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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악!”

퍽. 퍽. 퍽. 연이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훈의 코에서 붉은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맞아. 나라면 그 입 닥치고 어금니나 꽉 깨물고 있겠다.”

영훈이 본능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성큼성큼 걸어온 유진이 주먹 쥔 오른손을 뒤로 길게 젖혔다가 앞으로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또다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훈의 몸이 비틀거리며 크게 휘청거렸다.

“뭐 이런 미친 게.”

순식간에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영훈이 손등으로 코피를 닦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냉랭했고, 입술은 무참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유진은 주먹에 묻은 피를 쓱쓱 재킷에 닦으며 천천히 영훈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술만 먹으면 미친개가 되는 거. 그러니까 선배를 깔고 짓뭉개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줘야 할 거야.”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유진의 공격은 확실히 보통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너 왜 이래? 이 새끼가 감히 하늘 같은 선배한테?”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좋게 끝났을 것이다. 끝까지 매를 버는 이런 새끼한테 선배 대접은 사치였다.

“너 같은 것도 선배라고. 차라리 지나가는 개를 선배로 모시고 말지.”

싸늘하게 말을 내뱉고 난 유진은 곧바로 영훈의 배를 향해 온 힘을 실어 오른발로 돌려 찼다. 발차기를 배에 정통으로 맞은 영훈이 그 힘에 밀려나면서 문에 쿵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스르르 쓰러지는 영훈의 모습에 그제야 묵은 체증이 조금 가시는 것만 같았다. 유진은 씨근덕거리며 가쁜 숨을 골랐다.

준비 운동도 없이 욱하는 마음에 앞뒤 재지 않고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그 덕분에 유진 역시 이마와 주먹이 욱신거렸다.

“제길, 괜히 손만 다쳤네. 내일 하루 종일 삽질해야 하는데.”

유진이 아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이마를 슬며시 만져 보았다. 바로 그때 문을 가로막고 있던 영훈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옆으로 밀려나며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파우더룸 안으로 울려 퍼졌다.

“이런, 제가 방해한 건가요?”

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는 주름 한 점 없이 깔끔한 블랙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에 반해 영훈과 한바탕 실랑이를 한 유진은 피가 묻은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이었다.

유진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영훈과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정말 근사하게 생긴 남자였다.

“아,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서후는 바닥에 고통스럽게 누워 있는 영훈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유진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홀에서 봤을 때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이였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깨끗한 피부를 가진 시원스럽게 생겼다. 다듬지 않은 반달 모양의 눈썹이 보기 좋게 휘었고, 그 아래로 쌍꺼풀이 없는 아몬드형 눈매가 적당히 솟아오른 콧날과 크고 도톰한 입술과 함께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서후의 물음에 유진은 재빨리 새빨간 피가 묻은 손등을 재킷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남자에게 더듬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선배가 술을 많이 마셔서 문에 부딪혔는데 쓰러져서요.”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사실 전후 상황을 중간에 조금씩 떼어 버리고 말하는 것이 조금 많이 찔렸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바닥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저 인간이 술을 많이 마셨고, 그녀에게 추태를 부리길래 참고 또 참다가 욱해서 몇 번 손과 발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물론 휘두르는 족족 제대로 맞아서 몸을 못 가누고 휘청거리다가 문에 부딪혀서 쓰러진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니, 저는 이쪽 말고 그쪽이 괜찮은 건지 묻고 있는 겁니다.”

서후가 유진을 향해 다가왔다.

“저야 뭐 괜찮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바로 그때였다.

“아니, 박 실장님은 술 마시다가 어디로 가신 거야? 화장실에 계신가. 박영훈 실장님?”

살짝 열린 문밖으로 김 소장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곧이어 맞은편 쪽에 있는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김 소장이 영훈을 찾으러 화장실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제길.”

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눈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부탁드립니다. 아무것도 못 보신 것으로 해 주십시오.”

불편한 장면을 모르는 남자에게 들킨 것은 괜찮았다. 잘생겼으니까 분명 입도 엄청 무거울 거란 근거 없는 믿음까지 생길 정도였으니까.

“이봐요. 잠깐만 기다려…….”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느긋하게 듣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우선은 입이 싼 김 소장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 영훈이 게거품을 물고 따지든 말든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었다. 원래 사고 치고 튀는 것은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다.

설마 20대 후반까지 사고를 칠 줄은 몰랐지만, 후회가 되진 않았다. 유진은 피식피식 삐져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복도 끝에 있는 출입문 쪽으로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어둑해진 도심의 빌딩 사이로 하이얀 눈송이가 하늘하늘 춤추며 흩날렸다. 거리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에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더해져 눈앞이 아른거릴 지경이었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걷고 있는 유진은 뜨거운 전화기를 귀에 바짝 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잔뜩 구겨진 미간에 싸움닭처럼 독이 바싹 올라있는 상태였다.

“그래. 그렇다니까. 벌써 준다고 하고 안 준 게 몇 번째냐? 이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공사비를 떼어먹겠단 수작이란 말이지.”

유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일을 시켰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세상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거야. 일한 형님이 다른 것은 몰라도 돈 관계는 엄청나게 깔끔한 편이거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천하 태평한 목소리에 유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깔끔? 너 지금 깔끔이라고 그랬냐? 야,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 공사가 끝난 지 3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잔금을 안 주고 버티고 있단 말이야? 그것도 너랑 각별한 사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

‘유일한’이라는 사람은 틈만 나면 ‘우리 준혁이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공사비만 달라고 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미안하다. 내가 조만간 말씀드려 볼게.

