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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전야제 (3)



일권과 미래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맥주 캔을 들었다.

“건배!”

“짠!”

준혁이 들으면 섭섭했겠지만, 나름 준혁 없는 저녁을 알차게 보내는 두 사람이었다.

“여보, 아~”

일권은 테이블에 놓인 순살 새우치킨을 포크로 찍어 미래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게 치킨을 씹어 삼킨 미래를 보며 일권이 기대된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이제 내일이면 출발이네. 잘 다녀올 수 있지?”

“응. 자기도 같이 가면 좋은데, 아쉽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급한 출장이 있을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네.”

“아들이 미국에서 경기를 하는데도 안 빼 준대? 참 나쁜 회사다.”

미래의 귀여운 투정에 일권이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돈이 먼저니까.”

“그래. 하긴 자기가 더 아쉽겠지.”

미래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중에 텔레비전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흘러나왔다.

[지금 미국 펜실베이니아 윌리엄스 포트에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의 리틀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가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우리 선수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어, 뉴스 나온다!”

“우리 준혁이도 나오려나?”

일권과 미래가 기대에 차서 텔레비전에 집중하자, 곧 화면이 바뀌며 선수들이 머무는 숙소가 나왔다.

“와, 숙소 좋은데.”

“어, 저기에 애들 모여 있다. 얼른 준혁이 찾아봐, 여보.”

숙소 앞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아이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저마다 복장은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잠옷을 입은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코치진으로 보이는 세 명의 어른이 그 뒤에 서 있었다.

“푸웁!”

“뭐야, 저게?”

잠시 화면을 지켜보던 일권과 미래는 순간 맥주를 뿜어 버리고 말았다.

준혁이 가운데 서서 이상한 기체조 같은 동작을 취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주위에 둘러서서 따라 하고 있었다.

스트레칭과 요가가 묘하게 섞인 동작들인데, 얼핏 보면 태극권같이 손을 흐느적대는 자세도 있었다.

웃긴 점은 코치진들까지 똑같이 흉내를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왜 다들 맨발인데?”

미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면서 모두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장면도 나왔다.

[지금 동양의 신비라며 화제가 되고 있는 모습인데요, 기를 이용해 신체를 단련하는, 아시아인들만의 특별한 수련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선수들이 모두 맨발인 것은 땅의 기운을 그대로 전달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현지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선수단 감독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엔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아 고생을 했는데, 갑자기 선수들이 모여서 기체조와 명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날부터 전체적인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희 코치진들도 함께하고 있는 중입니다.]

준혁의 스트레칭이 기체조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화면은 다시 리포터의 얼굴을 비쳤다.

[이제 개막이 얼마 남지 않는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 벌써부터 많은 화제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우리 대표팀이 얼마나 선전을 할지 기대가 됩니다. 끝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바라며, 윌리엄스 포트에서 민지현 리포터였습니다.]

“여, 여보.”

“이게 무슨 일이지?”

부부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 미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엄마네? 아, 엄마. 응. 뉴스 보셨다고? 아니야. 무술 안 배워. 응. 야구하러 간다고 했잖아. 나도 모르지. 아니, 그게 아니라…….”

곧 일권의 핸드폰에서도 벨소리가 울렸다.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 일권이 중얼거렸다.

“흠, 진짜 내가 모르는 삼촌이 있나? 쟤는 저런 걸 어디서 배운 거야, 대체?”

일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 진실의 문을 열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와중에도 문자와 메시지는 속속 도착했다.



***



한국에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아침.

“야! 니들 때문에 이게 뭐야?”

준혁이 아이들을 보며 원망스럽다는 듯이 소리 질렀다.

“푸하하하! 준혁이 완전 무림 고수로 소문날 듯!”

“분위기가 이상한데, 재밌어.”

“난 무서울 지경이야.”

물론 준혁이 자신의 스트레칭 때문에 한국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지금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어느새 하나의 루틴이 되어 버린 행사.

숙소 앞 잔디밭에 준혁을 가운데 두고 아이들이 둘러섰다.

잠시 후, 코치진도 ‘아침 운동과 명상의 시간’에 합류했다.

그러고는 모두 맨발이 된 상태로 준혁의 동작을 따라 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대한민국 선수단 뒤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세계 각국의 학생과 어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 궁금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좋게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건만…….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둘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준혁의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이는 수가 백여 명은 족히 되어 보였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아 보였다.

다시 그것을 촬영하고 있는 방송사들.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의 주관 방송사인 ESPN은 물론, ABC 방송사를 비롯해 캐나다의 CTV, 일본의 NHK 등 각국의 방송사들까지 모여들어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한 켠에 쌓여 있는 백여 켤레의 신발들을 함께 카메라에 잡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쏟아 냈다.

이공자와 지내며 많이 대범해진 준혁이지만, 이 순간 다시 소심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창피한 마음에 중간에 끝내지도 못하고 결국 호흡까지 다 마친 후에 숙소로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일을 이렇게까지 키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이게 뭐야! 아, 창피해.”

“조금만 참아. 며칠 안 남았어.”

“그래. 이거 계속 해야 돼. 효과가 좋거든.”

“…….”

