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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인터내셔널 그룹 (3)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준혁은 다시 한번 존에 걸치는 패스트볼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볼!”

볼이 선언되었다.

“타자, 1루로!”

[아, 아쉽습니다. 이번 공도 스트라이크 같았는데, 볼을 선언합니다.]

[음, 심판 이상해요. 어떻게 저 공을 볼로 선언할 수 있지요? 이거, 심판의 자질이 의심됩니다.]

과격한 해설자의 말에 캐스터의 볼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하하, 저기 해설자님, 방송에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하하.

[아니, 지금 제가 화가 나서 그래요.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했겠어요? 그런데 심판이 그런 노력을 망쳐 버리고 있잖아요.]

[네네, 알겠습니다. 좀 진정하시고……. 아, 대한민국 팀의 감독이 덕아웃에서 나옵니다.]

포 볼 판정이 나오자 준혁은 허탈한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보았다.

처음 슬라이더가 볼 판정을 받자 준혁은 마지막 승부구를 같은 코스의 패스트볼로 선택했다.

슬라이더가 홈 플레이트에서 약간 빠져나갔다면, 패스트볼은 홈 플레이트 가장자리를 파고들었다.

다시 말해 슬라이더보다 더 안쪽으로 공이 들어갔다는 말.

하지만 심판은 그 공 또한 볼로 선언해 버렸다.

심판의 판정에 따라 마르타는 배트를 덕아웃 쪽으로 던지며 1루로 뛰어나갔다.

준혁과 민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타임!”

그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대한민국의 덕아웃에서 감독이 통역관과 함께 주심에게 다가갔다.

감독이 주심에게 항의하자 옆에 있는 통역관이 전달해 줬다.

“아니, 그 공이 어떻게 볼입니까?”

“…빠졌습니다.”

“분명히 홈 플레이트를 통과했는데 볼이라니요? 그런 공을 안 잡아 주면 어떻게 투구를 하라는 겁니까?”

“볼을 볼이라 선언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더 정확하게 볼 테니, 그만 들어가세요.”

“하아…….”

고집스러운 표정의 주심이 완고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더 이야기를 해 봤자 달라질 게 없다 판단한 감독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결국 마지막 당부를 남긴 채 감독은 다시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오늘 레이먼드 주심, 많이 안타깝습니다. 감독이 잠시 항의를 하고 들어갔는데, 지금부터라도 확실하게 봐주길 바랍니다.]

[네. 심판들은 항상 염두를 해야 돼요. 자신들의 잘못된 판정이 어린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요. 어쩔 수 없는 실수는 용납하더라도 능력이 부족한 것은 봐줄 수가 없어요. 저 심판, 저러면 안 돼요.]

[네, 네. 그렇습니다. 하하…….]

상당히 화가 난 듯 해설자가 격한 목소리로 불만을 쏟아내자, 아나운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편, 그라운드의 분위기도 여전히 어수선해 준혁은 여전히 마운드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들린 야구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한민국 응원단들이 더욱 큰 목소리로 응원을 하기 시작했지만, 준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럴 때 사부는 어떻게 했을까?’

역시 그냥 참아야 하는 것인가.

사부가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그러다가 이공자라면 어떻게 했을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당연히…….

‘사부라면 당장 검을 뽑아서 저 심판의 목을…….’

그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야구를 하다가 잘못된 판정을 내리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검을 뽑는 이공자의 모습.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죽여 버릴지도.’

이공자를 생각하니 웃음부터 나왔다.

그러면서 답답하던 마음이 서서히 풀렸다.

그래, 나도 싸운다.

검이 없으니 야구공으로.

준혁이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싸부, 나도 싸웁니다.’



잠시간의 소동이 가라앉고, 타석에는 퀴라소의 5번 타자가 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엔 준혁이 먼저 민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괜찮겠어?’

다시 한번 확인하는 민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후, 준혁은 체력 안배를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공을 힘껏 뿌렸다.

슈우웅!

퍼억!

“볼!”

배트를 내지도 못한 타자.

준혁의 볼이 조금 전 포볼이 선언되었을 때와 동일하게 들어갔다.

판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준혁이 다시 민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같은 위치, 같은 구질.

다시 한번 와인드업을 한 준혁이 빠르게 공을 던졌다.

슈욱!

퍼억!

방금 전의 공과 거의 같은 위치.

잠시 고민을 하던 레이먼드 주심이 소리쳤다.

“보, 볼!”

[아! 남준혁 선수, 동일한 위치로 공을 계속 집어넣습니다.]

[아니에요. 공 반 개 정도 안으로 넣었어요. 허허… 이거, 주심에게 싸움을 거는 것 같은데요?]

해설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 순간, 다른 나라의 중계진들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심판의 오심에도 멘탈이 무너지지 않은 동양의 작은 투수가 그들의 흥미를 끈 것이었다.

투 볼, 노 스트라이크.

공을 건네받은 준혁이 이번에도 역시 민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민수도 이미 준혁의 속셈을 파악했지만,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제구가 되다니…….’

물론 준혁의 집중력이 분노 때문에 한없이 올라간 상태라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자신의 포수 인생 동안 본 적이 없었다.

다시금 와인드업에 이어…….

준혁이 힘차게 공을 던졌다.

슈우욱!

퍽!

“보… 스트라이크!”

다시 볼 반 개 정도 안으로 들어온 코스.

