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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전야제 (2)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편서풍의 제트기류를 타기 위해 태평양 항로를 이용한다.
준혁 일행이 탄 여객기는 태평양 상공을 날아 미국 본토로 진입했다.
여기서 한참을 더 날아가 도착한 곳은 미국 동부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일명 JFK 공항이었다.
뉴욕 시 퀸즈에 위치한 JFK는 국제공항만으로 봤을 때는 미국 내 최대 공항이다.
본래 뉴욕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으로 개항했다가 1963년에 암살당한 고(故)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으로 같은 해 개칭되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무려 열네 시간의 길고 지루한 비행으로 뉴욕에 도착하였지만, 아직 이들의 여정은 끝이 아니었다.
세 명의 코치진과 열세 명의 선수, 그리고 관계자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선수단은 현지에서 미리 준비해 둔 버스 세 대로 갈아탔다.
비행기로 들어가는 방법은 오히려 하루가 넘는 동선이 나오기에 과감히 포기하고 뉴욕에서 버스를 이용한 것이다.
“저 나무 좀 봐! 이상하게 생겼어!”
“와! 미국 사람이다. 영어 되게 잘해.”
“미국 사람들은 총 들고 다닌다는데, 우리 쏘면 어떡하지?”
“바보야, 그럼 경찰이 먼저 쏜대.”
아이들은 공항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떠들어 댔고, 버스를 탄 이후에도 창밖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네 시간 정도 달린 후에 마침내 리틀 야구의 성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윌리엄스 포트에 들어섰다.
인구 약 3만 명의 크지 않은 도시.
그중에서도 경기가 열리는 사우스 윌리엄스 포트는 약 6천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세계 리틀 야구 리그 본부가 있다.
특히나 8월에 열리는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는 이 도시의 가장 큰 행사로서 매년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서 30만 명 이상의 야구 팬들이 어린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여든다.
버스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여행객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작은 가족 단위부터 응원단으로 보이는 대규모 사람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 있었다.
벌써부터 넓은 들판에 텐트를 치고 캐치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장면들 하나하나에서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의 열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대한민국 선수단이 탄 버스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흥분해서인지 기나긴 여행의 노곤함도 느끼지 못하는 어린 선수들이 재잘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자 숙소 앞에 모여 있던 응원단이 환호를 하며 이들의 도착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필라델피아와 뉴욕 한인회 주축으로 만들어진 재미 교포들의 응원단이었다.
단체복을 입은 선수들도 웃음 가득한 얼굴로 양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통일된 검은색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선수들의 가슴에는 ‘ASIA―PACIFIC’이라는 글자가 프린팅되어 있고, 모자에는 아시아 퍼시픽의 약자인 AP가 새겨져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대한민국 대표가 아니라 아시아―퍼시픽, 중동 지역 대표로 참가를 하기에 그런 것이었다.
“오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단장입니다.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인회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단장과 인사를 나눴다.
한국의 리틀 야구 연맹에서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도시의 한인회에 미리 요청을 해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도착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이들 위주로 구성된 응원단도 이미 꾸려져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쉬다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얘들아, 가자.”
코치진이 숙소를 지정해 주려고 고개를 돌려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흥분한 상태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와! 수영장이야!”
“저기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건가?”
“너무 좋다! 여기 마음에 들어!”
“계속 여기에서 살면 좋겠다. 와!”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숙소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한 켠에는 넓은 수영장까지 있는데, 시설이 꽤나 좋아 보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와 회색 건물들이 가득 찬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게 이곳의 환경은 너무나 새롭고 놀라웠다.
“자, 수영장도 이용이 가능하단다!”
“와! 난 다이빙 할 거야!”
“아싸!”
한인회의 누군가가 웃으며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자, 그 즉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축제 분위기였다.
***
대한민국 선수단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6일 뒤면 개막식이 열리는데, 선수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았다.
여행의 피로가 겹쳤는지, 너무 흥분해서 밸런스가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집중력이 떨어진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마을의 들뜬 분위기도 한몫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 이상 조용한 시골 풍경이 아니었다.
