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2화







“유진아, 우리 사이에 뭘 또 이렇게 까다롭게 구냐? 난 너한테 바라는 거 별로 없다. 넌 그냥 이 공사에서 따 가고 싶은 것만 따 가고, 그 대신 난 너한테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더 이상 얼마나 깔끔해야 되는 거냐?”

대한민국의 혈연, 지연, 학연이 이렇게 무서웠다. 이 개차반 같은 놈이 학연에서 걸릴 줄이야! 유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유진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는 김 소장의 눈빛도 불편했지만, 옆에서 대놓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몸을 붙여오는 영훈을 더는 참고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배가 저한테 하고 싶은 게 뭔데요? 갑자기 그게 뭔지 되게 궁금해지네?”

제발, 이 개차반 같은 선배가 더 이상의 실수는 하지 않기를 유진은 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잖아도 불끈불끈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부터 천방지축 망아지같이 구는 널 내 밑에 깔아 짓뭉개고 싶었어. 내 구미에 맞게 아주 순종이고 고분고분하게.”

영훈은 여전히 자신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유진의 손을 바라보며 나름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 가슴이 크고 풍만한 여자가 좋았지만, 가끔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어디 거절할 테면 거절해 보란 듯한 영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유진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혈연은커녕 지연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었다.

나이 스물아홉에 다시 대학교로 가서 공부할 것도 아닌데 굳이 학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 선배니 후배니 하는 체면치레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 줘 버릴 것이다.

유진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클럽은 곳곳에 보이지 않는 CCTV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적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들 점잖은 척 고상한 척 목소리를 낮추고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영훈의 진상 짓은 확실히 흥미로운 안줏거리일 테니까 말이었다. 한때 치기 어린 시절에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주먹이나 발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잃을 것이 없었던 그때와 달리 유진 역시 나이를 먹었고, 상황 역시 많이 변해 있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야 했고, 싫은 것이 있어도 적당히 무시하면서 좋아하는 척 넘어갈 수 있는 무던함도 요구했다.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건설업계도 한두 사람만 거치면 알음알음 알게 되는 좁은 인맥을 자랑하는 곳 중의 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참자.

참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야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만 같았다.

애써 떨어져 앉은 것이 무색하게 영훈의 몸이 또다시 유진 쪽으로 사정없이 기울었다. 유진은 슬며시 어깨로 그의 몸을 밀어내며 거리를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유진이 애쓰고 있건 말건 영훈은 그녀 쪽으로 몸을 아예 기대 버린 채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다들 술 따라 놓고 고사를 지내시나? 자, 한 잔씩들 쭉 드십시다.”

영훈이 독한 양주를 소주 마시듯 쪽 들이키자 김 소장과 유진 역시 테이블 위에 잘 말아 놓은 폭탄주를 집어 들었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박 실장님, 술이 정말 세십니다. 저도 이젠 나이가 들었는지 예전만큼 몸이 받쳐 주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에이, 왜 이러십니까? 주신이라고 불리는 김 소장님이 농담으로도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시는 거죠.”

“그런가요? 여하튼 다른 건 모르겠지만, 박 실장님과 마시는 술이 단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아주 죽이 척척 맞는 것이 술친구도 저런 친구가 없었다.

유진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김 소장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그녀도 저 꼰대 아저씨처럼 혓바닥에 기름을 칠한 것처럼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 날이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 자리는 ‘네오 리조트’ 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었는데, 이건 욕심이 난다고 딸 수 있는 건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더 있다간 서로 얼굴을 붉힐 일만 생길 터였다.

영훈 선배의 손이 유진의 허벅지를 주물럭거릴 때는 선배고 뭐고 확 밟아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사건 사고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니 지금껏 참은 게 아까워서라도 얌전하게 행동하면서 이쯤에서 일어서는 것이 딱 좋을 터였다.

이번이 마지막 잔이 될 폭탄주를 유진은 말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 나서 양주와 맥주가 섞인 폭탄주를 입에 대고 꿀꺽꿀꺽 소리 내어 모조리 마셔 버린 후, 빈 잔을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네오 리조트’ 건은 제가 함부로 끼어서 왈가불가할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없는 편이 두 분이서 말씀 나누시기 편하실 테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 소장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벌써 일어나려고요?”

