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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2.
한 주가 지나고, 금요일 밤. 백유완과 영해주는 또다시 포르테에서 마주쳤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서로의 이름도 몰랐으며, 서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울적한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뿐이었다.
그들은 그 어둠에 이끌려,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두 차례의 엇갈림 끝에 마침내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에게 열없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나 서로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바텐더가 주문을 받았다. 해주가 주문한 칵테일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자몽의 달면서도 새콤한 맛에 장미 향이 감도는 로자리, 유독 하얀 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붉은 뺨을 닮은 칵테일이었다.
그리고 유완이 주문한 것은 언제나 그가 마시는 보드카 한 잔이었다. 타인과 섞이기를 거부하며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거친 성정과도 같은.
백유완과 영해주는 침묵 속에 술잔을 비우며, 이따금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낯선 상대방을 제 가슴에 품는 서글픈 방법이었다.
유완은 해주의 왼쪽 눈꼬리 밑에 있는 점 하나를 발견했다. 눈물점이 있으면 가슴에 슬픔이 고일 상이라더라,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해주는 슬픈 상이었다.
해주는 침침한 가게 조명 아래 유난히 밝게 빛나는 유완의 황금빛에 가까운 눈동자를 보고, 그가 혼혈인가 싶었다. 확실히 유완의 이목구비는 눈이 움푹 파이고, 콧대가 높으면서도 또렷한 게 이국적인 면이 있었다.
마침내 두 개의 술잔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은 헤어짐을 직감했다.
그러나 헤어짐이 안타깝지는 않았다.
영해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의자를 밀어 넣는 그녀의 손길에서 한겨울과도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백유완은 보드카 한 잔을 더 주문했고, 가방을 챙겨 가게를 떠나는 해주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할 뿐,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유완은 해주의 이름도, 언젠가 다시 보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막연히 언젠가는 이곳에서, 여전히 슬픔에 사무친 채로 다시 만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백유완과 영해주의 세 번째 만남은 빠르게 찾아왔다.
주말이 지나고 화요일, 백유완과 영해주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과 달리 오늘은 비가 억수처럼 퍼부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포르테 앞에서 마주쳤다. 접이식 우산에 흥건한 빗물을 털어 내던 영해주는 저만치서 걸어오는 백유완을 발견하고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이윽고 유완이 제 앞에 섰을 때, 해주는 그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
백유완이 건들거리는 말씨로 대꾸했다. 내심 여자가 먼저 인사한 것을 기뻐하면서 말이다.
“그러게요.”
해주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우산을 돌돌 말아 끈을 고정했다. 먼저 말을 건 주제에 밋밋하게 구는 것이 참 묘한 여자다. 유완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썩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여자는 흥미를 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백유완은 자신이 들고 있던 끝부분이 살짝 찌그러진 긴 우산의 물기를 대강 털어 냈다. 해주가 먼저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유완이 뒤이어 가게로 들어갔다.
그들은 입구에 세워진 녹이 슨 철제 우산꽂이에 우산을 두고, 이번에는 바가 아닌 테이블을 찾아 거기에 동석했다. 서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사이처럼 말이다.
그들이 자리한 둥근 테이블은 손때가 묻고 낡아서 군데군데 흠집이 있었다.
백유완과 영해주는 그 흠집마저도 자신들의 처지처럼 느껴졌다. 온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인간. 낙오자. 그런 불우한 이름이 붙는 삶.
잠시 후, 바텐더가 소금 알갱이가 촘촘하게 붙은 프레첼 과자가 담긴 둥근 그릇을 들고 왔다. 손님에게 서비스로 내오는 기본 안주였다. 바텐더가 메뉴판을 내밀며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묻자, 두 사람은 저번과 똑같은 것을 시켰다.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재즈곡에 빗소리가 혼합되어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심장 박동처럼 심금을 울리는 소리였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윤곽을 시선으로 더듬어 보는 것과 마주 앉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조금 더 각별하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법이다. 또, 괜스레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번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이 닮은 사람들이었다. 지난번과 차이가 있다면, 백유완이 저번보다 훨씬 빨리 술잔을 비우고 다시 한 잔을 더 주문했다는 것뿐이었다.