게다가 물갈이를 하는지 설사와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잘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개중에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니,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선수들의 부모님은 개막식 전날 오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일찍 들어오긴 했는데, 예상보다 더 안 좋네.”
“그러게요. 어서 좋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적응 기간이 더 필요했을까요?”
“아니야. 이것도 많이 무리한 거야. 사실 더 늦게 보내야 한다는 작자들도 있었어.”
선수단과 코치진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게다가 훈련장의 사용이 가능한 시간은 한 팀당 고작 두 시간.
차분하게 연습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숙소의 공터나 다른 장소를 찾아 훈련을 했지만, 별반 효과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우리 선수단을 꿈의 구장으로 데려가서 연습시키면 좋을 텐데.”
답답한 마음에 준혁도 중얼거려 봤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행히 준혁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고, 틈틈이 호흡법과 스트레칭을 통해 몸의 컨디션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뜻한 햇살이 숙소 전체에 내리쬐는 이른 아침.
다른 아이들이 아직 잠에 취해 있을 때, 준혁은 일어나서 숙소 앞 잔디밭으로 나왔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바닥이 푹신거려.”
부드러운 촉감에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던 준혁이 슬리퍼를 벗었다.
맨발 사이로 간질이는 잔디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잠시 그 느낌을 즐기던 준혁이 서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으윽.”
곧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창문 밖에서 준혁이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준혁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현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준혁아, 너 스트레칭이 살짝 다른데?”
“응. 삼촌이 알려 준 거야. 이렇게 하면 효과가 더 좋대.”
“그래?”
“응. 잘은 모르겠는데, 이렇게 안 하면 혼나.”
‘그래서 준혁이 야구를 잘하나?’
특히나 현준은 투수로도 곧잘 등판하는 편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머리를 굴리던 현준이 준혁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따라 해 봐도 돼?”
뭐, 호흡법만 아니면 상관없겠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준혁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대신 평소보다 호흡은 좀 더 차분하게 쉬면서 해야 돼.”
간단하게 호흡의 중요성만 알려 주고 다시 스트레칭을 열중하자, 현준도 금세 따라 했다.
그러다가 준혁이 맨발인 것을 보고 자신도 신발을 벗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까지도 하나둘 옆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나름 컨디션이 괜찮은 준혁이 아침에 이상한 스트레칭을 하자 따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으으…….”
“아으으윽.”
“아그극.”
처음 스트레칭을 할 때 준혁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이들에게서도 흘러나왔다.
“그래도 몸이 풀리는 것 같아.”
“응. 왠지 좋은 듯.”
곧 다른 아이들도 함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합류할 때마다 신발 벗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이 어느새 다섯, 여섯, 일곱… 열셋.
결국 대한민국 대표팀의 모든 아이들이 잔디밭 위에서 스트레칭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준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치열이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창문 안쪽에서 코치진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쟤네들 뭐 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준혁이를 따라 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스트레칭이 살짝 다르네. 약간 무술 같기도 하고. 근데 왜 다 맨발이야?”
감독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공자가 개량한 이 스트레칭은 동공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내공을 쌓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체가 균형을 잡고 건강해지게 만드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감독은 보기보다 괜찮은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얼씨구, 저건 뭐야? 가부좌까지 하고선.”
“도라도 닦는 모양인데요. 하하.”
마침 스트레칭이 끝난 준혁이 습관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법을 사용하자, 그것을 본 아이들도 금방 따라 했다.
물론 아이들의 경우는 그냥 명상을 하는 정도지만.
둥글게 앉아 있는 아이들과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열세 개의 슬리퍼.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이 입을 열었다.
“털보 코치.”
“아니, 선배님도 그렇게 부르시면 어떡합니까?”
털보 코치가 볼멘소리로 대답을 하자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데 어쩔 수 있나, 나도 대세를 따라하지. 하하하. 어쨌든 우리 너무 조급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훈련 시간만 채우고 나머지는 관광을 하거나 놀러 가는 것이 어떨까?”
뜻밖의 제안에 털보 코치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사실 리틀 야구의 취지를 생각하면 그게 더 맞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뭣보다 축제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즐거워야지. 일단 경기까지 시간도 있으니, 좀 천천히 가자.”
