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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Chapter 1.

Barbaro(바르바로), 야만적인



1.



교통사고로 손이 망가져 더는 예전처럼 피아노를 칠 수 없는 한때의 천재 피아니스트 백유완과 독립 큐레이터이자, 미술 칼럼니스트, 그리고 빈곤한 어느 케이블 방송사의 미술 채널 리포터로 활동하는 영해주가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의 일이다.

그들을 오늘날의 애증과 거짓으로 인도한 곳은 주로 외국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어느 번잡한 동네의 작은 재즈바, 「포르테」였다.



네온이 조잡하게 빛을 발산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곳.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배어 있으며, 빗물이 새어 들뜬 벽지에 곰팡이가 슬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

닳고 닳은 당구 큐와 광택 잃은 당구공이 외로운 주정뱅이들을 위로해 주는 곳.

무수히 구멍 뚫린 다트판이 머지않아 수명을 다하고 사라질 곳.

그곳은 백유완이 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종종 들리는 단골 가게였으며, 영해주가 이별의 슬픔에 허덕이며 밤길을 헤매다가 충동적으로 들른 곳이었다.



백유완은 술로 과거의 영광을 씻어 내고 싶어서 포르테를 찾았다.

영해주는 제 미래를 망가트리고 싶어서 포르테를 찾았다.

10월. 가을의 끝자락, 겨울의 초입. 사람들이 코트 깃을 여미도록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는 서늘한 밤이었다. 가랑비가 건조한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불행처럼 스며들었다.

거리에 줄지어 선 가로등이 껌뻑이며 숨을 내쉬었다. 금요일 밤을 외로움과 열망으로 지새우는 사람들이 내뿜은 허연 입김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비좁은 가게 내부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아 휑하고 스산했다. 구닥다리 인테리어에 항상 심술이 난 듯한 인상의 사장이 건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곳이니, 손님이 많을 리가 없다. 선곡은 한물간 옛날 재즈곡들. 그래서 백유완이 포르테를 좋아하는 것이다. 번잡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인 채 이리저리 치이는 것이 싫어서.



보드카 한 잔과 얼마 안 되는 푼돈을 받고, 백유완은 포르테에서 조율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싸구려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기로 했다. 그 피아노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한동안 사람이 손도 대지 않은 흔적이 여실했다. 과연 이 가게가 생긴 이후로 누가 연주를 하기는 했나 싶은 물건이었다.

제안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백유완이었다. 결코, 주머니 사정이 궁해서는 아니었다. 큰 무대에 서며 벌어들인 돈이 제법 되었고, 부유한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 남자가 고작 푼돈에 선뜻 연주하기로 까닭은 이제는 영영 과거형이 되어 버린 무대의 눈이 부신 조명과 갈채가 그리워서이다.

유완의 제안을 키들거리며 수락한 바텐더는 한때 콧대 높던 남자가 저 엉망진창인 피아노와 똑같은 신세로 전락한 게 퍽 재밌다는 눈치였다. 유완이 사고를 당한 뒤로 이와 같은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백유완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조롱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를 진정으로 침울하게 하는 건, 자신에게 쏟아지던 사람들의 찬사가 끊어진 것도, 그를 시기하고 증오하던 이들의 조롱도 아닌 망가져 버린 손 그 자체였다.



백유완이 연주하기로 한 곡은 재즈바에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 가을과 작별을 고하는 잔잔한 녹턴이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심호흡하며 오른손을 먼저 올렸다. 그리고 예전의 감각을 조금씩 상기했다. 반질거리는 건반을 누를 때의 감촉과 현이 울려 퍼지며 내는 그 소리를.

이어서 더는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는 유완의 왼손이 고통스럽게 건반을 누르며 비탄에 잠긴 화음을 자아냈다. 날카로운 통증이 바짝 깎은 짧은 손톱 끝에서부터 올라와 어깨까지 짜르르 울렸다. 그러나 백유완은 이를 악물고 연주를 이어 나갔다. 퇴색했다고 한들, 천재의 찬란함은 잔잔하게나마 남아 있어, 그 흔적이 조금이나마 서려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의 눈길이 하나둘씩 점차 그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연주에 귀를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마다의 몽상에 빠져, 무대에 오르는 남자에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잃어 가고 있는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가, 비통에 잠긴 처절한 연주를 이어 나갈 동안 영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도란도란 대화하는 소리와 피아노 소리에 귀를 닫은 채, 바에 앉아 얼마 전에 헤어진 애인 도예성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를 곱씹는 중이었다.



해주야.

우리는 여기까지야. 하지만 너한테는, 그리고 나한테는 서로 다른 내일이 있을 거라 믿어.

너와의 지난 세월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너와의 시간이 오늘의 날을 있게 했어.

진심으로 네 행복을 기원해.



문자로 통보받은 이별. 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만나 함께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까지 했던, 장장 1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연인의 만남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해주는 자조한다. 실은 일찍이 이별을 예감했었다. 언제부턴가, 차갑다 못해 무미건조해진 자신을 바라보는 예성의 눈길이 더는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하지만 이런 형태의 이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그간의 만남을 천천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였다. 인생의 찰나, 청춘이 이렇게 진창으로 구르리라고 해주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영해주는 몇 번이고 예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예성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해주가 문자로 얼굴이라도 보고 얘기하자고 아무리 사정해도 매몰찬 침묵만이 돌아왔다.