레이먼드 주심은 이번 공에 스트라이크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드 스쿨 타입의 고지식한 주심은 준혁이 자신에게 싸움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 공을 잡아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 드디어 스트라이크입니다.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대단해요. 정말 이 말밖에 안 나오는 피칭입니다.]

한편, 퀴라소의 덕아웃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은 타자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직 어린 나이다 보니 보통 이럴 땐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어 퀴라소의 코치진들은 웨이팅 사인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유리한 볼카운트와는 달리 타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정적으로 몰렸다.

바로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제구를 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준혁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와인드업을 했다.

그런 후, 힘차게 휘두르는 오른팔.

타자의 눈에 같은 코스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이 보였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타자가 사인을 무시한 채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하지만 배트보다 늦게 들어오는 공.

체인지업이었다.

민수의 미트가 머문 곳은 방금 전 스트라이크를 선언받은 바로 그 위치.

“스트라이크!”

공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배트가 휘둘러졌으니 무조건 스트라이크였다.

그 순간, 레이먼드 주심도 등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이제 덕아웃에서 적극적인 타격을 지시받은 5번 타자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모두가 잔뜩 긴장한 가운데…….

준혁의 5구가 던져졌다.

슈우욱!

퍽!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가르고, 준혁이 던진 슬라이더가 또다시 같은 위치로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심판의 콜과 함께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와!”

“저놈 멋지네.”

“코리아 파이팅!”

“나이스 피처! 준혁!”

특별히 응원하는 팀 없이 개막 첫 경기를 보러 온 많은 리틀 야구팬들도 이 상황에 응원을 보냈다.

퀴라소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 팀과 준혁이 우직한 모습을 보이자 큰 응원을 받게 된 것이었다.

[마치 톰 글래빈이나 그레그 매덕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남준혁 선수의 제구력이 저 정도로 좋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드디어 원 아웃을 잡아냈습니다만, 이후의 피칭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



준혁이 던진 공은 누가 봐도 스트라이크였고, 슬라이더의 코스는 실로 절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신이 나간 건지, 눈을 감은 건지 심판은 연속으로 볼을 선언했고, 결국 아웃이 되어야 할 타자가 포볼로 나가 버렸다.

“쯧쯧, 저 심판… 웃기는 놈이군.”

어딜 가나 저런 놈은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집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망쳐 버리는 인간.

감독이 덕아웃에서 나와 항의를 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하지만 이공자가 보기에도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그때, 카메라가 고개 숙인 준혁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마운드 위에 외롭게 서서 고개를 숙인 준혁의 모습.

손에 쥔 야구공을 허탈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읽은 이공자는 갑자기 속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감히! 저 개자식이 나의 제자를!”

저도 모르게 옆에 놓여 있던 배트를 들었다.

자신의 제자를 고개 숙이게 만든 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만약 저놈이 앞에 있다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아니, 어른들이랍시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관객 모두를 응징해 버렸을 것이다.

“날 저곳으로 보내 줘!”

끝내 분을 참지 못한 이공자가 격하게 소리 질렀다.

휴게실을 넘어 야구장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사자후였다.

메아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몸 전체를 지배했다.

순간, 눈앞의 화면이라도 부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배트를 높이 들고 텔레비전에 나온 주심을 얼굴을 향해 휘두르려는 순간, 화면이 바뀌며 준혁의 모습이 다시 잡혔다.

언제 고민했냐는 듯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에 이공자는 배트를 번쩍 치켜든 상태에서 멈춰 버렸다.

“저놈, 왜 웃어?”

그러다 곧 준혁이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응? 나한테 왜?”

저 행동이 자신에게 보내는 인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사제 간의 비밀 신호라든가 뭐라든가.

“내가 텔레비전 부수려는 걸 알았나? 어떻게 알았지?”

슬며시 배트를 내려놓았다.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손으로 가슴을, 아니, 텔레비전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이 소중한 것을 망가뜨릴 뻔했구나.”

이공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각오와 함께 다시 시작된 준혁의 투구.

제자 녀석은 심판하고 싸우고 있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허, 저놈. 웃기네.”

어느새 이공자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



이후, 간단하게 세 명의 타자를 잡아 버린 준혁은 2회 초 퀴라소의 공격도 무실점으로 막아 냈다.

“고생했다, 준혁아.”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준혁에게 감독이 다가와 격려를 전했다.

“네, 감독님.”

“흔들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잘해 줬구나.”

“실은 저도 화가 났는데, 사부… 아니, 삼촌 생각이 나서 참았어요.”

“다행이네. 격투기하시는 삼촌 이야기지?”

“네.”

“그래, 다행이네. 언제 한번 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궁금하네, 과연 어떤 분일지.”

“아, 네. 혹시 가능하게 되면 알려 드릴게요.”

이공자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하지만 감독님께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둘러댄 준혁.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감독이 다른 선수들 쪽으로 걸어갔다.

4번 타자부터 이어지는 한국의 공격이 시작되자 모두가 덕아웃 난간에 몰려 응원을 시작했다.

타석에 선 치열은 투 볼까지 잘 골라냈지만,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들어오는 스크루볼을 건드려 땅볼 아웃이 되었다.

다음 타자인 현준과 민수도 각각 삼진과 플라이 볼로 물러나며 다시 공수가 교대됐다.

아직까지 예성의 번트를 제외하고 안타가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으로서는 매우 답답한 전개였다.

그리고 준혁이 마운드에 오르며 외로운 싸움을 다시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