“네, 선배님.”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아침 운동을 마친 아이들이 숙소로 들어왔다.
“야, 이거 좋은 것 같아.”
“응. 왠지 무거운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듯?”
“여기 있는 동안 매일 해야겠다.”
재잘대는 아이들에게 감독이 다가갔다.
“자, 오늘은 아침 먹고 10시부터 12시까지 그라운드 훈련을 한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감독이 잠시 말을 멈추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놀자!”
뜻밖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곧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오! 수영장이다!”
“아싸!”
“어? 감독님, 훈련 더 안 해도 돼요? 며칠 안 남았는데…….”
그 와중에 민수가 손을 들고 물어보자, 감독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왕 미국까지 왔는데 노는 시간도 좀 가져야지. 오후에 수영할 사람들은 수영하고, 혹시 관광 갈 사람들은 나랑 같이 나가도 된다. 그리고 다른 것 하고 싶은 사람은 와서 이야기하고.”
“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야구도 좋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즐겁게 놀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에 감독의 말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맞이한 저녁.
아이들의 얼굴이 아침때보다 많이 가벼워 보였다.
코치진은 그 모습을 보며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결정이 현명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 휴식 계획의 화룡점정이 나올 시간이 되었다.
“자, 저녁 먹자. 오늘은 특별식이다.”
“와! 뭐지?”
“고기 아닌가? 사실 이제 고기는 별로인데.”
“그래도 뭔가 특별한 고기 아니겠어?”
“난 아직 입맛이 없는 듯.”
식당으로 이동하며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고맙게도 오늘은 한인회분들이 저녁을 챙겨 주었는데, 식당의 문이 열리자 갑자기 아이들의 말소리가 멎었다.
“킁킁, 이 냄새는!”
“설마!”
그동안 허락되지 않은 음식이 기가 막힌 냄새를 풍기며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라면이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편서풍의 제트기류를 타기 위해 태평양 항로를 이용한다.
준혁 일행이 탄 여객기는 태평양 상공을 날아 미국 본토로 진입했다.
여기서 한참을 더 날아가 도착한 곳은 미국 동부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일명 JFK 공항이었다.
뉴욕 시 퀸즈에 위치한 JFK는 국제공항만으로 봤을 때는 미국 내 최대 공항이다.
본래 뉴욕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으로 개항했다가 1963년에 암살당한 고(故)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으로 같은 해 개칭되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무려 열네 시간의 길고 지루한 비행으로 뉴욕에 도착하였지만, 아직 이들의 여정은 끝이 아니었다.
세 명의 코치진과 열세 명의 선수, 그리고 관계자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선수단은 현지에서 미리 준비해 둔 버스 세 대로 갈아탔다.
비행기로 들어가는 방법은 오히려 하루가 넘는 동선이 나오기에 과감히 포기하고 뉴욕에서 버스를 이용한 것이다.
“저 나무 좀 봐! 이상하게 생겼어!”
“와! 미국 사람이다. 영어 되게 잘해.”
“미국 사람들은 총 들고 다닌다는데, 우리 쏘면 어떡하지?”
“바보야, 그럼 경찰이 먼저 쏜대.”
아이들은 공항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떠들어 댔고, 버스를 탄 이후에도 창밖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네 시간 정도 달린 후에 마침내 리틀 야구의 성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윌리엄스 포트에 들어섰다.
인구 약 3만 명의 크지 않은 도시.
그중에서도 경기가 열리는 사우스 윌리엄스 포트는 약 6천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세계 리틀 야구 리그 본부가 있다.
특히나 8월에 열리는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는 이 도시의 가장 큰 행사로서 매년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서 30만 명 이상의 야구 팬들이 어린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여든다.
버스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여행객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작은 가족 단위부터 응원단으로 보이는 대규모 사람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 있었다.
