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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인터내셔널 그룹 (2)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는 스포츠 전문 방송인 ESPN이 중계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룹 결승전과 월드시리즈는 미국의 지상파 방송인 ABC 방송국에서 독점 중계를 한다.
그만큼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가 미국 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대한민국과 퀴라소의 경기는 대회를 장식하는 첫 경기이기에 많은 이들이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의 이름이 미국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퍼엉!
[스트라잌!]
[남준혁 선수의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남준혁 선수, 폼이 굉장히 깔끔해요. 정말 교과서 같은 자세입니다.]
[네. 그렇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물론 지금 저 나이 때는 크게 상관없겠지만, 성인이 되면 그만큼 타이밍이 읽히기도 좋다는 말이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디셉션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변칙적인 투구 폼이라도 자신의 메커니즘에 맞게 최적화되어 있다면, 좋은 무기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렇군요. 오늘 제가 또 한 번 가르침을 얻네요.]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허허. 그래도 지금 남준혁 선수의 투구 폼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해설자의 말을 들은 이공자가 생각에 잠겼다.
‘디셉션이라…….’
그러고 보면 무림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었다.
무공을 처음 배울 때, 초식을 익히며 똑같이 표현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신체의 특성과 일치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의 효과가 나타나곤 했다.
그렇다면 만담가 같은 해설자의 말이라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었다.
“이거, 생각 좀 해 봐야겠군.”
이공자의 고민이 어디로 불똥을 튕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퀴라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카리브해 그룹에 위치한 나라로서, 한때 네덜란드 식민지였다가 2010년 독립되어 자치국가로 분리된 나라다.
유럽계 백인과 아프리카계 흑인 간의 혼혈이 주민의 대다수이며, 그 외에도 다양한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데, 의외로 리틀 야구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퀴라소의 첫 타자는 어렵지 않게 삼진으로 처리했다.
그 이후의 타자들도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이용하여 삼진 두 개를 추가했다.
사실 아직 어린 선수들이기에 눈으로 쫓아 공을 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경우 오히려 체인지업의 효과가 떨어지기도 하는데, 준혁의 강속구에 잔뜩 얼어버린 퀴라소의 타자들은 느린공의 변화에 오히려 당황하는 듯 보였다.
공수 교대와 함께 덕아웃으로 들어온 대한민국 선수들은 자신만만해했다.
“잘했다, 얘들아. 저쪽 타자들이 아직 준혁이 공을 공략하지 못할 때,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자.”
“네!”
대한민국의 1번 타자 안형석이 타석에 들어서서 방망이를 돌려본다.
퀴라소의 선발 투수는 주드릭 마르타.
큰 키에 팔다리가 길고, 마른 체형의 흑인 선수였다.
긴장한 표정으로 포수와 사인을 나눈 마르타가 서서히 와인드업을 한 후 힘차게 공을 던졌다.
슈웅!
퍽!
[퀴라소 팀의 첫 번째 공은 스트라이크입니다! 주드릭 마르타, 퀴라소 팀의 에이스인데요, 공이 상당히 빠릅니다.]
[네. 예선 리그에서 거의 실점이 없었어요. 최고 구속이 126㎞라고 합니다. 남준혁 선수와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없어요.]
‘빠르네.’
배터 박스에 선 형석이 배트를 짧게 잡았다.
최대한 컨택을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번째 공이 날아오자, 잔뜩 준비하고 있던 형석이 배트를 내밀었다.
슈웅―
결과는 헛스윙.
홈 플레이트로 날아오던 공이 급격하게 변화를 일으키며 몸 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형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과 동시에 관중석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스크루볼인가요? 요새는 부상 위험 때문에 잘 던지지 않는 공인데요, 이 공을 리틀 야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겠네요. 우리 선수들, 이 궤적의 공을 거의 접해 보지를 못했을 테니까요.]
[가뜩이나 빠른 공에 스크루볼까지 던진다면, 오늘 경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계진의 놀란 목소리가 시청자들의 안방에 울려 퍼졌다.
스크루볼은 너클볼, 자이로볼과 함께 3대마구라 불릴 정도로 위력이 뛰어나다.