영해주는 술잔을 아주 천천히 비웠다. 그녀의 뺨에 조금씩 취기가 돌아 더 불그스름해졌다. 꼭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던 안색이 이제야 산 사람처럼 생기가 감돌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같이 술잔을 비우며, 그러나 서로 다른 생각으로 무너지는 마음의 시간.
영해주의 머릿속은 온통 도예성의 마지막 메시지로 가득했고, 군데군데 빈자리는 더는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과 막막한 밥벌이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이제 막 독립 큐레이터로 출발한 해주의 지난번 기획 전시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비평이 무참하고 혹독했다. 해주는 그 일로 크게 자신감을 상실했고, 앞으로 이 일을 하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설상가상 이제는 의지하고 기댈 부모님조차 없다. 해주는 이 살벌한 세상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딛고 일어서야 했다. 부조리한 이 세상의 촌극에 지금껏 노출된 적 없던 가냘픈 여자에게는 가혹한 현실이다.
백유완은 교통사고를 당하던 당시, 의식을 잃어버리던 바로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지던 그 강렬함을 상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았던 아찔하고 몽롱했던 감각. 그리고 그렇게 망가져 버린 손.
의사는 일상생활은 무리가 없으나, 예전처럼 피아노를 연주할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었다. 백유완에게는 그 말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기억이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그는 늘 피아노와 함께였다. 평생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해주의 술잔도 비었다. 그 사이에 백유완은 석 잔째 보드카를 비우는 중이었다. 그는 워낙 주량이 센터라, 그리 취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진하고도 독한 술 냄새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가 술을 마신 줄 몰랐을 것이다.
“나랑 잘래요?”
해주는 대리석처럼 매끈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아니, 그의 고독을 보고 취기를 핑계로 삼아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삶의 중심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때. 차라리 완전히 망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제 삶의 곧은길을 이탈하고 싶다는 열망이, 평생 일직선으로 그어진 길만을 걸으며 살아왔던 그녀의 일탈을 부추겼다.
“뭐?”
유완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단아한 인상의 여자가 꺼낸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해주를 가늘게 흘겨보았다.
“자자고요, 나랑.”
해주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유완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해주가 몸을 숙이자 그녀가 입은 진홍색 블라우스 사이로 봉긋한 가슴골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미친. 큰일 당하고 싶어서 환장했지? 어?”
유완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 맘대로 생각해요.”
해주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인생 망치고 싶어?”
유완은 해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 아마도.”
해주는 열없이 미소 지었다.
“얼마나?”
유완의 좁혀진 미간이 서서히 풀어졌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이거 완전 미친 거 아니야?”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요.”
해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청순한 여자의 얼굴이 주홍빛 조명 아래 관능적으로 보였다. 유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음울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까닭이 술 때문이려니 한다. 그 역시 해주처럼 까닭 모를 이끌림과 제 음욕에 핑계를 대는 것이다.
가느다랗고 손톱이 분홍빛인 해주의 손이 유완의 잔을 슬그머니 건드렸다.
“어떻게 할래요. 같이 나갈 거예요, 아니면?”
해주가 다시 물었다. 유완은 단숨에 남은 술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입구를 향해 고갯짓했다. 해주의 충동을 수락한다는 뜻이었다. 또, 제 인생을 제대로 망가트리겠다는 뜻이었다. 가증스럽게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자의 인생과 함께.
3.
충동과 우울로 몸이 달아오른 그들은 인근에 있는 모텔을 찾았다. 야릇한 자줏빛 네온이 번쩍이는 겉만 휘황찬란하고, 내부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싸구려 모텔이었다.
충동적인 하룻밤에 고상함을 찾을 까닭은 없다. 이곳이야말로, 밑바닥을 기고 있는 그들에게 걸맞은 장소다.
507호. 무의미한 호수, 충동을 아우르는 일종의 맥거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의 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추락한 삶처럼.
백유완은 거칠게 영해주를 끌어당겨 제품에 가두고는 키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유완의 입술이 해주에게 닿으려는 아슬아슬한 찰나,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피해 버렸다.
“원나잇 하자고 제안한 주제에. 꼴에 같잖은 순정이라도 있어?”
백유완은 기분이 상해서 빈정거렸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당신 술 냄새가 싫어서…….”