벌써부터 넓은 들판에 텐트를 치고 캐치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장면들 하나하나에서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의 열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대한민국 선수단이 탄 버스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흥분해서인지 기나긴 여행의 노곤함도 느끼지 못하는 어린 선수들이 재잘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자 숙소 앞에 모여 있던 응원단이 환호를 하며 이들의 도착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필라델피아와 뉴욕 한인회 주축으로 만들어진 재미 교포들의 응원단이었다.
단체복을 입은 선수들도 웃음 가득한 얼굴로 양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통일된 검은색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선수들의 가슴에는 ‘ASIA―PACIFIC’이라는 글자가 프린팅되어 있고, 모자에는 아시아 퍼시픽의 약자인 AP가 새겨져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대한민국 대표가 아니라 아시아―퍼시픽, 중동 지역 대표로 참가를 하기에 그런 것이었다.
“오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단장입니다.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인회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단장과 인사를 나눴다.
한국의 리틀 야구 연맹에서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도시의 한인회에 미리 요청을 해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도착하기 전부터 어느 정도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이들 위주로 구성된 응원단도 이미 꾸려져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쉬다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시죠.”
“네, 감사합니다. 얘들아, 가자.”
코치진이 숙소를 지정해 주려고 고개를 돌려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흥분한 상태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와! 수영장이야!”
“저기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건가?”
“너무 좋다! 여기 마음에 들어!”
“계속 여기에서 살면 좋겠다. 와!”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숙소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한 켠에는 넓은 수영장까지 있는데, 시설이 꽤나 좋아 보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와 회색 건물들이 가득 찬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에게 이곳의 환경은 너무나 새롭고 놀라웠다.
“자, 수영장도 이용이 가능하단다!”
“와! 난 다이빙 할 거야!”
“아싸!”
한인회의 누군가가 웃으며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자, 그 즉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축제 분위기였다.
***
대한민국 선수단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6일 뒤면 개막식이 열리는데, 선수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았다.
여행의 피로가 겹쳤는지, 너무 흥분해서 밸런스가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집중력이 떨어진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마을의 들뜬 분위기도 한몫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 이상 조용한 시골 풍경이 아니었다.
게다가 물갈이를 하는지 설사와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잘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개중에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니,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선수들의 부모님은 개막식 전날 오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일찍 들어오긴 했는데, 예상보다 더 안 좋네.”
“그러게요. 어서 좋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적응 기간이 더 필요했을까요?”
“아니야. 이것도 많이 무리한 거야. 사실 더 늦게 보내야 한다는 작자들도 있었어.”
선수단과 코치진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게다가 훈련장의 사용이 가능한 시간은 한 팀당 고작 두 시간.
차분하게 연습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숙소의 공터나 다른 장소를 찾아 훈련을 했지만, 별반 효과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우리 선수단을 꿈의 구장으로 데려가서 연습시키면 좋을 텐데.”
답답한 마음에 준혁도 중얼거려 봤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행히 준혁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고, 틈틈이 호흡법과 스트레칭을 통해 몸의 컨디션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뜻한 햇살이 숙소 전체에 내리쬐는 이른 아침.
다른 아이들이 아직 잠에 취해 있을 때, 준혁은 일어나서 숙소 앞 잔디밭으로 나왔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바닥이 푹신거려.”
부드러운 촉감에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던 준혁이 슬리퍼를 벗었다.
맨발 사이로 간질이는 잔디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잠시 그 느낌을 즐기던 준혁이 서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으윽.”
곧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창문 밖에서 준혁이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준혁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현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준혁아, 너 스트레칭이 살짝 다른데?”
“응. 삼촌이 알려 준 거야. 이렇게 하면 효과가 더 좋대.”
“그래?”
“응. 잘은 모르겠는데, 이렇게 안 하면 혼나.”
‘그래서 준혁이 야구를 잘하나?’
특히나 현준은 투수로도 곧잘 등판하는 편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머리를 굴리던 현준이 준혁에게 물었다.
“그럼 나도 따라 해 봐도 돼?”
뭐, 호흡법만 아니면 상관없겠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준혁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대신 평소보다 호흡은 좀 더 차분하게 쉬면서 해야 돼.”
간단하게 호흡의 중요성만 알려 주고 다시 스트레칭을 열중하자, 현준도 금세 따라 했다.