해주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예성은 부유한 사업가의 딸과 약혼했고, 약혼녀 집안의 도움을 받아 크고 작은 전시부터 시작하여 그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또, 아트페어에 작품을 출품하기만 하면 완판이 될 정도로 떠오르는 신예 작가가 되었다. 듣기로는 제법 명성이 높은 대학교에 출강을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바로 해주와 자신이 함께 나온 모교에.

해주와 사랑을 나누며 서로의 밑바닥을 낱낱이 파헤쳐 가는 그 시간 동안 예성은 담배 한 갑 살 돈이 부족하여 절절매는 가난한 아티스트에 불과했다. 유학 생활은 빠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해주는 그의 불행과 가난마저 사랑했었다. 품을 수 있었다. 첫사랑의 절절함이야, 누군들 있는 법이다.



서로에게 불행만을 안겨 주는 만남.

고달픔만을 기억하는 만남.

지우고 싶은 수치만이 남은 만남.

더는 새로울 것 없는 만남.



해주는 예성과 자신의 만남을 곱씹으며, 술잔을 제 눈물로 채웠다. 세상 모든 구슬픈 음악이 마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설움이 이별의 후유증이다.

불행은 연달아 닥쳤다. 음울한 여자의 삶을 조롱이라도 하듯이.

영해주가 도예성과 헤어지고 얼마 뒤, 그녀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외동인 해주에게 가족이라고는 오로지 부모님뿐이었다. 예성과 나누는 사랑 외에는 가까운 친구조차 없는 고독한 여자가 영해주였다.

그렇게 해주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곁에 남은 것은 수북하게 쌓인 프로그램 대본과 전시 리플릿, 예성이 피우던 담배 연기가 밴 황량한 벽지뿐. 점점 더 바래어 가는 옛 추억의 잔상뿐. 그리고 찾아온 외로움뿐.

해주는 숨이 점차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멈추는 곳. 그곳에 백유완이 있었다. 핀 라이트 조명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의 고독한 모습에 해주는 자신의 우울함을 투영해 본다.

그리고 백유완 역시 자신과 같은 염증에 시달리는 이 외로운 여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에게서는 자신처럼 깊은 수렁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 특유의 버석버석하고 메마른 느낌이 있었다.

어떤 강렬한 예감이 백유완의 뇌리를 스쳤다. 이름도, 나이도, 무엇도 모르는 저 여자. 유난히 하얗고 말간 얼굴, 그리고 새카만 긴 생머리에 밤하늘처럼 검고 푸른 눈동자에 수심이 가득 고인 이 여자와 함께 이 지난하게 붕괴한 현실 속에서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리라는.



연주가 끝이 나고 쏟아지는 갈채는 지극히 기계적이다. 사람들의 호응은 금세 끊어지고, 백유완은 고작 한 칸짜리 계단이 세워진 좁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시 어두컴컴한 현실이 그를 반겨 주었다. 유완은 한숨을 되삼켰다.

백유완은 해주가 앉은 바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자연스레 해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바텐더가 약속했던 보드카 한잔을 유완의 앞에 놓았다. 그는 여전히 키들거리고 있었다. 멋진 연주라며 빈말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저 개새끼가…….’

유완은 속으로 이를 으드득 갈면서, 바텐더를 무시하고 해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해주도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잠깐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외로움을 곱씹었다.

“멋진 연주였어요.”

해주는 무미건조한 인사말을 건넸다. 유완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아득한 심해를 보았다.

“개소리하고 있네. 안 듣고 있던 거 다 알아.”

유완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니에요. 정말 듣고 있었는걸.”

해주는 남자의 무례함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지독한 무기력에 빠진 그녀는 외부에서 치고 들어오는 날카롭고 차가운 말에 통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뎌져 버렸다.

“좆 까, 씨발. 죽을상 하고 폰만 붙들고 있던 거 다 보였거든?”

유완이 서슴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따지듯이 말했다.

“날 보고 있었어요?”

그러자 해주가 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유완의 거친 말씨야 아무래도 좋다는 그런 미소였다.

“…….”

“왜?”

유완의 침묵에 해주가 되묻는다. 유완은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술을 벌컥 들이켰다.

‘그러게 왜 이딴 여자를.’

유완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해주는 지금껏 그가 품에 안고 사랑했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여자였다. 그런데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독한 보드카가 백유완의 식도를 타고 내려와 단숨에 위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홧홧하게 열이 오른 유완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여자에게 문득 말로 형용하기 힘든 욕망을 느꼈다. 그녀의 어둠을 파헤치고 싶다는 그런 욕망.

그 순간에 영해주는 다시 도예성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를 읽느라 유완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겉치레에 불과한 행복을 염원하는 말. 그 말이 예성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완전히 떠나 버렸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송두리째 허물어진 10년의 세월 앞에 해주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마저 잃어버리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막막한 길을 헤매고 있다.



영해주는 망가지고 싶었다.

슬픔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그리고 문득 제 옆에 앉은 날카롭고 성마른 이 남자가 자신을 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백유완은 망가트리고 싶었다.

한때 찬란했던 자신을.

그리고 문득 제 옆에 앉은 이 청아하고 우울한 여자가 자신의 찬란했던 과거를 영영 씻어 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