영해주는 유완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디까지나 핑계다. 덜컥 여기까지 오긴 했으나, 막상 몸을 섞자니 적어도 선을 분명하게 긋고 싶었던 것이다. 유완도 그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씨발, 좆같이 구네.”
유완이 욕설을 지껄이며 사나운 손길로 재킷을 벗었다. 그래, 어차피 하룻밤에 불과한데 애틋함을 찾는다고 한들 뭐가 좋을 게 있나 싶었다.
그 사이 해주도 자신이 걸치고 있던 카멜색 코트를 벗었다. 그 안에 입은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아래, 언뜻 보이는 그녀의 팔은 마르고 길었다.
코트를 반으로 접어 포개는 여자의 몸짓은 나긋나긋하고, 조심스럽다. 유완은 시선으로 그녀를 탐하며 진득하게 애무했다. 여자가 허공에 그리는 부드러운 선을 단 한순간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남자의 손이 여자의 손목을 끌어당긴다. 백유완은 영해주를 거칠게 침대로 내동댕이치다시피 쓰러트렸다. 해주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끄르는 유완의 손길이 성마르다. 그는 블라우스를 찢어 버릴 기세였다.
해주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허무한 얼굴로 가만히 유완을 따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허무함이 가득 담긴 새카만 눈동자가 유완의 심기를 건드렸다.
“야, 씨발, 내가 지금 너 강간이라도 하냐? 어?”
유완은 불쾌함이 치밀어 울먹이듯이 따져 물었다.
“아니요.”
해주는 두 팔을 올려 유완의 어깨를 감았다. 오늘 밤, 이 충동을 눈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또, 이름 모를 이 남자에게 괜한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유완은 해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해주의 맨살에서 옷에서 밴 섬유유연제와 살 내음을 맡았다. 조막만 한 어린애들에게서 나는 젖내가 풍기는 여자였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풀 내음 같은 상큼한 향기가 났다.
그래서 유완은 해주를 안는 것이 꼭 금기를 범하는 듯한 짜릿함에 사로잡혔다. 속된 말로 꼴린다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2.
한 주가 지나고, 금요일 밤. 백유완과 영해주는 또다시 포르테에서 마주쳤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서로의 이름도 몰랐으며, 서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울적한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뿐이었다.
그들은 그 어둠에 이끌려,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두 차례의 엇갈림 끝에 마침내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에게 열없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나 서로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바텐더가 주문을 받았다. 해주가 주문한 칵테일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자몽의 달면서도 새콤한 맛에 장미 향이 감도는 로자리, 유독 하얀 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붉은 뺨을 닮은 칵테일이었다.
그리고 유완이 주문한 것은 언제나 그가 마시는 보드카 한 잔이었다. 타인과 섞이기를 거부하며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거친 성정과도 같은.
백유완과 영해주는 침묵 속에 술잔을 비우며, 이따금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그들이 낯선 상대방을 제 가슴에 품는 서글픈 방법이었다.
유완은 해주의 왼쪽 눈꼬리 밑에 있는 점 하나를 발견했다. 눈물점이 있으면 가슴에 슬픔이 고일 상이라더라,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해주는 슬픈 상이었다.
해주는 침침한 가게 조명 아래 유난히 밝게 빛나는 유완의 황금빛에 가까운 눈동자를 보고, 그가 혼혈인가 싶었다. 확실히 유완의 이목구비는 눈이 움푹 파이고, 콧대가 높으면서도 또렷한 게 이국적인 면이 있었다.
마침내 두 개의 술잔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은 헤어짐을 직감했다.
그러나 헤어짐이 안타깝지는 않았다.
영해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의자를 밀어 넣는 그녀의 손길에서 한겨울과도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백유완은 보드카 한 잔을 더 주문했고, 가방을 챙겨 가게를 떠나는 해주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할 뿐,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유완은 해주의 이름도, 언젠가 다시 보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막연히 언젠가는 이곳에서, 여전히 슬픔에 사무친 채로 다시 만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백유완과 영해주의 세 번째 만남은 빠르게 찾아왔다.
주말이 지나고 화요일, 백유완과 영해주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과 달리 오늘은 비가 억수처럼 퍼부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포르테 앞에서 마주쳤다. 접이식 우산에 흥건한 빗물을 털어 내던 영해주는 저만치서 걸어오는 백유완을 발견하고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이윽고 유완이 제 앞에 섰을 때, 해주는 그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보네?”