다만, 던질 때 손목을 반대 방향으로 무리하게 틀어야 해서 부상의 위험이 높기에 프로 선수들도 굳이 던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슈욱!
“스트라이크 아웃!”
완전히 허를 찔린 형석은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에 방망이를 내지도 못한 채 결국 루킹 삼진을 당했다.
“와!”
대한민국의 첫 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한 마르타는 응원단의 열띤 환호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스크루볼을 던지는 것 같아. 궤적이 이상해.”
형석이 대기 타석에 서 있는 예성에게 정보를 전해 주자, 예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트 박스로 들어갔다.
“참나, 무슨 열두 살짜리들이 125㎞를 던지고, 스크루볼을 던지나?”
대한민국 팀 감독이 덕아웃으로 돌아온 형석을 위로하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 125㎞는 우리도 있지만요.”
털보 코치가 대기 타석으로 걸어가는 준혁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준혁인 너클볼 같은 거 갑자기 던지고 그러지는 않겠지? 만화처럼 말이야.”
“하하, 준혁이는 언더핸드나 사이드암 투구법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 그것도 만화네. 허허.”
“하지만 투구 폼은 하나로 고정하라고 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사이, 예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은 체구이지만, 야구 센스만은 확실한 선수다.
예성이 야무지게 배트를 움켜쥐고 투수를 노려봤다.
초구 와인드업과 함께 마르타가 힘껏 공을 던졌다.
빠른 속도의 패스트 볼이 마르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예성이 기습 번트 자세를 취했다.
깡!
3루 베이스라인 쪽으로 공을 굴린 예성이 1루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 마르타를 비롯해 퀴라소의 3루수와 포수가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중 제일 거리가 가깝던 3루수가 공을 먼저 주워 들고는 1루 베이스로 빠르게 던졌다.
[3루수, 공을 잡고 1루로 던집니다. 아! 1루수 놓칩니다. 공이 빠져서 뒤로 흐르고, 우익수가 따라갑니다!]
[리틀 야구가 실책이 없지는 않지요.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이 빠진 것을 확인한 예성이 2루로 달리려다가 우익수를 보고 그대로 1루 베이스에 멈춰 섰다.
그러자 우익수가 빠르게 2루에 공을 던졌다.
에러로 인한 1사 1루 상황.
의도치 않게 1회에 기회를 맞이한 대한민국이었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의 응원단이 시끌벅적해지며, 더욱 큰 소리로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마르타는 문득 경기 전 코치진에게 받은 대한민국의 예선전 기록을 떠올렸다.
거기에 쓰인 대로라면, 준혁은 누가 봐도 대한민국 팀의 에이스다.
지금도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단단하고 다부진 몸인 것이 느껴졌다.
‘좋은 집에서 어릴 때부터 주목받으며 야구를 했겠지.’
마르타는 새삼 자신과 비견되는 준혁의 모습에 살짝 질투를 느꼈다.
자신은 어렵게, 그야말로 악에 받쳐 야구를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글러브도 살 수 없어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빌려 야구를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절박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야구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부상 위험 때문에 사람들이 말린 스크루볼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지금은 스크루볼이 마르타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깡!
알루미늄 배트 특유의 청명한 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경쾌했지만, 타구는 그렇지 못했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스크루볼을 건드린 탓에 유격수 방향으로 굴러간 볼은 6―4―3의 병살로 이어졌다.
준혁의 대회 첫 병살타였다.
[아쉽네요. 대한민국의 1회 말 공격이 무산되었습니다.]
[마르타 선수. 비록 번트를 허용해 주자를 보냈지만, 다음 남준혁 선수를 병살로 잘 잡았어요. 상대편 투수지만 칭찬해 주고 싶네요.]
[네. 그럼 저희는 잠시 후 2회에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아쉽다.”
응원석의 미래가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비볐다.
“다음번에 치면 되지, 뭘. 너무 걱정 마요.”
“아니, 그래도 너무 아까우니까 그렇…… 으응?”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에 미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돌렸다.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회사 일 때문에 시간을 못 낸다던 일권, 돈을 벌어야 준혁에게 야구를 시킬 수 있다고 말한 그 일권이 눈앞에 있었다.
“설마… 회사 그만둔 거야? 겨우 아들 야구 보려고? 이 인간이 진짜!”
