풉, 애가 뭐래?”
준혁의 애교에 결국 미래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일권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보탰다.
“봐, 이제 존댓말도 하잖아. 준혁이가 다 컸다니까, 여보.”
“그래, 좋아. 하지만 아플 것 같거나 다치면 즉시 그만두는 거다?”
비록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허락이 떨어졌다.
사실 조건이랄 것도 없지만.
“아싸! 고마워, 엄마!”
기뻐하는 준혁의 모습에 일권과 미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
“…이렇게 된 겁니다, 싸부.”
덕아웃 앞 땅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부와 제자.
준혁은 잠이 들어 이곳에 오자마자 낮의 일을 보고하듯 말했다.
그에 전후 사정을 파악한 이공자가 다시 한번 되새기듯 말했다.
“그럼 이제 대회에 나간다는 말이구나.”
“네.”
이공자는 현재 수련의 진행도를 곰곰이 따져 봤다.
“지금 수련 상태라면… 투수?”
“네. 주로 투수를 하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포지션도 할 수 있을 거래요.”
“대단하군.”
이공자의 말에 준혁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날 인정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준혁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 이공자가 말하는 패턴은 익숙하다.
준혁은 괜히 심통이 난 얼굴로 되물었다.
“고작 그런 실력으로 대회를 나가는 것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죠?”
“호오, 대단하군. 이건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독심술을 배웠느냐, 제자야?”
“치.”
역시 이공자의 눈에 준혁의 실력이 찰 리가 없다.
그래도 털보 감독님이나 철승이,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잘한다고 생각하던데.
작게 구시렁거리는 준혁의 모습을 보던 이공자가 혀를 끌끌 찼다.
“쯧, 어쩔 수가 없군.”
“네?”
“괜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훈련 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겠다, 제자야.”
아니, 인정받았다고요!
준혁이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닿을 수 없는 절규였다.
“네가 망신을 당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네 부모님께도 누를 끼치는 일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괜히 이공자의 마음이 급해졌다.
“좋은 부모님이시다. 실망을 끼쳐 드리지는 말아야지.”
“그, 그렇죠.”
“안 되겠다. 이제부터 특별 훈련이다. 내 너를 부끄럽지 않은 수준으로 만들어 주겠다.”
준혁은 갑자기 열을 내는 이공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처음에 보여 주던 모습과 너무 달라진 이공자의 모습.
분명 본인도 모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 하느냐, 제자야! 일단 체력 단련부터 다시 시작이다.”
“네, 싸부!”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마! 일단 달려라!”
“…….”
그렇게 두 사제는 처음부터 되짚어 가며 특별 훈련에 돌입했다.
***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준혁과 이공자는 강도 높은 수련을 했고, 그 결과 투수 파트와 타자 파트까지 마스터했다.
이후의 파트는 수비 부분인데, 시간이 부족해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준혁이 맡을 포지션이 주로 투수와 1루수이기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준혁은 실제로도 소속된 팀에서도 틈틈이 훈련을 진행하며 대회를 준비했다.
물론 투수 자리가 비어 보결로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굴러온 돌이기에 처음엔 많이 견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혁의 실력을 알아본 아이들이 차츰 인정하며 어려움 없이 하나가 되어 훈련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 아시아―태평양 & 중동 지역 예선의 날이 밝았다.
장소는 화성 드림 파크 리틀 야구장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한때는 미군 폭격기의 시험 사격이 벌어지던 장소이지만, 지금은 어린 꿈나무들의 뜨거운 열정을 쏟아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리틀 야구의 랜드 마크로 거듭났다.
넓은 주차장과 푸른 잔디 공원에 펼쳐진 최신식 시설, 그리고 총 여덟 개의 경기장.
그중 네 개는 리틀 야구장으로, 세 개는 주니어부, 나머지 한 개는 여성부 경기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지역 예선을 위해 아시아 지역 각국에서 선발된 리틀 야구팀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이번 지역 예선에 참가하는 국가는 총 12개국이며, 2개 조 풀 리그로 경기를 치른 후, 각 조의 1, 2위 네 팀이 교차로 토너먼트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중 한국 선발팀은 뉴질랜드, 괌,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와 함께 A조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우승팀은 아시아 지역 대표로 미국 펜실베니아 주 윌리엄스 포트에서 열리는 월드시리즈에 참가할 수 있다.
사실 리틀 야구는 로컬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대표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기는 했다.
첫날의 일정을 위해 준혁도 팀원들과 함께 드림 파크 야구장에 도착했다.
대절한 버스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내리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흥분한 모습이었다.
“야, 오늘 이승협 선수도 온대.”
“응, 왜?”
“개회식에 참석한다는데.”
“오오, 그럼 사인도 받을 수 있으려나?”
“그건 아마 힘들지 싶다. 잠깐 왔다 가겠지.”
지금은 은퇴한 국민타자, 이승협.
야구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사람이다.
“와, 근데 사람 엄청 많네.”
“외국 사람들도 진짜 많아.”
명색이 국제 대회라 드림 파크 리틀 야구장에는 취재하러 온 기자나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다.
모든 이들이 한껏 흥분된 모습으로 이 축제를 즐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자자, 개회식 시작이다.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에게 총감독이 말했다.
그의 가슴에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KOREA’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박혀 있었다.
한국 대표팀의 전통적인 색상인 파랑과 하얀색이 섞인 유니폼은 새삼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잠시 후, 각국 선수들이 메인 경기장으로 들어서고,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준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위로 한가로이 떠다니는 하얀 구름이 마치 꿈속에서의 하늘과 비슷했다.
‘기분이 좋아.’
준혁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개회식이 끝나고…….
드디어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 지역 예선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