한결같이 그녀를 못마땅해 하던 김 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와 동시에 유진은 영훈 선배의 어깨를 밀쳐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덕분에 술 잘 마시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유진은 단정하게 맨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왼쪽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영훈과 시선을 맞추며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영훈 선배, 바쁘신데 저 같은 후배까지 불러서 챙겨 주시고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귀가하시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차가운 냉기만 폴폴 풍기던 유진이 돌연 태도를 바꾸어 영훈을 향해 살갑게 웃어 주자 그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저벅저벅 걸어 홀을 빠져나갔다.

“유진아, 정유진. 야, 너 거기 안 서?”

등지고 있는 영훈은 보지 못했지만, 일그러진 유진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저 자식이.”

영훈의 목소리가 들렸을 법도 한데 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풀어헤친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행여 붙잡힐세라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한편, 서후는 무심한 표정으로 여자가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훈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여자나 남자나 질척거리지는 것만큼 구질구질한 것도 없는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있던 서후가 태연과 시선을 교환했다.

“박영훈 실장은 질척거리거나 구질거리는 타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원래 정보와 사실 사이에는 간극이란 것이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박영훈 실장의 진상 짓을 보고 싶어 하셨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봅니다. 많이 아쉬우시겠습니다.”

태연이 턱을 문지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서후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비서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끝나려면 아직 10여 분이 더 있어야 하니 속단하긴 이르지. 태연아,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김제균 소장과 인사도 좀 하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있나 살펴보도록 해.”

서후가 구 실장을 태연이라고 부를 때는 항상 무언가가 아쉬울 때였다.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저한테 귀찮은 일은 다 밀어 놓고 혼자서만 빠져나가겠다는 그런 못된 경우는 도대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태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저번에 구 실장이 말했던 모니터 말인데, 이번 주 화요일 날 도착할 거라고 내가 말했었나?”

서후가 당근을 투척하는 시기는 언제나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순식간에 딱딱했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태연이 무테안경을 고쳐 썼다.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나가 있을게.”

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수집을 태연에게 맡기고 홀을 빠져나갔다. 그의 동물적인 감은 아직 뭔가가 더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나간 여자와 그 뒤를 쫓아간 남자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홀로 나온 서후는 주저하지 않고 복도 끝을 돌아 화장실과 파우더룸이 마주 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서서 고민하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파우더룸 안쪽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흑.”

희미하긴 해도 신음 소리가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후는 자신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황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한편, 유진은 홀에서 나와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전에 뒤따라온 영훈에게 손목을 붙잡히고야 말았다. 덩치가 큰 그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파우더룸으로 끌려 들어온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영훈은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남자였기에 근력으로 따진다면 한참 불리했다.

“영훈 선배, 미쳤어요? 이러지 좀 마시라고요.”

“어지간히 좀 튕겨라.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이게 정말 예쁜 줄 아나? 야, 좀 가만히 있어 보라니까.”

영훈이 몸을 밀착해 오며 유진의 등을 더듬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가슴 쪽으로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다. 거칠게 뿜어대는 영훈의 뜨거운 콧김과 찐득하게 달라붙는 우악스러운 손놀림에 유진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바싹 독기 어린 신경은 곤두서 버렸고 그와 동시에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고야 말았다. 결국에는 우려했던 대로 폭력적인 본능만이 남아 버렸다.

“야, 박영훈! 내 몸에서 떨어져.”

이를 꽉 문 유진이 또박또박 말을 끊어 말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는 영훈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악스러운 힘으로 그녀의 손을 어렵지 않게 떨구어 냈다.

“어라? 반말도 하네? 어이구,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대신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내 몸이 통제가 안 되네. 그러니 유진이 네가 이해해 주라.”

영훈이 느물거리며 히쭉 웃자, 유진 역시 그를 향해 씩 웃었다.

“잘됐네. 사실 나도 술만 마시면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말이야.”

언뜻 그녀의 표정에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드러난 것도 같다.

“그럼 서로 피장파장인 거다.”

“뭔진 모르지만, 좋지.”

그런 그녀와 마주 보며 영훈이 헤벌쭉 웃을 때였다. 유진은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가 앞으로 당기며 영훈의 얄미운 면상에 이마를 힘차게 박았다. ‘퍽’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영훈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