“아냐, 아냐!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요!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보고…….”
“너라면 가능해.”
거침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미래의 돌직구에 일권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넘어갈 미래가 아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빨리 대답해!”
“출장 왔어.”
그제야 자세히 살펴보니,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정장 차림이다.
어이없어 하는 미래를 보면서 일권은 언제 상처받았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경기에 안 늦어서 다행이다. 하하,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출장을 윌리엄스 포트로 온 거야?”
“아니, 뉴욕. 근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기로 바로 온 거야.”
“하, 이 인간이 진짜…….”
그래도 웃음이 났다.
허구한 날 속 썩이고, 사고 치고, 철이 없어도 반가운 내 남편 아니겠는가.
그런 미래에게 일권이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이거 보고 다시 가야 돼.”
“뉴욕에서 여긴 어떻게 왔는데?”
“여기 회사 직원 차 빌려서 왔지. 하하, 캐리어도 차에 그대로 있어.”
미래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살고 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남일권 머릿속이다.
그런 속내도 모른 채 일권은 속없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출장 잡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하, 칭찬해 주세요.”
“근데 왜 말 안 했어?”
“결재가 늦게 나기도 했고. 만약에 되면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성공!”
“하하하… 웃자, 웃어. 내가 남일권 때문에 웃지, 언제 웃어?”
“그래요. 게다가 여기까지 공짜로 왔다니까? 개이득.”
미래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마련해 주자, 일권은 주위 응원단들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저 타자가 잘해. 오늘 준혁이 응원 많이 해야 될 거 같아.”
미래의 말에 일권이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 투수를 하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 퀴라소의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역시 마르타 선수가 이 팀의 핵심이네요. 기록을 보니 예선에서 홈런도 네 개나 쳤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남준혁 선수, 힘내 주시길 바랍니다.]
마운드에서 로진백을 만지작거리던 준혁이 투수판 옆으로 툭 내려놓았다.
민수의 사인은 바깥쪽 존에 살짝 걸치는 패스트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투수판에 발을 올려놓았다.
글러브를 모으고 3루 쪽을 잠시 응시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자연스럽게 와인드업 모션으로 이어졌다.
힘차게 발을 뻗으며 미트를 향해 뿌려진 공.
슈욱!
퍽!
홈 플레이트 가장 바깥쪽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며 들어간 완벽한 공에 마르타도 쉽사리 배트를 내지 않았다.
“볼!”
순간, 미트를 내밀고 있던 민수의 몸이 움찔했다.
대한민국 응원단에서도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에?”
준혁도 마운드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르타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한 민수가 준혁에게 다시 공을 던져 주었다.
[…스트라이크 아닌가요?]
[화면으로 보니 스트라이크가 맞는 것 같은데, 저걸 안 잡아 주네요.]
[아쉽습니다만, 어쨌든 스트라이크 판별은 심판의 권한이니까요.]
준혁이 다시 와인드업을 했다.
이번 공은 몸 쪽 높은 패스트볼.
투수와 타자의 역량을 겨뤄 볼 수 있는 구위였다.
슈욱!
깡!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고, 공은 3루쪽 베이스라인을 넘어 파울이 되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3구는 아래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마르타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지만, 공은 그보다 늦게 홈 플레이트에 도착했다.
제대로 속은 마르타가 배트로 헬멧을 두드리며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준혁은 민수와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준혁아, 이 공으로 유인하면 넘어올 거야.’
민수는 바깥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가운데 패스트볼처럼 보이다가 빠지면 땅볼이나 헛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은 판단이라 여긴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이번 공은 특히 더 신중하게 던지기 위해 노력했다.
슈우욱!
가운데로 들어가다가 타자의 먼 방향으로 틀어진 슬라이더가 홈 플레이트 끝에 절묘하게 걸쳤다.
마르타는 움찔했지만, 끝내 배트를 내밀지는 못했다.
퍼엉!
‘좋았어, 잡았다!’
공을 던지고 주먹을 불끈 쥔 준혁이지만…….
“볼!”
야속한 심판은 이번에도 볼을 외쳤다.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는 스포츠 전문 방송인 ESPN이 중계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룹 결승전과 월드시리즈는 미국의 지상파 방송인 ABC 방송국에서 독점 중계를 한다.