그러다가 준혁이 맨발인 것을 보고 자신도 신발을 벗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까지도 하나둘 옆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나름 컨디션이 괜찮은 준혁이 아침에 이상한 스트레칭을 하자 따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으으…….”
“아으으윽.”
“아그극.”
처음 스트레칭을 할 때 준혁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이들에게서도 흘러나왔다.
“그래도 몸이 풀리는 것 같아.”
“응. 왠지 좋은 듯.”
곧 다른 아이들도 함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합류할 때마다 신발 벗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모여든 아이들이 어느새 다섯, 여섯, 일곱… 열셋.
결국 대한민국 대표팀의 모든 아이들이 잔디밭 위에서 스트레칭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준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치열이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창문 안쪽에서 코치진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쟤네들 뭐 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준혁이를 따라 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스트레칭이 살짝 다르네. 약간 무술 같기도 하고. 근데 왜 다 맨발이야?”
감독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공자가 개량한 이 스트레칭은 동공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내공을 쌓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체가 균형을 잡고 건강해지게 만드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감독은 보기보다 괜찮은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얼씨구, 저건 뭐야? 가부좌까지 하고선.”
“도라도 닦는 모양인데요. 하하.”
마침 스트레칭이 끝난 준혁이 습관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법을 사용하자, 그것을 본 아이들도 금방 따라 했다.
물론 아이들의 경우는 그냥 명상을 하는 정도지만.
둥글게 앉아 있는 아이들과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열세 개의 슬리퍼.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이 입을 열었다.
“털보 코치.”
“아니, 선배님도 그렇게 부르시면 어떡합니까?”
털보 코치가 볼멘소리로 대답을 하자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데 어쩔 수 있나, 나도 대세를 따라하지. 하하하. 어쨌든 우리 너무 조급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훈련 시간만 채우고 나머지는 관광을 하거나 놀러 가는 것이 어떨까?”
뜻밖의 제안에 털보 코치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했다.
“그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사실 리틀 야구의 취지를 생각하면 그게 더 맞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뭣보다 축제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즐거워야지. 일단 경기까지 시간도 있으니, 좀 천천히 가자.”
“네, 선배님.”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아침 운동을 마친 아이들이 숙소로 들어왔다.
“야, 이거 좋은 것 같아.”
“응. 왠지 무거운 느낌이 점점 사라지는 듯?”
“여기 있는 동안 매일 해야겠다.”
재잘대는 아이들에게 감독이 다가갔다.
“자, 오늘은 아침 먹고 10시부터 12시까지 그라운드 훈련을 한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감독이 잠시 말을 멈추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놀자!”
뜻밖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곧 기쁨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오! 수영장이다!”
“아싸!”
“어? 감독님, 훈련 더 안 해도 돼요? 며칠 안 남았는데…….”
그 와중에 민수가 손을 들고 물어보자, 감독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왕 미국까지 왔는데 노는 시간도 좀 가져야지. 오후에 수영할 사람들은 수영하고, 혹시 관광 갈 사람들은 나랑 같이 나가도 된다. 그리고 다른 것 하고 싶은 사람은 와서 이야기하고.”
“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물론 야구도 좋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즐겁게 놀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에 감독의 말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맞이한 저녁.
아이들의 얼굴이 아침때보다 많이 가벼워 보였다.
코치진은 그 모습을 보며 휴식을 취하기로 한 결정이 현명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 휴식 계획의 화룡점정이 나올 시간이 되었다.
“자, 저녁 먹자. 오늘은 특별식이다.”
“와! 뭐지?”
“고기 아닌가? 사실 이제 고기는 별로인데.”
“그래도 뭔가 특별한 고기 아니겠어?”
“난 아직 입맛이 없는 듯.”
식당으로 이동하며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고맙게도 오늘은 한인회분들이 저녁을 챙겨 주었는데, 식당의 문이 열리자 갑자기 아이들의 말소리가 멎었다.
“킁킁, 이 냄새는!”
“설마!”
그동안 허락되지 않은 음식이 기가 막힌 냄새를 풍기며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라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