백유완이 건들거리는 말씨로 대꾸했다. 내심 여자가 먼저 인사한 것을 기뻐하면서 말이다.
“그러게요.”
해주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우산을 돌돌 말아 끈을 고정했다. 먼저 말을 건 주제에 밋밋하게 구는 것이 참 묘한 여자다. 유완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썩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여자는 흥미를 동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백유완은 자신이 들고 있던 끝부분이 살짝 찌그러진 긴 우산의 물기를 대강 털어 냈다. 해주가 먼저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유완이 뒤이어 가게로 들어갔다.
그들은 입구에 세워진 녹이 슨 철제 우산꽂이에 우산을 두고, 이번에는 바가 아닌 테이블을 찾아 거기에 동석했다. 서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사이처럼 말이다.
그들이 자리한 둥근 테이블은 손때가 묻고 낡아서 군데군데 흠집이 있었다.
백유완과 영해주는 그 흠집마저도 자신들의 처지처럼 느껴졌다. 온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인간. 낙오자. 그런 불우한 이름이 붙는 삶.
잠시 후, 바텐더가 소금 알갱이가 촘촘하게 붙은 프레첼 과자가 담긴 둥근 그릇을 들고 왔다. 손님에게 서비스로 내오는 기본 안주였다. 바텐더가 메뉴판을 내밀며 무엇을 주문하겠느냐고 묻자, 두 사람은 저번과 똑같은 것을 시켰다.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재즈곡에 빗소리가 혼합되어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심장 박동처럼 심금을 울리는 소리였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윤곽을 시선으로 더듬어 보는 것과 마주 앉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조금 더 각별하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법이다. 또, 괜스레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번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이 닮은 사람들이었다. 지난번과 차이가 있다면, 백유완이 저번보다 훨씬 빨리 술잔을 비우고 다시 한 잔을 더 주문했다는 것뿐이었다.
영해주는 술잔을 아주 천천히 비웠다. 그녀의 뺨에 조금씩 취기가 돌아 더 불그스름해졌다. 꼭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던 안색이 이제야 산 사람처럼 생기가 감돌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같이 술잔을 비우며, 그러나 서로 다른 생각으로 무너지는 마음의 시간.
영해주의 머릿속은 온통 도예성의 마지막 메시지로 가득했고, 군데군데 빈자리는 더는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과 막막한 밥벌이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이제 막 독립 큐레이터로 출발한 해주의 지난번 기획 전시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비평이 무참하고 혹독했다. 해주는 그 일로 크게 자신감을 상실했고, 앞으로 이 일을 하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설상가상 이제는 의지하고 기댈 부모님조차 없다. 해주는 이 살벌한 세상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만 딛고 일어서야 했다. 부조리한 이 세상의 촌극에 지금껏 노출된 적 없던 가냘픈 여자에게는 가혹한 현실이다.
백유완은 교통사고를 당하던 당시, 의식을 잃어버리던 바로 그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지던 그 강렬함을 상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았던 아찔하고 몽롱했던 감각. 그리고 그렇게 망가져 버린 손.
의사는 일상생활은 무리가 없으나, 예전처럼 피아노를 연주할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었다. 백유완에게는 그 말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기억이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그는 늘 피아노와 함께였다. 평생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해주의 술잔도 비었다. 그 사이에 백유완은 석 잔째 보드카를 비우는 중이었다. 그는 워낙 주량이 센터라, 그리 취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진하고도 독한 술 냄새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가 술을 마신 줄 몰랐을 것이다.
“나랑 잘래요?”
해주는 대리석처럼 매끈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아니, 그의 고독을 보고 취기를 핑계로 삼아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삶의 중심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때. 차라리 완전히 망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제 삶의 곧은길을 이탈하고 싶다는 열망이, 평생 일직선으로 그어진 길만을 걸으며 살아왔던 그녀의 일탈을 부추겼다.
“뭐?”
유완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단아한 인상의 여자가 꺼낸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해주를 가늘게 흘겨보았다.
“자자고요, 나랑.”