그만큼 리틀 리그 월드시리즈가 미국 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대한민국과 퀴라소의 경기는 대회를 장식하는 첫 경기이기에 많은 이들이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준혁의 이름이 미국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퍼엉!
[스트라잌!]
[남준혁 선수의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참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남준혁 선수, 폼이 굉장히 깔끔해요. 정말 교과서 같은 자세입니다.]
[네. 그렇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물론 지금 저 나이 때는 크게 상관없겠지만, 성인이 되면 그만큼 타이밍이 읽히기도 좋다는 말이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디셉션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변칙적인 투구 폼이라도 자신의 메커니즘에 맞게 최적화되어 있다면, 좋은 무기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렇군요. 오늘 제가 또 한 번 가르침을 얻네요.]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허허. 그래도 지금 남준혁 선수의 투구 폼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해설자의 말을 들은 이공자가 생각에 잠겼다.
‘디셉션이라…….’
그러고 보면 무림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었다.
무공을 처음 배울 때, 초식을 익히며 똑같이 표현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신체의 특성과 일치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의 효과가 나타나곤 했다.
그렇다면 만담가 같은 해설자의 말이라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었다.
“이거, 생각 좀 해 봐야겠군.”
이공자의 고민이 어디로 불똥을 튕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퀴라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카리브해 그룹에 위치한 나라로서, 한때 네덜란드 식민지였다가 2010년 독립되어 자치국가로 분리된 나라다.
유럽계 백인과 아프리카계 흑인 간의 혼혈이 주민의 대다수이며, 그 외에도 다양한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데, 의외로 리틀 야구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퀴라소의 첫 타자는 어렵지 않게 삼진으로 처리했다.
그 이후의 타자들도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이용하여 삼진 두 개를 추가했다.
사실 아직 어린 선수들이기에 눈으로 쫓아 공을 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경우 오히려 체인지업의 효과가 떨어지기도 하는데, 준혁의 강속구에 잔뜩 얼어버린 퀴라소의 타자들은 느린공의 변화에 오히려 당황하는 듯 보였다.
공수 교대와 함께 덕아웃으로 들어온 대한민국 선수들은 자신만만해했다.
“잘했다, 얘들아. 저쪽 타자들이 아직 준혁이 공을 공략하지 못할 때,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자.”
“네!”
대한민국의 1번 타자 안형석이 타석에 들어서서 방망이를 돌려본다.
퀴라소의 선발 투수는 주드릭 마르타.
큰 키에 팔다리가 길고, 마른 체형의 흑인 선수였다.
긴장한 표정으로 포수와 사인을 나눈 마르타가 서서히 와인드업을 한 후 힘차게 공을 던졌다.
슈웅!
퍽!
[퀴라소 팀의 첫 번째 공은 스트라이크입니다! 주드릭 마르타, 퀴라소 팀의 에이스인데요, 공이 상당히 빠릅니다.]
[네. 예선 리그에서 거의 실점이 없었어요. 최고 구속이 126㎞라고 합니다. 남준혁 선수와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없어요.]
‘빠르네.’
배터 박스에 선 형석이 배트를 짧게 잡았다.
최대한 컨택을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번째 공이 날아오자, 잔뜩 준비하고 있던 형석이 배트를 내밀었다.
슈웅―
결과는 헛스윙.
홈 플레이트로 날아오던 공이 급격하게 변화를 일으키며 몸 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형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과 동시에 관중석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스크루볼인가요? 요새는 부상 위험 때문에 잘 던지지 않는 공인데요, 이 공을 리틀 야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겠네요. 우리 선수들, 이 궤적의 공을 거의 접해 보지를 못했을 테니까요.]
[가뜩이나 빠른 공에 스크루볼까지 던진다면, 오늘 경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중계진의 놀란 목소리가 시청자들의 안방에 울려 퍼졌다.
스크루볼은 너클볼, 자이로볼과 함께 3대마구라 불릴 정도로 위력이 뛰어나다.
다만, 던질 때 손목을 반대 방향으로 무리하게 틀어야 해서 부상의 위험이 높기에 프로 선수들도 굳이 던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슈욱!
“스트라이크 아웃!”