준혁이 사과하자 유진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네가 왜 미안해? 돈 줄 것처럼 사람 불러다 놓고서 온갖 허드렛일은 다 시켜 대는 그 형님이 나쁜 거지.”

-설마, 너한테 또 설거지하라고 그러든?

“이젠 날 알바처럼 부려 먹는 게 놀랍지도 않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확 다 엎어 버리고 뛰쳐나오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겠냐? 깨끗하게 닦아 놓으라니 닦아 놓고 와야지.”

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일손이 딸려 주방에 있는 커다란 싱크대 안에 층층이 쌓여 있는 접시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잠시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기다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먹고 살기 참 힘들다. 안 그러냐, 유진아?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준혁의 목소리에 그녀 역시 바로 꼬리를 내렸다. 준혁이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너무 몰아세웠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뭐, 너랑 각별한 사이라고도 하고, 곧 새 가게도 오픈할 거라잖아. 아무튼 공사만 딸 수 있다면 그깟 설거지가 문제겠냐? 그래서 막힌 싱크대까지 군말하지 않고 뚫어 주고 오는 길이다.”

-어쨌든 고생했다. 그런데 유진아.

“왜?”

-새 싱크대 배관이 어떻게 그렇게 자주 막힐 수가 있는 거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의아한 목소리에 유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 음식 장사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라면서. 아니, 어떻게 음식물 찌꺼기를 받칠 체나 하수구 망을 사용하지 않는 거냐고? 나 맨손으로 음식물 찌꺼기가 잔뜩 박혀 있는 하수구 구멍을 뚫다가 속이 뒤집어져서 죽는 줄 알았다. 또 막힐까 봐 아예 철물점에 가서 하수구 망까지 자비로 사다가 설치해 주고 오는 길이다.”

유진은 걸을 때마다 찔꺽찔꺽 소리를 내는 자신의 젖은 작업화를 내려다보았다. 고여 있던 구정물을 헤집고 다닌 덕분이었다.

먼지나 흙을 뒤집어쓰고 일하는 편이라 더러움에 대해서는 무던한 편이지만,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구정물이 묻은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은 아무리 무던한 그녀라도 참기 어려웠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쯧쯧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일이 있으면 도와 달라고 날 불렀어야지.

“나보다 더 바쁜 널 어떻게 불러?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마음 편하지. 어쨌든 나 지금 집으로 가고 있거든. 옷 갈아입고 준영 형님네 가서 한잔하고 있을 테니까 그쪽 일이나 빨리 마무리하고 튀어 와라. 나 오늘 무지하게 술이 당긴다.”

차가운 날씨에 젖은 발가락이 퉁퉁 부으면서 얼어서 간지럽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술이나 마시자고? 그렇다면 오늘도 데이트 같은 것은 없다는 거네.

“웃지 마라.”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남자라면서 아직도 못 찾은 거냐?

“준혁아, 넌 내가 재미있지?”

-미안. 난 가끔 유진이, 네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 도대체 스물아홉과 서른의 차이가 뭐라고 그렇게 키스, 키스하는 거야?

준혁이 커다랗게 웃는 통에 유진은 뜨거운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야 했다. 2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에는 근사한 남자랑 알콩달콩한 데이트도 하고 찐한 키스도 할 거란 나름 야심찬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야, 네가 여자의 마음을 알아?”

-갑자기 웬 여자인 척? 그러는 너야말로 그렇게 하면서 놀면 재미있냐?

“넌 주위에 여자가 넘쳐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귈 수 있지만, 난 풍족한 너랑 달라서 주변이 삭막하다 못해 적막하거든. 서른이 되기 전에 근사한 남자와 찐한 키스 정도는 해 보고 싶다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이야? 나 같은 여자는 그런 소원 빌면 안 되는 거냐고.”

유진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준혁은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니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야, 넌 무슨 농담을 그렇게 무섭게 받아치냐? 그리고 유진이 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 내 몸 그렇게 함부로 굴리지 않는다니까 그러네.

“그래. 그렇다고 치자.”

-유진아?

“왜?”

-그럼 찐한 키스는 아직이란 거네?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뭐라고 들은 거야? 곧 한다니까? 할 거라고.”

-알았어. 알아들었으니까 전화기에 대고 소리 좀 지르지 마. 그리고 유진아.

“또 왜. 왜 자꾸 부르는 건데?”

-정 급할 것 같으면 이 오빠가 대신 해 줄까?

“뭘?”

-키스.

유진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준혁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신경 꺼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순식간에 유진의 음성이 냉랭해지자 이번에는 준혁이 얼른 꼬리를 내렸다.

-그래라. 어찌 됐건 이쪽 일 최대한 빨리 끝내고 현우랑 득달같이 달려갈 테니까 너 먼저 마시고 있어.

“응.”

준혁과의 오랜 통화로 손난로처럼 따뜻해진 휴대폰을 두툼한 주머니 안에 넣은 후 유진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축축했던 신발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발이 시리고 가렵다 못해 아려 왔다.

얼마 남지 않은 집을 향해 걸어가던 유진은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가 뭐라고 그러든 2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그러니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 밋밋하고 자극 없이 지나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