해주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유완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해주가 몸을 숙이자 그녀가 입은 진홍색 블라우스 사이로 봉긋한 가슴골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미친. 큰일 당하고 싶어서 환장했지? 어?”
유완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 맘대로 생각해요.”
해주는 쌀쌀하게 대꾸했다.
“인생 망치고 싶어?”
유완은 해주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 아마도.”
해주는 열없이 미소 지었다.
“얼마나?”
유완의 좁혀진 미간이 서서히 풀어졌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이거 완전 미친 거 아니야?”
“당신 좋을 대로 생각해요.”
해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청순한 여자의 얼굴이 주홍빛 조명 아래 관능적으로 보였다. 유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음울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까닭이 술 때문이려니 한다. 그 역시 해주처럼 까닭 모를 이끌림과 제 음욕에 핑계를 대는 것이다.
가느다랗고 손톱이 분홍빛인 해주의 손이 유완의 잔을 슬그머니 건드렸다.
“어떻게 할래요. 같이 나갈 거예요, 아니면?”
해주가 다시 물었다. 유완은 단숨에 남은 술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입구를 향해 고갯짓했다. 해주의 충동을 수락한다는 뜻이었다. 또, 제 인생을 제대로 망가트리겠다는 뜻이었다. 가증스럽게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자의 인생과 함께.
3.
충동과 우울로 몸이 달아오른 그들은 인근에 있는 모텔을 찾았다. 야릇한 자줏빛 네온이 번쩍이는 겉만 휘황찬란하고, 내부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싸구려 모텔이었다.
충동적인 하룻밤에 고상함을 찾을 까닭은 없다. 이곳이야말로, 밑바닥을 기고 있는 그들에게 걸맞은 장소다.
507호. 무의미한 호수, 충동을 아우르는 일종의 맥거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의 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추락한 삶처럼.
백유완은 거칠게 영해주를 끌어당겨 제품에 가두고는 키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유완의 입술이 해주에게 닿으려는 아슬아슬한 찰나,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피해 버렸다.
“원나잇 하자고 제안한 주제에. 꼴에 같잖은 순정이라도 있어?”
백유완은 기분이 상해서 빈정거렸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당신 술 냄새가 싫어서…….”
영해주는 유완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디까지나 핑계다. 덜컥 여기까지 오긴 했으나, 막상 몸을 섞자니 적어도 선을 분명하게 긋고 싶었던 것이다. 유완도 그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씨발, 좆같이 구네.”
유완이 욕설을 지껄이며 사나운 손길로 재킷을 벗었다. 그래, 어차피 하룻밤에 불과한데 애틋함을 찾는다고 한들 뭐가 좋을 게 있나 싶었다.
그 사이 해주도 자신이 걸치고 있던 카멜색 코트를 벗었다. 그 안에 입은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아래, 언뜻 보이는 그녀의 팔은 마르고 길었다.
코트를 반으로 접어 포개는 여자의 몸짓은 나긋나긋하고, 조심스럽다. 유완은 시선으로 그녀를 탐하며 진득하게 애무했다. 여자가 허공에 그리는 부드러운 선을 단 한순간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남자의 손이 여자의 손목을 끌어당긴다. 백유완은 영해주를 거칠게 침대로 내동댕이치다시피 쓰러트렸다. 해주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끄르는 유완의 손길이 성마르다. 그는 블라우스를 찢어 버릴 기세였다.
해주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허무한 얼굴로 가만히 유완을 따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허무함이 가득 담긴 새카만 눈동자가 유완의 심기를 건드렸다.
“야, 씨발, 내가 지금 너 강간이라도 하냐? 어?”
유완은 불쾌함이 치밀어 울먹이듯이 따져 물었다.
“아니요.”
해주는 두 팔을 올려 유완의 어깨를 감았다. 오늘 밤, 이 충동을 눈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또, 이름 모를 이 남자에게 괜한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유완은 해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해주의 맨살에서 옷에서 밴 섬유유연제와 살 내음을 맡았다. 조막만 한 어린애들에게서 나는 젖내가 풍기는 여자였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풀 내음 같은 상큼한 향기가 났다.
그래서 유완은 해주를 안는 것이 꼭 금기를 범하는 듯한 짜릿함에 사로잡혔다. 속된 말로 꼴린다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었다.