완전히 허를 찔린 형석은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에 방망이를 내지도 못한 채 결국 루킹 삼진을 당했다.
“와!”
대한민국의 첫 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한 마르타는 응원단의 열띤 환호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스크루볼을 던지는 것 같아. 궤적이 이상해.”
형석이 대기 타석에 서 있는 예성에게 정보를 전해 주자, 예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트 박스로 들어갔다.
“참나, 무슨 열두 살짜리들이 125㎞를 던지고, 스크루볼을 던지나?”
대한민국 팀 감독이 덕아웃으로 돌아온 형석을 위로하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뭐, 125㎞는 우리도 있지만요.”
털보 코치가 대기 타석으로 걸어가는 준혁을 바라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준혁인 너클볼 같은 거 갑자기 던지고 그러지는 않겠지? 만화처럼 말이야.”
“하하, 준혁이는 언더핸드나 사이드암 투구법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 그것도 만화네. 허허.”
“하지만 투구 폼은 하나로 고정하라고 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사이, 예성이 타석에 들어섰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은 체구이지만, 야구 센스만은 확실한 선수다.
예성이 야무지게 배트를 움켜쥐고 투수를 노려봤다.
초구 와인드업과 함께 마르타가 힘껏 공을 던졌다.
빠른 속도의 패스트 볼이 마르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예성이 기습 번트 자세를 취했다.
깡!
3루 베이스라인 쪽으로 공을 굴린 예성이 1루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 마르타를 비롯해 퀴라소의 3루수와 포수가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중 제일 거리가 가깝던 3루수가 공을 먼저 주워 들고는 1루 베이스로 빠르게 던졌다.
[3루수, 공을 잡고 1루로 던집니다. 아! 1루수 놓칩니다. 공이 빠져서 뒤로 흐르고, 우익수가 따라갑니다!]
[리틀 야구가 실책이 없지는 않지요.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공이 빠진 것을 확인한 예성이 2루로 달리려다가 우익수를 보고 그대로 1루 베이스에 멈춰 섰다.
그러자 우익수가 빠르게 2루에 공을 던졌다.
에러로 인한 1사 1루 상황.
의도치 않게 1회에 기회를 맞이한 대한민국이었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의 응원단이 시끌벅적해지며, 더욱 큰 소리로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마르타는 문득 경기 전 코치진에게 받은 대한민국의 예선전 기록을 떠올렸다.
거기에 쓰인 대로라면, 준혁은 누가 봐도 대한민국 팀의 에이스다.
지금도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단단하고 다부진 몸인 것이 느껴졌다.
‘좋은 집에서 어릴 때부터 주목받으며 야구를 했겠지.’
마르타는 새삼 자신과 비견되는 준혁의 모습에 살짝 질투를 느꼈다.
자신은 어렵게, 그야말로 악에 받쳐 야구를 하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글러브도 살 수 없어 다른 아이들의 것을 빌려 야구를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절박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야구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부상 위험 때문에 사람들이 말린 스크루볼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겠지만, 지금은 스크루볼이 마르타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깡!
알루미늄 배트 특유의 청명한 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경쾌했지만, 타구는 그렇지 못했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스크루볼을 건드린 탓에 유격수 방향으로 굴러간 볼은 6―4―3의 병살로 이어졌다.
준혁의 대회 첫 병살타였다.
[아쉽네요. 대한민국의 1회 말 공격이 무산되었습니다.]
[마르타 선수. 비록 번트를 허용해 주자를 보냈지만, 다음 남준혁 선수를 병살로 잘 잡았어요. 상대편 투수지만 칭찬해 주고 싶네요.]
[네. 그럼 저희는 잠시 후 2회에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아쉽다.”
응원석의 미래가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비볐다.
“다음번에 치면 되지, 뭘. 너무 걱정 마요.”
“아니, 그래도 너무 아까우니까 그렇…… 으응?”
들리지 말아야 할 목소리에 미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돌렸다.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회사 일 때문에 시간을 못 낸다던 일권, 돈을 벌어야 준혁에게 야구를 시킬 수 있다고 말한 그 일권이 눈앞에 있었다.
“설마… 회사 그만둔 거야? 겨우 아들 야구 보려고? 이 인간이 진짜!”