그렇게 화제가 된 덕분에 각국의 취재진들은 대한민국 팀의 연습과 그 이후의 모습들까지 촬영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행사 주최 측도 인터넷 기사 등을 올리며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 흥행에 적극 활용하는 모습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 대한민국 대표팀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다가올 개막식을 준비해 나갔다.



***



“큭큭큭.”

“…….”

“풉.”

“…….”

“나도 제자를 들이기에는 많지 않은 나이지만, 너는 나보다 더한 놈이었구나.”

“…….”

“그것도 난 한 명인데, 너는……. 크큭큭큭, 축하한다, 제자야. 부럽구나.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사조가 되는 것이냐? 뭐, 대사부도 좋고.”

스포츠 채널 뉴스를 통해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본 이공자는 준혁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준혁은 이공자까지 자신을 놀려 대자 정말 수련이 하기 싫어졌다.

“나에게 검이 있다면 이날을 위해 날을 갈았을 것이요, 나에게 창이 있다면 바로 오늘을 위해 창대를 깎았을 것입니다.”

준혁이 땅을 바라보며 비장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었다.

따악!

“아야!”

“까불지 말고, 나도 그만 웃을 테니까 이제 수련을 시작하자.”

“…네, 사부.”

“그리고 혹여 나중에 문파를 세운다면 나도 꼭 초대하거라.”

“…….”



***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는 총 16개의 팀이 참가한다.

각기 인터내셔널 그룹과 미국 그룹으로 나뉘어 리그전을 펼치는데, 더블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 방식이라 진 팀에게 패자부활전을 통해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

쉽게 말해 두 번을 패배해야 완전히 탈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복잡할 수도 있는 이런 규칙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패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대한민국이 속한 인터내셔널 그룹은 아시아―퍼시픽, 라틴 아메리카, 유럽―아프리카, 카리브해, 네 곳의 선발팀과 캐나다, 멕시코, 일본, 호주의 단일 국가 팀으로 이루어졌다.

단일 리그가 200개가 넘을 경우 본선 진출권이 주어지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지역으로 묶어 대표팀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야구의 인기가 높은 대한민국이지만, 리틀 야구의 인프라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미국 그룹은 말 그대로 미국 내 리틀 리그 팀들 중에서 선발된 팀이다.

그렇기에 미국 내 리그 전체 숫자를 보자면 미국 그룹에 선발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어쨌든 각 그룹에서 우승팀이 선발되면, 그 두 팀이 월드시리즈를 치러 최종 우승팀을 결정하며, 개막식 날부터 결승전까지 모두 10일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 개막식이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물론 전의를 다잡으며 훈련을 마무리하고,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하는 중요한 날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만의 전통.

바로 전야제라 불리는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각 팀별로 준비된 특설 트럭에 선수단이 탄 채로 윌리엄스 포트 시내를 일주하는데, 이때의 응원 열기도 대단했다.

그리고 또 하나.

“와! 랜디 존슨이다!”

“정말로 덩치가 큰데?”

“무섭게 생겼어.”

퍼레이드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에 앞서 메이저 리그의 레전드 투수, 랜디 존슨이 윌리엄스 포트를 찾은 것이었다.

이것도 하나의 전통으로, 매년 메이저 리그의 레전드 선수들이 방문해 대회를 축하하고 선수들에게 격려의 말을 나누는 행사였다.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선수들은 대회 기간 동안 야구를 즐기고, 좋은 경기를 위해 땀을 흘리고, 승리를 위해 열정을 쏟아 부으시기 바랍니다. 먼 훗날, 아주 소중한 추억이 될 겁니다. 그리고 메이저 리그에서 함께 뛰는 선수들도 나왔으면 하네요. 부디 즐겁고 행복한 기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랜디 존슨의 짧은 메시지가 끝나자,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대한민국 대표팀도 큰 소리를 지르며 레전드의 메시지에 화답했다.

물론 아이들이 영어를 듣고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다.

“자, 얘들아 이제 시작이다.”

코치진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리 준비되어 있는 트럭으로 다가갔다.

빨간 광택이 멋지게 빛나는 트럭 뒤에는 선수들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준혁아, 잘하고 와!”

“대한민국 화이팅!”

미래가 준혁을 보며 힘껏 소리를 질렀다.

트럭 옆에 미리 와 있던 다른 부모들도 자신의 아이와 다른 선수들에게 열띤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어제 한국에서 출발한 부모님들이 윌리엄스 포트에 도착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카퍼레이드 행사에도 참석했다.

“다녀올게요!”

아이들도 양손을 들어 화답했고, 같이 자리한 한인 응원단도 환호성을 보냈다.

곧 쇼 타임이 시작됐다.

중계 차량과 선두 차량이 출발한 후, 흥겨운 퍼레이드 음악을 연주하는 기악대가 탄 트럭이 뒤를 따랐다.

그 뒤로도 여러 장식들로 꾸며진 트럭들이 지나가고, 드디어 선수들이 탄 트럭들도 하나둘 합류했다.

선수들의 트럭들 사이사이엔 재미있는 복장을 한 기악대나 코스프레를 하고 춤을 추는 무용단 등이 섞여 있었다.

마치 놀이동산의 퍼레이드가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세 번째로 대한민국 선수단이 탄 트럭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