“아냐, 아냐!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요!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보고…….”
“너라면 가능해.”
거침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미래의 돌직구에 일권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넘어갈 미래가 아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빨리 대답해!”
“출장 왔어.”
그제야 자세히 살펴보니,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정장 차림이다.
어이없어 하는 미래를 보면서 일권은 언제 상처받았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경기에 안 늦어서 다행이다. 하하,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출장을 윌리엄스 포트로 온 거야?”
“아니, 뉴욕. 근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기로 바로 온 거야.”
“하, 이 인간이 진짜…….”
그래도 웃음이 났다.
허구한 날 속 썩이고, 사고 치고, 철이 없어도 반가운 내 남편 아니겠는가.
그런 미래에게 일권이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이거 보고 다시 가야 돼.”
“뉴욕에서 여긴 어떻게 왔는데?”
“여기 회사 직원 차 빌려서 왔지. 하하, 캐리어도 차에 그대로 있어.”
미래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살고 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남일권 머릿속이다.
그런 속내도 모른 채 일권은 속없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출장 잡으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하, 칭찬해 주세요.”
“근데 왜 말 안 했어?”
“결재가 늦게 나기도 했고. 만약에 되면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성공!”
“하하하… 웃자, 웃어. 내가 남일권 때문에 웃지, 언제 웃어?”
“그래요. 게다가 여기까지 공짜로 왔다니까? 개이득.”
미래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마련해 주자, 일권은 주위 응원단들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저 타자가 잘해. 오늘 준혁이 응원 많이 해야 될 거 같아.”
미래의 말에 일권이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 투수를 하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자, 퀴라소의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역시 마르타 선수가 이 팀의 핵심이네요. 기록을 보니 예선에서 홈런도 네 개나 쳤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남준혁 선수, 힘내 주시길 바랍니다.]
마운드에서 로진백을 만지작거리던 준혁이 투수판 옆으로 툭 내려놓았다.
민수의 사인은 바깥쪽 존에 살짝 걸치는 패스트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투수판에 발을 올려놓았다.
글러브를 모으고 3루 쪽을 잠시 응시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뒤, 자연스럽게 와인드업 모션으로 이어졌다.
힘차게 발을 뻗으며 미트를 향해 뿌려진 공.
슈욱!
퍽!
홈 플레이트 가장 바깥쪽을 아슬아슬하게 걸치며 들어간 완벽한 공에 마르타도 쉽사리 배트를 내지 않았다.
“볼!”
순간, 미트를 내밀고 있던 민수의 몸이 움찔했다.
대한민국 응원단에서도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에?”
준혁도 마운드에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르타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한 민수가 준혁에게 다시 공을 던져 주었다.
[…스트라이크 아닌가요?]
[화면으로 보니 스트라이크가 맞는 것 같은데, 저걸 안 잡아 주네요.]
[아쉽습니다만, 어쨌든 스트라이크 판별은 심판의 권한이니까요.]
준혁이 다시 와인드업을 했다.
이번 공은 몸 쪽 높은 패스트볼.
투수와 타자의 역량을 겨뤄 볼 수 있는 구위였다.
슈욱!
깡!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고, 공은 3루쪽 베이스라인을 넘어 파울이 되었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
3구는 아래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다.
마르타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지만, 공은 그보다 늦게 홈 플레이트에 도착했다.
제대로 속은 마르타가 배트로 헬멧을 두드리며 다시 타격 자세를 취했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준혁은 민수와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준혁아, 이 공으로 유인하면 넘어올 거야.’
민수는 바깥쪽으로 흐르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가운데 패스트볼처럼 보이다가 빠지면 땅볼이나 헛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은 판단이라 여긴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이번 공은 특히 더 신중하게 던지기 위해 노력했다.
슈우욱!
가운데로 들어가다가 타자의 먼 방향으로 틀어진 슬라이더가 홈 플레이트 끝에 절묘하게 걸쳤다.
마르타는 움찔했지만, 끝내 배트를 내밀지는 못했다.
퍼엉!
‘좋았어, 잡았다!’
공을 던지고 주먹을 불끈 쥔 준혁이지만…….
“볼!”
야속한 심판은 이번에도 볼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